[예스 24] <시간위의 집> 억울한 사연이 쌓아올린 시간의 집

(* 영화의 관람을 방해할 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집’ 장르가 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공포물의 하위 카테고리 정도 된다. 집이 생명을 가진 듯 사람을 무섭게 하고 공격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내용의 영화를 일컫는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디 아더스> <폴터 가이스트> <이블 데드> <샤이닝> <주온> <장화, 홍련>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타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간위의 집>도 귀신 들린 집이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비가 내리치는 어느 밤, 영화는 으스스한 기운이 테를 두른 적산가옥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런 분위기에 걸맞게 정신 잃은 한 여자가 마루에 쓰러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녀는 가정주부 미희(김윤진)다.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지하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 그녀는 서둘러 내려간다. 칼에 찔려 죽어 있는 남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은 지하실에 위치한 의문의 방문 뒤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다음 날 아침, 미희는 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2017년 11월이 되어서야 석방된 미희는 그 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92년에 살았던 그 집으로 돌아온다. 그 소식을 듣고 그녀와는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최신부(옥택연)가 찾아온다. 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에 미희는 말한다. ‘그들’이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데려갔어. 그렇다면 이 집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귀신 들린 집 영화는 보통 주인공이 살던 그 이전 사람들의 사연이 집과 결합해 주인공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사실 괴롭힌다는 표현이 좀 과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아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주인공 당사자에게는 공포를 다가가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억울한 사연은 시간을 매개하여 집이라는 역사의 공간에 쌓인다. <시간위의 집>이라고 제목을 지은 연유도 여기에 있다.

미희가 석방 후 바로 집을 찾은 이유도 억울한 사연이 있어서다. ‘그들’에게서 아들을 찾아야 한다. <시간위의 집>에서 그들의 사연은 종류가 다양하다. 다양한 시간대 층위의 사람들이 그 집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의 사건이 미희에게 벌어졌던 날은 1992년 11월 11일. 25년 전인 1967년 11월 11일에도, 더 앞서 25년 전인 1942년 11월 11일에도 이 집에서는 사건이 있었다.

(스포일러 주의!) 25년을 주기로 11월 11일이 되면 이 집에서는 시간의 빈틈이 생기고 그때마다 이승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미희가 석방되어 돌아온 2017년 11월 11일은 이 집에 들어찬 억울한 사연들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인 셈이다. 어디서부터 이 사연들이 출발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귀신 들린 이 집의 억울한 사연이 쌓인 첫 번째 시간은 1942년, 일제 강점기다. <시간위의 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이 영화는 극 중 적산가옥을 일종의 한국 역사로 보는 듯하다. 25년이 주기인 이유? 1967년과 1992년은 큰 의미는 없고 2017년 현재와 맞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예전에 이 지면에서 <가려진 시간>에 대해 설명하며 ‘세월호 영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시간위의 집>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시간위의 집>이 취하는 입장(?)은 선명하다. 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 꽃 같은 청춘이 죽어 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와 같은 과거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는 것. 비극적 역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적폐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은 한국사회 전체에 공포로 다가온다.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는 억울한 사연이 쌓이고 쌓여 ‘시간 위의 집’이 생겼다는 논리가 이 영화를 지배한다.

이는 동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공포이자 현실이다. 다만, <시간위의 집>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동의하기 힘들다. 여러 시간의 층위를 다루면서 자체적인 논리를 구축하는 노력을 들이기보다 메시지의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활용하는 연출이 노골적으로 엿보인다. 머리로 설득시키기 이전 감정을 자극하겠다는 의도는 허구의 장르와 현실의 일면으로 구축한 영화적 논리를 무참히 깨뜨려 버린다.

