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Lost In The South Mission: Going Home)


당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최근 북한을 뿔 달린 시뻘건 도깨비가 아닌 가끔가다 뻘짓꺼리도 하고 情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인간의 시선으로 접근한 <휘파람 공주>, <남남북녀> 등의 북한人을 소재로 한 영화와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다.

이는 곧, 북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비스무리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물론이요, 전체적인 만듦새에 있어서도 ‘거기서 거기다’ 할 정도로 동일한 모냥새를 취하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북한 장교 최백두(정준호 분)와 그의 쫄따구 병장 림동해(공형진 분). 날씨 좋은 어느 날 낚시질 나왔다가… 술도 한 잔 걸치고 날씨도 급작스레 폭풍우 모드로 변하는 바람에 난파되어 눈을 떠보니.. 허걱! 이 곳은 남한..

이들은 과연 어떤 난관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오게 될 것인가, 가 바로 당 영화의 재미를 결정짓는 핵심부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취하는 전략은 당근 코믹인데 그래서 당 영화의 성패여부는 관객을 얼마만큼 웃기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당 영화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조폭마누라 2>, <낭만자객>,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등 요즘의 한국 코미디 영화가 관객에게 똥칠을 가했던 그 뒤안길을 그대로 복습하는 추태를 범하고 있다.

일단 이야기의 대략적인 와꾸만 잡아놓으면 게임은 다 끝났다는양, 세부적인 상황을 더 다듬어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배우의 개인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전문용어 구사 못 해 안달 난 욕쟁이 할무이마냥 시도때도없이 씨벌씨벌을 입에 달고 다니며, 화장실 유모 안 넣으면 한국코미디쒯영화 협의회에서 과태료라도 물리는지 똥 넣는 장면 같은 類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그게 또 우끼다면 몰라, 당 영화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억지 웃음 유발에만 심하게 몰두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앞썰했듯 당 영화는 배우의 개인기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으면서 그 배우들이 제대로 우껴주는 것도 아님인데 본 특위는 당 영화의 마지막,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1등을 먹어야지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동해와 백두가 뭔가 크게 하나 제대로 터뜨려 주는 줄만 알았다.

무대에서 <챔피언>을 북한 사투리로 구성지게 부르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어느 정도 각은 잡아주는 공형진은 둘째치고 당 영화에서 개그적 감각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정준호, 무대를 와리가리하며 뻘쭘한 동작으로 챔피언! 챔피언! 외쳐대는 모습을 보면서 본 특위는, 아이고! 안 우껴주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네, 하는 생각까정 들었더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가 한 개도 안 우끼다는 얘기가 아니다. 공형진의 개그 타이밍을 맞추는 연기는 거의 송강호와 삐까맞다이 먹을 정도로 훌륭했는데 그게 자주 나왔으면 좋으련만 간혹가다 한 번씩 튀어나오니 이를 어째쓸까나…

우리가 야구장에 번트안타 하나 보러 경기장을 찾는 것이 아니듯 단지 우끼는 몇장면 건지려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 아닌 전차로 해서 본 특위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워스트에 뽕한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Happy Ero Christmas)


실로 아까비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만 더 일찍 개봉했드라면 ‘2003 토룡영화제’ 전 부문 후보등록은 물론이요, 다관왕까지 찜쪄먹는 건 따놓은 당상이었을텐데…

그렇다. 니덜도, 본 특위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만 당 영화는 그 생명력이 스미스의 복제능력처럼 사그라들줄 모르는 국산 쒯영화의 올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할 기념비적 작품에 다름이 아니다. 대체 워떤 영화이길래…

당 영화는 1년에 딱 한 번밖에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시류에 편승하여 이날만을 목놓아 지둘려왔던 수많은 바퀴벌레 남뇨관객을 겨냥해 만든 기획영화다. 특히 제목 정중앙에 백혀있는 ‘에로’라는 두 글자 땜시롱 더더욱 귀두가 주목되고 있는 형국인데.. 에로는 조또…

당 영화는 여친없는 성병기(차태현 분)가 남친한테 채인 허민경(김선아 분)을, 조폭두목 방석두(박영규 분)의 방해를 뚫고 쟁취(?)한다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심심해터진 단순 러부질에 다름 아니다. 근데 제목이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인 이유는? 극중에서 별 비중 없는 에로감독이 제작하는 비됴의 제목을 빌려온 까닭이다.

다시 말해 에로비됴와 관련된 부분은 당 영화에서 쌀 한 가마니의 쌀 한 톨 분량에 불과한데 제목이 에로틱하다보니 주최측은 이점을 이용, 얍삽하게 관객을 끌어 모으려 뺑끼를 부리고 있는 거다.

모, 제목이 제목이다 보니 당 영화는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나름대로 에로틱한 설정을 몇 군데 낑군 거 같긴 하다. 근데 영화 전체가 ‘발기부전’이라고 할 정도로 전혀 꼴림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 아니 안타까울쏘냐…

단순히 김선아 응뎅이 두둥~ 함 보여주고 극중 에로여배우가 매장에서 옷맵시 좀 보겠다며 거울 앞에서 야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 글씨, 이런 세상에, 피스톤 운동을 시연하고 자빠져 있는 것이니 대체 어느 누가 이거 보구 쏠리겠냐. 헉! 아니 이거 혹시 우끼려구 넣은 부분인가? 씨바, 그렇다면 더 황당하고…

그러나 당 영화의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당 영화는 마치 <펄프픽션>처럼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들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맞물려 들어가기는커녕 서로 따로국밥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구성하고 있는 에피소드들도 지들 맘대로 별 개연성없이 나홀로 플레이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개별 에피소드들조차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힘드니 이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대입해봐도, 뉴튼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이해하려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음이다.

