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A Torinói l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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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 감독의 은퇴작으로 알려진다.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이미 작품 준비 전부터 계획한 은퇴라는 점에서 <토리노의 말>은 벨라 타르의 세계관이 응집된 영화라고 할만하다. <사탄탱고>(199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000) <런던에서 온 사나이>(2007) 등 벨라 타르의 전작들이 그렇듯 <토리노의 말> 역시 프레드 켈레멘 촬영감독의 흑백촬영과 롱테이크, 미할리 비그 음악감독의 무한 반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말까지 포함해 총 4명이라는 간략한 인물 구성으로 긴 시간과 느림의 미학을 통해 소멸하는 인간의 생을 묘사한다.

인간의 삶이란 게 그렇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니체는 이를 ‘영원회귀’라고 했다. 실제로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일화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극 초반에 삽입한다. 어느 마부의 혹독한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흐느끼던 니체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긴 후 10여 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숨을 거두었다는 것. 곧이어 영화는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마부 부녀의 단조로운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잠에서 깬 부녀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술 한 잔씩을 한 후 우물에서 떠온 물로 익힌 감자를 한 알씩 먹고 마구의 말을 돌본다. 이게 일상의 전부다.  

다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차이를 생성하는 끊임없는 반복임을 상기한다면 마부 부녀의 되풀이되는 생활에서도 미묘하게 변화하는 지점을 감지할 수 있다. 카메라가 매번 구도를 달리하며 이들의 삶을 비춰 미세하게 균열하는 지점을 만들어내면 그 속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 순간 우물가의 물이 말라버리고 등장의 불이 완전히 꺼지면서 마부 부녀의 삶은 점차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집 바깥의 폭풍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데 이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는 나약한 인간의 생사존망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요람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무덤으로 회귀하는 운명론적 시간을 품은 존재다. 무와 무의 영원 사이에서 유()를 차지하는 찰나의 삶은 살기위해 버텨야 하는 시간들의 연속이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태연하게 앉아 바라보는 극 중 인물의 숏은 이를 특징적으로 압축한다.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부 부녀가 끝내 집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삶을 관망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은 죽는 그날까지 묵묵히 살아가는 것밖에는 없다. 파멸과 죽음을 향한 니체의 영원회귀는 곧 인간 운명의 시간인 셈이다.  

다시 말해, 마부 부녀가 선 자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들은 곧 죽을 운명이지만 이는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마부 부녀의 사라져 없어지는 삶을 단 6일을 통해 보여주는 건 그래서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 말하길, 신은 여섯 번째 날에 자신의 형상을 모방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극 중 마부 부녀가 거친 바람에 삶이 풍화되어 끝내 점으로 회귀하는 날이 바로 여섯 번째 날이다. 벨라 타르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에 검은 무지 화면을 몇 초간 보여주지만 영화의 시작 역시도 이와 같았다. 마부 부녀가 죽음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것처럼 <토리노의 말>은 그럼으로써 니체의 영원회귀를 형상화한다. 벨라 타르도 마찬가지다. 은퇴를 언급했지만 그것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다. 삶이라는 방식을 통해 또 다른 영화, 또 다른 예술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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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56

<슬랩스틱 브라더스>(漫才ギャ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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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가와 히로시는 만담 듀오 ‘시나가와 소지’로 유명세를 떨치는 코미디언이다. 또한 자전적 소설 <드롭 Drop>(2009)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으며 이를 영화로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팔방미인 시나가와 히로시가 두 번째로 연출한 <슬랩스틱 브라더스> 또한 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이다.  

토비오(사토 류타)는 만담 파트너와 결별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로 감옥에 갇힌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깡패 류헤이(카미지 유스케)를 만나는데 대화 몇 마디를 나눠보니 만담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토비오의 만담 파트너 결성 제안에 류헤이는 흥미를 보이지만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다. 토비오는 전 파트너가 남긴 거액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고, 류헤이는 사이가 좋지 못한 상대방 깡패와의 대립으로 다시 폭력의 세계에 뛰어들기에 이른다.