귀신 들린 집과 같은 공포와 SF와 판타지와 스릴러 등의 접근으로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과 같은 한국사회의 비극을 다루고자 하는 장르 영화는 다른 접근법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감정의 위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한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영화를 통한 감정 해소는 일시적이라 비슷한 패턴의 작품이 반복되면 관객은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위의 집>이 주는 교훈은 영화의 메시지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3.30)

<아비정전>(阿飛正傳)

요약
왕가위 감독이 1990년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영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탓에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쓸쓸한 인간관계에 대해 묘사했다. 개봉 당시에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지금은 왕가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홍콩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홍콩금장상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5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놉시스
아비는 늘 여자를 갈구하지만 깊은 사랑은 경계하는 바람둥이다. 도박장의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먼저 접근해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해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이도 잠시, 아비는 수리진을 자신의 집에서 쫓아낸 뒤 댄서인 루루를 들여 또 다른 사랑을 나눈다. 루루는 소극적인 수리진과 달라서 아비가 자신에게 싫증을 느꼈다는 걸 눈치채고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럼에도 루루에게 매몰차게 이별 선언을 하는 아비에게는 길게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어려서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지금의 양어머니에게 입양된 것. 게다가 양어머니 역시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까닭에 아비의 분노를 부른다. 루루와 헤어지고 양어머니와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한다.

한편 버림받은 수리진은 아비에게서 자신의 짐을 받으러 갔다가 그곳을 지나치던 경관을 만난다. 초췌한 수리진을 위로하던 경관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 호감을 갖는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 역시 짧게 끝나고 만다. 수리진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경관 일을 그만 둔 남자는 선원이 되어 필리핀에 가게 된다.

우연히 길을 가던 중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비를 발견한 남자는 그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간다. 정신을 차린 아비는 남자에게 필리핀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런 뒤 어느 바로 데리고 갔다가 위장 여권을 거래하던 중 상대방을 칼로 찌르면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작품해설

1. 제작배경
데뷔작 <열혈남아>(1988)가 홍콩에서 흥행과 평단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으면서 왕가위 감독은 제작사 영지걸 제작유한공사로부터 차기작 <아비정전>에 대한 예술적 통제권을 100% 위임받았다. 홍콩 영화계에서 가장 바쁜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유덕화, 양조위 등 6명의 톱스타를 모두 캐스팅할 수 있었고 홍콩과 필리핀을 오가는 로케이션 촬영도 진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현장 당일 배우들과 함께 즉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을 정도다.

이는 <아비정전>을 애초 2부작으로 기획했던 왕가위의 야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여기에는 제작사와 감독간에 목적하는 바가 달라 생긴 오해의 배경이 자리한다. 제작사가 왕가위에게 영화의 전권을 위임한 건 당시 홍콩영화가 전세계 영화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액션 누아르를 만들어줄 것이란 기대였다. 하지만 왕가위가 기획한 영화의 성격은 제작사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액션이라고 할 만한 것은 영화의 후반부 아비가 여권 암거래를 하던 중 상대방을 칼로 찌른 다음 도망칠 때 짧게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대신 왕가위는 커플로 맺어지지 않은 채 상대방의 등만을 바라보며 사랑에 아파하고 고통받는 인물들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왕가위를 향한 오해는 비단 제작사뿐만이 아니었다. <열혈남아>에서의 어둡고 폭력이 난무한 액션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은 <아비정전>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와 관련, 한국 개봉 당일 이 영화를 보던 관객이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며 극장에서 소동을 피운 일화는 유명하다. 제작사는 파산에 이르렀고 <아비정전>의 2부는 무산됐으며 왕가위는 다음 작품 <동사서독>(1994)을 만들 때까지 제작비를 구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2. 시대적 배경
왕가위의 첫 번째 작품은 <열혈남아>이지만 영화적 세계관이 최초로 구축된 건 <아비정전>부터였다. 왕가위 영화를 규정하는 분위기는 떠난 자 혹은 떠난 것에 대한 그리움과 그에 따른 허무함이다. <아비정전>에는 연애하는 이들도 있고 짝사랑하는 이도 등장하지만 온전히 맺어지는 커플은 없다.

아비는 수리진, 루루와 차례로 연애를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한다. 이에 마음고생을 하는 수리진은 그녀를 동정하는 경관을 만나 호감을 표하지만 그 관계도 짧게 끝날 뿐이다.