그니까 결국 당 영화는 아이디어는 엄꼬 이야기 쓸 능력은 안되고 그런데 크리스마스 때 돈은 벌어들여야겠고 해서 예전에 유행하던 조폭코미디 공식 끌어다가 대충 뚝딱거리고 제목 좀 그럴싸하게 데코레이숑해서 만들어진 쒯영화의 전형이다 이 소리다. 이거 약아빠진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실미도>(Silmido)


당 영화는 실제로 지난 1971년 서울 한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실미도 사건’을 소재로 가져와, 북파공작원의 탄생에서부터 비극적 최후까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즉, 강우석 감독이 시대를 우회적으로 풍자했던 <투캅스>나 <공공의 적>과 달리 이번엔 역사자체가 사회모순이자 아픔이었던 실미도 사건을 정면에 드러내놓고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얘기다.

일단 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실미도 사건이라는 당시 역사가 운명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비극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이 속에서 양성된 인찬(설경구 분)을 위시한 북파공작원 개인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더해 그들을 조련한 기간병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접고 서로의 심장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드라마틱한 관계 등 머리부터 발끝까정 말이 되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캐릭터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을 보여온 감독답게,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쌀벌한 훈련과정에서 우리의 액숀협객 다찌마와리 임원희를 앞세워 의외의 우끼고 자빠라짐을 유도, 이를 통해 인물의 캐릭터를 살리고 관객의 감정이입까정 자연스럽게 이끎으로써 재미까정 일타쌍피한 솜씨는 관객을 재미의 도가니탕으로 흠뻑 빠뜨려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비유띄벗뜨…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북파공작원들의 김일성 모가지 따러가는 임무가 전격적으로 취소되면서부터 재미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왜냐?

당 영화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북파공작원 vs 기간병’의 구도를 접고 대신 ‘북파공작원, 기간병 vs 국가’라는 새로운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들이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동시에 국가주의에 똥침을 놓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감독은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북파공작원과 기간병간의 관계 묘사라는 것이 마치 감정표현에 서투른 중년남성을 보는 것처럼 굉장히 촌스러워 이야기에 몰입하려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조중사(허준호 분)의 사탕봉지는 정말이지…

게다가 당 영화는 뒤로 갈수록 북파공작원이 희생양이라는 사실에만 치중하여 오로지 관객의 울음보를 터뜨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데 이를 보여주는데 있어 하나의 사건을 축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짜잘한 에피소드 위주로 끌고가니 이야기가 산만해져 갈등포인트가 힘을 받지 못해 결국 스토리는 늘어지고 전개는 산만해진다.

그 결과, 이런 힘있는 이야기를 그저 ‘실화 재현’ 수준에만 머물게 하고 관객의 감정을 순간순간 자극하여 울리기에만 바빴지 큰 감정의 울림을 주지 몬한 감독의 단순한 연출력은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얼 위해 일하는 걸까?


현재 편집국 필진 3명. 그리고 일주업데. 1인당 소화해야 할 기사양이 평균 4개. 최고로 많을 땐 6개까지도 써봤다. 그런데 최근엔 여기에 하나가 더 붙었다. 일망타진 이너뷰 녹취. 그래도 불가능은 없다. 다 해낸다. 주변사람들에게 성실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나보다.

사실 딴지에 입사해서 굉장한 필력의 기자들을 본 후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성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내게 맡겨진 일은 내 능력 이상의 것이라도 다 해내고 싶었고 웬만해선 다 해냈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했던 셈이다.

어쨌든 뿌듯했다. 이 많은 걸 다하다니. 하지만 양이 질을 덮어주는 건 아니었다. 기사를 많이 쓴다고 해서 독자들이 나의 글을 인정해 준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회사에서 월급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습관처럼 써댔다. 성실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오늘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을 만났다. 일망타진 이너뷰 찍새 신분으로 총수를 따라갔다. 그와 4시간 이너뷰를 하고 2시간동안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셔본 결과, 김문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실하기만 하다는 거다.  

이번 김문수 이너뷰의 키포인트는 그가 왜 정치를 신한국당에서 시작했느냐였다. 아시다시피 김문수 의원은 재야인사로써 정치에 입문하기까지 노동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수구꼴통들의 집합소인 신한국당에 입당하다니, 그 부분이 이번 이너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민중당이 실패로 끝나고 방황하고 있을즈음 신한국당에서 러브콜을 보냈단다. 그래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성실을 무기로 8년의 시간동안 정치를 해왔다. 국회출석률도 엄청 좋다. 거의 98%. 지금껏 딴지가 만나온 정치인 중에서 가장 월등한 출석률을 자랑한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는 굉장히 성실하다.

근데 성실하기만 할 뿐 비젼이나 방향성이 없다. 애당초 그가 기득권 세력인 신한국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신한국당에서 먼저 러브콜을 보내와서. 총수가 묻는다. 정치 목표가 모냐고. 오랜시간 머뭇거리다가 한다는 답변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그래서 고건 내각이 출범한 후 주가가 800선까지 오른 것이 정국안정이고, 일자리 200만개를 창출한다고 한 노무현이 오히려 19만개의 일자리를 감소시킨 것이 명백한 대통령 탄핵 사유가 된다고 말하는 그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있다보니 지금의 내 딜레마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라는 나의 고민, 이는 목표없는 나의 성실함의 한계였다. “내가 지금 무얼 위해 일하는 걸까?”

비젼없는 성실함, 목표없는 성실함. 이는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차이나타운>(Chinatown)




고전영화 많이들 보셨습니까? <반지의 제왕>, <디 아더스> 보느라 시간이 없었다고요, 쯧쯧 딱하기는. 그거 아십니까, 피터 잭순이 <반지의 제왕>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1933년에 발표된 <킹콩 King Kong>과 1963년에 만들어진 판타지 <제이슨 앤 아거노츠 Jason and the Argonauts>가 있었기 때문이고,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고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디 아더스> 역시 고전공포영화의 법칙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각설하고, 본 우원 벌써 두 번째 기사임다. 독자제위들의 벌떼와 같은 공격적 응원메일이 아니었다면 다시 만나기 힘들었더랬습니다. 이렇게까지 친근감을 표시해주니 본인 그저 가슴이 벅찰 뿐임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안면도 익히고 그랬으니, 말 트는게 어때, 우리 딴지가 맺어준 친구 아이가?  

