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Le Quattro Vo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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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영화 팬들에게 <네 번>은 전혀 생소한 영화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의 유로파 시네마 레이블(Europa Cinemas Label) 상을 비롯해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바로 한국의 이광모 감독이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2010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힌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두 번째 연출작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기프트 Il Dino>(2003)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에 놓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진 칼라브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통해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면서 날로 황폐해지는 마을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호평을 받은 것이다. 이때 프라마르티노 감독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칼라브리아를 돌아다니면서 비보 발렌티아 지방의 목동과 숯장수를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품이 바로 <네 번>이다.

<네 번>은 제목만 가지고는 이야기나 성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부제인 ‘늙은 목동, 아기 염소, 전나무와 숯’이 좀 더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네 번>은 늙은 목동, 아기 염소, 전나무, 숯이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염소를 관리하는 늙은 목동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와 동시에 염소가 태어난다. 이 아기 염소는 무리를 빠져나와 길을 헤매던 중 전나무 아래서 동사하고 만다. 아기 염소의 시체를 자양분 삼은 전나무는 무성하게 자라 사람들의 눈에 띄고 곧 벌목된다. 그리고 벌목된 전나무는 조각조각 해체되어 숯이 되고 사람들은 이 숯을 피워 따뜻하게 겨울을 난다.   

별스러운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네 번>은 탄생과 죽음이 연계된 자연 순환의 이치에 관한 영화가 된다. 늙은 목동은 죽고 없지만 살아생전 보살폈던 염소가 새끼를 낳아 인간과 동물 간의 삶과 죽음의 선이 연결되고, 동사한 아기 염소는 전나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동물과 식물간의 조화가 이뤄지며, 벌목업자에게 팔려간 전나무가 오랜 시간 타서 숯으로 재탄생되면 식물과 광물 간에도 생과 사는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독은 “피타고라스는 오리엔탈 철학에 영향을 받아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칼라브리아는 이 윤회 사상에 깊게 물들었다. 그곳에서 자연의 질서는 상하관계가 아니다. 거기서는 모든 존재가 영혼이 있다.”고 말했다.

하여 <네 번>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순환을 이루는 자연의 리듬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음미한다. 그런 감독의 태도에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가져야 할 겸손함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 아닌 자연을 이루는 한 요소로 바라보는 겸양의 자세가 배어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인간을 주인공이 아닌 자연의 한 일부로 묘사하기 위해 고민했다. 인간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균형을 잡고 싶었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말처럼 <네 번>은 자연파괴가 일상화된 지금 더욱 더 가치 있는 영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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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세 얼간이>(3-Id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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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정식으로 개봉된 인도영화는 <블랙>(2005)과 <내 이름은 칸>(2010) 등 손에 꼽히지만 그 전부터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과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를 훨씬 능가할 정도다. 라지쿠마르 히라니 감독의 <세 얼간이>(2009)가 대표적으로, 국내 인터넷 리뷰만 2만 개 이상이 오르자 전격적으로 개봉이 결정된 경우다. <세 얼간이>는 제목과 달리 진짜 얼간이들의 얘기가 아니다. 비인간적인 경쟁과 오로지 취업만이 대학 사회의 최우선 가치가 된 상황에서 우정과 사랑과 꿈과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를 외치는 이들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임페리얼 공대는 인도에서 수재들만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파르한(마르하반)은 사진에 재능이 있지만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공대에 입학한 케이스다. 라주(셔만 조쉬)는 병든 아버지와 가난한 집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할 목적으로 임페리얼에 들어왔다. 하지만 괴짜로 통하는 란초(아미르 칸, 실제 나이는 47세로 20세의 대학생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촬영동안 우유와 바나나로 식사를 대신했다고 한다)를 만나면서 이들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란초의 주관에,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꿈을 잠시 접을 줄 아는 희생정신에 파르한과 라주는 삶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세 얼간이>는 이미 자국에서 역대 인도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재미뿐 아니라 인도인들의 의식 속에 잊혔던 어떤 감정을 건드린 것으로 풀이된다. 급작스러운 산업화와 그에 따른 경쟁의식, 그리고 출세와 돈만이 성공의 척도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순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에의 호소는 <세 얼간이>의 진가다. 특히 그런 인도사회의 축소판으로 엘리트들이 집결한 대학(극중 임페리얼 공대는 가상의 학교다)을 배경으로 삼은 점은 의미심장하다. “2등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총장의 폭력적인 교육관 앞에서 이를 거부하듯 ‘알 이즈 웰'(All is Well의 인도식 발음), 즉 “모두 괜찮을 거야” 외치는 란초의 주문은 돈보다, 출세보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되살리려는 의지처럼 들린다.

