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라>(Gomor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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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티브’의 미셸 시망은 2008년의 영화를 꼽는 자리에서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를 수위에 놓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고모라>는 이탈리아 정치영화의 뛰어난 귀환을 의미한다. 사회 곳곳에 파고든 범죄의 심각성을 모자이크 스타일의 구성을 통해 폭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미셸 시망의 극찬은 동명의 원작 소설가 로베르토 사비아노가 극중 범죄조직 ‘카모라’로부터 위협을 받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영화화를 밀어붙인 마테오 가로네의 용감함에 기초한다.  

<고모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폴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항의 면모를 품은 곳도, 피자 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낭만적인 여행지도 절대 아니다. 죄악과 탐욕으로 몰락한 성경의 ‘고모라’처럼 나폴리 역시 도시 곳곳에 스며든 악의 세포로 빠르게 쇠락해가는 중이다. 특히 마약과 매춘은 물론이고 패션 산업과 심지어 쓰레기 처리까지, 나폴리를 근거지 삼아 이탈리아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카모라의 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러다보니 카모라의 범죄에 개입된 인물은 특별히 너나 할 것 없다. 위로는 카모라의 수장부터 아래로는 빈민가의 어린아이까지 나폴리는 도시 전체가 카모라가 뿌려놓은 범죄의 거미줄로 카르텔 되어있을 정도다. 그래서 마테오 가로네는 10여 명이 넘는 인물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특유의 피라미드 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가로축으로는 카모라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두 소년을, 세로축으로는 조직을 위해 의상실을 운영하는 중년남자를 위치시키고 그 주변으로 가난하고 평범한 이웃들을 점점이 박아놓아 일상이 범죄인 나폴리의 충격적인 실상을 그려나간다.

이들의 행위는 결국 지독한 가난을 벗고 어떻게 해서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싶다는 이탈리아의 집단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평범한 이들의 검은 욕망은 카모라와 같은, 시칠리아 마피아의 세력을 훨씬 뛰어넘는 범죄조직이 암약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토양으로 기능한다. 극중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을지언정 결코 성취할 수는 없다. 철저히 카모라의 이득을 위해서만 그 욕망이 존재 가치를 가질 뿐 쓰임새가 없어지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폭력을 동반한 검은 욕망은 가난으로 대물림되고 그 와중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를 살상하는 현대판 고모라의 신화가 완성하는 것이다.

<고모라>가 소설의 영역에, 영화의 영향력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카모라의 폭력 카르텔이 만 천하에 폭로된 까닭이다. 원작자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수년간의 잠입 취재를 통해 카모라의 조직체계와 핵심인물, 범죄 수법을 폭로하는 탐사저널리즘의 개가를 일궜고 (소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열 살도 안 넘은 꼬마 아이가 카모라에 들어가겠다며 방탄복을 입고 총알을 막아내는 충격적인 신고식의 실상을 알 수 있었을까?) 감독 마테오 가로네는 뛰어난 영화화로 전 세계가 나폴리의 실상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원작자와 감독은 여전히 카모라의 협박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화가 현실을 뒤바꿀 수는 없겠지만 현실에 관심 갖도록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고모라>는 증명한다. 2008년의 영화일 뿐 아니라 2000년대를 대표하는 범죄영화의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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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

<밀크> 하비 밀크의 시대를 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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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은 1998년 이미 하비 밀크와 관련한 영화를 기획한 적이 있다. <The Mayor of Castro Street>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위해 구스 반 산트는 하비 밀크 역에 숀 펜, 정적인 댄 화이트 역에 톰 크루즈를 캐스팅 물망에 올려놓고 워너브러더스사의 제작 승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워너브러더스는 어쩐 일인지 제작을 망설였고 그렇게 표류하던 하비 밀크 프로젝트는 2008년 새롭게 <밀크>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어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와는 다른 연출