수리진과 다르게 루루는 떠난 아비를 찾아 나서지만 공교롭게도 아비의 친구(극중 경관과 친구에게는 따로 이름이 부여되지 않았다)가 그녀를 짝사랑하며 뒤를 따른다. 굳이 따지자면 5각 관계의 사연인데 그중 단 한 커플도 맺어지지 않으니 허무한 이야기인 셈이다. 다만 이와 같은 허무함이 그리움의 정서로 치환되는 건 극중 시간적 배경인 1960년대를 회상하듯 사연 당사자들의 내레이션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아비정전>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홍콩이라는 국가의 지정학이 깊이 반영된 결과다. 1997년 영국 반환을 앞둔 홍콩 주민들의 심정이라는 것은 아비처럼 한 여자에게서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불안감 또는 수리진처럼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갖는 향수어린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왕가위는 발이 없어 지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날아가야 하는 ‘발 없는 새’의 사연을 극중 아비의 입을 통해 수시로 노출하는 등 당시 홍콩 주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은유함으로써 주제를 드러냈다.

3. 영화 스타일
왕가위는 <열혈남아>를 통해 주인공이 거의 정지해 있는 가운데 주변 인물들이 빛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는 스텝프린팅 기법을 선보이며 스타일리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아비정전>에는 왕가위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한 스텝프린팅을 활용한 장면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왕가위 감독은 좁은 방과 같은 구도를 통해 고립된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데 주력했다. 극중 인물들이 고립된 건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아 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인물의 등을 바라보는 이미지와 방을 들어와 나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등에 주목한 건 떠나간 사랑을 뒤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겨진 자의 심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들어왔다 나가는 행위의 경우, 어느 한명에 정착하지 못해 계속해서 사람을 바꿔가며 연애를 할 수밖에 없는 아비의 처지를 드러낸다.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기에 이들에게는 찰나의 순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비정전>에는 유독 시계를 비추는 장면이 많은데 짧은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에 담아두고 있어야 하는 극중 인물들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현재의 고통을 순화하기 위해 과거의 특정한 순간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비는 바로 이와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짧은 시간의 연애를 계속해서 가져간다. 결국 죽음만이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데 홍콩의 좁은 방에서 생활하던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겠다며 필리핀에 가서야 울창한 열대 숲과 같은 넓은 공간에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아비정전>의 특징적인 기법과 스타일은 미술감독 장숙평의 추천으로 처음 작업하게 된 크리스토퍼 도일(중국명 두가풍)의 공이 컸다. 이후 왕가위와 크리스토퍼 도일의 협업은 <2046>(2004)까지 이뤄졌다.

4. 결말에 대한 논란과 2부
흥행 실패에 따라 <아비정전>은 많은 뒷말을 낳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논란은 결말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 이전 장면에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양조위가 출연한다. 그리고 영화는 양조위가 외출 준비하는 장면을 약 5분 동안 보여주다가 끝을 맺는다.

당시 관객은 이 뜬금(?)없는 결말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지만 왕가위 감독이 이런 식의 엔딩을 가져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애초 2부작으로 기획된 만큼 2부에서는 아비에게 버림받은 수리진과 루루, 그리고 양조위가 맡은 역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흥행 실패에 따른 제작사의 파산과 왕가위를 향한 비난으로 2부의 제작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왕가위의 신작이 나올 때면 <아비정전>의 2부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대개가 <아비정전>의 변주인 까닭이다. 예컨대, 수리진이라는 이름은 <화양연화>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7)에서, 루루는 <2046>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고 유덕화가 연기한 경관의 경우, <중경삼림>에서는 양조위가 연기하지만 직업도 성격도 유사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공식적인 <아비정전>  2부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왕가위 감독이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아비정전>  2부는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
아비(장국영) :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여자를 갈아치우는 바람둥이.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지우지 못해 이성을 사귈 때면 자신이 먼저 떠난다.

수리진(장만옥) : 도박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점원. 이성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오랫동안 간직하는 스타일이다.

루루(유가령) : 사랑에 적극적인 전문 댄서. 아비가 구애하자 이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아비가 떠나지만 어떻게든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필리핀으로까지 가게 된다.

경관(유덕화) : 힘든 시간을 보내는 수리진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주는 남자.

아비의 친구(장학우) : 아비를 만나러 갔다가 루루를 보고는 첫눈에 반한다. 아비를 찾겠다며 필리핀으로 떠나겠다는 루루를 위해 경비까지 마련해준다.

