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Incen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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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은 여러 매체를 통해 캐나다 영화라고 소개가 됐지만 더 정확하게는 퀘벡 영화다.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대화가 이뤄지고 여기에 아랍어가 중간 중간 끼어든다. 언어로 촉발된 혼돈은 종종 바벨탑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을린 사랑>은 현대판 바벨탑 신화라고 할만하다. 언어가 아닌 지금 아랍(레바논 내전이라고 추정된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격한 종교 충돌 및 그에 따른 복수의 혼돈이 야기한 비극적 가족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고발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전장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메마른 아랍의 사막, 아니 혹독한 폭력이 휩쓸고 간 죽음의 대지에서 <그을린 사랑>은 출발한다.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영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 톰 요크가 토니 블레어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유명하다.)가 흐르면서 전쟁 병기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며 오프닝을 여는 <그을린 사랑>은,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를 추적해 들어가는 영화(로 보인)다. 안 그래도 오프닝이 끝나면 주인공 남매가 공증인을 통해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전해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편지를 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매에게는 지금껏 비밀에 부쳐둔 아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아들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을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다고 생각한 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반면 딸은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언제나 남성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적대감을 취한다.)

여기서부터 <그을린 사랑>은 오빠를 찾아 레바논으로 떠나는 딸의 여정과 엄마의 과거를 교차하며 이들 가족사에 숨겨진 전쟁의 상흔을 쫓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스터리의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객의 관심을 끌기위한 궁여지책의 오락적인 목적이 아닌 나도 모르는 새 몸속에, 핏속에, DNA속에 스며든 전쟁의 흔적을 끌어내기 위한 구조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오프닝에서 비친 아이들이 그 자신의 의지로 어린 나이에 군인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럼으로써 사랑보다 증오를, 소통보다는 폭력을, 결국 화해가 아닌 전쟁을 접하면서 성장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되풀이될 거라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시대, 전쟁 통인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일이고 숭고한 일인 것이다.

<그을린 사랑>에 ‘위대한’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다면, 주인공 남매의 어머니가 전쟁 와중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엔 화해의 전도사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의 전쟁영화들은 ‘고발’의 형태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냄으로써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이 세상의 평화는 화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아랍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아들과 캐나다 퀘벡의 남매가 조우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류는 종교, 인종, 나라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이라는 한 핏줄로 엮어있음을, 그래서 이제는 우리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자는 것을 절실하게 역설한다. (결국 극중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캐나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전쟁이 야기한 비극을 정면에서 다뤘다는 것,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퍼지고 있음을 웅변한다. 그래서 <그을린 사랑>에 대해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문제적 걸작’이라는 표현은 그리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감독한 드니 빌뇌브는 앞으로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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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10.25)


<테이킹 우드스탁>(Taking Wood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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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이하 ‘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은 어떤 영화를 소개해주실 건가요?
허남웅(이하 ‘허’) 오늘은 <와호장룡> <색,계>의 연출자로 유명한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7월 29일 개봉)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어떤 작품이죠?
1969년이었죠, 미국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려 큰 반향을 일으켰잖아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가자 인기 있고, 가장 중요한 록 뮤지션들이 모여 3박 4일 동안 5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펼쳐졌던 페스티벌인데요. <테이킹 우드스탁>은 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어떻게 열리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나보죠?
실제로 <테이킹 우드스탁>은 국내에도 지난 4월에 출간이 된 동명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책의 저자 엘리엇 타이버는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이 열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우드스탁 관계자들이 페스티벌을 열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장소를 제공한 사람인데요. 리안 감독이 <색,계> 홍보 차 TV토크쇼에 출연했다가 책의 저자 엘리엇 타이버를 만나 책을 전해 받게 됐고, 따듯하고 코믹한 감성에 매료가 돼서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하네요.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있어 우리가 잘 모르는 흥미진진한 배경이 있었군요?
정말로 극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전설적인 페스티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잡스러운 배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데 최현정 아나운서는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이 어디에서 열렸다고 알고 계신가요?

우드스탁 페스티벌이니까, 우드스탁에서 열린 거 아닌가요?
최현정 아나운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드스탁이라고 하면 우드스탁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실은 우드스탁이 아닌 뉴욕주의 ‘베델’이라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원래 열리기로 했던 장소의 사람들이 히피들은 방종하고 성에 너무 개방적이고 동성애자들이 말썽을 부릴 거라며 장소 제공을 꺼려했거든요. 근데 베델 지역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엘리엇 타이버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장소를 제공하게 됩니다. 하도 파리만 날리는 모텔을 운영하느라 등골이 휘어가던 우리의 주인공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데 그렇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탄생했다고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죠.

책의 저자인 엘리엇 타이버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군요?
엘리엇 타이버 본인이 직접 출연을 하는 건 아니고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건데요. 디미트리 마틴이라고 국내에서는 생소한 배우고요, 미국에서도 배우보다는 코미디언과 TV쇼 작가로 유명합니다. 영화 출연도 실질적으로는 <테이킹 우드스탁>이 처음이라고 하는데요. 근데 재미있는 건 실제 엘리엇 타이버는 동명의 책에서는 뚱뚱한 체형에다가 평범에서 약간 모자라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묘사가 되는데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호리호리한데다가 꽃미남과의 배우가 출연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실제 타이버보다 영화 속 타이버가 더 호감 가는 인물인 건데, 이렇게 말하면 실제 엘리엇 타이버가 기분 나쁘려나요? 일종의 영화적 조크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록페스티벌이니만큼 영화에서 많은 록뮤지션들의 공연을 볼 수 있겠네요?
<테이킹 우드스탁>의 특징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다루지만 뮤지션들의 공연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사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다룬 작품들은 꽤 있었거든요. 사실 <테이킹 우드스탁> 책이 관심을 끈 건 공연 자체가 아니라 이 페스티벌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예컨대, 엘리엇 타이버의 어머니는 돈에 환장한 여자로 나오거든요. 남편과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재능을 보이는 자식을 볼모로 잡아(?) 모텔을 운영하는 여자인데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랄 수 있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함께 하면서 엘리엇 타이버는 물론 그의 아버지까지도 어머니의 협박 아닌 협박에서 벗어나 진짜 그들 각자의 인생을 찾아 나서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뒷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답게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다루는군요?
이 영화는 우드스탁이 뭔가를 변화시켰다고 신화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성의 순간은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영화는 우리의 주인공이 우드스탁이 벌어지는 동안 약에 취해있는 것처럼 묘사해요. 그것처럼 누군가는 우드스탁을 통해 자유와 평화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느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우드스탁의 공연 자체를 즐겼을 것이며, 또또 누군가는 엘리엇 타이버처럼 삶의 변화를 꾀했을 거라는 거죠. 우드스탁은 이미 끝난 지 오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형태로 남아있다는 거죠.