만담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작품답게 <슬랩스틱 브라더스>는 매 장면 말이 홍수처럼 끊이지 않는다.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의 본질과는 다소 동 떨어진 모습이지만 만담에서 주가 되는 ‘말’, 즉 소통을 통해 파트너와 호흡하고 더 나아가 주변 인물들과 화합하는 모습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토비오와 류헤이가 서로 만나기 전 영화는 이들 각자가 속한 만담과 폭력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아마도 감독의 목적은 류헤이를 폭력적인 환경에서 끄집어내 만담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데 있는 것 같다. 다만 류헤이가 훌륭한 만담가로는 보이지 않지만 주먹이 아닌 말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의 힘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법이다.  


201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탈로그



<슈퍼 에이트> 괴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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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에이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발화되는 열차 전복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이 영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처럼 <슈퍼 에이트>의 괴수를 실은 ‘열차의 도착’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장르의 본격적인 출현을 예고한다. 지난해만 해도 <황당한 외계인: 폴>의 그렉 모톨라, <리얼 스틸>의 숀 레비 등 스필버그에게 영향받은 ‘스필버그 키드’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중 <슈퍼 에이트>의 J. J. 에이브람스는 <미지와의 조우>(1977)와 <E.T.>에 대한 오마주로 <슈퍼 에이트>를 제작, 연출함으로써 좀 더 직접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신화를 2010년대 버전으로 갈무리하는 것이다.

에이브람스 버전의 <미지와의 조우> 혹은 <E.T.>

특수 분장에 관심이 많은 조이(조엘 코트니)를 필두로 감독지망생 찰스(라일리 그리피스)와 마틴(가브리엘 비소), 캐리(라이언 리), 프레스턴(작 밀스), 그리고 앨리스(엘르 패닝)는 ‘슈퍼 8’ 카메라를 가지고 좀비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할 생각에 부풀어 있다. 각자 역할을 맡아 밤에 몰래 기차역에서 촬영을 하던 중 선로에 뛰어든 의문의 자동차로 인해 운송열차가 전복되는 사건을 목격한다. 그 사이에 정체불명의 괴수가 탈출하고 이후 마을에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전기를 발동시키는 전자부품들이 사라져 수시로 정전이 되는가 하면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지기까지 한다. 급기야 군인들이 마을을 들쑤시면서 괴수는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고 아이들은 더 큰 위험에 직면한다.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10대 초반 슈퍼 8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출품한 경험 말이다. (이는 당시 지역 신문에도 실렸는데 기사를 본 스필버그는 본인의 8mm 영화 편집을 어린 에이브람스에게 맡기기도 했다.) 영화로 사고하고 그러면서 성장한 에이브람스의 무비 키드로서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슈퍼 에이트>는 극 중에서 발생하는 재난현장이 곧 아이들이 찍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구조로 진행이 되는 까닭에 ‘<E.T.>와 <클로버필드>가 만났을 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온갖 시각적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을 슈퍼 8 카메라 렌즈에 고정시킨다면 그 속을 채우는 건 스필버그의 초기 외계인 장르의 영화다.

<미지와의 조우> <E.T.>는 외계인 장르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외계인이 이들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전혀 악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체된 미국 중산층 가족의 결합을 돕거나(<미지와의 조우>), 아빠가 부재한 아이들의 대체 부모 역할을 할(<E.T.>) 정도로 친근하게 묘사됐던 것이다. 다만 <슈퍼 에이트>는 조이와 친구들이 외계의 존재, 즉 괴수를 지구로부터 탈출시킨다는 내용 때문에 <미지와의 조우>보다는 <E.T.>의 정서에 더 가깝다. 영화가 시작되면 떠오르는 엠블린 엔터테인먼트의 이티를 태운 자전거가 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로고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때문에 영화의 배경 역시 <E.T.>가 개봉했던 1980년대를 전후하고 있는데, <슈퍼 에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 설정을 보인다. <E.T.>의 엘리엇, 마이클, 거티 남매에게 아버지가 부재했던 것과 달리 <슈퍼 에이트>의 조이는 끔찍한 사고로 엄마를 잃었으며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귀엽고 다소 어수룩해 보였던 외계인의 이미지는 에이브람스 버전에서는 끔찍하고 공격적인 괴수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차이는 영화 내적으로보다 외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E.T.>와 <슈퍼 에이트>가 각각 제작된  시기의 사회적 배경, 특히 가족의 위상과 관련해서 말이다. <E.T.>에서 스필버그는 외계인을 대체 아버지의 위치에 세워두고 해체된 엘리엇 가족의 봉합을 이야기했는데 <슈퍼 에이트>는 그 방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2010년대의 가족 신화