명장면 명대사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아비)

극중 아비의 독백.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어딘가에 안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발 없는 새’에 빗대어 내레이션으로 전한다. 아비를 연기한 장국영은 2003년 4월1일 <아비정전>의 ‘발 없는 새’처럼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털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음악
<Always in My Heart>(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 : 브라질 2인조 기타 그룹의 연주곡. 필리핀의 시원스런 열대 밀림을 비추는 오프닝에서 사용되었다.

<Maria Elena>(자비에르 쿠얏) : <아비정전>의 아비가 맘보춤을 출 때 흘러나온 음악. 아비정전〉 개봉 뒤 한국에서는 이 음악은 물론 해당 장면을 패러디한 광고가 유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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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분노의 기원을 찾아서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이 코너명인 ‘신나는’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제목부터가, 무시무시해라, <분노>다. 그에 걸맞게 영화의 시작 배경 또한, 평범한 부부가 무참히 살해된 현장이다. 이런 영화를 신나게 볼 수 있다면 변태 같겠지만, 어떻게든 연결해 설명할까 한다.

원인인가, 결과인가 

문제의 살해 현장에 남은 단서는 단 하나. 벽에 피로 쓰인 ‘분노 怒’라는 글자다. 그리고 영화는 1년을 건너뛴 시점에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오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요헤이(와타나베 켄)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를 치바의 집으로 데려온다.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는 요헤이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로 항구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코와 사랑에 빠진다.

도쿄의 샐러리맨 유마(츠마부키 사토시)는 클럽파티를 즐기다 처음 보는 나오토(아야노 고)와 하룻밤을 보낸다. 별 연고가 없는 나오토를 집에 데려온 온 유마는 함께 동거하며 사랑을 나눈다. 오키나와로 이사를 한 중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새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와 무인도를 구경하러 간다. 그곳에서 혼자 배낭여행 중인 청년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나 친구가 된다. 하지만, 타나카가 무엇을 하고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배경이 서로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연결이 된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겉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몇 가지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타시로와 타츠야와 타나카는 모두 외지인이고 이름도 비슷한 데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그러니까, 이 세 명 중의 한 명이 범인인 셈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살인사건의 가해자를 찾는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범인 찾기가 유일한 목적인 영화는 아니다. 제목의 ‘분노’가 어디서 혹은 어떻게 기인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상일 감독(<훌라걸스> 등)은 그 전에도 비슷한 소재로 <악인>(2010)을 만든 적이 있다. <분노>와 같이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 원작인 <악인>은 살인 사건을 다루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상일 감독의 전작 <악인>을 상기한다면 <분노> 또한, 어느 한 명의 가해자를 발본색원하여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구조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다. 왜 그와 같은 살인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드는 <분노>는 믿음과 불신의 동전 양면을 오가며 분노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에피소드별 사랑하는 관계를 중심에 두면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황을 첨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에 있어 둘의 관계는 완벽한 구도이지만, 그 사이에 누군가 개입하면 사랑 이외의 감정이 난무하는 상황이 펼쳐지고는 한다. 요헤이는 타시로의 지난 행적이 불분명하여 딸 아이코가 불행해지지는 않을까 마음에 걸린다. 엄마가 오랫동안 병원에서 요양 중인 유마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오토와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다. 타츠야는 정체불명의 타나카와 어울리는 이즈미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는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영화는 이런 상황에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약한 고리를 주목하여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는다. 극 중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네가 어떻게 말하던 받아들이는 건 나의 몫이다.” 문제는 그 선택이 최악으로 몰릴 때다.

믿음이냐, 의심이냐

모든 에피소드의 커플 관계가 무르익을 때쯤 경찰은 살인 사건 용의자의 구체적인 인상을 언론을 통해 공개한다. 용의자의 생김새를 보니 눈매는 타시로를, 얼굴의 점은 나오토를, 전체적인 인상은 타나카와 닮았다. 이를 본 요헤이 부녀와 유마와 타츠야의 반응은 당연히 한결같아서 일단 사실을 부정하는 가운데 한편으로 실제 살인자이면 어떡할까, 고민을 숨길 수가 없다.