이안 감독의 최근 작품인 <색,계>와는 굉장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져요.
<색,계><와호장룡> 같은 영화와는 많이 다르죠. 하지만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이지만 미국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족과 동성애는 즐겨 사용하는 소재였죠. <아이스 스톰>처럼 1970년대의 미국 가족의 붕괴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고, <브로큰백 마운틴>처럼 가슴 저린 동성애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요. <테이킹 우드스탁>은 이 두 가지 소재를 모두 다룹니다. 엘리엇 타이버는 동성애자였고 결국 그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니까요. 다만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다소 가볍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테이킹 우드스탁> 역시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FM4U(6:00~7:00)

<좀비랜드>(Zombi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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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 극중 결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좀비는 장르물 역사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사랑받은 존재다. 할리우드에서는 여전히 좀비물이 제작되고 있으며 박스오피스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긴다. 한국에서는 양상이 좀 다르다. 장르물의 가치가 여전히 폄하되고 그중에서도 좀비는 대중의 외면을 받기 일쑤다. 한국에서 좀비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나로호 발사의 성공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다. 또한 좀비영화를 본다는 것은 동네 멀티플렉스로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달리 발품과 돈을 더 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적절한 최근의 예가 바로 <좀비랜드>다.

<좀비랜드>는 지난해 10월 2일 미국 개봉과 함께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 4주간 톱10에 랭크된 전력을 갖고 있다. 11주간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 영화가 한국으로 넘어오니 극장 개봉 없이 DVD로 직행하는 신세가 됐다. 티켓파워를 가진 배우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좀비영화에는 관객이 안 몰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이 좀비물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독 국내 시장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나마 DVD로 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신예 루벤 플레이셔가 연출한 <좀비랜드>는 좀비물의 최근 경향을 모두 반영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요즘 개봉하는 좀비영화가 그러하듯 <좀비랜드> 역시 왜 세상이 좀비들로 넘쳐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 대신 좀비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생존규칙을 제시하며 영화의 문을 연다. (이 부분의 가장 선구적인 작품이라면 소설 <세계 대전 Z>의 맥스 브룩스가 쓴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가 있다. 곧 국내에 번역될 예정이라고 한다.) 순진한 청년 콜럼버스(제시 아이젠버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다. 주변 모든 이들이 좀비로 변해갈 때 그만이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체력 강화에 힘을 쏟을 것! (좀비에게서 멀리 오랫동안 달아나야 하니까) 확인 사살할 것! (머리를 박살내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니까) 안전벨트를 맬 것! (좀비 추격을 따돌렸다고 안심하다가 전복된 차와 충돌해 앞 유리로 튕겨나가 좀비의 밥이 될지 모르니까) 등등.

근데 콜럼버스가 동부의 집을 떠나 서부로 가면서 만나게 되는 이들도 모두 나름의 생존규칙을 가지고 있다. 텔러해시(우디 해럴슨)는 보이는 족족 좀비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낙이요, 위치타(엠마 스톤)는 남자 보기를 좀비 보듯 하며 친구 없이 무료한 삶을 보내는 동생 리틀 록(아비게일 브레슬린)을 위해 놀이동산 구경 시켜주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이렇게 생존규칙이 다르다보니 이들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좀비로부터의 생존을 말하는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따로 놀기 좋아하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하나로 맺어지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

