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The King of Pi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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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부산영화제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근원을 찾아가는 상영작이 두드러졌다. 증오를 먹고 자란 모자간의 관계가 콜럼바인 총기 사건과 같은 비극을 야기하는 린 램지의 <어바웃 케빈>(2011), 대지진 이후 여전히 기성세대의 욕심으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청년 세대의 갈등과 좌절을 묘사하는 소노 시온의 <두더지>(2012) 등이 대표적이라 할만하다. 또한 학창시절에 경험한 폭력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도 그중 한 편인데 주요 상 6개 부문 중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무비꼴라쥬상, 넷팩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까지 무려 3개 부문을 수상하며 ‘부산영화제의 왕’으로 등극했다.

<돼지의 왕>의 수상이 좀 더 의미를 갖는 것은 부산영화제 사상 ‘애니메이션’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다. 안 그래도 <돼지의 왕>은 부산 상영 이전부터 한국 최초의 ‘잔혹’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 때문에 눈길을 끌어왔다. 이미 학원폭력과 동물살해 장면이 포함된 1차 예고편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심의 반려를 당했을 정도. 수위가 어떻기에? 애니메이션 묘사가 잔인하면 얼마나 잔인하겠는가. 게다가 연상호가 주도한 작화는 선이 정교하기보다는 굵은 쪽에 가깝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폭력 구조가 빚은 폐해를 학교라는 공간에 압축한 이야기가 더 모질고 숨을 옥죄어 오는 것이다.

소설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서전 대필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종석(양익준 목소리 출연)은 중학교 동창 경민(오정세)을 만나 생각지도 않은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나약한 경민은 힘센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처지였고, 종석은 집이 넉넉하지 못한 까닭에 학교생활이 고역인 형편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위안 삼으려 했지만 소위 잘나가는 이들의 계속된 괴롭힘으로 최악을 맞는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철이(김혜나)가 보호해주며 학교생활에 숨통이 트이지만 이들 셋 사이에는 또 다른 폭력이 야기된다. 그리고 그 폭력의 기억이 15년 뒤에 다시금 찾아와 종석과 경민을 괴롭히는 것이다.   

종석과 경민이 공유하는 기억 속의 학교는 부와 폭력의 재화(財貨)에 맞춰 철저히 분리된 계급의 전시장이다. 그럼 <돼지의 왕>은 계급을 학습하도록 학생들을 방치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애니메이션인가? 연상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놓인, 그러니까 이 영화가 ‘돼지’로 칭하는 종석과 경민 같은 무리들이 지위 상승을 이뤄보겠다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풍경 속에서 이 사회의 고착화된 비극을 갈무리해낸다. 이것이 극 중의 특수한 상황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말하기를 꺼려할 뿐이지 이미 경험하고 학습한 이 사회의 엄연한 생존규칙이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에 따르면, 학창시절부터 생존규칙을 뼛속부터 체화시키는 이 사회의 계급 시스템은 균열하지 않는 견고한 어떤 것이다. 다만 거기서 떨어진 코딱지만 한 콩고물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돼지들은 서로에게 계급적 동지가 아니라 그냥 절벽에서 떨어뜨려야 할 경쟁 상대이고 종석과 경민처럼 좀 더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에 불과하다. 하여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학교 내 계급구조의 공고한 틈을 비집고 튀어나와 똑같은 방식의 폭력을 휘두르는 철이 같은 이는 ‘돼지의 왕’으로 불리며 우상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 내에는 또 하나의 약육강식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의 생리 또한 상위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먹이사슬의 형태를 이룬다. 이 부분이 <돼지의 왕>의 핵심이랄 수 있는데 철이 또한 끝까지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경우 종석 혹은 경민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비극이 놓여 있다. 이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계급 구조에 대한 분노를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에게로 폭발시키는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란 힘들다. <돼지의 왕>이 묘사하는 바라면 우리 사회는 지옥 그 자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실 연상호는 그의 이름을 알린 중편 <지옥: 두 개의 삶>(2003) 때부터 이 세상을 지옥으로 묘사해왔다. 첫 번째 장편 <돼지의 왕>을 완성하기 위해 연상호는 5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강산이 반 정도 변하는 시간이었지만 이 사회의 계급 구조는 개선의 여지는커녕 좀 더 견고해진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돼지우리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는 상황이고 돼지끼리의 갈등은 더욱 빈번해졌으며 이들을 지배하고 관망하는 개들의 횡포는 극에 달한 상황이다. <돼지의 왕>의 잔인성은 특정장면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치부를 대놓고 응시하는 이 애니메이션의 시선에 있다. <돼지의 왕>은 연상호가 우리 시대의 돼지들에게 보내는 애가(哀歌)인 것이다.
 

KBS 저널
2011년 11월호

<네 번>(Le Quattro Vo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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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영화 팬들에게 <네 번>은 전혀 생소한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의 유로파 시네마 레이블(Europa Cinemas Label) 상을 비롯해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바로 한국의 이광모 감독이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2010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힌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두 번째 연출작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기프트 Il Dino>(2003)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에 놓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진 칼라브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통해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면서 날로 황폐해지는 마을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호평을 받은 것이다. 이때 프라마르티노 감독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칼라브리아를 돌아다니면서 비보 발렌티아 지방의 목동과 숯장수를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품이 바로 <네 번>이다.

<네 번>은 제목만 가지고는 이야기나 성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부제인 ‘늙은 목동, 아기 염소, 전나무와 숯’이 좀 더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네 번>은 늙은 목동, 아기 염소, 전나무, 숯이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염소를 관리하는 늙은 목동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와 동시에 염소가 태어난다. 이 아기 염소는 무리를 빠져나와 길을 헤매던 중 전나무 아래서 동사하고 만다. 아기 염소의 시체를 자양분 삼은 전나무는 무성하게 자라 사람들의 눈에 띄고 곧 벌목된다. 그리고 벌목된 전나무는 조각조각 해체되어 숯이 되고 사람들은 이 숯을 피워 따뜻하게 겨울을 난다.   

별스러운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네 번>은 탄생과 죽음이 연계된 자연 순환의 이치에 관한 영화가 된다. 늙은 목동은 죽고 없지만 살아생전 보살폈던 염소가 새끼를 낳아 인간과 동물 간의 삶과 죽음의 선이 연결되고, 동사한 아기 염소는 전나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동물과 식물간의 조화가 이뤄지며, 벌목업자에게 팔려간 전나무가 오랜 시간 타서 숯으로 재탄생되면 식물과 광물 간에도 생과 사는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독은 “피타고라스는 오리엔탈 철학에 영향을 받아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칼라브리아는 이 윤회 사상에 깊게 물들었다. 그곳에서 자연의 질서는 상하관계가 아니다. 거기서는 모든 존재가 영혼이 있다.”고 말했다.

하여 <네 번>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순환을 이루는 자연의 리듬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음미한다. 그런 감독의 태도에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가져야 할 겸손함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 아닌 자연을 이루는 한 요소로 바라보는 겸양의 자세가 배어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인간을 주인공이 아닌 자연의 한 일부로 묘사하기 위해 고민했다. 인간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균형을 잡고 싶었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말처럼 <네 번>은 자연파괴가 일상화된 지금 더욱 더 가치 있는 영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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