지난 시간 <말타의 매>라는 훌륭한 골동품 한 점 소개해 줬으니 이번에는 이름난 마을 한 곳 알려주고 싶은데, 뭐 어디냐구, 서두르긴. 자! 이번에 안내해 줄 마을은 <차이나타운> 되겠다.

요 마을 이름에서 풍기는 대로 쪼매 위험한 곳이니 본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잘들 따라온나. 한 눈 팔고 딴 데로 샜다간 바가지쓰니깐.

1.

1941년 존 휴스턴에 의해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가 선을 보인 이후, 필름 느와르의 외피를 둘러싼 하드보일드는 숫총각이 불꺼진 여관방에서 홀인원을 하지 못해 골프채를 헛 휘두르는 상황을 방불케 하는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전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한 듯한 어두운 흑백 화면으로 인해 하나의 유행이 되기에 충분하였더랬다.

게다가 하드 보일드가 영화사적으로 얼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는 이 장르의 부분적인 특징들이 현재까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 꽃 같은 몽타를 보유한 쭉빵한 걸이 한 명 있다. 그 걸은 자신의 외적자산을 백분 활용, 상대남성의 단물만을 쪼∼옥 빼먹고 파멸의 길로 유도한다. 그렇다면 이는 하드보일드가  배출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그뿐인가 흑(黑)과 암(暗)이 불안한 기운을 조성하는 어두운 화면이 등장하는 날에는 하드 보일드를 논하지 않고는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작금의 사태가 이럴진대 <말타의 매>가 등장했던 당시 하드 보일드를 향한 관객제위들의 맹목적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때 만들어지던 영화의 경향을 지금의 문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하드 보일드인 것과 하드 보일드가 아닌 것’으로 구분 지어 설명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하드 보일드는 1940년대 헐리웃시장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한창 잘 나가던 하드 보일드 영화들은 1950년대 초반을 전성기의 마지막 정점으로 그 세를 조금씩 잃어가게 된다. 유행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등에 업고 끊임없이 양산되던 하드 보일드 영화에 관객들이 식상함을 느낀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드보일드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긴 생명력을 갖기에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개상황을 예측하기 힘든 미로와 같은 글을 계속해서 창조해 낸다는 것이 딴지라면 모를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결국 정통 하드보일드 영화는 스크린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그나마 TV를 통해 탐정장르라는 이름의 옷으로 갈아입고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긴 동면의 시간을 갖던 하드보일드는 1960년대 중반에 들어, 모 영화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흥미롭지만 대중적 반향은 없었던 얼마간의 무용담 영화”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3년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은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The Long Goodbye>로 실로 오랜만에 영화귀족들인 평론가와 변덕이 들 끊는 관객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내며 가볍게 잽을 날리기 시작했고, 1974년 드디어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차이나타운 Chinatown>에 의해 하드 보일드는 신 느와르(neo-noir, 국내 비평가들은 수정주의라고 함)라는 재건의 이름을 달고 원투 펀치를 작렬함으로써 올만에 영화계 사각의 링에 승리의 두 팔을 번쩍 올리게 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쓰”

2.

당 영화 <차이나타운>의 두드러진 특징은 감독의 업적보다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타우니(Robert Towne)의 공적에 더 큰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드보일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라는 평가와 함께 <차이나타운>은 로버트 타우니의 영화라고 주장하는 극성파도 있었으며, 그를 하드보일드 소설의 창시자인 대쉴 해미트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성미 급한 아덜도 생길 정도였다.

본 우원 일정부분에 대해서는 수긍의 고갯짓을 약간 ‘도리도리’ 해 보일 수 있지만 시나리오의 획기적인 완성도만을 앞세워 <차이나타운>을 타우니의 것이라고 한 주장에는 뒷골이 땡겨 심히 불만이 밀려오는도다. 대통령이 나라의 왕이라꼬 대한민국이 김데충이꺼 아니자너.  

시나리오 작가의 크레딧에는 분명 로버트 타우니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바뜨 그러나 실은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와의 투톱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진 산물이 바로 <차이나타운>의 뛰어난 각본이었던 것이다. LA의 화려함과 대조되는 불쾌한 이미지의 차이나타운을 끌어들여 상반된 분위기를 설정한 것은 로만 폴란스키였으며, 상실감으로 끈적거리는 비극적 결말을 유도한 것 역시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플레이메이커 로만 폴란스키의 쓰루 패스를 받은 타우니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네트를 흔들었다고 해야할까.

당 영화 <차이나타운>은 하드보일드에서 제시된 주요 특징들을 모두 배치해 놓음으로써 고전 하드 보일드 영화들에 존경(오마쥬)을 바치고 있다. 주인공이 사립 탐정인 점, 별 일 아닌 것 같던 의뢰가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음모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매력적인 뇨(女).