<좀비랜드>의 최종 목적은 주인공 각자가 스스로 정한 규칙을 깨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소통’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스스로 만든 생존규칙은 단순히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갈수록 사람 살기 각박해지는 현대사회에서도 구성원들은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으로 생존해가고 있다. 콜럼버스처럼 바깥세상과 교류를 끊고 집에 쳐 박혀 인터넷 게임 WOW만 일삼는 히키코모리도 있고 외로운 삶을 이겨내려 애완동물에게 온갖 사랑을 쏟는 텔러해시 같은 남자도 있으며 위치타와 리틀 록 자매처럼 남자에 대한 불신을 갖고 살아가는 여자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소통은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근데 생존규칙이 각자의 방식으로 평행선을 긋게 되면 좀비 가득한 세상에 고립된 인간이나 모두 섬처럼 사는 현대사회의 사람들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좀비는 반복적인 삶에 무기력해지고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어가는 현대인들을 은유하는 장치로도 종종 다뤄진다. 이 영화의 제목이 좀비‘랜드’(zombieland)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좀비랜드>를 보며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사이먼 페그, 이 불세출의 콤비가 만든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조지 로메로의 우산에서 벗어나 거대한 정치적 배경 없이 우리 이웃의 각박한 삶을 좀비로 은유한 (거의) 첫 번째 좀비물이었다. 그리고 <좀비랜드>는 그와 같은 주제, 즉 이웃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는 주제를 좀 더 심화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좀비랜드>는 주인공들이 그들 각자의 규칙을 조금씩 깨가면서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결국엔 유사가족을 이룬다는 얘기를 다룬다. (여기에는 청춘 남녀주인공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위해 루벤 플레이셔 감독이 선택한 클라이맥스의 장소는 다름 아닌 놀이동산이다. 표면적으로는 위치타가 동생 리틀 록을 데려다주려는 곳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극중 인물들의 소통이 가장 극대화된 방식으로 이뤄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놀이는 가장 유희적으로 이뤄지는 소통이라는 점에서 놀이동산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혼자 놀지 말고 같이 놀자.’ 비록 그것이 좀비를 사살하는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 와중에 콜럼버스와 위치타는 키스를 나누고, 텔러해시는 가족사에 얽힌 비밀을 밝히며, 함께 있기 거북해하던 이들은 마침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뉴욕 포스트’의 카일 스미스는 <좀비랜드>를 두고 “<행오버> 이후 가장 웃기는 코미디”(The funniest comedy since <The Hangover>)라고 평했다. (그러고 보니 <행오버> 역시 국내에는 DVD로 직행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코미디는 좀비가 주는 공포감을 중화하는 일종의 당의정이라 할만하다. 생각해보면 소통의 진심이 의심받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건 웃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존 경쟁 속에서 웃음은 현실에 핍박받는 서로간의 불신과 의심을 불식시키는 당의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사람 되기 힘들어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고 했나. 루벤 플레이셔 감독은 좀비가 되기 싫으면 웃음을 잃지 말자고 말한다. 그것이 곧 소통의 지름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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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6.21)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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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책을 영화화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는 제작 단계부터 악소문에 시달린 영화였다. 그것은 모두 연출자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바꿔 모리스 샌닥을 분노케 했다는 얘기부터 너무 난해하게 찍은 까닭에 제작자가 직접 편집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심지어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국내에는 극장 개봉 없이 DVD로 직행했다. 그런 전차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형편없는 작품인가? 전혀!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아닐지 몰라도 그가 아니면 도무지 만들 수 없는 영화라는 점은 확실하다.

일단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관련한 스파이크 존즈의 오해부터 풀자면, 그를 연출자로 결정하는데 가장 목소리를 높인 인물은 바로 모리스 샌닥이다. 샌닥은 오래전부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실사 영화를 기획해왔다. 과거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이에 실망한 샌닥은 괴물의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사가 낫다고 판단했다. 단, 실사 화면에 괴물을 CG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라이브 액션이어야만 했다. 샌닥의 기획 의도처럼 스파이크 존즈 역시 애니메이션을 주장하는 제작사에 맞서 실사를 주장하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을 이루었다.

영화화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스파이크 존즈의 색깔이 원작의 오라(aura)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굳이 예로 들자면 미셸 공드리의 감성과 공유되는 것이기도 하다. 수공업적인 형태의 제작 방식, 즉 사람이 괴물의 탈을 쓰고 연기함으로써 풍겨나는 인간적인 따뜻함은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 할만하다. 스파이크 존즈가 거대한 인형의 형태로 구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울까 걱정의 시선이 없었던 게 아니다. (바로 그 이유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감독에 대한 악소문을 키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웬걸, 인간이 탈을 쓰고, 여기에 미세한 표정과 행동을 CG로 더해 되살려낸 괴물의 실체는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스파이크 존즈가 죽어도 라이브액션을 고집한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올해 전주영화제 기간 중 극장에서 두 차례 상영된 적이 있다. 당시 직접 관람했던 어느 영화평론가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란다. 괴물의 첫 등장에 잠시간 숨죽이던 아이들이 주인공 맥스(맥스 레코즈)와 괴물들이 어울리는 장면에서 벌떡 일어나 상영관을 마구 뛰어다니며 박장대소를 하더란다. 사실 원작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장난이 심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방에 갇힌 맥스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갔다 와 보니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러니까 간단한 원작의 이야기와 샌닥이 그린 20장 정도의 그림을 토대로 101분의 상영시간을 채우는 건 순전히 맥스와 괴물간의 소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맥스와 괴물 모두 친구가 된 기쁨에 못 이겨 숲을 파괴하고, 서로 놀이를 한답시고 일부러 나무에 생채기를 내며, 피곤에 못 이겨 잠을 잔다는 것이 탑을 쌓듯 서로 뒤엉키는 등 이건 아이들의 감수성이 아니면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디테일이다. 하여 아이들이 더 적극적이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그만큼 스파이크 존즈의 눈높이가 동심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 등은 모두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놀기 좋아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소유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조금 관계없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혹자는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소피아 코폴라(<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마리 앙투아네트>)와 그가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스파이크 존즈의 유아스러운 감수성을 들기도 한다. 아이 같은 성향이 예술적으로 발휘될 때는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그것만큼 여자를 힘들 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요는, 아이들의 심정은 아이(?)가 알아본다고 할까.