<밀크>라는 제목은 미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게이 정치가 하비 밀크(Harvey Milk)에게서 따왔다. 영화는 하비(숀 펜)가 뉴욕에서 만난 애인 스코트 스미스(제임스 프랭코)와 샌프란시스코에 터를 잡은 1970년부터 전직 시의원 댄 화이트(조쉬 브롤린)에게 살해당하는 1978년까지를 다룬다. 하비가 샌프란시스코의 시의원이 되는 과정과 시의원이 된 후 정치적인 활약상에 집중하는 영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건 유서를 녹음하는 하비 밀크의 음성이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거점 삼은 게이 커뮤니티와 관련한 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오프닝을 여는 <밀크>가 보여주는 첫 장면은 죽음을 예감한 하비 밀크가 뒤에 남을 동료들에게 남기는 전언이다. 녹음기를 앞에 두고 “지금 녹음하는 이야기는 내가 죽은 후 듣게 될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하비 밀크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음성은 이 영화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이야기임을 알리는 선언에 가깝다. (이와 관련한 얘기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이는 또한 감독의 영화적 선언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밀크>가 구스 반 산트의 최근 몇 작품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구성을 띤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독은 이미 전작 <엘리펀트>(2003) <라스트 데이즈>(2005)를 통해 죽음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구스 반 산트는 죽음을 전후한 순간이야 말로 그 사람에 대한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죽음을 지렛대 삼아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밀크>와 전작들 간에 큰 차이를 보인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파편화된 이미지로 시어(詩語)에 가까운 영화 언어를 구사한다면 <밀크>의 언어는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신화화하지 않는 객관적인 기록에 가깝다. 아마도 이 차이는 해당 인물(혹은 사건)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에서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예컨대,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각각 다루고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과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바가 없는 사안에 속한다. 반면 하비 밀크의 공식적인 시의원 활동은 채 1년이 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정체는 뚜렷해 관객은 이 영화가 주는 의미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하여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다수의 주관적인 시점과 몇 가지 행적을 토대로 한 재구성에 가깝다면 <밀크>는 사료 고증에 철저한 재현, 즉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숀 펜 생애 최고의 연기

<밀크>는 한편으론 극영화가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을 취할 때 ‘배우는 어떤 연기를 펼쳐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이라 할만하다. <밀크>처럼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작품에서 배우는 배역을 자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구스 반 산트가 하비 밀크 역에 숀 펜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물에 깊숙이 개입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구스 반 산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숀 펜 외에는 없었다. 그가 맡아야 했고 실제로 해냈다. 실제 하비 밀크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는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숀 펜은 늘 캐릭터에 동화되는 연기를 펼치는 까닭에 자신을 버리는데 익숙하다. <칼리토>의 ‘곱슬머리’ 변호사나 <아이 엠 샘>의 ‘지체장애’ 아버지처럼 외양의 변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그중 하비 밀크의 외모는 원래 숀 펜이 가지고 있는 선 굵은 외모에 ‘포샵’ 처리를 한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가장 격한(?) 변신에 속한다. 다만 두드러진 외모적 변화만이 아니더라도 소수자인 게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대변자로 나선 하비 밀크에게서 숀 펜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조지 W.부시 정부의 비도덕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한 숀 펜의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는 그대로 하비 밀크에게로 겹쳐진다.

이처럼 캐릭터의 모습에는 배우의 특징적인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외모일수도, 평소 성격일수도 있지만 숀 펜에게는 활동가적인 기질에서 드러나는 자기 확신에 찬 신념이다. 다만 “나의 정치적 감정이 극중 하비 밀크와 연결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숀 펜의 말처럼 그는 특정 영화의 출연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는 쪽이다. 다시 말해, 하비 밀크를 연기했다는 이유로 게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비 밀크가 되려했을 뿐.   

<칼리토> 이후의 숀 펜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기억된다. 맡은 배역에 대한 존중과 이해심을 전제한 그의 변신은 캐릭터적인 볼거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인물이 가진 배경을 넘어 아예 우주를 끌어안으려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소수자 캐릭터가 1990년대부터 집중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정점에 바로 <밀크>가 있다. 숀 펜은 하비 밀크의 페르소나로 완벽히 변신하여 연기로써 대중을 압도하고 감동을 준다. (그리고 2009년 숀 펜은 <미스틱 리버>에 이어 생애 두 번째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밀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글머리에 스치듯 언급했지만 <밀크>는 이미 미국에서 2008년 개봉이 이뤄졌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2년 늦게 찾아온 셈인데 오히려 비상식이 판을 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겨냥한 것 마냥 꽤나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모양새다. 안 그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하비 밀크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촛불 행진을 벌이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거쳤던, 그리고 ‘다시’ 거쳐야할 행보를 떠오르게 한다. 이 장면 위로 흐르는 하비 밀크의 내레이션은 <밀크>가 보편적인 이야기이면서 현재진행형인, 즉 국경과 시간을 초월한 바로 지금 여기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난 주 펜실베니아에서 전화가 왔다. 앳된 목소리의 청년이 고맙다고 말했다. 게이 정치가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그와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 (중략) … 이건 개인의 성취 문제도 아니고 자아나 권력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 ‘우리’의 문제다. 게이 뿐 아니라 흑인과 동양인, 노인과 장애인, 바로 우리의 문제다.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무너진다. 희망만 갖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희망이 없으면 삶은 가치가 없다. 그리하여 당신이 그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밀크>는 전기(傳記)영화의 형태를 띠지만 결국엔 산 자의 이야기다. 하비 밀크의 죽음으로 그의 육체는 산화했지만 그가 뿌린 저항과 연대의 씨앗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으로 뿌리내렸다. 다만 그 기록이랄 수 있는 <밀크>가 한국과 미국에서 점하는 사회적 지표는 각국의 대통령이 꿈꾸는 이념적 지향만큼이나 거리감이 크게만 보인다. 사실 <밀크>의 미국 개봉은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유력한 상황에서 소수자의, 소수자에 의한(구스 반 산트 감독이 게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소수자를 위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바마 시대에 대한 영화였다. 