<슈퍼 에이트>가 종국에 내세우는 메시지는 사이가 벌어진 가족의 결합이다. <E.T.>와 비교해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다다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두 영화가 극 중 비슷한 시간대의 배경을 공유하지만 실제 개봉 시기는 무려 3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할 만하다. 그동안 스필버그는 가족의 봉합을 넘어 아버지의 지위 복권을 일관되게 전파해왔다. 그러면서 외계인을 바라보는 스필버그의 시선은 완전히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예컨대, <우주전쟁>(2005)의 세 발 달린 거대한 괴물체만 하더라도 무차별적 살육으로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던 레이(톰 크루즈)는 외부의 침입자에 맞서 끝까지 아이들을 보호, 흩어진 가족을 불러 모으며 강인한 아버지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니까 에이브람스는 변모한 스필버그의 외계인 장르 공식을 가지고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릴법한 <E.T.>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슈퍼 에이트>의 관건은 하나. 육체는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버지의 지위 복권은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조의 아빠 잭슨(카일 챈들러) 경관은 부인을 잃은 후 사면초가다. 혼자서는 도무지 조를 키울 능력이 떨어져 보인다.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방학동안에 조를 야구 캠프에 보내 잠시간 짐(?)을 덜어낼 생각까지 한다. 무엇보다 앨리스와 어울려 영화를 찍는 조를 도무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인의 죽음에 앨리스의 아빠 루이스(론 엘다드)가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잭슨이 아버지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뿐만 아니라 루이스와도 관계 개선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화해를 중간에서 주선해야 하는 것은 실은 엄마의 몫이다. 하지만 조와 앨리스의 엄마는 모두 부재한 상태다. (앨리스의 아빠 왈, “앨리스 너도 엄마처럼 날 떠나버려”) 대신 이들의 관계 개선에 결정적인 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괴수다. 다시 말해,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인데 얼핏 봐서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괴수가 엄마라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괴롭혀서다. 괴수는 공군기지 ‘에어리어 51’에 갇혀 이유 없이 생체 실험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며 인간에 대한 증오가 생겼고, 조의 엄마는 그녀의 죽음으로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의 분란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죽어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어떻게 해서든 조와 앨리스 집안에 생긴 오해를 풀어줘야지만 마음 편하게 이승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집안 사이의 화해를 이끌어낼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바로 괴수다. 괴수가 마을의 온갖 쇠붙이를 끌어 모아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려는 행위는 곧 조의 엄마가 그녀로 인해 생긴 현세의 오해를 해결한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려는 은유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여 에이브람스는 괴수의 특정행동들을 엄마의 죽음으로 발생한 오해를 해결하는 일종의 힌트처럼 작용시킨다. 무덤 옆 주차장 공간 지하에 은신처를 마련케 함으로써 괴수를 죽은 조의 엄마의 대리인으로 위치시키고, 괴수에 의해 납치된 앨리스를 이곳에 보관해 놓아 조가 오게끔 유도함으로써 어린 연인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며, 그동안 불화하던 조와 앨리스의 아빠가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게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서서히 무르익을 때 쯤 감질 맛나게 부분적으로 모습을 비추던 괴수는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크리처 디자이너 네빌 페이지에 따르면, 괴수의 눈은 극 중 조의 엄마의 눈에 가깝게 디자인했다고 전한다.) 그 과정은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 생긴 불화가 풀어지는 흐름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것은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정신적 성장과 맞물려 진행된다. 루이스가 공장에 결근한 탓에 대신 출근한 조의 엄마가 사고를 당한 것을 두고두고 원망하던 잭슨은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단순한 사고(“accident, just accident”)였다고 인정하며 화를 푸는 것이다. “우린 이해해. 살다 보면 나쁜 일도 생겨. 나쁜 일도 있지만 계속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위기에 빠진 조가 괴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던지는 말인데 조와 괴수의 관계뿐 아니라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서도 유효한 메시지다.