묵직한 메시지를 품고 있지만 <세 얼간이>가 이를 풀어가는 전략은 코미디다. 대중영화로써 더 많은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상업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순수의 회복을 지향하는 란초의 행위가 지금 인도의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컨대 ‘바보'(idiot)스럽게 비춰지는 것을 상징하는 반어의 형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세 얼간이>는 한국의 <써니>(2011)처럼 실질적으로 판타지다. 예컨대, <써니>는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의 부를 이용해 현실의 무게에 기를 펴지 못하는 고교동창생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비현실적이지만 영화적인 해피엔딩으로 관객들에게 잠시간의 위안을 주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 얼간이> 역시 란초로 대변되는 인간적인 가치의 순수함이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다만 여전히 스크린 밖 현실에서는 세속적인 가치가 인간성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판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얼간이>는 그 자체로 재미있을 뿐더러 인도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프리즘과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한국 사회와도 닮았는지! 이는 국내 영화수입사가 인도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원래 170분에 달하는 <세 얼간이>는 국내에 소개되면서 141분으로 축소되었다. 인도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상당수의 뮤지컬 장면을 삭제한 까닭이다. 물론 두 개의 뮤지컬 장면이 살아있지만 국내 관객의 정서를 이유로 온전한 형태의 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은 인도영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저해하는 폭력처럼 비친다.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가깝게 다가서려 애쓰지만 현실은 영화를 상품의 일종으로 규격화하며 허구(혹은 판타지)의 영역에 가둬놓으려 한다. 영화 안팎으로 <세 얼간이>는 한국 사회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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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심장의 뛰네>(My Heart B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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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주리(유동숙)는 매사에 의욕이 없다. 지금껏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는 “하고 싶어, 많이 하고 싶어, 남자도 자주자주 바꿔 가면서”라고 주문을 외지만 좀체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에로영화 제작사를 운영하는 대학동창 명숙을 찾아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뱃살은 출렁 늘어졌고 남자 경험도 없는 그녀에게 에로 연기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심장이 뛰네>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의 여자 버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가 어떻게든 여자와 관계를 갖고자 하는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을 코믹하게 바라봤다면 <심장이 뛰네>는 일종의 자아 찾기로 묘사한다. 주리가 그렇게 남자와 자고 싶은 것은 단순히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사랑’의 한 행위로써 (에로영화를 빙자한) 성관계가 전면에 나설 뿐 주리는 상대 남자배우와의 심리적 교감을 통해 죽어있던 감정의 ‘심장이 뛰는‘ 짜릿한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여자의 몸은 대개 관음과 탐닉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는데 허은희 감독은 탐구하고 알아가는 시선으로 주리의 몸과 감정을 대한다. 그래서 <심장이 뛰네>의 주인공들은 헐벗은 몸이 아닌 그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싶어 하고, 이를 알아주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상대방을 만날 때 비로소 감정이, 심장의 박동이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허은희 감독은 <심장이 뛰네>의 인상 깊은 연기로 로마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신종플루로 사망한 고(故)유동숙에게 이 영화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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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천영화제
카탈로그
(2011.7.14~7.22)

<시체스 별장의 공포>(Atroc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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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4일 한 가족이 시골의 외딴 저택에서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머리가 잘리고, 불에 타 죽은 시체들 외에 두 개의 캠코더가 현장에서 발견된다. 경찰들은 이를 중요한 증거 자료로 확보하는데 그 안에는 문제의 가족들이 저택에서 지냈던 37시간의 행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시체스 별장의 공포>는 <블레어 윗치>(1999)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 등 현실감을 극대화한 첨단의 공포 영화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를 유튜브 세대를 위한 공포영화라고 해도 좋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극중 주인공이 촬영한 동영상이 영화 전체를 이룬다. (이중에는 뉴스릴 화면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노리는 효과는 무엇일까?

