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거 스플래쉬>(The Bigger 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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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는 영화의 축제다. 곧 스타들의 향연이라는 의미다. 20회를 맞은 이번 부산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굵직굵직한 별들이 많았다. <비거 스플래쉬>의 틸다 스윈튼, <저수지의 개들>의 하비 케이틀,  <파리, 텍사스>의 나스타샤 킨스키, <유 콜 잇 러브>의 소피 마르소 등 이들이 떴다 하면 부산은 반짝이는 별을 보기 위한 인파들로 들썩였다.

부산 관객과 통하다

그중에서도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틸다 스윈튼이었다. 단 하루의 방문이었지만, 그녀의 명성답게 숱한 이슈를 만들었다. 틸다 스윈튼은 <비거 스플래쉬>를 연출한 이탈리아 출신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함께 공식 기자 회견은 물론 영화 상영 후 이어지는 GV까지 참여하며 빡빡한 하루 일정을 소화했다.

그녀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 부산영화제는 2009년 역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함께했던 <아이 엠 러브> 이후 두 번째다. 이번 내한은 앞선 두 차례에 비해 한국 관객들이 그녀에게 느끼는 친밀도의 온도감이 상당히 올라갔다는 인상이었다. 그것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 <설국열차>를 통해 국내 관객에게 더욱 가까운 배우가 되었기 때문일 터.

안 그래도, <비거 스플래쉬>의 첫 번째 공식 상영에는 봉준호 감독이 직접 상영관을 찾았다. 영화 관람은 물론 이후 벌어진 30분여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자리를 지킬 만큼 틸다 스윈튼을 향한 애정이 대단했다. 이에 대한 틸다 스윈튼의 화답,  “한국 스탭들과 함께 일한 건 영광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봉준호는 최근 가족 같은 동료가 된 관계다.”

이는 그저 예의상 멘트가 아니었다.  <비거 스플래쉬>의 아시안 프리미어가 있던 다음 날, 모두를 놀라게 할 소식이 한 해외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수물로 알려진 <옥자>에 틸다 스윈튼이 다시 한 번 참여한다는 것. “제작 초기 단계다. 굉장히 즐겁게 준비 중이다.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것 말고는 전할 수 있는 얘기가 거의 없다”고 그녀가 말했지만, 틸다 스윈튼을 포함해 그 외의 출연진들, 제이크 질렌할, 폴 다노, 빌 나히 등 초특급 배우의 면면은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노출한 것만큼이나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틸다 스윈튼과 봉준호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국적과 상관없이 예술이 어떻게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지 감탄하게 된다. 이번 부산영화제를 통해 감독과 배우의 사이를 넘어 가족 같은 이들의 관계를 목격한 관객이 느끼는바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소통이 부재한 시대라고 여기저기서 곡소리를 내고 있지만, 예술은, 영화는 이렇게 안팎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관객의 공감대를 끌어낸다.

그래서 틸다 스윈튼은 배우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깝다.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비거 스플래쉬>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전설적인 록스타 마리안이다. 직업의 성격과는 영 딴판으로 그녀는 현재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목에 염증이 생겨 치료를 받는 중이라 표정과 몸짓으로 주변 사람과 소통한다.

<비거 스플래쉬>로 예술하다 

사실 <비거 스플래쉬>는 원작이 있다. 1969년 자크 드레가 연출하고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출연했던 프랑스 영화 <수영장>이다. <수영장>에서도 주인공은 마리안이다. 하지만 <비거 스플래쉬>와 다르게 <수영장>의 마리안은 록스타도 아니고 무엇보다 목 상태도 좋아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원작 영화와의 차별을 위해 의도적으로 마리안 캐릭터에 변화를 준 것인가? 아니다. 이는 오로지 틸다 스윈튼의 결정이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마리안 역할에 가장 먼저 염두에 뒀던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었다. 케이트 블란쳇이 스케줄 문제로 <비거 스플래쉬>에 합류할 수 없게 되자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틸다 스윈튼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틸다는 자신이 1순위의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이 엠 러브>의 인연에 아랑곳없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녀의 단호한 결심에 변화를 가져온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단절된 관계와 벽에 부딪힌 소통의 한계를 경험한 틸다 스윈튼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중화해 줄 영화가, 캐릭터가 필요했다. 마침 마리안은 자연인으로서 경험했던 한계와 이를 예술로 승화할 좋은 매개체가 되어줄 것 같았다.

틸다 스윈튼은 엄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반영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한 가지 조건을 들어 마리안 역할을 수락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인물로 마리안을 설정해달라는 것. <아이 엠 러브>에서도 그랬듯이 인간의 욕망이 초래하는 복잡한 관계와 비극을 테마로 삼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틸다 스윈튼의 제안은 혹할만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거 스플래쉬>는 이상향에 가까운 휴양지에서 예기치 못한 이의 방문으로 관계가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그리스 비극 같은 영화다. 마리안은 남편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과 함께 시칠리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손님이 방문하니, 마리아의 전 남자 친구 해리(랄프 파인즈)와 그의 딸이다. 반가운 기색도 잠시 이들 넷 사이에는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해리는 폴의 부재를 틈타 마리안에게 다시 합칠 것을 종용하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마리안은 제대로 거절을 하지 못한다. 그 시간, 마리안을 질투하는 해리의 딸을 따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온 폴은 그녀의 유혹 앞에서 마리안에게 비밀로 해야 할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망과 질투의 감정이 넷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며 관계를 수렁으로 몰아간다.

소용돌이치는 온갖 감정 앞에서 길을 잃곤 하는 관계를 위해 틸다 스윈튼이 떠올린 말 하지 못하는 록커라는 설정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처럼 어둡고 무거운 역할을 주로 맡아 왔던 랄프 파인즈가 기존 이미지를 벗고 <비거 스플래쉬>에서 수다스러운 캐릭터 해리를 연기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렇듯, 각각의 개인이 처한 상황은 천차만별이라 소통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예술은 이럴 때 더욱 가치를 발현한다. 잘 알려졌듯, 틸다 스윈튼은 영국 런던 출신이다. <비거 스플래쉬>에서 마리안의 남편 폴로 출연한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러스트 앤 본>)는 벨기에에서 나고 자랐다. 또한, 이 영화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성장했다. 극 중 인물들과 다르게 <비거 스플래쉬>의 감독과 배우는 각기 다른 국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로써 소통을 이뤘다. <비거 스플래쉬>가 <아이 엠 러브>처럼 꽤 뛰어난 작품이란 사실은 이들의 소통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틸다 스윈튼이 있다.

 

시사저널
(201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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