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Vsadnik po imeni Smert)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비에트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카렌 샤흐나자로프는 한동안 코미디와 뮤지컬 영화의 동격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소비에트 연방이 ‘글라스노스트’(Glasnost)로 지칭되는 개방 정책을 펴면서 샤흐나자로프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처럼 소비에트 삶의 정통성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던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Boris Viktorovich Savinkov)가 쓴 <창백한 말>(The Pale Horse)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제정 러시아 시절 지하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혁명당 리더로서 테러를 주도했던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다. 그중 1905년에 벌어졌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을 다루는데 영화 역시 이를 그대로 다룬다. 극중 테러리스트 집단의 리더로 등장하는 조지(안드레이 파닌)는 원작자의 분신인 셈인데 그는 자신들의 활동이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 예상했다. 

문제는 멤버들 각자가 다양한 동기로 활동에 참여한 까닭에 테러 방식에 이견을 보인다는 것. 가령, 농부인 표도르는 대공뿐 아니라 부르주아도 제거해야한다는 강경주의자인 반면 바냐는 대공이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암살을 거절하는 순진한 학생이다. 이처럼 테러에 대한 상반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원칙에 입각해 활동을 벌이다보니 대공 암살은 몇 번의 실패를 맞게 된다. 그러면서 테러에 대한 조지의 생각은 애초 목적과 달리 암살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그의 삶은 철저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의 목적은 암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암살에 임하는 멤버들의 내적 모순 상태를 드러내며 ‘테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영화는 중반까지 멤버들의 입장 차를 드러낼 목적으로 장면(scene) 위주로 진행하다가 암살이 본격화되면서 숏(shot) 위주로 전환해 이들의 심적 반응에 집중한다. 즉, 이상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테러리즘의 애매모호한 속성을 묘사하는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의 능력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고의 성취다. (다만 동일한 인물이 몇 번의 암살을 시도함에도 단 한 번의 추적이나 의심을 받지 않는 등 상황 묘사의 허술함이 종종 노출되기도 한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고민의 실체는 이것이다. 극중 대사를 빌리면, “테러리즘은 개인이 국가에 맞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 희생이 따르는 테러는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영화는 조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극 말미 죽은 자의 목소리란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선셋대로>의 그것처럼 회한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 당시를 전후해 정치시대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현재와도 연관성을 갖는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현재 러시아가 처한 불안한 정국은 조지를 비롯한 멤버들이 원한 행복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 다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관객들에게 이들이 처했던 상황에 동정심을 가지길 바라는 듯 보인다. 행복에는 어떠한 죄악도, 기만도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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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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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3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