주인공 가족이 외딴 저택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 얽힌 무서운 괴담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오래 전, 저택의 미로와 같은 숲속에서 소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 하여 거친 입자와 웅웅거리는 사운드의 캠코더 영상 속에는 주인공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고 결국에 죽음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전설의 형태를 통해 말로만 회자되는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졌을 때의 충격. 물론 허구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페이크 다큐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러한 현실감에 있을 테다. 특히 <시체스 별장의 공포>가 좀 더 흥미로운 이유는 극영화적 요소를 은근히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이닝>(1980)의 미로에서의 추격전, <링>(1998)의 우물과 TV영상 등의 설정은 좀 더 변화하려는 페이크 공포 다큐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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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천영화제
카탈로그
(2011.7.14~7.22)

<로봇>(Endh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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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한국의 영화 팬들에게 폭발적으로 화제가 된 인도 영화가 있었다. 국내에 개봉도 하지 않은 이 영화는 샹카르 감독의 <로봇>이었다. <터미네이터>를 닮은 ‘로봇’이 <아이, 로봇>의 미래형 빌딩을 배경으로, <매트릭스>에서처럼 분신술을 이용, <디 워>의 괴수도 됐다가, <트랜스포머>의 로봇도 되는 등 인도 영화치고는 유례 없는 SF의 볼거리가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이다.
 
이야기는 <바이센테니얼 맨>에 <프랑켄슈타인>을 적절히 혼합한 모양새다. 바시가란 박사는 로봇 ‘치티’를 창조한다. 생김새와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감정까지 시뮬레이션한 치티는 급기야 바시가란 박사의 애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박사는 자신의 창조물인 치티를 제거하려들면서 파국의 위기를 맞는다. 

샹카르 감독이 <로봇>을 기획한 건 이미 10년 전. 막대한 예산, 캐스팅의 어려움(샤룩 칸은 시나리오가 무감동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때문에 제작을 연기해야 했던 감독은 남인도 영화의 거물 프로듀서 칼라니티 마란(Kalanithi Maran)의 지원으로 영화를 완성하게 됐다. 꿈의 프로젝트였던 만큼 <로봇>이 인도 영화계에 세운 기록도 화려하다. 인도 영화 최초의 SF이고, 4천만 달러의 제작비는 사상 최대이며  1,500개의 CG컷이 사용된 것 역시 기록적이다. 개봉 그 해 인도 영화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가 됐고 해외로도 수출되어 2,250개 스크린에서 <로봇>이 소개됐다. 물론 영화의 설정 및 이미지들은 할리우드 영화와 많이 겹쳐지지만 로봇마저 피해가지(?) 않는 뮤지컬 장면은 인도 영화만의 정체성을 확실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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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천영화제
카탈로그
(2011.7.14~7.22)

<일루셔니스트>(The Illusio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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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일루셔니스트>를 많은 사람들이 볼 것 같지 않다. 한국 관객에겐 낯선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실뱅 쇼메의 작품, 지금은 거의 사라진 슬랩 스틱 연기를 구사하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 자크 타티를 모델로 한 주인공, 첨단의 3D가 아닌 고전적 2D 애니메이션이라니. 게다가 극중 주인공 타티쉐프의 직업은 록 스타와 텔레비전의 유행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마법사다. 여러 모에서 현대 영화의 리듬과 역행하는 <일루셔니스트>에는 ‘순수’에 대한 향수의 정서가 충만하다. <윌로씨의 휴가>(1953) <나의 삼촌>(1958) <플레이 타임>(1967) 등 자크 타티의 영화는 날로 고도화되는 사회를 풍자하면서도 한줌의 순수를 긍정하는 낭만이 풍만했다. 살아 생전 자크 타티가 딸에게 남긴 편지를 시나리오로 한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영화적 유산을 가감없이 계승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사보다 이미지로,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다만 CG로 대변되는 규모의 스텍타클에 익숙한 현대의 관객들이 <일루셔니스트>가 그려내는 고전적 가치의 마법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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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7월호
 

<코파카바나>(Copacab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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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투시 감독의 <코파카바나>(2010)에는 제목과 달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휴양지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삼바 음악을 즐겨 듣고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코파카바나 해변을 꿈꾸는 중년의 여인이 등장한다.