스파이크 존즈는 괴물의 실사화 작업에 신경을 쓴 만큼이나 주인공을 맡은 맥스 레코즈의 심리를 안정시키는데도 주력했다. 그런 까닭에 현장에는 늘 아이들로 넘쳐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DVD 스페셜 피처로 수록되어 있는 제작기 ‘Series of “Where the Wild Things Are” Short by Lance Bangs’ 중 한 장(章)에는 현장이 왜 아이들로 넘쳐났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래도 메이저 영화에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어린 나이의 맥스 레코즈에게는 현장의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고 존즈 감독은 말한다. 근데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게 꼭 맥스 레코즈만을 위한 분위기 조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은 ‘Series of “Where the Wild Things Are” Short by Lance Bangs’의 내용은 현장에서 감독을 비롯해 스태프들과 아이들의 장난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촬영 막간 흡혈귀 분장을 한 스파이크 존즈가 맥스 레코즈를 뒤에서 습격, 놀래어 살해(?)하는 에피소드나 생일을 맞은 감독을 위해 현장을 무섭게 연출, 깜짝 파티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스태프들의 제작 비화는 그대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감성을 대변한다. 영화의 결말부,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 맥스를 향해 괴물들이 아쉬워하며 내뱉는 “가지 마, 널 먹어버릴 만큼 좋아한단 말이야”와 같은 대사는 감수성이 메마른 어른들의 동심마저도 되살려낼 만한 수준인 것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동을 타깃삼은 가족영화다. 다만 할리우드가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가족용이라고 해서 절대 어른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주요한 이미지는 바로 ‘동굴’이다. 이 이미지는 맥스가 계속해서 자기만의 요새 속으로 숨어드는 심정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이처럼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맥스나 그들만의 섬에 갇혀 사는 괴물은 어떤 면에서 소외된 자와 닮았다. 그들이 동굴처럼 좁은 곳으로 몸을 숨기는 이유는 고립을 강조해 역설적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항의의 성격을 지닌다. 또 한 편으로는 소외된 자들끼리 그들만의 이상향을 건설해 고립의 벽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래서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도 괴물들과 함께 그들만의 요새를 건설하려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맥스는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결국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자기 안팎의 고립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자는 주제를 설파한다. 가족 해체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유효한 메시지인 것이다.

스파이크 존즈는 항상 고립된 자들의 이야기를 즐겨 다뤄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와 로테 슈와츠(카메론 디아즈)는 부부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심적 공허감으로 외로운 인물들이었고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니콜라스 케이지)은 대중들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 증세를 겪는 무명작가였다. 결코 많지 않은 작품이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오라는 격려이고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에게 좀 더 손을 뻗어줄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다르지 않다. 비록 한국에서는 DVD로만 출시돼 역설적으로 소수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굳이 많은 이들이 찾아볼만한 가치를 지닌 영화다. 특히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말하는 메시지를 감안하면 그냥 묻히기에는 아까운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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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6.9)

<이웃집 좀비> 새로운 장르적 감수성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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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좀비>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이미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비롯해 2관왕의 영예를 안으며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가 드디어 개봉을 확정했다. 좀체 한국에서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았던 좀비물인데다가 2000만 원대의 초저예산으로 제작됐지만 <이웃집 좀비>가 2010년의 한국영화계에 던지는 의미 하나만큼은 블록버스터 급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좀비종합선물세트

<이웃집 좀비>는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영화다. 첫 번째는 <틈 사이>. 피규어 마니아가 혼자 있는 방에서 좀비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성영화처럼 묘사한다. 두 번째는 <도망가자>. 좀비로 변해가는 남자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여자의 코믹한 러브스토리다. 세 번째는 <뼈를 깎는 사랑>. 좀비로 변한 엄마를 위해 살을 도려내고 피를 뽑아내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네 번째는 <백신의 시대>. 백신을 개발한 과학자가 이를 뺏으러 온 괴한과 사투를 벌이는 히어로물이자 액션영화다. 다섯 번째는 <그 이후… 미안해요>. 좀비 바이러스 제거 이후의 세상이 배경으로, 좀비였던 남자가 인간으로 돌아온 후 겪는 차별을 다룬다. 그리고 여섯 번째 <폐인 킬러>. 마감에 쫓기는 남자(혹은 좀비)의 강박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자 영화의 크레디트이다.

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기에 앞서 여섯 개의 ‘단편‘이 아니라 여섯 개의 ’에피소드‘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웃집 좀비>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이웃집 좀비>는 좀비를 주제로 한 여섯 개의 각기 다른 단편을 모은 작품이 아니다. 좀비라는 공통 소재 외에도 여섯 개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관통하는 일정한 흐름을 갖는다. 이미 간략한 줄거리를 보고 눈치를 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웃집 좀비>는 ‘좀비 바이러스의 발생에서부터 제거 이후’를 시간 순으로 따른다. 떨어뜨려 놓아도 단독 작품으로 무방하지만 여섯 개의 토막(Episode)난 이야기들이 연대기 속에서 하나의 영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4명의 공동 각본, 연출이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이웃집 좀비>는 오영두, 장윤정 부부, 류훈, 홍영근 4인으로 이뤄진 영화제작집단 ‘키노망고스틴’의, 에 의한, 을 위한 작품이다. <틈 사이>와 <도망가자>는 오영두 각본과 연출, <뼈를 깎는 사랑>과 <폐인 킬러>는 홍영근 각본과 연출, <백신의 시대>는 류훈 각본과 연출, <그 이후… 미안해요>는 장윤정 각본과 연출이고 촬영 장소는 <백신의 시대>만 제외하면 오영두, 장윤정 부부의 살림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홍영근은 연기를, 류훈과 오영두는 촬영을, 장윤정은 특수 분장을 겸업(?)하며 2000만 원대의 제작비를 가지고 각 에피소드 당 최대 3일의 촬영 기간을 넘기지 않으면서 그럴싸한 좀비영화를 완성했다.