하지만 이전 하드보일드 영화들은 허황한 욕망을 좇는 인간의 추악한 악을 표현하는데 있어 여러 인물이 연루되는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 일방적으로 전개하여 독자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와 달리 <차이나타운>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사건해결의 열쇠가 되는 단서를 여기저기 살포시 흩뿌려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가령,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시체의 없어진 오른쪽 구두와 물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 나온 주인공의 없어진 오른쪽 구두를 통해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앞선 그 시체가 살해당한 것임을 단박에 눈치 깔 수 있다. 또한 차이나타운에서 지방검사로 지낸 기티스(잭 니콜슨)의 전력은, 본인처럼 총명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결말을 어렴풋이 추론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는 아주 촘촘히 엮어져 있어 집중하여 보지 않을 경우 많은 단서들을 놓치게 될뿐더러 작가와 벌이는 1:1 두뇌게임에서 낙오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인터렉티브 영화의 원조를 <차이나타운>에 두는 업계의 추측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이유는 LA를 배경도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아는가 모르겠지만, 텍사스처럼 LA 역시 모래 반, 자갈 반에 황량한 바람만이 지랄맞게 극성을 부리는 훵한 황무지였드랬다. 그런데 이 불모지에 불과한 LA가 개척자의 침입에 따른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급속히 거대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범죄와 음모에 노출되었드랬다. 바로 그 타락하는 모습을 물 부족과 연관지음으로써 생기가 말라 가는 도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로버트 타우니는 단순히 물과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어 별 의도 없이 이런 소재를 택하였다는 겸손한 필을 가장한 다소 김 빠지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불구(그렇지만 실은 자신의 식견을 뽐내는…. 그래 너 잘났다 쓰바야), 시나리오 작가로써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특출 난 장점들로 인해 <차이나타운>의 각본은 영화학과의 시나리오 강의 시 교재로 채택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시나리오 소개서와 작법서에도 누락되는 일이 없을 정도다.  시나리오 하나로 영화판권뿐 아니라 출판계에서 로열티까지 받아먹는 일타이피의 득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각본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로버트 타우니는 암울하게 끝맺음되는 결말부에 대해서 노골적인 실망감을 표시했드랬다. 왜냐, 자신은 관객을 계몽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임으로 당연히 해피엔딩의 결말을 취함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의 똥꼬집으로 인해 악이 승리(?)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타우니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대부> 이후 선의 가치가 전복된 결말이 하나의 경향이 되어 <차이나타운>이 그 유행을 따랐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또 한편에서는 당 영화가 만들어지기 5년 전,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Charles Manson)에 의해 부인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은 로만 폴란스키의 개인적 이력을 끌어들여 감독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맨슨에 대한 분풀이를 할 요량이었는지 로만 폴란스키는 악당 역으로 출연 기티스의 코를 베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

이 영화의 특징이 단지 시나리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주는 진한 갈색톤의 음울한 영상을 만들어낸 촬영감독 존 A. 알론조의 카메라도, LA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방이 막힌 것 같은 폐쇄감을 창조한 리처드 실버트(production designer), 스튜어트 캠벨(art director), 루비 레빗(set designer)의 공로도 <차이나타운>을 논하는데 있어 빼 먹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

거의 매 장면마다 등장하는 잭 니콜슨은 기티스가 뿜어내는 냉정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우스꽝스러움을 예의 그 속알머리없는 마빡 카리스마와 빛나는 반창고로 감싼 코에 담아 열연함으로서 험프리 보가트가 창조한 느와르 탐정 역의 전형을 최초로 넘어선 배우라는 찬사를 받았다.

에버린 멀웨이 역의 페이 더나웨이(Faye Dunaway)역시 부자집 자재의 품위를 잃지 않으며(이영애의 그것과는 다른) 요부의 도발미까지 풍기는 균형잡힌 연기로 느와르의 팜므 파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반전효과와도 맞먹는 부도덕한 관계로 희대의 아버지 상을 보여준 노아 크로스는 <말타의 매>의 감독인 존 휴스턴이 맡았다. 이를 두고 의미부여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평론가 선상들께서는 그가 등장하였다는 점에 착안 <차이나타운>을 소개하기를 ‘고전 필름 느와르의 마감’이라는 마빡기사로 신 느와르의 출현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기가 막힌 작문솜씨를 뽐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각본과 뛰어난 연출력, 인상적인 영상, 배우들의 열연을 고루 갖추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그 다음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음에도 고작 로버트 타우니만이 각본상을 수상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꼴려오네 패밀리들이 그들보다 강했던 탓이다.  

그래도 <차이나타운>이 주도한 신 느와르의 흐름은 그 후 변주영화들의 득세를 불러왔다. 그 중에서도 탐정이라는 소재는 짜바리로 대체되어 짭새 장르의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요부 역시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되어 많은 남성캐릭터들의 오줌보를 지리게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정통 하드 보일드의 플롯을 갖춘 영화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어서 그것을 만나기까지 하드 보일드 팬들은 2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영화가 뭔지 궁금하신가, 그럼 몇 주만 기둘려 보시라. 더 이상의 영진공 업무중단은 없을 터이니 곧 그 실체가 밝혀질 것이다. 그 때까지 고전영화 많이들 찾아 좀 보시라.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


당해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로맨틱 코미디다. 감독도 <왓 위민 원트>를 만든 낸시 마이어스. 그래서 당 영화는 이 장르가 그렇듯, 개와 고냥같은 쥔공 남녀가 첨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아웅다웅하다가 뭔가를 계기로 알콩달콩 사랑을 이루고 중간에 결별을 빙자한 갈등을 겪은 후 끝내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고 만다는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나 이렇게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사랑 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 결정적으로 이 장르와 차별을 긋는 지점이 있다. 바로 해리와 에리카 역으로 등장하는 잭 니콜슨과 다이앤 키튼. 이미 환갑의 나이를 넘긴 머리 벗겨지고 주름살 자글자글한 할배, 할매가 주인공이라는 소리.

그래서 당 영화의 관건은 얼굴 팽팽하고 쭉빵한 젊은 배우가 아닌 이들 노인네를 가지고 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추구하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로맨스를 펼쳐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당 영화는 이런 주위의 우려와 불안에 아랑좃 하지 않고, 늙었지만 돈 많고 젊은 여자가 줄줄이 비엔나로 따르는 해리와 똑같이 늙고, 성공한 처지지만 동년배 남자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에리카 이 두 노인네의 상반된 상황을 충돌시키면서 이들의 로맨스를 재미나게 연출, 관객의 입장료 7,000원(혹은 8,000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대로 충족시켜줌이다.

사실 두 老배우의 얼굴을 뜯어먹는 재미는 없지만 해리와 에리카가 펼치는 로맨스는 재미를 뛰어넘어 귀여운 경지에까지 이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잭 니콜슨의 똥꼬가 영화 중간 특별 출연하는데 그것만 봐도 버럭 웃음이 나올 정도라는 것까지만 밝히겠다.