바부(이자벨 위페르)는 한가롭게 쇼핑을 즐기고 술을 마시다 흥겨운 음악만 들리면 자연스럽게 몸을 흔드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다만 그녀의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는 그런 엄마가 맘에 들지 않는다. 쉽게 남자를 갈아 치우고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한 데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바부가 철없어 보이는 것이다. 마침 결혼을 결심한 에스메랄다는 오랜만에 엄마와 속 깊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바부가 못 마땅해 하자 폭발하고야 만다. 급기야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화를 내고 모녀 관계는 그렇게 서먹해진다.

바부는 여자로서 매력이 넘치지만 엄마로서는 별로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의 가족 배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친해지지만 조금이라도 지내본 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유분방한 여자가 아니라 자식에게 헌신하는 엄마가 되어 에스메랄다에게 좀 더 충실할 것을 바란다. 물리적 나이가 아닌 심리적 어른으로서의 성장, <코파카바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두 모녀의 화해를 통해 바부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과정이 흥미로운 건 마크 피투시 감독이 바부의 고유한 성격을 구태여 교정하려 않는 데 있다. 오히려 인정하는 태도를 기저에 깔고 두 모녀가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해피엔딩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떠나는 곳은 바로 코파카바나, 가 아니라 벨기에의 오스탕드. 코파카바나와 달리 생기 없는 해변 도시이지만 바부는 새로운 직장을 얻어 콘도 이용권을 팔면서 딸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어 보려 노력한다. 다행히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직장에서의 일도 잘 풀리고 새로운 남자 친구도 사귀지만 그녀의 성격 상 끝까지 버텨내기는 요원하다. 그로 인해 바부는 좌절하는가? 그렇지 않다. 늘 그렇듯 별 일이냐며 툭 털어내지만 대신 관계에서의 성숙을 이뤄내는 데는 성공한다. 짧은 동안이지만 자신과는 성격도, 세계관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계의 어긋남이 발생했을 때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대신 우회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운 성격 탓에 주변과 불화하기 일쑤지만 맘에 담아두지 않는 그녀의 삶의 태도는 편견과 오해가 빈번한 이 세계에서 종종 마법을 일으켜 뜻하지 않는 행복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딸과의 화해에 이르면서 꿈꾸던 코파카바나를 향하게 되는데, 마크 피투시 감독은 바부가 그 전에 마음 속 코파카바나, 그러니까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 속에서 안식을 얻는 과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목이 <코파카바나>이면서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 역설의 영화가 가능했던 이유다.

그리고 또 하나. 천진난만한 엉뚱함 속에서 삶의 철학을 길어 올릴 수 있게끔 노련한 연기를 펼친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의 세계 그 자체다. 심지어 <코파카바나>에서는 실제 친딸 롤리타 샤마와 모녀 연기를 펼치며 극과 현실의 경계를 무화하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가벼운 코미디로 치부하기에 <코파카바나>가 보여주는 삶의 신비는 단순한 웃음 이상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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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알라마르>(Ala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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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마르>는 멕시코 출신의 페드로 곤살레스-루비오가 만든 연출작이다. 장편 데뷔작 <블랙 불>(2005)과 <공통점>(2007)에서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던 감독은 전작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이라는 소재를 담아 낸다. 

영화의 이야기는 74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 만큼이나 간략하다. 한때 운명적인 사랑이라 여겼던 호르헤와 로베르타 커플은 아들 나탄을 낳고는 현실의 벽에 가로 막힌다. 멕시코 출신의 호르헤가 자연 친화적인 삶을 원한 반면 로베르타는 도시 생활을 꿈꾸었던 것. 결국 나탄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로베르타는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곧 헤어지게 된 호르헤와 나탄 부자는 호르헤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멕시코의 어촌 마을 고향에서 둘 만의 시간을 보낸다. 