화해의 메시지


J. J. 에이브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의 지위 복권에 따른 가족 봉합을 좀 더 넒은 의미로 확장한다. 아버지의 성장 메타포는 받아들이되 가족 화해의 단위를 이웃으로까지 범위를 늘려 화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가족영화가 온전히 미국 내부의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에이브람스의 영화는 내부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읽힌다. <E.T.> 당시만 하더라도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 결속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외부의 문제가 내부에 잔존한 <슈퍼 에이트>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내부 결속을 넘어선 외부 세계와의 화해다. 화해는 집착을 버리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결국 이와 같은 소동이 벌어진 것은 지구에 불시착한 괴수가 자기 별로 돌아가려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군사적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됐다.  

그런 이기심은 대개 집착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지구를 떠나려는 괴수를 포획하려는 어느 군인의 집착, 부모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식으로까지 전가하려는 잭슨과 루이스의 집착, 그리고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조의 집착.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조의 엄마를 두고 벌어진 집착으로 빚어진 결과다. (그래서 <슈퍼 에이트>의 오프닝은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미장센으로 시작한다.) 조가 웬만해서는 품속에서 꺼내지 않는 엄마의 사진이 든 목걸이는 그런 집착을 상징하는 도구다. 아빠의 성장이 집착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했듯이 조의 성장 역시도 엄마와의 옛 기억을 놓을 때 이뤄진다. 우주선의 자성에 이끌려 날아가던 목걸이를 손에서 놓자 괴수는 비로소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되는데 마치 조가 붙들고 있던 엄마의 기억에 대한 집착을 저 멀리 떠나보내는 모습과 꼭 닮아있다. 새로운 시대는 그렇게 열리는 법이다. 스필버그 키드의 대표주자인 에이브람스가 스필버그의 유산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 새로운 스필버그 장르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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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자전거 탄 소년>(Le gamin au ve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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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 특유의 스타일이면서 한편으로 전작들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이 첨가되어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어른(특히 성인남자)의 방관 속에 위험에 처한 아이의 사연을 ‘포착하듯’ 담아낸다는 점에서 여전히 극사실적이지만 지금껏 사용한 적 없던 음악이 극 중에 삽입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연상시키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소 변모한 연출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9살 소년 시릴(토마 도레)은 보육원을 탈출하려고 애쓴다. 연락이 끊긴 아빠와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기 위해서다.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옛집을 가보니 아빠는 소식 하나 남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 뿐 아니라 소중히 아끼던 자전거도 팔았음을 알게 된다. 실의에 빠진 시릴은 동네 미용실 주인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의 도움으로 자전거를 다시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주말 위탁모로 맞이하면서 함께 아빠를 찾아 나서는데, 어렵게 만난 아빠는 시릴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 것을 요구한다.   

다르덴 형제에 따르면, “폭력 문제로 감옥에 갈 위기에 빠진 소년을 도와주는 한 여성”에 대한 영화를 오래 전부터 구상해왔다고 한다. 그전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버림받은 아이들끼리 미래를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을 유예해왔다. 예컨대 그 시간은 생활고에 시달려 아이를 판 <더 차일드>(2005)의 어린 부모 브루노와 소냐 커플이 어른으로 성장했을법한 나이다. 하지만 브루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 탄 소년>의 아빠는 <더 차일드>에 이어 다시 한 번 시릴을 버리는 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영화에서 아빠 역할은 모두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했다.) 