상대에 대한 불신은 자기 내면에 침전해 있는 불안감의 거울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가출을 밥 먹듯 하며 유흥업소에서 일했던 딸의 행각에 여전히 마음고생이 심한 요헤이는 아이코의 불행을 전제하며 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이코가 과연 번듯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딸이 좋아하는 타시로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요헤이는 아이코 몰래 타시로의 뒷조사를 해보니 이름을 바꿔가며 떠도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마침 우연히 보게 되는 살인 사건 용의자의 인상착의. 아버지는 타시로가 바로 그 살인자가 아닐까 강하게 의심을 한다.

가까운 사이에 형성되는 믿음은 굳건한 것 같아도 실은 살얼음 못지않아서 의문이라는 감정이 무겁게 발을 디딛는 순간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로는 믿음을 연발하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려 해도 이는 역으로 그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드러내는 자기 부정과 같은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가까운 사이에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이를 견디기 힘들어 상처받고 도망치는 패턴을 반복한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아이코와 유마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들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를 경멸하고 이를 분노의 감정으로 전이해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파괴한다.

이 영화는 ‘분노’의 기원을 믿음과 불신 사이에 피어나는 의심에서 찾는다. 에피소드마다 배경이 다르고 등장하는 인물이 많은 것, 이는 <분노>가 다루는 분개하여 크게 화를 내는 감정이 특정인의 것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사항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말한다는 건 쉽지 않다. 분명한 건 믿음의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때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신나는’ 것들을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신나는 씨네’ 코너에 전혀 신나지 않은 영화 <분노>를 신나게(?) 떠들어대며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KDI 나라경제
‘신나는 씨네’
2016년 4월호

[GV] <나의 딸, 나의 누나>

(언제나처럼 말로 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문장들이 거칠어요. 감안 부탁드리고 또 하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한 토마 비더갱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의 각본 데뷔작 <예언자>는 할리우드 장르물로 인식이 되는 감옥영화를 프랑스 감옥물의 전통과 혼합해 자크 오디아르 감독에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선사했죠. 그런 인연이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다룬 <러스트 앤 본>과 <디판>까지 이어졌죠.  <디판>에서는 프랑스 사회에 유입된 인도인 난민이 어떻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지 현실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와 다르게 <미라클 벨리에> 같은 경우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부부의 딸이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토마 비더갱은 장르를 가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고전적인 장르와 보편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런 비더갱을 일러 ‘그림자 사나이 the man in the shadow’라고 헤드라인에 적시했는데요. 영화의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영화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가라는 의미이겠죠.

그림자 사니아 토마 비더갱은 이제 <나의 딸, 나의 누나>로 전면에 나섭니다. 그의 첫 감독 연출작이죠. 토마 비더갱 감독은 동료 시나리오 작가인 로랑 아비톨에게서 우연히 프랑스의 컨트리 웨스턴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이야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합니다. 축제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린 토마 비더갱 감독과 어느 한 사건을 겪으면서 성숙해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는 딸의 실종을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로 탄생했습니다.

가족 드라마이지만, 이 영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장르는 서부극, 더 정확히는 존 포드의 <수색자>입니다. 실제로 토마 비더갱 감독은 <나의 딸, 나의 누나>를 만드는 데 있어 <수색자>를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수색자>는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유명하죠. 남북전쟁을 마치고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온 이든(존 웨인)은 가족과의 행복을 느낄 짬도 없이 인디언 원주민 코만치족에게 조카 데비를 납치당하고 말죠. 이후 이든은 또 다른 조카 마틴과 함께 그녀를 찾아나섭니다.