곤살레스-루비오 감독은 호르헤와 로베르타의 관계를 영화 초반에 짧게 설명한 후 영화의 대부분을 호르헤와 나탄 부자가 지내는 배경에 집중한다. 김기덕 감독의 <섬>(2000)의 바다 위의 그림 같은 숙박촌을 연상시키는 <알라마르>의 배경은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큰 산호초 군락지인 ‘반코 친초’다. 장면 장면이 그림 엽서를 방불케 하는 풍경의 반코 친초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고즈넉한 자연의 리듬과 시간을 체화한 호르헤는 아들 나탄에게 고기잡이, 도요새와 친해지기 등 반코 친초가 인간에게 선물한 바다와 숲의 혜택을 물려주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그리고 영화는 한가로이, 하지만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잡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더욱 더 애틋한 정을 나누는 부자의 모습 뒤로 천혜의 풍경을 펼쳐 놓는다. 

‘간직’과 ‘보존’은 <알라마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다. 영화의 마지막 ‘현재 반코 친초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는 자막을 넣은 것은 호르헤와 나탄의 여행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정확히 짚으려는 의도가 크다. 이번 여행을 끝으로 나탄이 로마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자가 서로에게 느끼는 일말의 감정은 흡사 아름다운 여행지를 뒤로 하며 느끼는 아쉬움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 시간이지만 <알라마르>가 남기는 여운은 진하고 깊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에 더 가깝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영화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반코 친초의 특정한 풍경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곤살레스-루비오 감독이 극중 부자의 사연을 다루는데 있어 인상적인 사건보다 반복에 가까운 일상을 주목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삶은 늘 반복되는 행위에 가깝지만 복잡 미묘한 감정의 파동은 표면 위에 무수한 함축과 설명 불가능한 난해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마르>의 담담한 연출은 관객들에게 특정한 감정을 강요하거나 호소하지 않는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호르헤의 마음은, 아빠를 떠나보내는 나탄의 심정은 , 그런 부자를 헤어짐을 바라봐야 하는 엄마 로베르타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알라마르>의 시적인 영상은 관객에게 각자의 명상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의 영역에 위치하면서도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또한 극중 가족의 화합과 붕괴의 시소 위에 놓인 경계에서의 관계 맺기와도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알라마르>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라마르>는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생소한 현대 멕시코 영화의 하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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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7

<사랑을 카피하다> 원본과 복제 사이로 오리지널리티 길어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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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증명서>가 소개됐을 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무엇이 ‘증명서’와 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난다. 약간의 고민 끝에, 극중에서 처음엔 남남이었던 그녀(줄리엣 비노쉬)와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가 점점 오래된 부부인 듯한 대화와 행동을 하는 걸 상기하고 부부 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이야기가 ‘증명서’로 상징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랑을 카피하다>(2010)로 제목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원제 ‘Certified Copy’를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직역하다보니 ‘증명서’라는 제목으로 표기됐음을 알게 됐다.

이런 사연을 소개하는 이유는 제목을 오기한 측의 잘못(?)을 드러내 망신을 주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고, 다만 주어진 제목과 극중 이야기를 연결해 영화를 이해한 나의 ‘반응’이  <사랑을 카피하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리 밝히자면, <사랑을 카피하다>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반응’ 또는 ‘해석’에 온전히 기대고 있는 진정한 유기체의 영화라 할만하다.

키에로스타미의 <비포 선셋>? <이탈리아 여행>?