그렇게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는 지옥 같은 현실을 뒤바꿔줄 극적인 변화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에 비춰 <자전거 탄 소년>에 아빠 대신 도움을 주는 성인 여성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르덴 형제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이 영화에 대해 “현대의 동화”라는 표현을 썼다. 극(極)사실주의를 지향하는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과 동심을 바탕으로 하는 동화는 배치되는 개념에 가깝다. 그들의 말은 곧 희망이란 동화에서나 가능할법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동화의 형식을 차용한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밝은 영화일지 모르지만 인위성을 배제하면 비극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화 속 ‘자전거’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가 연출한 <자전거 도둑>(1948)의 현대판이라 할만하다.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 안토니오는 생계를 위해 자전거를 훔쳤다가 걸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지만 아들 브루노(<더 차일드>의 아빠와 이름이 동일한 것은 우연일까?)만은 유일하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전거 탄 소년>의 자전거는 부자 관계를 끊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자전거 도둑>과 <더 차일드>를 잇는 브루노라는 이름, <더 차일드>와 <자전거 탄 소년>을 연결하는 아빠 역할의 동일한 배우. 이는 결국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같은 사회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결속이 흐릿해지는 부자간의 비극적인 역학관계를 의미한다. 그 틈을 비집어 사만다가 화해를 주선하지만 앞으로 시릴이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게다가 곳곳에 도사린 위험 속에서 사만다가 어떻게 시릴을 키워낼지도 미지수다. 그러니까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해 밝다고 말하는 것은 시릴과 사만다를 향한 막연한 기대감의 반영일 뿐이지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아니다. 다르덴 형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희망을 동화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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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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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의 영어 제목은 ‘Miracle’이 아니라 ‘I Wish’다. 이 차이는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기적>이 일본 대지진과는 하등 상관없이 제작된 작품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쿠슈 철도청의 제안을 받은 영화다.) 하지만 1년 내내 화산재가 끊이지 않는 쿠슈의 작은 마을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사는 형제가 화산 폭발로 함께 살기를 희망한다는 내용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일본대지진과 연결 짓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고레에다의 영화는 균열된 가족의 현상을 직시하면서도 작은 틈이지만 미래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기적’에 대해 갈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꼬집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건 말건 그 가능성을 무조건 신뢰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제목처럼 기적은 언젠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일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단 하나의 ‘희망 wish’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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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2년 1월호






<아멘>(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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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리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몽>(2008) 이후 3년, 그동안 김기덕 감독은 그와 관련한 갖가지 소문(후배 감독과 프로듀서와의 불화, 폐인설 등)으로부터 벗어나 강원도 산속에 칩거하며 와신상담 속에 <아리랑>을 만들었다. 처절한 자기고백과 자기쇄신이 난무하는 이 영화 속에서 김기덕 감독은 데뷔 이래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그간의 힘겨웠던 과정을 셀프카메라 형식을 빌려 과감하게 드러낸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고, 힘겨워하고 냉소하고, 꾸짖고 울부짖고,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등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영역의 창작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아닌 게 아니라,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한 달 남짓 유럽에 머무는 동안 <아멘>을 완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김기덕 감독이라면 가능하다. 직접 개조하 DSLR 카메라 1대를 가지고 유일하게 캐스팅한 여배우와 함께 어떤 스태프도 없이 프랑스 파리와 아비뇽, 이탈리아 베니스를 돌며 영화를 만들었다. 김기덕 감독은 제작부터 각본과 연출, 촬영과 편집과 사운드, 그리고 극 중 연기까지, 무려 1인 7역을 담당한 것이다. <실제상황>(2000) 당시 영화의 러닝 타임과 동일하게 실시간 촬영했던 실험적인 연출을 감안해도 이번 경우는 꽤나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미니멀한 제작 환경답게 <아멘>의 이야기 역시 단출하다. 남자친구 이명수를 찾기 위해 무작정 유럽으로 쫓아온 한 여자(김예나)가 방독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 기이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굴곡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극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설정은 여자의 임신이다. 관계를 맺는 장면을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차 안에서 잠을 깬 여자의 팬티는 무릎까지 내려가 있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방독면 남자는 “아이를 낳아달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남긴다. (이후 그는 여자에게 “경찰에 자수해 벌을 받을게요”라는 메모를 남긴다.) 제목이 ‘아멘’인 점을 감안하면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연상케 하는 극 중 여자의 임신은 김기덕 감독이 그만의 방식으로 ‘어떤’ 구원을 의도하려는 바가 짙다. 실제로 방독면 남자는 드러난 눈 부분을 어둡게 처리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김기덕 감독이 연기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멘>을 <아리랑>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아멘>은 <아리랑>을 가지고 칸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다작의 감독으로 통했던 그를 기억한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3년의 공백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아우라(aura)가 감지된다. 오두막 ‘안’에 스스로 갇혀 고통스럽게 만든 <아리랑>으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발동시킨 창작욕은 일련의 행보 탓에 깊은 의미를 생성한다. 확실히 <아리랑>과 <아멘>은 짝패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결되는 지점이 다양하다. 그 중 <아리랑>의 내부 깊숙이에서 회오리치던 이야기 구조가 <아멘>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된다는 점은 주목해 볼 만하다. <아멘>은 유럽을 돌아다니는 여주인공의 특성상 로드무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장르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그 행위로써 장르적 의미를 갖는다.  

