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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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로 입사한 지 오늘로 3주차가 됩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생소한 일이다보니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일 긴장한 채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처럼 영화를 고르고 글을 쓰는 건 맞지만 이곳에서는 필름도 직접 수급해야 하고 당직도 하면서 표도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일들이 많네요. 그래도 마감하느라 밤새는 게 예사인 잡지 일에 비하면 출퇴근 시간이 고정적이라 시간 활용하기가 좋아 한편으로 맘은 편합니다. 사무실이 상영관 바로 옆이라 고민 없이 바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도 좋고요. 그래서 처음 성과물을 내는 것이 바로 12월 14일부터 시작하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Hommage Claude Chabrol’입니다.

제가 들어가기 전부터 기획된 것인데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니, 클로드 샤브롤 사망(2010년 9월 12일) 후 추모 영화제를 하는 곳이 많을 것 같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해요. 오퍼만큼은 넣어보자는 생각에 프랑스 쪽에 의뢰를 해보니 올해까지 필름 대여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클로드 샤브롤 이 양반이 평생에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저작권 관리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다 보니 필름 수급에 한계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는 모두 8편입니다. 목록은 <미남 세르쥬>(1958) <사촌들>(1959) 초기 두 작품과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코믹한 TV쇼 사회자로 등장하는 <마스크>(1987)를 제외하면 <지옥>(1994) <의식>(1995) <거짓말의 한가운데>(1999) <초콜릿 고마워>(2000) <악의 꽃>(2002)까지, 1990년대 이후의 작품이 주를 이룹니다. 샤브롤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1960년대의 영화들, 가령 <도살자>(1969) <야수를 죽여야 한다>(1969) <부정한 여인>(1969)과 같은 작품을 상영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아쉽네요.

개인적으로는 <둘로 잘린 소녀>(2007)를 봤으면 했는데 이 또한 수급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한국에는 잘 안 알려진 작품입니다. 한국의 영화 전문가들이 주로 1960년대 작품과 <의식>을 전후한 1990년 중반 몇몇 작품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둘로 잘린 소녀>를 중심으로 샤브롤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한창이라고 하네요. 대신 제가 이번 영화제를 통해 가장 기대하는 작품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원래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1964년에 시도했던 프로젝트입니다. 클루조 영화 경력에서 가장 큰 예산이 투입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야심이 가장 크게 반영됐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클루조의 <지옥>은 영화 역사상 가장 저주받은 미완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투자사와의 마찰로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주인공 여배우가 교체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촬영 3주 후 클루조가 심근경색을 일으키면서 끝내 촬영이 중단되고 말았죠. 그리고 30년이 지나서야 클루조의 미망인이 저작권을 넘기면서 샤브롤의 <지옥>이 탄생하게 되었던 겁니다.

전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지옥>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히치콕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정도로 미스터리 연출에 일가견을 보였던 클루조답게 의처증에 시달리는 부인의 심리를 인공적인 배경과 다양한 색채의 조명으로 대담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더랬습니다. 과연 클루조가 이루려던 <지옥>을 샤브롤이 어떤 버전으로 완성했을지 궁금하네요. 프랑스 제작사로부터 스크리닝 DVD로 받기는 했지만 아직은 보지 않았고요. ‘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가 열리면 볼 생각입니다. 극장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덴데 굳이 작은 화면으로 볼 생각은 안 드네요. 이번 ‘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를 통해 샤브롤의 진가를 모두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죽음 이후 찾아온 허기를 다소나마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을 기약해야죠. 보다 큰 규모로 샤브롤 영화제를 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영화뿐만 아니라 그가 쓴 연구서도 함께 볼 수 있으면 해요.

사실 샤브롤은 소르본대학에서 약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파리의 시네클럽을 통해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과 어울리면서 이후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유명합니다. <미남 세르쥬>를 발표하기 전까지 활발한 평론 활동을 펼쳤던 그는 에릭 로메르와 공저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누명 쓴 사나이>(1956)를 분석한 연구서 <히치콕>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샤브롤도 그렇고 클루조도 모두 히치콕을 대입해야 흥미로운 설명이 이뤄지네요.) 저는 샤브롤이 쓴 글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어서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만 그 때문에 샤브롤의 영화가 과소평가됐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샤브롤은 ‘히치콕주의자’로 유명합니다. 히치콕 영화의 자장 안에서 샤브롤의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그의 연출의 면모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거죠. 샤브롤의 영화를 본 분들이면 잘 아시겠지만, 히치콕의 영화를 단순 모방한 것은 아닙니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에 대해서도 “뉴웨이브(누벨바그의 영어식 표현)는 없다. 영화의 바다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영화 세계의 창조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감독이 바로 샤브롤이었습니다. 히치콕이 그랬듯 살인의 이면에 감춰진 죄의식과 강박증 같은 인간의 말라비틀어진 감정에 주목하되 프랑스적이라고 해도 좋을 배경과 감성을 섞어 샤브롤만의 미스터리 스릴러 문법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이래도 안 보실 겁니까. (반 협박 ㅋㅋ) 12월 14일부터 시작입니다. 개막작은 <사촌들>이고요. 그럼 ‘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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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
추모 영화제
(2010.12.14~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