특히 좀비물은 창작자의 취향을 심하게 타기 마련인데 <이웃집 좀비> 역시 예외는 아니다. <틈 사이>가 고함 소리 외에 대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무성영화의 구조를 띤다면 <도망가자>는 사랑 고백 도중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눈알처럼 B급영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뼈를 깎는 사랑>은 제목 그대로 고어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사 도중 몇몇 사람이 잔인한 장면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또한 <백신의 시대>와 <그 이후… 미안해요>는 각각 액션과 사회고발의 성격을 섞어 기존 좀비물의 베이스 위에 또 하나의 재미를 얹혀놓는다. 이처럼 <이웃집 좀비>는 좀비물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각기 다른 색깔과 장르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 이후… 미안해요>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조지 로메로가 <살아난 시체들의 밤>(1968)으로 현대 좀비영화의 대중화를 연 이후 좀비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눈에 띄는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조지 로메로가 <살아난 시체들의 밤>으로 미국 사회의 병폐를 은유한 이래 좀비는 학습 능력을 갖추기도 하고(<시체들의 낮>(1985)) 뛰는 것에도 익숙해졌으며(<28일 후>(2003)) 전 세계로 퍼져 로컬 좀비물이 쏟아져 나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최근 좀비물의 경향은 과거와는 또 다르다. 이전의 좀비물이 주로 장르의 재미 측면에서 발전을 거듭해왔다면 근래 등장하는 작품들은 좀비를 현실 깊숙이 개입시킨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도입한 <REC>(2007)를 기점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한 이때 좀비물은 시대를 반영한 풍자로, 집단의 무의식에 스며든 공포의 발현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이웃집 좀비>의 출발도 바이러스다. 신종플루의 기세가 한풀 꺾인 이후 찾아온 ‘좀비 바이러스’의 출현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결국 이 모든 사태의 이면에 도사린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와 비리를 전제로 한다. 물론 <이웃집 좀비>는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만 신종플루와 관련한 제약회사의 음모론이 실제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생활형 좀비물’로 각광받는 <이웃집 좀비>의 현실감을 극적으로 높이는 장치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장르적 재미에 충실한 가운데 사회적 메시지가 짙은 <그 이후… 미안해요>가 유독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웃집 좀비>는 실제 오영두, 장윤정 부부의 옥수동 집에서 촬영됐다. 한정된 장소를 가지고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공간인양 영화적 속임수를 쓰는데 여기를 벗어나는 에피소드는 <백신의 시대>와 <그 이후… 미안해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신의 시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다른 장소에서 촬영됐고 <그 이후… 미안해요>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심리적인 스케일을 외부로까지 확장한다. 이 에피소드는 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쫓기는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좀비였다가 인간으로 돌아와 소수자로 전락한 이들의 힘겨운 세상살이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이후… 미안해요>는 <이웃집 좀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이웃집 좀비>는 ‘좀비’보다 ‘이웃집’에 무게중심이 기울어진 영화다. 그 때문에 좀비의 활약상(?)을 기대한 이들에게 다소 심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박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발산하는 매력의 정수다. <이웃집 좀비>의 좀비들은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공권력이라는 무시무시한 총구 앞에서 보호해야할 내 애인(<도망가자>)이자 우리 부모(<뼈를 깎는 사랑>)이고 지켜내야 할 백신(<백신의 시대>)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막강해진 국가권력 앞에서 항의해야할 목소리를 잃고 시위해야할 수족을 잃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이웃집에 소수자가 살아도 박해하지 않고 이에 대한 편견에 대해 그것이 편견이라고 말할 줄 아는 태도가 이 영화에서 목격된다.

<이웃집 좀비>는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좀비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 한국의 좀비물들은 그 시도 자체가 영화의 의미와 등치될 만큼 이벤트성이 강했을 뿐더러 세계적인 조류에서 멀리 떨어진 좀비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웃집 좀비>는 다르다. 최근의 경향을 그대로 따르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눈매마저 날카롭게 세운다는 점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이라고 불러도 마땅한 것이다.


저예산의 한계를 극복한 장르 문법

<이웃집 좀비>가 보여주는 새로운 감수성의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은 장르성이다. <이웃집 좀비>는 저예산 독립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저예산의 한계를 장르 문법에 기반을 둔 이야기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 이는 최근의 독립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기도 하다. 지난 한해 개봉했던 독립영화를 보더라도, 김태곤 감독의 <독>은 행복한 가족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공포로,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권태기 부부의 이야기를 외계인 남편과 지구인 부인이라는 SF적 설정으로,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결투가 허용된 가상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남자의 대결을 액션물로 풀어가며 두드러진 장르적 경향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2009년 독립영화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워낭소리>와 <똥파리>의 전국적인 흥행보다 장르에 방점을 둔 독립영화의 출현이라고 보는 쪽이다. 장르영화는 감독과 관객 간에 화술과 스타일에서 어떤 규칙을 전제하는 까닭에 관객의 흥미를 쉽게 끌어내기 용이하다. <이웃집 좀비>처럼 장르적 범위 안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용인하는 방식은 좀비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 영화가 관객의 거부감을 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장르영화는 굳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제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장르 규칙에 대한 강제성이 크지도 않아 이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로 기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저예산에 맞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장르가 저예산으로 가능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웃집 좀비>가 이미 증명한 바, 이름난 배우의 섭외, 컴퓨터그래픽의 사용, 거액의 제작비 없이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용이하고 볼거리를 강화할 수 있기에 장르만큼 적합한 용기는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해, 색다른 소재와 파격적인 설정에 드라마를 끼워 맞추는 대신 이야기에 장르성을 강화하고 그 속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야 독립영화도 좀 더 지속적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가 쉬워질 것이다. 