<수색자>의 이든과 마틴의 관계는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프랑수아 다미안)과 아들 키드(피네건 올드필드)를 연상시키죠. 알랭과 키드가 각각 ‘나의 딸’과 ‘나의 누나’인 켈리를 찾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데요. 이는 토마 비더갱 감독이 인물을 통해 각 세대의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를 드러낸 것인데요. 알랭은 딸 켈리가 지하드스트에게 잡혀감으로써 그녀가 성적으로, 인종적으로 더렵혀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이 역력해 보여요. 그의 과격함은 역으로 알랭이 공포와 증오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반면 키드는 누이 켈리를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지만, 아버지와는 좀 다른 대처를 보여주죠. 인종이나 문화에 상관 없이 순수하게 누나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아버지가 키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드는 거죠. 아버지 세대가 <나의 딸, 나의 누나>에서 보여주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적대적이라면, 아들 세대인 키드는 적당하게 거리를 둔 채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죠. 누나를 데려간 이의 본거지를 찾아 침입했다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이슬람 여성과 가정을 이루는 영화의 결말이 이를 보여주고 있죠.

<수색자>가 서부극 가운데서도 미국의 개척정신을 찬양하는 장르가 아닌 인디언에 대한 미국 백인의 불안을 드러낸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각광받은 이유를 <나의 딸, 나의 누나>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알랭처럼 <수색자>의 이든은 과격한 인종주의자입니다. 심지어 그는 조카 데비가 코만치족에게 잡혀가 인디언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단죄하려고 합니다. 백인과 인디언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런 태도는 영화에서 일종의 상징적인 단죄를 받습니다.

<수색자>의 유명한 장면이죠. 데비를 구한 이든과 마틴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틴은 가족의 품이라는 집으로 들어가지만, 이든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서부의 어딘가로 떠나죠. 서부 사나이는 그렇게 쓸쓸히 퇴장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처럼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도 단죄를 당합니다. 딸을 찾지 못한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과격하게 운전을 하던 중 차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죠. 이 장면에서 차가 전복되는 장면은 흡사 서부극의 말이 격렬한 전투 속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사실 알랭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딸이 사라졌죠, 딸을 찾는 과정에서 아내와 이혼했죠, 가족이라고는 아들만 남았는데 키드는 딸을 찾기 위해 집착하는 아버지에 저항을 합니다. 정보를 입수한 아버지가 함께 가자고 하자 “NO!” 싫다고 거부감을 드러내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며 타인과 타문화에 적대적이었던 아버지는, 더 정확히는 그 세대의 태도는 키드 세대에게는 구시대의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이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왜 프랑스 사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의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서부극을 끌어오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힌트는 이 영화 중간중간 언급이 되는데요. 알랭과 키드가 켈리를 찾는 여정 속에 TV 화면을 통해 9.11 사건을 노출하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가 배경으로 삼는 건 서양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대립이죠. 그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9.11이고요. 9.11 이후 미국은 이에 대한 복수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요. 미국처럼 프랑스 역시도 이슬람 문화권과 난민 문제를 비롯해 갈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죠. 서양권과 이슬람권의 대립에 대해서 프랑스는 미국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던 건데요. 이에 토마 비더갱 감독은 미국의 장르인 서부극으로 프랑스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한국 개봉명과 달리 원제가 <카우보이 Les Cowboy>인 이유가 있죠.

세대별 역사에 대응하는 방식과 감정을 서부극의 장르로 우회하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한편으로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관계 맺기의 변화를 가족 드라마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요. 알랭 가족이 켈리의 실종으로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죠. 알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심지어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딸을 찾는다면, 키드는 그 와중에도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알랭을 잡는 카메라는 대개 그를 단독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면, 키드는 UN 구호단체에서 사귀는 여자 친구, 그곳에서 만나는 미국인(존 C. 라일리) 등 누군가 함께 하는 과정 속에 누나를 찾아나서는 장면이 빈번하죠.

알랭의 아내이자 키드의 엄마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키드와 거의 흡사한데요. 알랭이 딸을 찾아나서느라 집을 돌보자 않자 이혼을 하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들죠. 남자 친구는 알랭처럼 프랑스인이지만,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알랭처럼 그 자신의 가치와 태도를 강요하지 않는 것업니다. 그러니 알랭과 다르게 타인종과의 결합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거죠. 엄마 또한, 아들 키드가 이슬람 문화권의 여인, 심지어 딸을 납치한 이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증오와 분노 없이 가족처럼 맞이해 줍니다. 이들의 태도에 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겠죠. 바로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 셈입니다.