물론 포스터에 박혀있듯이 감독은 영리하게도 한 얼굴, 한 몸매하는 키아누 리브스와 아만다 피트를 등장시켜 쥔공 배우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안배하는 세심함을 과시한다. 해서, 아무리 늙은 배우가 뭔 짓을 한들 로맨틱 영화에 젊은애들 안나오면 그게 무슨 재미냐며 경로사상을 개무시하는 관객제위께서는 당 영화를 관람해도 무방할 것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당 영화의 제목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인가, 하는 궁금점이 이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노년의 남녀가 나누는 사랑이라 빠굴을 할 수 없어서 고게 아깝다고 이케 지은 걸까? 아니다. 당 영화 로맨틱 코미디 영환데 어찌 빠구리가 빠질 수 있으리요.

이는 사랑을 나누는 커플들이 상대방에게 차이는 것을 염려,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몬하고 빠굴만 즐기다 헤어지는 작금의 인스턴트 사랑을 겨냥한 제목으로, 노년의 로맨스라는 점 빼면 별 거 없는 이야기 자체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설정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당 영화는 장르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맞춰 가야하니 제목이 말하는 부분은 겉핥기식으로 제시될 뿐 그렇게 깊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스토리 자체도 로맨틱 코미디라면 능히 지켜줘야 할 해피엔딩의 결론을 따르다보니 뒤로 갈수록 쥔공이 헤어졌다 다시금 결합하는 결말부가 급작시레 진행이 되어 뜬금없이 다가오는 감이 없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당 영화를 관람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아까운 것이다. 특히 지금 연애질에 한창인 커플들일수록 당 영화를 놓치면 아까운 것임은 더욱 그렇다.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덧붙여,
당 영화에 쥔공으로 출연하는 다이앤 키튼. 1946년 생이니 올해 나이가 쉰 여덟. 근데 영화 속에 나오는 그녀의 몸매는 쉰 여덟이 아니다. 오히려 딸로 등장하는 아만다 피트보다 더 호리호리빵빵한 것이… 몸짱 아주매 저리 가라다. 앗싸!

<8명의 여인들>(8 Femmes)


<스위밍 풀>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프랑소와 오종의 작품인 <8명의 여인들>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폭설로 고립된 집안에서 쥔공인 8명 여인들의 남편이자, 아빠이자, 사위이자, 형부이자, 오빠이자, 주인이자, 불륜 상대가 어느날 아침 살해된 채 발견되자 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이처럼 당 영화는 살해범을 찾는다는 추리구조가 뼈대를 이루고 있음으로 해서 영화 내내 단서가 하나하나 드러나며 사건에 대한 본질에 다가가고 있음이다.

그런데 감독 프랑소와 오종은 전작들을 통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즐겨해 왔던 대로 당 영화에서도 역시 무대와 쥔공들의 모습을 색깔 있게 치장한 뒤 죽은 남자와 관련된 8명의 여인들의 속내에 감추어진 위선을 까밝히고 있다.

그런 관계로 당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쥔공들의 속사정을 밝히기 위한 인물묘사에 공을 들이는데 그 특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짬뽕하여 하나로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보다 이를 풀어 가는 감독의 재치 있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당 영화는, 일단 기본적으로 추리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된 장소에서 극이 진행되고 영화의 마지막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모여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연극적인 요소도 지닌다. 무엇보다 압권은 극 중간에 불쑥불쑥 튀나오는 노래로, 쥔공들이 자신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각자 한 곡씩 떙긴다는 점에서 뮤지컬까지 오지랖을 넓히고 있다.

게다가 감독은 원래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조지 큐커 감독의 <여인들>을 리메이크하려다가 판권문제가 여의치 않아 당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꽃으로 인물을 상징하는 도입부나,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설정 등 <여인들>에서 많은 부분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프랑소와 오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물들간의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동성애, 근친상간과 같은 악취미적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으니, 이처럼 당 영화는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이 장르, 저 장르 삼팔선 넘나들 듯 겁대가리없이 크로스 오버하는 자유로움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결과, 당 영화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유쾌하고 발랄하며 밝은 인상을 풍기고 있음이다. 물론 여기에는 제목 그대로 8명의 여인들이 뿜어대는 매력이 한 몫 하는 것은 당근이다.

특히 노년부터 신예까지 우리로 치자면 선우용녀에서부터 송혜교까정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로 출연해 맘껏 기량을 과시하는데 이런 그들을 한데 어우른 솜씨는 바꿔 말해 감독의 현장 장악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소리니, 당 영화 <8명의 여인들>은 여배우들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그 보다는 오종 감독의 체취가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이다.

하지만 한가지, 당 영화가 이러코롬 범인이 누군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보니 별 임팩트없이 범인의 정체 및 살해 동기가 밝혀지는 결말은 긴장감이 빤쓰줄 끊어지듯 탁 풀어져 버리는 바람에 관객에게 미치는 힘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다른 건 다 좋았는데 결말 매조질이 시원치 않았던 관계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에 봉한다.

덧붙여,
당 영화에는 <스위밍 풀>에서 쭉빵한 몸매로 뭇 남성관객의 환호성을 받은 뤼디빈 사니에르가 출연하고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찾아보는 것 역시 당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 중 하나다. 아마 쉽게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딴지는 구걸중…


탄핵덕에 월드컵 이후 딴지가 호기를 맞았다. 탄핵안이 가결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대규모의 유저들이 딴지를 접속하기 시작하였고 딴지역시 이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창간이후 가장 빠릿빠릿한 대응으로 그네들의 욕구를 127% 충족시켜줬다.

독자들은 딴지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며 좋아했고, 두 명을 찾아라 이벤트가 진행되자마자 유수의 방송국에서는 촬영을 하겠다고 사옥을 찾아 왔으며, 신문에서는 딴지의 순위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급격히 상승하였다는 보도를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이에 고무된 딴지는 직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탄핵에 매달린 결과, 평상시 두달 걸려야 될 분량의 기사 업데를 무려 5일만에 올리는 쾌거를 일구며 연일 승승장구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돈.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이너넷 전체 순위 20위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연출했음에도 불구 티셔츠 몇 장 판걸로 판세를 마감하여 아쉬움을 샀던 총수는 급기야 그제 식사 도중 자발적 유료화를 하면 어떻겠느냐며 직원들의 의중을 떠본다.