나는 글 중간에서 김기덕 감독이 <아멘>을 통해 찾는 것이 구원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진술했다. 어떤 구원일까. 김기덕 감독은 <아멘>의 작품의도에 대해 “연인은, 사랑은, 범죄란, 불행은, 행복은, 생명은, 죽음은, 믿음은, 영화는 무엇인가? (중략) 나만 알고 있는 내 생각이 가능하길 기도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아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김기덕 감독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아멘>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던 <아리랑>과 떨어뜨려 설명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리랑>의 내부에서 <아멘>의 외부를 지향하는 구조는 여자 주인공의 임신과 연결되면서 ‘낳는다’는 의미, 즉 창작의 고통으로 치환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발언이 극 중 강간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에서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영화계에 대한 한()을 고해성사하듯 쏟아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의지인 듯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총구를 겨눈 후 자신을 향해서도 총을 발사, 자살이라는 상징적인 죽음으로 묵은 한을 씻어낸다. 그리고 <아멘>을 통해 새로운 출발의 다짐처럼 영화적 구원(Amen)의 길에 다다른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가시면류관처럼 옥죄던 방독면을 벗는 장면은 정확히 이에 조응한다. 아기를 낳아달라고 줄곧 여자를 괴롭히다 끝내 약속을 받아낸 후 파리의 첫 번째 감옥이었던 콩시에르주르(La Conciergerie)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이 영화에 테마에 걸맞은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 본인의 영화적 구원에 대한 욕망이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그가 원하는 평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멘>과 <아리랑>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김기덕 신작열전’이라는 제하로 함께 묶여 상영이 되지만 정식 개봉 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2주간의 상영 기간을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한국의 어느 극장에서도 상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김기덕 감독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두 영화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동반 시산부 개봉은 어떤 면에서 적절한 형태로 보인다.) 이는 여전히 한국 영화계와 불화한 김기덕 감독의 불편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길에 이르렀으되 완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구원.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더욱 개인적인 행태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김기덕 감독은 국외자처럼 힘겹게 영화를 찍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은 열릴 것이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힘겨워하는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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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르 아브르>(Le Ha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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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과거가 없는 남자>(2002) 등으로 유명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판타지의 영역에 속한다. 당연하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되 웬만해선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적 설정으로 주제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일러 ‘블랙 코미디의 대가’라고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인데 <르 아브르>(2011)는 그런 감독의 장기가 절정에 달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마르셀 막스(앙드레 윌름스)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구두닦이로 연명하는 처지다. 벌이가 시원찮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단 둘이 생계를 이어가기에 곤란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벌어진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난민 소년 이드리사(브론딘 미구엘)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경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지병으로 쓰러지면서 막다른 벽에 부딪힌다. 하지만 위기에 처할 때면 아무 대가없이 도움을 주는 이웃이 함께 하기에 막스는 모종의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삭막한 현실(<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죽어라 일해도 변화시킬 수 없는 노동자의 처절하고 비참한 삶(<성냥공장 소녀>(1989)) 등 화려한 자본주의 사회 뒤쪽의 어둡게 드리운 진실을 폭로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르 아브르>에서 고발하는 현실 역시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현재 유럽의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아프리카 난민 문제가 그것. 다만 문제의식은 여전하되 이를 비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해결하는 결말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변화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난민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공권력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도록 소년 한 명을 위해 마을 사람이 총동원되는 극 중 상황은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종의 허구인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은 만인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에 속한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쏘냐. 아키 카우리스마키 왈, 법을 어겨서라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척박한 세상 최소한이나마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말한다. 어떻게?

