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은 김윤석과 강동원의 캐스팅으로 제작 단계부터 대중의 화제를 모았다. 실은 제작 훨씬 전부터 충무로 관계자들이 영화화하고 싶어 하던 작품이었다. <검은 사제들>은 원작이 있다. <검은 사제들>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이 단편으로 만들었던 <12번째 보조사제>(2014)다. 그러니까, <검은 사제들>은 <12번째 보조사제>의 장편 버전인 셈이다.
이야기의 줄기는 같다. 김신부(김윤석)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영신(박소담)의 몸에 똬리를 튼 악마를 내쫓으려 퇴마의식을 계획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조사제가 필요한데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최부제(강동원)다. 하지만 악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김신부와 최부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신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퇴마의식이 처음인 최부제의 약한 마음을 공략해 그 힘을 더 키워만 간다.
<검은 사제들>은 <12번째 보조사제>를 그대로 취하되 악마가 어떻게 여고생인 영신의 몸을 숙주로 삼았는지 그 과정에 새로운 사연을 더했다. 어린 소녀의 몸에 든 악마를 퇴치하는 엑소시즘의 소재 덕에 <검은 사제들>은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1973)를 연상시킨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엑소시스트>의 자장 안에서 <검은 사제들>을 이해하려 들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와 발현한 토양이 다르다. <엑소시스트>는 이유 없이 악령이 든 소녀와 신부와의 대결이 중심에 놓였다.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패스트푸드점 창가 너머, 어두운 곳에 신부님 한 분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순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신부님은 왜 그렇게 초조했을까? 악마 때문일 터. 악은 몰상식과 비도덕과 비정상이 판을 치는 혼란한 틈에 기생하고 위력을 키워가기 마련이다. <검은 사제들>에서 최부제에 앞서 김신부를 도왔던 보조사제는 10명이 넘었다. 단편을 단서 삼는다면 최부제는 아마 ‘12번째 보조사제’일 것이다. 최부제에 앞선 10여 명의 보조사제들은 악마의 위력을 견디다 못해 김신부의 청을 뿌리치고 도망쳐 숨어 살고 있다.
그만큼 영신의 몸에 든 악마의 힘은 대단하다. 악마는 인간이 품고 있는 두려움을 공략해 그 힘을 키워 간다. <검은 사제들>은 최부제가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트라우마에 주목한다. 최부제의 여동생을 죽음으로 몬 건 검은 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해자의 정체가 아니다. 피붙이를 잃어 본 비극의 기억이다. 영신이 여고생이라는 설정도 그냥 나온 건 아닐 테다.
지금 한국 사회는 여고생과 같은 청춘을 볼모로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병들어 있다. 한국의 청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입시 지옥을 간신히 통과하면 대학교 등록금에, 취업 전쟁에 내몰려 영혼과 육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내몰린다. 국가가, 어른이 개인을, 학생을 전혀 돌보지 않는 한국 사회는 악이 창궐하기 좋은 환경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악마로부터 영신을 구하기 위한 김신부와 최부제의 활동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깎아 버린다며 내부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은밀히 진행된다. 리더는 사라지고 시스템은 침몰하는 상태에서 무명의 개인들이 살려달라 애원하는 청춘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광경은 익숙하다. <검은 사제들>을 일러 ‘세월호 시대의 영화’라고 명명하고 싶은 이유다.
시사저널
(2015.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