첫 장면부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앞서 밝힌 영화의 의도를 확실히 한다. 마이크 한 대와 ‘공인된 모사 Copia Conforme’라는 이탈리아 제목의 책 한 권만이 딸랑 놓여있는 단상을 비추는 카메라는 수동적인 위치에 놓인 스크린 밖의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 들이려 한다. 곧이어 극중 책의 저자인 제임스 밀러가 등장해 약속 시간에 5분 정도(영화의 제목과 주요 스태프를 소개하는 오프닝 장면의 시간이 이 정도 된다!) 늦은 것을 사과하고 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을 때면 관객은 마치 실제 제임스 밀러가 나를 상대로 강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끔 화면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제임스 밀러의 강연 내용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청중의 모습이다. 실제로 카메라는 밀러가 신작과 관련해 내뱉는 말을 들려주는 대신 청중 속의 그녀가 강연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련의 장면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작품의 의도를 알리기 위해 관객을 대상으로 미리 밝히는 일종의 감상법 소개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사랑을 카피하다>의 본격적인 내용은 이후에 그녀와 제임스 밀러가 펼치는 사연이 될 터인데, 그녀가 운영하는 골동품점에 밀러가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토스카나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삶과 예술, 그리고 부부 관계(?)에 대한 열띤 대화를 나누게 된다.

혹자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실시간에 가깝게 남녀 주인공을 쫓으며 대화를 중계하는 연출 방식을 두고 ‘키아로스타미 버전의 <비포 선셋>’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을 카피하다>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평가는 못 된다. 예컨대, <비포 선셋>(2004) 외에도 <사랑을 카피하다>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1960),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 등 의도적으로 기존의 작품들을 끌어들인다. 그중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작품이 바로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이탈리아 여행>(1953)이다. <사랑을 카피하다>처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여행>은 친척의 빌라를 처분하러 온 미국인 부부가 나폴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부부 관계의 갈등을 드러내면서 위기를 겪기도 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는 등 정신적 여정을 포개 놓는 형식을 취한다.

개인적으로 <사랑을 카피하다>의 원본은 <비포 선셋>보다는 <이탈리아 여행>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탈리아의 죽여주는 풍경이 배경이고, 부부 관계의 달콤함과 쓴맛을 모두 맛 본 중년 남녀가 등장하며, 무엇보다 출신지가 각기 다른 감독과 남녀 배우가 조합을 이루는 등 여러 모에서 닮아있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하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실제로 <이탈리아 여행>을 가장 중요한 원본으로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그녀와 제임스 밀러의 관계가 부부가 아닌 듯, 한편으로 부부인 듯 굉장히 애매하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 키운 복제 하나 열 원본 부럽지 않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로 만난  그녀와 제임스 밀러는 토스카나를 배회하던 중 어느 카페에를 들어가게 된다. 프랑스인 그녀와 영국인 제임스 밀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이를 알아들을 리 없는 이탈리아 노(老)여주인은 그들을 향해 잘 어울리는 부부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재미있는 건, 부부 같다는 얘기를 들은 그녀와 밀러가 카페를 나서는 순간부터 결혼 15주년  기념일을 어제 막 지낸, 하지만 서로에게 무감한 실제 부부처럼 대화를 나누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홍보사의 보도 자료에는 그녀와 밀러가 부부 역할극을 벌인다고 소개가 되어 있지만 그것이 정말 역할극인지 실제 관계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서, 처음엔 부부 관계를 숨기고 있던 이들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도록 영화는 다면적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의문은 한 가지, 그녀와 밀러는 실제 부부일까? 아니면 부부 역할극 놀이에 빠진 작가와 독자의 관계일까?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화는 이 질문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골동품점 운영자와 ‘공인된 모사’의 저자답게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요지는 원본과 복제, 창조와 모방, 진품과 짝퉁, 진짜와 가짜 등 오리지널 진위 여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대화 곁을 지나쳐가는 주변 환경 역시도 심상치 않다. 가령, 어느 박물관을 스쳐 지나갈 때 큐레이터가 지오토의 작품을 두고 진품으로 여겨졌던 것이 수세기가 지난 후 위작으로 판명됐다는 설명을 한다. 그러자 그녀와 밀러의 대화는 진품으로 여긴 감상자들의 찬탄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 간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진품과 위작의 진위 여부가 아니다. 그에 대한 감상자들의 반응이 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진짜와 가짜 여부에 집착하던 그녀와 밀러의 대화도 시간을 더할수록 각자의 반응에서 오는 차이에 더 집중하는 형국으로 변모한다. 다비드상과 흡사한 석상이 놓인 분수대에 당도한 이들은 원본과 모방에 대한 논란은 집어치우고 이 작품의 의도가 무엇인지, 맘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각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는 데만 열을 올릴 뿐이다. 그것은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도, 촬영 감독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아들인 바흐만 키아로스타미가 맡았다.) 마찬가지다. 석상에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의도적으로 그녀와 밀러의 대화에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두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고 원본과 복제의 차이에 대해 실컷 떠들게 해 놓고서는 정작 이들의 반응만을 집요하게 살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체리향기>(1997)와 같은 작품을 통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사랑을 카피하다>는, 그래서 생소하다. 하지만 <사랑을 카피하다> 이전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순수하게 ‘반응’만으로 영화 한 편을 완성한 적이 있다. <쉬린>(2008)이라는 작품으로, 극중에서 줄리엣 비노쉬를 비롯해 이란의 유명 여배우 114명은 <코스로우와 쉬린>이라는 무대극을 관람한다. 이때 <쉬린>을 관람하는 실제 관객은 극중 무대극을 소리로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대신 <코스로우와 쉬린>을 관람하는 여배우들의 얼굴에 주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울고, 웃고, 놀라고, 감동하는 등의 표정 변화, 즉 반응만을 보게 된다. 이런 식의 구성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예술관이 담겨 있다.