결과는… 반대.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며 구걸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게다가 내 생각이 맞다면 총수는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유료화가 시행되던 당시에 <서프라이즈> 지승호와의 이너뷰에서 자발적 유료화를 두고 구걸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발적 유료화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오늘 회사에 와보니 디자이너들의 입이 나와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딴지가 오프라인 책장사를 한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오히려 자발적 유료화보다 더 명분도 있고 괜찮은 거 아니냐 했더니만 아, 글씨 그 조건이라는 것이 쪼까 껄적지근하다. 아마도 다음주 월요일 업데 때 공지 될 거 같은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독자들이여 딴지가 책을 낼 예정이다. 근데 조건이 있다. 니덜이 정기구독료를 미리 보내줘서 책을 만들 돈이 되면 <월간 딴지(가칭)>가 창간된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미리 돈을 입금하라’

허걱! 결국 <월간 딴지> 창간의 조건은 딴지독자들이 보내주는 돈이 책을 출간할 정도로 모이면 출판이 되는 거고 안되면.. 쪽팔리지만 그동안 받은 돈 다시 돌려주고 <월간 딴지> 창간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다. 결국 책 출판할테니 돈 달라는 얘기. 그러니까 다시 말해 방법만 바뀌었지 자발적 유료화나 진배가 없는 거다. 그것도 조건부.

딴지의 경영상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너무 즉흥적이며 독자를 너무 믿는다는 것. 고기의 종류에 따라 보기좋은 미끼를 던져놓고 낚을 생각을 해야하는데 언제나 독자의 충성도만을 믿고 미끼를 던지기는커녕 고기가 와서 낚이길 기다리고 있다. 대체 어느 세월에 낚을려고…

물론 다행히 많은 독자가 <월간 딴지> 출간에 호응을 해줘서 돈을 벌 수 있다면 모 그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방법이 잘못 됐다. 오프라인 잡지가 된다는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닌 앞으로 딴지의 오프라인을 책임질 주력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 그런 프로젝트를 장기간의 준비없이 접속수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하루사이에 덜컥 결정해 버리다니, 지금 잡지 시장이 얼마나 포화상태인데 말이다.

<월간 딴지>의 출판이 떨떠름한 건 이 때문이다.  

<스쿨 오브 락>(School of Rock)


젊은아덜의 파릇파릇 푸레쉬한 러부질을 수려한 화면빨과 재치 만빵의 대사로 잔잔시럽게 풀어내 뭇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냈던 <비포 선라이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래이터. 이번엔 가족영화를 빙자(?)한 포복절도형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소리 소문도 없이 들고 나왔음이다. 제목하야 <스쿨 오브 락>.

어디 내놓으면 별 약빨 못 받을 거 같은 촌시런 외모와 똥배 가득 덩치로 인해 자기가 맹근 롹 밴드에서 쫓겨난 듀이(잭 블랙 분). 어찌저찌 이러쿵저러쿵 어절씨구 해설랑 선생을 사칭해 핵교에 들어간 듀이는 범생적 사고관에 젖어있는 초딩들을 롹 스피릿 충만한 ‘스쿨 오브 락’ 밴드의 연주자로 싸그리 날라리화 시킨다.

그래서 당 영화는 우리의 쥔공 듀이가 통기타, 피아노, 첼로에 익숙한 자신의 반 학생들을 전기기타, 전자음반, 베이스로 집중, 조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끼고 자빠라짐이 압권인데 그 태풍의 눈엔 방금 막 <이나중 탁구부> 출연을 마치고 나온 듯한 인상의 잭 블랙이 있음이다.

이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내게 너무 가벼운 그녀>를 통해 뭔가 크게 한 방 터뜨려 줄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잭 블랙은 당 영화에서 예의 그 전신을 흐느적거리는 오징어적 움직임을 절도있게 승화한 오도방정으로… 뭔 소린지 감이 안 오겠지만 우쨌든 이럴 정도로 정신없이 관객을 우낌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런 예술적인 연기 역시 이야기가 받쳐줘야 최대치를 발휘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롹을 영화 전체 베이스로 깔고 있는 당 영화는, 열린 음악회式 고리타분한 정규교육을 롹으로써 유쾌상쾌통쾌하게 똥침 쑤신다는 재미난 얘기 속에 루저 스피릿과 저항 스피릿 등 그 바닥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처럼 당 영화가 보수적인 가치에 마구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영화의 탈을 쓰고 있다보니 ‘막판 감동 한 판 과하게 선사하기’라는 가족영화의 룰을 그대로 따르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해서 결말이 약간 민망하긴 했지만서도 ‘일등이 최고의 마빡은 아니다’라던가 ‘생긴 거보다 더 중요한 마빡은 재능’이라는, 나름대로 당 영화가 내세우는 교훈은 이야기의 설정을 비추어 보건데 꽤나 구여운 맛이 있었더랬다.

이보다 문제는 당 영화에 거창하지는 않지만 롹의 역사라 할 만큼 이름만 대면 대부분 알아 먹을만한 롹 이야기와 밴드, 노래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데이빗 게펜’을 ‘데이빗 게핀’으로, 불후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Great Gig in the Sky’를 ‘하늘의 궁전’으로 삑싸리 내는 등 번역이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당 영화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롹과 관련한 소소한 꺼리들인데 롹에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을 경우, 영화를 이해하는데 지장은 없지만 이와 같은 잔재미를 캐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스쿨 오브 락>은 큰 영화가 극장가를 독점하고 있는 와중에서 마치 흙 속의 진주처럼 그 재미를 반딱반딱 빛내고 있는 작품인 바,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덧붙여,
많은 영화들이 안면몰수하고 조기 퇴장하는 관객을 붙들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작금의 풍토에서 당 영화는 마구 돋보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크레딧이 끝까정 올라가는 순간까지 보는이들을 붙들어 매고 있음이다. 아무렴 붙잡아 두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암.