<르 아브르>가 궁극에 내세우는 바는 가진 자들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못가진 자들끼리의 ‘연대’다. 태평한 성직자들 마냥 예배당에 앉아 “신의 가호를”과 같은 기도나 읊어댈 때가 아니다. (성직자들의 설교가 등장하면 감독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가차 없이 뚝 편집해 버린다!) 그럴 시간 있으면 일단 ‘닥치고’, 자유와 식량을 찾아 목숨 걸고 바다 건넌 난민 한 명이라도 더 보살피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괴물 되지 않고 사람으로 사는 도리다. 지금처럼 가진 자의 폭거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못 가진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방법밖에는 없다. 일명 ‘이드리사 난민 구하기’를 시침 뚝 떼고 밀어붙이는 영화의 결말 앞에서 웃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한 편으로는 숙연해지는 이유다.

혹자는 현실을 매정할 만큼 쌀쌀하게 묘사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연출력을 두고 차갑다고 말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합당한 평가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전제하고 있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이민자에 적대적인 유럽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르 아브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품고 있는 사람다움이 비등점에 달한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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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다슬이>(The Lovely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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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 뇌 장애를 가진 이들 가운데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레인맨>(1988)에서 자폐증 환자이지만 숫자를 모조리 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더스틴 호프만의 역할이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박철순 감독의 <다슬이>는 말하자면, 한국판 <레인맨>이다. 자폐증이지만 그림 실력이 뛰어난 서번트 증후군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레인맨>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슬이(유해정)는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인적 드문 어촌 마을인데다가 또래 친구도 없고 할머니와 삼촌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폐증이 심한 다슬이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심심할 새가 없다. 낮에는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눈사람이 나오는 TV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까닭이다. 9살 소녀의 미술치고는 꽤나 근사하지만 이웃들의 눈에는 담벼락을 어지럽히는 눈엣가시로 비칠 뿐이다. 다슬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크레파스 대신 페인트를 가지고 온 동네에 칠을 하기 시작한다.

<레인맨>을 비롯해, 직접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지 않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한 핏줄 영화로 이어지는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어거스트 러쉬>(2007) 등은 재능의 발현을 중심에 두고 이를 가능케 하는 주변인들의 노고에도 고루 시선을 분산한다. <다슬이>는 좀 차별된 경우인데, 다슬이의 재능을 의도적으로 폭발시켜 감동을 자아내지도, 이를 돕는 친지들의 자기희생을 칭송하는 낯 뜨거운 전략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슬이의 재능 주변으로 무성하게 꽃을 피울만한 인물과 에피소드는 최소화한 채 오로지 다슬이에만 집중한다. 그녀를 소개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면 (다슬이가 등대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감시원이 제지하고 이에 맘 상한 그녀가 마구잡이로 덤벼듦으로써 캐릭터가 설명된다.) <다슬이>는 온전히 그녀의 시선만 좇을 뿐이다. 다슬이의 눈과 마음이 가는 대로 관객 역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의 의도는 내려다보는 동정이 아닌 수평적인 이해를 전제한다. 거리를 둔 바라보기가 아니라 다슬이가 되어 그 처지를 직접 경험해보자는 거다.

여기에 바로 <다슬이>의 진가가 존재한다. 그런 불편한(?) 조건으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일방적인 동정심 따위 철저히 배제한다. 극 중 다슬이의 입장이 되어보면 세상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영화의 배경은 거친 파도가 난무하는 어촌 마을이지만 다슬이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드넓은 캔버스가 되니 그 위에 다양한 상상의 이미지들을 그려 넣을 수가 얼마나 좋은가. 다슬이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이 넘실대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벽에 낙서하지 말라며 불평을 토로하는 이들의 각박함이라니.

이런 세상의 ‘다슬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응원이다. 영화는 결국엔 홀로 남겨지는 다슬이의 모습을 비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결코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 여전히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모습에서 흐뭇해지는 건 우리 자신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박철순 감독이 다슬이를 대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 편으로 감독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슬이를 연기한 유해정에 대한 응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유해정은 <다슬이>가 영화 데뷔작이다. 그럼에도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다. ‘천재 배우’라는 홍보문구가 한낱 수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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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머니볼>(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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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을 기대케 하는 것은 인물의 입체적인 접근을 통한 사회 바라보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는 <카포티>(2005)의 베넷 밀러가 연출자로, <소셜 네트워크>(2010)의 아론 소킨이 작가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머니볼>은 돈이 우승과 직결되는 풍조가 만연한 프로스포츠계,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메이저리그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가치를 보여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을 다룬다.