새로운 신화는 과거처럼 자신들의 공동체만 보수적으로 지키는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겠죠. 새로운 국가 건립, 즉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아버지 알랭과 아들 키드로 이어지는 시간의 여정과 프랑스에서 시작해 파키스탄까지 가는 공간의 여정으로 신화를 구축하는데요. 이에 대한 토마 비더갱 감독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가 <나의 딸, 나의 누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어느 누구도 지하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하드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인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미국인처럼 구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베일이 상징처럼 된 이들도 함께 존재한다. 이게 지금 세계의 풍경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프랑스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로의 여정을 통해 베일을 쓴 여인을 만나고 가족을 구성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계다.”

 

<나의 딸, 나의 누나> GV
CGV 명동 씨네라이브러리
(2017.3.22)

<토니 에드만> 등만 보면 흐르는 눈물의 정체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 아예 안 보고 싶을 때가 많은데 뭐라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다. 돈을 번답시고 밖으로 나돌며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그의 과거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실 그 하나 때문에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얼굴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다르게 등을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 눈물이 쏟아진다. 도대체 왜?

<토니 에드만>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가 선정하는 2016년 올해의 영화 목록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 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도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독일 출신의 여성 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했는데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의 자전적 경험을 영화에 반영했다.

그러니 주인공은 사이가 좋은 않은 부녀로 설정되어 있다. 아버지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딸은 물론 부인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지 혼자 산다. 근데 혼자 사는 척을 하지 않는다. 누가 찾아오면 가발과 가짜 치아로 외모를 변신해 ‘토니 에드만’으로 행세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판다 화장을 하고 나타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뭐 오늘 하루뿐인데 겉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저 먼 루마니아의 회사 업무에 복귀한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가 독일에서 회사에까지 찾아와 생일 선물을 챙겨주는 것도 모자라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며 변장을 하고 장난을 쳐온다. 이네스 왈, 아버찌 쫌!

부녀의 이야기임에도 나는 이네스에게 감정 이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니 에드만>을 봤다.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남 일 같지 않아서였을 테다. 특히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숙소로, 회사로 찾아와 이네스의 상사와 동료와 친구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황당한 변장으로 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일종의 폭력으로 보여 불편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이네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감정이 폭발한 이네스는 딸의 상황에는 개의치 않고 화해라는 선의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쌓였던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독일의 집으로 돌아가 달라 부탁하는 딸의 주문에 아버지는 고개를 떨군 채 얘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그 상황의 결말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끝난 듯한 발걸음으로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현대의 가족 관계는 이렇듯 복잡 미묘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처럼 가족의 갈등 관계는 단순히 가족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갈등의 우물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 수원지에는 가족 구성원 각 세대가 처한 환경과 지나온 역사와 그로 인해 확립된 입장 등 다양한 물줄기가 충돌하며 파문을 일으킨다. 같은 사안이라도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 만나기만 하면 돈 문제로 충돌하는 친척과의 관계 지속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럴 시간에 글이라도 한 줄 쓰고, 영화라도 한 편 더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을 통과한 아버지는 힘든 일을 겪게 되면 결국 기대는 언덕은 가족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친척의 대소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는 아버지를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빈프리트와 이네스 부녀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 빈프리트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인간관계로 파생되는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다. 변장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이네스는 다르다.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탓인지 동료를 밟고 넘어야 내가 살 수 있다. 그녀는 회사에 나갈 때면 늘 사회적 가면을 쓰고는 한다.

이 둘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아버지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은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들이 계속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차이만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일 거다. 변장하지 않고, 사회적 가면도 쓰지 않은 뒷모습에서 진심을 읽는다. 흰머리가 잔뜩 내려앉은 뒤통수와 축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은 부모가 자식 때문에 겪은 수난의 세월을 말없이 웅변한다.

피로 맺은 관계일지라도 그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 그건 설득으로 좁힐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넘어 인간관계가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뜻밖에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차이를 인정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럴 때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예컨대, <토니 에드만>과 같은 영화를 함께 나란히 앉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영화의 마지막, 아버지와 딸의 극적인 포옹이 제공하는 감동이 제법 크다. 아버지 <토니 에드만> 같이 보실래요?

 

ARENA
2017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