<말타의 매>(The Maltese Falcon)


역사학자 E.H.카란 사람이 역사를 가르켜 이렇게 썰 풀었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제가 고전영화로 독자 제위덜과의 합방을 시도하려는 이유는 역사학자 카의 이 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로 끌어와 그 둘 사이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일이야말로 고전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간절한 욕망일테니까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고전영화에 대해 어떤 견해들을 갖고 계심까? <단쪽비연수>처럼 과도한 졸음을 유발하는 수면제 무비, 아니면 어설픈 스턴트나 조악한 특수효과가 더 빛을 발하는 <비싼무>류의 어이없음, 광적인 영화팬들이나 소유하고 있는 ‘그덜만의 리그’, 이도 저도 아니라면 고전영화를 본다는 것은 엘레강스한 영화귀족들이나 가지고 노는 사치스러운 취미.

절대 NO. Absolutely 아님. 단언컨대 고전영화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아님다. 과거의 영화를 접한다는 것은 중·장년의 엄니 아부지 팬들에게는 학창시절과 연애시절의 풋풋한 순간을 떠올리듯, 평생을 따라다니는 ‘시간의 그림자’이며, 젊은 친구들에게는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을 살아보는 ‘교육적 체험’임다. 그뿐입니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고전은 무척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고전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그 지루한 거 재미없는 거’ 이러시는데 그러지 마십쇼. 그럼 댁들은 국사가 지루합디까? 그럼 <태조 왕근>이나 <여편네 천하>는 뭔 재미로 본답디까. 확실히 말하건데 고전영화 그 안에는 덩치만 큰 요즘의 영화보다 익숙하고 찡한 ‘울림’이 있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영화관계자들은 과거의 영화를 리메이크하지 못해 안달이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 제가 조금 흥분했슴다. 고전영화 무관심의 행태에 관해서는 차후에 자세히 알려드리기로 하고 지금부터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슴다.

1.


영화에 대해 쫌 아시는 분들은 <말타의 매>하면 일단 ‘음, 필름 느와르의 원형’하고 으쓱해 하실거라 사료가 되옵니다. 맞지? <말타의 매>를 소개하는 글들이라면 어디나 할 것 없이 필름 느와르를 완성한 영화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제가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에 <말타의 매>를 소개하면서 ‘느와르의 원형’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타의 매>가 ‘필름 느와르의 원형’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필름 느와르의 시초에 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니까요. 다시 말해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말타의 매>는 ‘필름 느와르의 원형’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겁니다.

1946년 프랑스 비평가들은 당시 미국 영화의 한 경향을 빗대어 ‘어두운 영화’ 즉 ‘필름 느와르’라는 뽀다구나는 용어를 선사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어둠이 강조된 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써, 당시 미국의 불안한 사회상을 배경으로 삼아 흑백필름을 표현수단으로 채택하였습니다. 게다가 암(暗)을 살리기 위해 조명이 다각도로 이용되고 흑(黑)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가 애용이 되죠.그래서 방과 같은 밀폐된 장소는 느와르의 가장 적합한 공간적 배경이 됩니다.

세트촬영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입죠. 한 무리의 비평가 선생님들께서는 바로 이것이 ‘필름 느와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필름 느와르’의 원형을 1941년 5월 1일에 개봉한 오손 웰즈의 <시민케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흔히 알려져 있는 ‘필름 느와르’의 정의는 여기서 한발짜국 더 걸어나갑니다. 하드보일드라고 알려진 탐정소설을 주제로 삼아 어두컴컴한 화면에 담아야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필름 느와르’라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죠. 그러니 이 경향을 따르는 사람들은 <말타의 매>가 이 장르의 원형이라고 목청 높여 외쳐댄답니다.

그럼 <시민케인>을 필름 느와르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전자의 경향을 따르게 될 경우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가 가지고 있는 영화사적 가치는 사라지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말타의 매>를 필름 느와르로 하지말고 하드보일드 영화의 효시라고 말을 좀 바꿔보죠. 어때요 이게 더 낮죠? 이렇게 하면 <시민케인>이 ‘필름 느와르’의 형님먹고, <말타의 매>가 ‘하드보일드 영화’의 원조 먹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또랑 치고 가재잡고, 너두 먹구 나두 먹구 두 영화 모두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용어의 정의라는 거에 괜히 역사적 가치 이런게 끼여들면 내가 먼저니 니가 나중이니 순서 따지는 옹삼이나 해창이처럼 때로는 유치하고 치사한 쌈박질이 된답니다.

우리는 애들처럼 싸우지 말고 신사적으로 <말타의 매>를 ‘하드보일드 영화의 출발’이라고 정의하고 이야기를 전개해보도록 하죠. 불만들 없으면 오라이~

2.

대쉴 해미트(Dashiell Hammett)에 의해 개척된 하드보일드(hard-boiled) 소설 장르는 「Benet Reader’s Encyclopedia of AmericaLiterature」이라는 미국의 문학백과사전에 따르면 ‘사회의 어두운 면을 현실성 있게 다룬무자비하며 피가 난자하는 탐정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슴다.

제가 자료 좀 뒤져 봤슴다. 1920년대 말에 탄생한 하드보일드 소설은 금주법 시대였던 당시의 미국을 백그라운드로 깔고 있으며, 개인의 추악한 욕망에 의해 계획된 더러운 음모를 소재로 얽히고 설킨 사건들을 거미줄처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땀시롱 하드보일드가 선보이는 어두운 현실세계를 소화하기엔 필름 느와르의 외피가 아주 딱인 셈이죠.

사실 대쉴 해미트의 소설 「말타의 매」를 가지고 영화화한 사례는 1931년 로이 델 루스(Roy Del Ruth)의 <말타의 매>와 1936년 윌리엄 디털(William Dieterle)의 <악마는 뇬을 만났다 Satan Met a Lady>가 있었지만 성공적이지도 못 했을뿐더러 스타일보다는 이야기쪽에 중점을 둔 영화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대쉴 해미트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는 필름 느와르와 하드보일드 소설 그 둘간의 합방시도가 최초로 성공한 사례일 뿐 아니라 그 후 하드보일드 장르(영화)의 유행을 가지고 온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이는 영화 <말타의 매>에서 보여지는 두드러진 특징들이 하드보일드 소설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함다. 그만큼 존 휴스턴은 해미트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을 끌어왔고 원작에도 충실했습니다. 전자가 필름 느와르로 불리는 암과 흑에 의존한 흑백스타일이라면 후자는 주인공의 성격을 잘 살린 연출력과 적역의 캐스팅이었슴다.