내 영화의 원산지는 어디인가

영화를 비롯해 모든 예술 행위는 보는 이를, 듣는 이를, 느끼는 이를, 해석하는 이를, 즉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갖가지 반응에 의해 규정되고 해석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이때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는 지표 중의 하나가 바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다. 그런데 영화는 다른 예술 매체에 비해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순수성이 상대적으로 희박한 편에 속한다. 그것은 영화가 미술과 사진과 음악과 패션과 만화와 같은 각종 예술 매체를 노골적으로 갖다 쓰며 ‘도둑질의 예술’이란 평가를 얻은 까닭이 크다. 그래서 영화는 다른 매체와 달리 오마주 혹은 인용이란 형태에 관대하며 심지어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이는 오마주와 인용으로 이뤄진 영화를 통해 세계 최고 감독의 위치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본이 갖는 의미는 갈수록 희박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타란티노처럼 오마주와 인용을 경유해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는 경우가 빈번해진 것이 현대 영화의 특징이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그런 맥락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영화다. 그녀와 밀러가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실컷 논쟁을 펼쳐도 원본과 가본의 진위 여부는 사실상 이 영화가 관심을 갖는 테마가 아니다. 앞서 나는 <사랑을 카피하다>가 <비포 선셋>보다 <이탈리아 여행>에 더 가깝다고 의견을 밝혔는데 그것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의도한 수많은 반응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앞서 열거한 ‘한 핏줄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본과 복제가 혼재한 예술의 형태를 보여주며 현대 영화의 본질을 꿰뚫었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극중 밀러의 대사를 빌리자면, “잘 키운 복제 하나 열 원본 부럽지 않다”이고 이 영화의 원제 ‘공인된 모사’에 공감하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을 카피하다>가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는 원산지(?) 표시다.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인이고, 그녀를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는 프랑스인이며, 제임스 밀러 역의 윌리엄 쉬멜은 영국인이다. 또한 극중 배경은 이탈리아이고 영화의 제작국은 프랑스와 벨기에다. 이때 <사랑을 카피하다>는 어떤 나라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영화의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현대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이처럼 영화의 원산지가 점점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경우는 좀 더 절박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난 해 12월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하얀 풍선> <써클> <오프사이드>)이 자국 정부로부터 6년 징역과 함께 20년 간 영화 활동 금지 및 국외 출국 금지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반이슬람적이고 프로파간다 성격이 짙은 영화를 만들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또한 오래 전부터 이란 정부의 압박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1997년 <체리 향기>가 자살이 소재였다는 이유로 출국 금지 조치를 당해 칸국제영화제 폐막 3일 전까지 작품을 출품하지 못했던 해프닝이 있었을 정도다. 그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키아로스타미는 이란 밖에서의 영화 연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이는 자국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생겨난 키아로스타미의 개인적인 반응이면서 또한 사회적인 반응이라고 할만하다. 그렇게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은 개인의, 사회의, 그가 접한 영화의, 관객의 각종 반응을 통해 진화해왔다. 다시 말해, <사랑을 카피하다>는 키아로스타미가 지금껏 이어온 필모그래프를 결산하는 ‘복제’의 총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원본’의 영화적 행보를 알리는 출발점인 셈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가 카피한 <이탈리아 여행>이 현대 영화의 출발점으로 평가 받듯이 <사랑을 카피하다> 또한 새로운 세기를 열어젖힐 영화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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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1.5.11)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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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책을 영화화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는 제작 단계부터 악소문에 시달린 영화이었다. 그것은 모두 연출자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바꿔 모리스 샌닥을 분노케 했다는 얘기부터 너무 난해하게 찍은 까닭에 제작자가 직접 편집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일단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관련한 오해부터 풀자면, 스파이크 존즈를 연출자로 결정하는데 가장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 바로 모리스 샌닥이다. 샌닥은 오래전부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실사 영화를 기획해왔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과거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이에 실망한 샌닥은 괴물의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사가 낫다고 판단했다. 단, 실사 화면에 CG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라이브 액션이어야만 했다. 샌닥의 기획 의도처럼 스파이크 존즈 역시 애니메이션을 주장하는 제작사에 맞서 실사를 주장하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을 이루었다.