야구의 꽃이랄 수 있는 타율과 타점, 홈런처럼 보이는 수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출루율과 같은 효율성으로 선수를 선발, 우승권에 근접한 팀을 만든 빌리 빈의 업적은 10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빌리 빈이 구단 원로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기어코 성과를 이루고야 마는 플롯 구조는 베넷 밀러와 아론 소킨 콤비가 미국의 뉴 프론티어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빌리 빈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 얻은 성과는 3~4년 전에 정점을 찍은 후 지금은 다소 주춤한 상태다. (2011년 오클랜드의 성적은 74승 88패 서부지구 3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빌리 빈의 ‘스몰볼’이 맹위를 떨칠 때도 오클랜드는 플레이오프에서 번번이 탈락, 메이저리그 전체 우승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런 빌리 빈의 업적이 지금 <머니볼>을 통해 재조명받는 것은 미국의 내부적 상황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강타한 금융 위기는 절대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폐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겹쳐놓으려는 듯 <머니볼>은 영화의 첫 화면에 ‘뉴욕 양키스 연봉 총액 1억 2천 5백만 달러 vs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연봉 총액 4천1백만 달러’라고 적시한다. (하지만 양키스는 어슬레틱스를 무찌르고 2001년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머니볼>은 스몰볼의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옹호하지 않는다. 1918년 이후 우승이 없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스몰볼의 가치에 매료되어 큰돈에 빌리 빈을 영입하려 한다. 하지만 돈보다 우정을 택한 빌리 빈은 오클랜드 잔류를 선언한다. 하지만 부자 구단 레드삭스는 2004년 스몰볼이라는 효율성을 장착한 후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고 오클랜드는 또 한 번 플레이오프에서 눈물을 삼키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베넷 밀러와 아론 소킨은 큰돈을 가치 있게 굴릴 수 있는 효율성이야말로 지금 미국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빌리 빈을 다루지만 특정 인물의 스펙트럼을 통과해 사회에 대한 발언으로 기능한다. 제목이 <스몰볼>이 아니라 <머니볼>인 이유, 바로 이 때문이다.

<드라이브>(Dr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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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는 평단에서 특히 좋아할만한 영화다. 낮에는 할리우드 엑스트라, 밤에는 뛰어난 운전 기술을 이용해 범죄자들의 탈출을 돕는 무명의 드라이버는 뭐랄까,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장 피에르 멜빌의 느와르에 나오는 살인청부업자(주로 알랭 들롱이 연기했다!)의 현대판 버전을 연상시킨다.

시종일관 감정의 동요를 눈치 챌 수 없는 무표정, 처음의 계획이 어긋나는 상황에 아랑곳없이 지극히 말을 아끼는 냉정함, 상대방에 대한 동정을 허락하지 않는 결단력까지, 덴마크 출신의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은 라이언 고슬링, 캐리 멀리건, 론 펄먼과 같은 할리우드 배우를 기용해 낯설면서도 익숙한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같은 결과로 <드라이브>는 범죄와 액션이라는 B급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감독상 수상이라는 예상외의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쉽게 즐길만한 오락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카체이스가 중요하게 두각 됨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관객의 쾌감을 자극하는 연출로 가져가지 않는다. 오히려 LA 도로사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기에 가능한 도주처럼 주인공의 캐릭터와 능력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쪽으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에서 시각적 쾌감을 주는 쪽은 고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잔인한 상해 묘사에 있다. 이건 뭔가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그만큼 새롭게 다가온다. 할리우드처럼 보수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프렌치느와르처럼 깔끔하지도 않은 제3의 무엇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제작과정은 즉흥과 우연에 따른 낯선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드라이브 역에 캐스팅된 인물은 휴 잭맨이었다. 라이언 고슬링은 그를 대신해 참여했다가 (역시 하차한 닐 마셜 감독의 자리에) 니콜라스 윈딩 레픈까지 끌어들였다. 윈딩 레픈은 원 시나리오를 존중하는 대신 상당 분량의 카체이스 장면을 8분여로 줄이면서 영화의 성격을 바뀌어버렸다. 이질적인 조합이 충돌하면 때론 이렇게 흥미로운 결과물이 도출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