<이웃집 좀비>에서 특히 두드러진 장르적 움직임은 독립영화계의 변화한 인식을 가늠케 한다. 주류 영화계와는 차별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는 예전과 변함이 없지만 이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대중친화적인 사고의 폭이 유례없이 넓어진 게 사실이다. <생산적 활동> <경축! 우리사랑>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점균 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다. “이야기를 가장 흥미 있는 방법으로 전달하는 할리우드 장르 문법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야 한다. 단지 할리우드 것이라고 틀에 박힌 이야기, 전형적인 구성이라고 깎아내릴 건 아니다. 저예산영화들도 필요하다면 할리우드 장르를 적극 받아들여 관객에게 어필해야 한다.” 일상 생활 속에 침투한 생계형 좀비라는 장르적 설정으로 무장한 <이웃집 좀비>가 2월 18일 관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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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2.15)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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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의 셜록 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캐릭터를 두고 말들이 많다.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캐릭터이자 추리형 탐정인 그를 액션영웅으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다. 어느 평자는 ‘이런 농담 같은 영화가 다 있냐’며, 어느 소설가는 ‘홈즈는 성룡이 아니다’라며 셜록 홈즈의 변신(?)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주먹질에 능한 홈즈의 모습을 부각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왓슨(주드 로)과 짝을 이뤄 젊은 여자를 비밀 종교의식의 제물로 바치는 연쇄살인마 블랙 우드(마크 스트롱)를 말 그대로 때려눕히는 것. 블랙 우드는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무덤에서 되살아나며(?) 홈즈와 왓슨은 괴이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에 홈즈가 평생에 걸쳐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아이린(레이첼 맥아담스)이 가담하면서 일은 점점 더 꼬여만 간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내치> 등으로 유명한 가이 리치 감독은 코난 도일이 쓴 소설 속 그대로의 셜록 홈즈를 재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시대가 한참 변한 만큼, 또한 영화가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만큼 셜록 홈즈 역시 현대적인 캐릭터에 걸맞은 위용을 뽐낸다. 액션영웅의 면모는 밝힌바 그대로고 홈즈와 왓슨의 관계 역시 우리가 알던 주인공과 조력자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넘어서 게이 커플이 아닐까 의심을 살만큼 동등한 관계로 급진전을 이뤘다. (왓슨이 홈즈에게 주먹을 날리기까지 한다!)

이는 셜록 홈즈 세계에서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다. 셜록 홈즈는 소위 패러디라 불리는 안작(贋作)소설이 가장 발달한 시리즈다. 홈즈를 사랑하는 작가들이, 팬들이 그들 각자의 셜록 홈즈 소설을 완성한 것. 역사가 아주 깊어서 최초의 셜록 홈즈 안작소설은 이미 코난 도일이 살아생전이던 1892년에 발표된 <페그람의 수수께끼>이다. 그 후 코난 도일이 1893년에 발표한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가 목숨을 잃자 (이때 함께 라이헨바흐 폭포에 뛰어들었던 모리아티 교수는 영화 <셜록 홈즈> 2편의 악당으로 예정된 상태다!) 그 충격에게 헤어나기 위해 팬들이 직접 안작소설을 ‘마구잡이’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셜록 홈즈 소설의 하위 장르가 된 것이다.

<Y의 비극>의 앨러리 퀸은 서른 두 편의 안작소설을 모아 <셜록 홈즈 앤솔로지>를 편집했고 최근 들어 국내 출판계에도 미치 컬린의 <셜록 홈즈의 마지막 날들>, 칼렙 카의 <셜록 홈즈 이탈리아인 비서관> 등 홈즈 안작소설이 활발하게 번역, 출간되는 실정이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셜록 홈즈 캐릭터의 기본 설정은 갖추되 기존 이미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주를 꾀한다는 것이다. 공포소설에 가까운 작품이 있는가 하면(<셜록 홈즈의 유언장>) 홈즈가 93세라는 노령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 심지어 홈즈와 왓슨이 게이 커플로 등장하는 팬픽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 역시 전혀 말이 안 되는 영화가 아니다. <셜록 홈즈>는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 안작인 셈이다. 오히려 가이 리치가 이야기의 변주는 꾀하였을지언정 홈즈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는 굉장히 충실한 편이다. 4편의 장편과 53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대부분 영화 속에 포함되어 있을뿐더러 (개인적으로 베이커가 특공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먹질에 능한 모습만 하더라도 실제로 홈즈는 수준급의 복싱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코난 도일의 작품 속에 묘사되고 있다. 더군다나 가이 리치는 홈즈의 액션도 사실은 추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홈즈가 극중 권투경기를 치르면서 주먹을 날리기 전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어디를 가격할지 머릿속으로 미리 계산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 다만 셜록 홈즈라고 하면 추리 능력이 더 부각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달리 액션 영웅적 면모가 더 강조되는 까닭에 일부 홈즈 팬들의 불만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느끼는 <셜록 홈즈>의 불만은 굳이 가이 리치여야 했나는 점이다. 이왕 홈즈 소설의 변주를 꾀할 생각이었으면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나 <스내치> 버전으로 갔어도 좋을 듯 했다. 물론 극중 홈즈의 복싱 장면처럼 의도적인 시간 비틀기를 통한 가이 리치만의 장기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일부에 그칠 뿐이다. 특유의 베베 꼬인 스토리에 발맞춘 MTV적인 현란한 편집이 더욱 강조됐다면 더 완벽한 가이 리치만의 셜록 홈즈 안작영화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홈즈는 홈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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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여배우들>(The Actre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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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배우들이다.’ <여배우들>의 본편이 상영되기 전 자막으로 제시되는 문구는 이 영화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여배우들>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제3의 그것, 바로 여배우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인 것이다.

2008년 12월 24일 모 사진 스튜디오에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이 집결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6인’이라는 표제 하에 패션지 VOGUE의 2009년 1월호 표지의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위해 모인 것. 하지만 자칭 타칭 자존심 강한 6인의 여배우가 한자리에 모이자 촬영이 순조롭지 못하다. 윤여정은 다른 동년배 배우의 대타로 이 자리에 낀 것 같아, 이미숙은 사진 촬영 자체가 성격상 견디기 힘들어, 고현정은 스타 티를 노골적으로 풍기는 최지우가 맘에 들지 않아, 최지우는 툭하면 시비를 걸고 들어오는 고현정이 얄미워서, 김민희는 전날까지 이어진 해외 촬영으로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김옥빈은 선배들의 눈치를 보느라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이다.