영화화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스파이크 존즈의 색깔이 원작의 아우라를 뛰어넘는다. 수공업 형태의 제작 방식, 즉 사람이 괴물을 탈을 쓰고 연기함으로써 풍겨나는 인간적인 따뜻함은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 할만하다. 스파이크 존즈가 거대한 인형의 형태로 구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울까 걱정의 시선이 없었던 게 아니다. (바로 그 이유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감독에 대한 악소문을 키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탈을 쓰고, 여기에 미세한 표정과 행동을 CG로 더해 되살려낸 괴물의 실체는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스파이크 존즈가 죽어도 라이브액션을 고집한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원작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장난이 심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방에 갇힌 맥스(맥스 레코즈)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갔다 와 보니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다. 간단한 원작의 이야기와 샌닥이 그린 20장 정도의 그림을 토대로 101분의 상영 시간을 채우는 건 순전히 맥스와 괴물들간의 소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맥스와 괴물 모두 친구가 된 기쁨에 못 이겨 숲을 파괴하고, 놀이를 한답시고 일부러 나무에 생채기를 내며, 피곤에 못 이겨 잠을 잔다는 것이 탑을 쌓듯 서도 뒤엉키는 등 이건 아이들의 감수성이 아니면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티테일이다. (안 그래도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 등은 모두 아이들처럼 자신만의 동굴 속에 갇혀 놀기 즐겨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소유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동을 타깃삼은 가족영화다. 다만 할리우드가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가족용이라고 해서 절대 어른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주요한 이미지는 바로 ‘동굴’이다, 이 이미지는 맥스가 계속해서 자기만의 요새 속으로 숨어드는 심정을 대변한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맥스나 그들만의 섬에 갇혀 사는 괴물은 어떤 면에서 소외된 자와 닮았다. 그들이 동굴처럼 좁은 곳으로 몸을 숨기는 이유는 고립을 강조해 역설적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항의의 성격을 지닌다. 다른 한 편으로는 소외된 자들끼리 그들만의 이상향을 건설해 고립의 벽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도 괴물들과 함께 그들만의 요새를 건설하려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맥스는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스파이크 존즈는 항상 고립된 자들의 이야기를 즐겨 다뤄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와 로테 슈와츠(카메론 디아즈)는 부부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심적 공허감으로 외로운 인물들이었고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니콜라스 케이지)은 대중들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 증세를 겪는 무명작가이었다. 결코 많지 않은 작품이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오라는 격려이고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에게 좀 더 손을 뻗어줄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다르지 않다. 자기 안팎의 고립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자는 주제를 설파한다. 가족 해체가 일상화된 현대사화에서 이는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유효한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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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개관 9주년 기념 영화제
(2011.5.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