초기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사립탐정이었슴다. 그래서 이 장르의 주요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고유한 탐정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슴다. 대쉴 해미트 하면 샘 스페이드 였고, 해미트에 이어 이 장르의 대표적인 작가가 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는 필립 말로우가 파트너였습니다. 영구에겐 늠름한 개새끼 땡칠이가 따라다니듯이요.

그런데 이 탐정들은 단순히 범인을 잡는 말 그대로의 탐정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의 주인공이 대개 그렇듯 뛰어난 추리력은 물론이고 기지에 능하며 겁대가리라는 것이 없슴다. 뭇 남성들이라면 한번쯤 인생의 목표로 삼아봤을 인물이며, 뭇 여성들이라면 이 놈과 한번 빠굴이라도… 어헝~  

하지만 샘 스페이드로부터 규정된 하드보일드의 남성주인공은 한편으로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갈피를 몬 잡는 우매한 우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슴다. 같은 소속의 파트너 아내와 밤새 침대에서 놀아나고, 누군가와 대화라도 할라치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말만 나불대며 더러운 세상을 향해 남은 감정이라고는 차가운 냉소 뿐임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의 주인공은 일상 남자들이 꿈꾸는 이상과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인물임다. 그러니 하드보일드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죠.

<말타의 매>에서 샘 스페이드 역은 후까의 대형이자 우리의 카리스마 지존이신 험뿌리 보가트 옹께서 담당하셨슴다. 딱딱 끊어지게 내 뱉는 간결한 어투는 험뿌리의 매마른 이미지와 잘 어울려 더욱 매섭게 느껴지며 웃음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무표정 또한 샘 스페이드의 냉정함에 제격입니다. 험뿌리 보가트가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할리웃 빅 스타의 자리에 오른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다.

3.

느와르 영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바로 쭉빵 언니들의 대 선배님이신, 요부로 지칭되는 여성캐릭터입니다. 사건은 항상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뇨자의 의뢰에서부터 시작이 됨다. 하지만 그뇨의 아름다운 외모 뒤에는 상대남성을 몰락시킬 독침을 머금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슴다.

<말타의 매>에서 메리 에스터가 분한 브리짓 샤네시는 얼굴값하는 외모를 이용 남자들을 위험에 빠뜨림다. 이처럼 넘들을 유혹해 실속을 챙기는 뇨자들을 가리켜 프랑스 인들은 ‘악한 뇬’이라는 뜻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이라고 이름붙여 주었습니다.

근데 이게 요즘에 와서는 돈 있는 어리숙한 넘들이나 중년의 아자씨를 유혹해 돈푼이나 뜯어먹는 나이트 죽순이들이나 고삐리 뇬들을 일컫는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되길, 브리짓 샤네시로 인해 팜므 파탈의 캐릭터가 완성은 되었지만 풍만한 가슴과 꿀꺽~…. 금발의 머리로 대표되는 강렬한 외모의 악녀들은 <말타의 매>가 등장한 이후 그러니까 19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임다.

1940년대 당시 헐리웃 여배우 발탁 지령은 무조건 빵빵한 가슴과 노랑머리였슴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나 브리짓 바르도는 이 점을 적극 활용 검은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큰 가슴을 마음껏 흔들어대 연기보다는 육체로 스타에 오른 경우임다. 영화 속에서 터질듯한 가슴은 하층계급과 동일시되었고 그런 가슴을 가진 뇬들은 천혜의 육체적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남성을 등에 업고 신분상승과 부를탐하는 이미지로 그려졌슴다.

이는 하드보일드의 본질과 들어맞는 것이였슴다.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남성 팬을 다수 거느린 하드보일드가 이러한 호재를 놓칠 리가 없었슴다. <길다>의 리타 헤이워즈나 <푸쉬오버>의 킴 노박(히치콕의 <현기증>에서 가슴에 자신있던 그뇨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은 이러한 시류 속에 스타가 된 소위 육체파들이었습니다.

그런 뇨배우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말타의 매>의 메리 에스터는 팜므 파탈 계보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육체가 돋보이는 배우는 아니었슴다. 그래서 극중 남자들에게는 매력을 발휘하지만 글쎄요, 관객에게는 그다지 큰 어필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험프리 보가트가 뿜어내는 남성적인 매력에 가린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샤네시라는 역할이 사건의 열쇠가 되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더 활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말타의 매>가 쭉빵걸의 출연 없이 많은 남성관객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이야기의 우수성을 잘 살린 감독의 연출력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샘 스페이드가 보여준 휘둘리지 않는 지좃있는 남성상 덕분이 아닐까 함다. 왜냐, 샘은 결코 샤네시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녀의 목적달성을 위한 희생양이 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샘 스페이드는 역으로 그뇨을 이용해 재미도 좀 보고, 약도 올려서 범인도 잡고 낭중엔 그뇨마저 죄 값을 치르게 함다. 뇨자관객들 입장에서는 되려 샘 스페이드가 악녀 아니 악남으로 보이시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남성전용장르인 셈입니다. 뇬들에게 크게 한 번 등쳐먹힌 넘들이라면 샘이 샤네트에게 단죄를 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무척이나 통쾌했을 것임다. 저도 얼마전에 사랑인줄 알았다 쪼매 뜯겼더랬습니다. 은실이 너 다음에 나한테 걸리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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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말타의 매>는 작년에 20세기 걸작 꼴렉션이라는 명찰표를 달고 국내에 처음으로 출시가 되었슴다. 그럼 <말타의 매> 즐람하시고 다음 시간에는수정주의 하드보일드(수정주의 느와르아님다)라고 명명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과 함께 여러분과의 두 번째 잠자리를 가져보도록 하겠슴다. 그럼 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