<여배우들>의 이재용 감독은 무대 위의 여배우들이 아닌 무대 뒤편의 여배우들, 풍문으로는 떠돌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여배우들의 진솔한 속내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5대의 카메라가 분주한 촬영 현장을 이리저리 뛰어가며 잡아낸 <여배우들>의 영상은 흡사 <클로버필드>에 육박하는 어지러움을 선사할 정도다. 다르다면, <클로버필드>가 파괴현장의 중심에 관객이 직접 서있는 느낌을 이미지적으로 제공한다면 <여배우들>은 여배우들의 심정에 관객들이 최대한 몰입하게끔 감정적으로 밀착하게 기능한다.

<여배우들>이 펼치는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물론 윤여정의 이혼 사유와 같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유의 가십성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평생을 여자로 살고 싶다는 이미숙의 고백은, 마땅한 작품이 없어 미래가 불투명한 김민희의 고민은 여배우라는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좋을 만큼 인간적인 측면에서 감정적인 동화를 선사한다. 특히 기가 세다고 소문난 이미숙과 고현정이 이혼 이후 여배우 삶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여배우들>의 제작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낸 대목이라 할만하다.

다만 이것이 온전히 실제 상황이라고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도입했고 배우들의 즉흥 연기가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각본에는 여섯 명 배우의 이름이 모두 크레딧에 올라있다!) <여배우들>은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배우가 그 자신을 연기하는 엄연한 픽션이다. 예컨대, 극중 VOGUE의 촬영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고현정과 최지우의 갈등은 각본에 이미 설정된 것들이다. 극의 흐름만 하더라도 무대의 앞과 뒤를 나누어 계산한 티가 역력하다. 전반부가 패션지 화보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면 후반부는 사회자가 없는 토크쇼를 보는 것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이다.

하여 <여배우가>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현기증은 감각의 현기증이라기보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든 이성적인 현기증에 가깝다. 아무리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6인이 진실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설정이 끼어들었음을 자명하다. 고현정과 최지우의 갈등이 창밖의 눈 내리는 광경으로 조성된 판타지적인 분위기로 갑작스럽게 해소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배우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다. 스크린을 통해 비치는 여배우들의 화려한 면모는 그렇게 비현실적일 수 없지만 스크린을 떠난 그들의 모습에는 현실의 아우라가 짙게 깔려있다. 다시 말해, <여배우들>이 보여주는 여배우는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경계인에 가깝다. 이 영화가 어지럽게 느껴진다면 여배우들이 그만큼 현기증 나는 존재라는 뜻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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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5)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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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상상을 현실로 재현하는 첨단의 엔터테인먼트지만 한편으로는 스펙터클한 이미지 뒤로 미국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전파하는 전령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적 보수주의의 가치를 설파하는 두 편의 영화, <크리스마스 캐롤>과 <2012>가 개봉했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보수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이를 드러내는 태도는 천양지차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언제나 영상의 신기술 도입에 가장 빠른 대처를 보여줬던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은 <폴라 익스프레스>(2004) <베오울프>(2007)에 이어 <크리스마스 캐롤>로 ‘퍼포먼스 캡션’의 정수를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천하의 구두쇠로 악명을 날리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크리스마스 새벽에 찾아온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만나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명약관화하다. 빈자와 약자, 그리고 힘없는 자를 보살펴 도와 천국의 삶에 이르라는 것.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은 이것이 기독교의 가치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스크루지를 찾아오는 유령의 형상 중 하나가 백인 예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God Bless You!’ 바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다.

로버트 제메키스의 영화를 꾸준히 보아온 관객에게 이런 종류의 메시지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포레스트 검프>(1994) <콘택트>(1997) <캐스트 어웨이>(2000)를 통해 미국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옹호했다면 <폴라 익스프레스>를 기점으로 급격히 훼손되고 있는 미국의 가치에 대한 풍자적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를 테면, <베오울프>에서 미국의 자존심과 다를 바 없었던 독보적 영웅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음을 반영한 것에 더해 <크리스마스 캐롤>에서는 미국의 훼손된 가치의 복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메시지와 첨단의 이미지 간의 상관관계다.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든다. 할리우드 특유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말초적 감각을 자극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정보를 주입한다. 로버트 제메키스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실사에 끌어들였고 <포레스트 검프>에서 CG 합성의 새 영역을 개척했으며 <폴라 익스프레스>에서는 퍼포먼스 캡션을 끌어들였다. 매 작품 업그레이드되는 특수영상 기술에 맞춰 제메키스의 메시지는 더욱 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대신 이미지는 더 현란해지고 더욱 화려해졌다.

그에 반해 <2012>의 롤랜드 에머리히는 거대한 이미지 자체가 메시지인 영화를 만든다. <해운대>의 쓰나미 따위 우습다는 듯 현존하는 재난은 모두 끌어들여 지구 전체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 기저에는 어떤 우월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만이 세계 평화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거대한 파괴의 이미지로 보는 이의 불안감을 조장한다. 불안감은 구원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2012>를 위시한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는 팍스 아메리카나로써 지구를 재건할 백인 구원자의 아우라를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와 로버트 제메키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메시지를 위해 볼거리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겉보기엔 닮았다. 하지만 볼거리에 담긴 메시지의 가치는 같은 듯 다르다. <2012>가 보수주의적 가치를 앞세워 무시무시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전파한다면 <크리스마스 캐롤>은 말 그대로 기독교적 보수주의, 즉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한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노림수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면 로버트 제메키스는 적어도 자신이 옹호하는 가치에 솔직하다. 에머리히의 영화가 오로지 박스오피스의 숫자로 평가받는 것에 반해 제메키스의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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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Whit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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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충무로의 일본 소설 판권 경쟁 속에서 (<검은집> 이후) 가장 먼저 영화화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국내에 불어 닥친 일본 장르문학의 유행 속에서 유난히 각광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인데다가 한석규, 손예진과 같은 톱스타가 출연한 까닭에 근래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흑과 백이 강렬히 대비한 포스터처럼 영화는 미호(손예진)가 벌이는 대낮의 섹스신과 요한(고수)이 저지르는 한밤의 살인 장면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작한다. 이렇듯 대비와 교차는 <백야행>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말이다. 과거의 사연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사는 미호가 빛을 상징한다면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요한이 어둠을 의미하고, 이들의 현재가 14년 전의 어떤 사건과 수시로 교차하는 가운데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야심과 스케일과는 달리 박신우 감독은 썩 만족할만한 완성도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백야행>은 시종일관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미호와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상당 부분 쳐내고도 설득력이 부족한 인상을 준다면 이는 우선적으로 각색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다.

