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The Handmaiden)

mademoigel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의 공식 시사가 끝난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전했다. “칸 영화제에 갔다가 상도 못 받고 고배만 마시고 빈손으로 돌아온 박찬욱입니다” <아가씨>의 칸영화제 본상 수상에 기대를 모았던 기자들을 향한 재치 있는 사과의 뉘앙스였다. 한편으로 <아가씨>가 칸영화제 수상용이 아닌 많은 관객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상업영화라는 우회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왜 1930년대인가?

<아가씨>는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3) 이후 3년, 국내 연출작 <박쥐>(2009) 이후 7년 만의 신작이었던 까닭이다. 또 하나. 영국 출신의 새라 워터스가 쓴 <핑거스미스>가 원작임이 알려지면서 국내 팬은 물론 해외 팬들까지 이목을 집중했다. 18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인 원작을 과연 어떻게 한국의 토양 위로 옮길 것인가? 박찬욱 감독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소매치기로 살아가던 숙희(김태리)에게 후지와라(하정우) 백작은 솔깃한 제안을 한다. 엄마에게 거액을 상속받은 여인 히데코(김민희)의 재산을 가로채자는 것. 히데코는 현재 거대한 저택에서 삼촌 코우즈키(조진웅)와 함께 살고 있다. 말이 함께 사는 것이지 거의 잡혀 사는 꼴이다. 그런 히데코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보통 방법으로는 힘들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숙희는 하녀로 신분 위장하여 히데코에게 접근한다. 히데코의 수발을 들면서 기회가 있을 때면 남녀 관계에는 숙맥인 그녀에게 사랑에 대해 알려준다. 결국에는 히데코가 백작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결혼까지 하게 하여 재산을 빼앗으려는 속셈이다. 근데 문제가 생긴다. 히데코의 목욕을 돕던 중 숙희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생긴다. 그건 히데코도 마찬가지. 이들은 후지와라와 코우즈키의 눈길을 피해 사랑을 나눈다.

1930년대 배경이 중요한 이유는 <아가씨>의 정체성과 관계있다. 영국 소설과 한국 영화의 결합인 것처럼 일제 강점기, 즉 경성시대는 온갖 것이 혼재한 시대였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경성에는 우리 고유문화에 왜색이 더해졌다. 시대의 특성상 근대 문물과 신문물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힘겨루기가 팽팽하던 때였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충돌했고 신분관계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며 혼란을 부추겼다. 그러다 보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거짓과 술수가 판치기 좋은 환경이었다.

숙희와 히데코와 후지와라와 코우즈키가 기묘하게 얽힌 관계의 배경과 그렇게 닮아 있을 수 없다. 한국 땅에서 코우즈키와 같은 일본인이 지배자 노릇을 하고 ‘하녀’ 신세가 된 조선인 숙희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히데코와의 사랑을 꿈꾼다. 백작이라 자신을 소개하지만, 신분이 불분명한 후지와라는 자신보다 약한 숙희와 히데코를 장기 말 삼아 신세 좀 고쳐볼 생각에 꿈에 부푼 상태다. 속이지 않으면 속을 수밖에 없는 폭풍전야의 상황. 후지와라 백작 왈, “우리 동네에서 순진한 건 불법이거든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짜’ 감정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예사롭지 않다. 숙희는 계약에 따라 히데코를 백작과 맺어주려 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 행여 히데코가 백작을 사랑한다면? “가엾고도 가엾고나. 가짜에 맘을 뺏기다니” 백작에게 맘이 없는 히데코는 그런 후지와라에게 자신을 밀어붙이는 숙희가 원망스럽다. “내가 꼭 그분하고 결혼하면 좋겠어?”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은 금기에 가깝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결합이고 귀족 아가씨와 하녀의 합침이며 무엇보다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과연 숙희와 히데코의 선택은?

어떻게 파격적인가?

박찬욱 영화 미학의 뿌리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이미지는 자극적이고 파격적이며 외설스럽다. 그런데도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건 이미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다. 박찬욱은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함께 하는 숙희 역에 캐스팅 공고를 내면서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강도 높은 노출 연기. 수위는 타협 불가’ 그러니까, 극 중 히데코와 숙희가 펼치는 최고 수위의 동성애 장면은 후지와라와 코우즈키로 대변되는 남성적인 보수 지배 계층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자 탈출이다.

이들이 펼치는 첫 번째 섹스는 욕조에서다. 사탕을 입에 물고 핥으며 달콤하게 샤워를 하던 히데코는 뾰족이 자란 사랑니 때문에 통증을 느낀다. 이에 숙희는 엄지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히데코의 입에 ‘넣었다 뺐다’ 문제의 이를 갈아댄다. 이때 이들의 표정이 가관이다. 동공은 떨리고 입술은 파르르 흡사 섹스를 나누는 듯하다. 그런 의도일 테다. 핵심은 이들의 행동이 우회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골무를 낀 숙희의 엄지손가락은 남성의 성기, 히데코의 입은 여성의 성기. 그렇다면 이들은 여전히 남성적인 사고와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히데코와 코우즈키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가둬두고 키운 건 (그녀의 재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직업 때문이다. 코우즈키는 외설서를 제작, 이에 관심 있는 남성들을 모아 히데코가 실제처럼 읽도록 강제해 판매율을 높여 왔다. 말하자면, 코우즈키에게 히데코는 돈벌이다. 히데코가 코우즈키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일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후지와라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숙희와 함께 히데코가 남성의 지배를 떨쳐내는 길은 이 저택을 떠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이들의 섹스도 갈수록 대담해진다. 욕조에서의 섹스와 다르게 그다음 몸을 섞는 장면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남성’적인 행위 없이 여성이 나눌 수 있는 체위로 서로를 향한 욕망을 공유한다. 기모노를 풀어헤치고, 하녀 복을 벗어던진 히데코와 숙희에게는 국적도, 신분도, 이들을 옭아매는 모든 속박과 지배에 상관없이 오로지 자유를 열망하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 뿐이다. 더 나아가 도구까지 활용해 몸을 섞는다 한들 최고 수위 노출 장면의 함의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놀랍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박찬욱의 영화 또한 그렇다.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최민식)와 미도(강혜정)의 관계의 파격, <박쥐>(2009)의 뱀파이어 신부(송강호)와 친구의 아내(김옥빈) 간의 금기를 넘어선 정사 등 파격과 금기는 더는 낯선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익숙해진 표현의 탈출구로 삼은 것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다. <아가씨>는 박찬욱의 첫 번째 시대극이다. 낯선 시대 속에서도 매혹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현혹하는 박찬욱의 주제 의식은 변함이 없다. <아가씨>는 확실히 상업영화다.

 

시사저널
(2016.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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