<백야행>은 출소 직후 살해당한 한 남자의 과거와 연관된 미호와 요한의 사연을 쫓는 장르적 구조를 취하지만 실은 이들의 사랑이 품은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 신파드라마에 가깝다. 원작 역시 하얀 눈처럼 차갑고 이기적인 미호 곁을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요한의 조건 없는 순애보적 사랑이 작품의 정서를 좌우했다. 특히나 그럴 수밖에 없는 미호와 요한의 사연이 사건을 둘러싼 심리적 묘사로 축적된 것에 반해 영화에서는 오로지 사건의 압축적 설명으로 제시되는 까닭에 관객들로 하여금 감정의 동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단 하나, 미호와 요한, 현재와 14년 전의 사건을 매개하는 형사 동수(한석규)의 역할은 원작과 달리 설명자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미호와 요한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그다. 다만 영화는 미스터리를 지향하지만 추리과정은 오로지 동수의 설명과 그의 기억에만 의지할 뿐이다. 무엇보다 요한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그의 사정을 대변하는 동수의 신파조 웅변은 <백야행>이 미스터리적 쾌감과 심리 묘사보다 설명적 대사에 의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만하다.

<백야행> 관련한 많은 리뷰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기계화된 연기’에 대한 불만 역시 이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극중 캐릭터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기 보다 짜인 각본에 연기를 맞춘 티가 너무 눈에 띄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감독의 책임이다. 연기에 대한 통제가 거의 실종됐다싶을 정도로 배우들은 대사만 읊고 표정만 지을 줄 알았지 감정을 담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딱 하나다. 심리보다 사건의 전개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이는 일본소설, 특히 일본의 장르문학을 원작 삼은 한국영화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패착 요인 중 하나다. 일본 장르문학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단순히 장르적 이야기의 탄탄함 때문만이 아니다. 복잡한 사건에 대한 기계적인 해결보다 이에 반응하는 캐릭터의 심리와 정서가 설득력 있게 제시된 까닭이다. 바로 그 점이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매력이자 정수임을 영화 <백야행>은 간과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백야행>이 얻은 유일한 성과라면, 앞으로 대기 중인 일본 장르문학 원작의 한국영화들을 향한 반면교사 역할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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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시간 여행자의 아내>(The Time Traveler’s W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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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오드리 니페버거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목에서처럼 시간 여행을 다루지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SF가 아니다. 각본을 맡은 브루스 조엘 그린은 <사랑과 영혼>(1990)에서 보여줬던 장기를 되살려 판타지 요소 다분한 러브스토리로 이야기를 각색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헨리(에릭 바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 클레어(레이첼 맥아덤즈)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클레어가 여섯 살일 때 둘은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것. 헨리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렇다고 클레어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시간 여행이 가능했던 헨리는 금세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이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시로 일어나는 까닭에 클레어와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여행은 주된 목적이 아니다.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물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헨리가 어떻게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같은 시공간 안에 동일인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 등등 과학적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오로지 둘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백 투 더 퓨처>(1985)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등 그간의 시간 여행 소재 장르에서 보았던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불경한 호기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굉장히 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 영화와 달리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적인 운동이 극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는 눈에 뚜렷이 보이는 사건이 없다. 대개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역사적 사실을 흐트러뜨린 후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사건을 다뤘다면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해진 운명에 복종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소박한 감정을 우선한다. 그래서 클레어 앞에 나타난 시간 여행자 헨리는 미래의 사건을 알려주는 예지자라기보다는 앞으로 닥칠 위기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감정 치료사에 더 가깝다.

헨리가 치료로 내세우는 건 다름 아닌 기다림. 기다림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 안 그래도 클레어가 헨리에게 배우는 가장 중요한 감정의 원천은 기다림이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헨리를 마음에 품은 클레어는 시간여행을 하는 그를 늘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며 미래에도 기다릴 것이다. 헨리의 죽음 이후 슬픔을 곱씹는 클레어를 위에서 내려 보는 카메라가 초침 소리에 맞춰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촬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운명론을 바탕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선천적 운명으로 결정되며 이를 결코 초월할 수 없다는 세계관을 기저에 깔고 있다. 오프닝에서 어린 헨리는 엄마의 차 사고를 목격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사건을 되돌리려는 헨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헨리 역시도 자신의 죽음을 아는 순간까지도 이를 피하려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 스스로 이를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줄 뿐.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high angle shot)를 중요하게 사용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의 삶은 결코 하늘의 시선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명론은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과 결합하면서 이상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를 낭만적인 기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헨리가 여섯 살의 클레어 앞에 나타나 운명적 사랑을 예고할 때부터, 비록 헨리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지만 가족 앞에 다시 나타나 영원한 사랑을 암시할 때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가 러브스토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증명해 보인다. 언제가 만나게 될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다린다는 설렘은 얼마나 짜릿한가! 원작소설의 SF적 설정은 시간 여행만 제외하고 모두 지워버린 탓에 SF물로써는 낙제점에 가깝지만 러브스토리의 측면에서는 꽤나 볼만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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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