그런 <밀크>가 MB시대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국내에서 개봉하는 <밀크>는 ‘MB시대를 이겨내는 방법’ 혹은 ‘MB시대를 근절하는 방법’에 대한 영화라고 할만하다. 젊은 세대에게 상식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희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MB시대를 버티는 이유이고 또한 버텨야 하는 당위다. 비상식과 일방적인 명령에 맞선 연대와 저항은 기득권의 폭력을 불러올지언정 그로 인해 흘린 피와 죽음은 지금 이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가 <밀크>와 같은 영화를 만들 날이 오지 않을까. 다만 오래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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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3.3)

<산타렐라 패밀리>(Fuer a de Ca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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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종종 음식과 비유된다. 이안의 <음식남녀>(1994), 가브리엘 악셀의 <바베트의 만찬>(1987) 등은 음식 만들기를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함으로써 좋은 점수를 받았다. 2008년 스페인 영화계를 강타했던 나초 G. 베일라 감독의 <산타렐라 패밀리> 또한 주방을 무대로 인생의 한 단면을 표현함으로써 자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영화다.

막시(하비에르 카마라)는 레스토랑 ‘산타렐라’의 주인이자 주방장. 10년 넘게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막시에게 동료들은 가족 같은 존재다. 다만 너무 가족 같아 소동이 끊이지 않는데 미쉐린 음식 평가원의 방문도 그 중 하나다. 막시는 이번 기회에 좋은 점수를 얻어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리려하지만 이게 웬걸, 게이인 탓에 결혼과 동시에 헤어졌던 아내가 숨을 거두면서 두 아이가 막시 곁으로 온다. 10년 동안 멀어진 관계가 쉽게 회복될 리 만무한 터. 설상가상으로 동료 알렉스(롤라 두에냐스)가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그에게 마음을 품으면서 막시는 자식에게 인정 잃어, 친구에게 절교당해 사면초가에 빠진다.

<산타렐라 패밀리>는 철없는 막시의 아버지 되기를 그린다. 아이들이 찾아오기까지 막시의 삶은 몇 개의 불안정한 정체성이 파편처럼 흩어진 인생에 다름 아니었다. 레스토랑 주인으로써 인정받기에 안달 났고 게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알렉스와 갈등을 빚었으며 부모님과의 왕래도 오래 전에 끊어진 터다. 영화는 그런 막시의 삶을 재료삼아 소동극의 과정을 거쳐 아버지라는 요리를 완성해낸다.

혹자는 게이가 주인공인데다가 스크루볼 코미디에 버금가는 대사가 압도적이고 소동극의 형태를 띤 까닭에 페드로 알모도바르(<나쁜 교육><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영향력을 언급하지만 이는 <산타렐라 패밀리>를 설명하는 적합한 방법은 아니다. 언급된 요소들이 공통된 건 사실이지만 알모도바르 작품의 경우,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과 결합하면서 도발적으로 기능한다면 <산타렐라 패밀리>는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기운을 풍기며 마음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것은 아버지 되기라는 이 영화의 주제가 결국 해체된 가족의 결합이라는 고전적 이야기의 틀을 빌려온 것에서 기인한다. 신기하게도 극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간관계에 있어 절름발이에 다름 아니다. 10년 넘게 가족을 등진 막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알렉스는 너무 쉽게 정을 줘서인지 남자들은 그녀의 육체만 맛(?)보곤 돌아서기 일쑤다. 막시와 알렉스가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 호라시오(벤자민 비쿠나)는 어떤가. 전직 축구선수 출신인 까닭에 성정체성을 숨겨온 지 오래다.

이 지점에서 <산타렐라 패밀리>는 전통적인 가족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기존의 가족이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막시와 호라시오가 짝을 이루고 막시의 아이들과 함께 이합집산 하여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것. 이 영화는 막시의 아버지 되기를 통해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 봉합이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가족 재구성을 말하는 셈이다.

극중 막시가 운영하는 산타렐라는 스페인 음식에 프랑스풍을 가미한 일종의 퓨전레스토랑이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전통적인 음식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10년 넘게 산타렐라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테다. 막시가 이룬 가족 또한 산타렐라의 퓨전음식과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도 이제 퓨전음식처럼 변해가고 있다. 극중 막시는 호라시오와의 관계가 잠시 흔들릴 때 이런 얘기를 한다. “이렇게 다르다면 서로 같이 있을 필요 없겠네.” 영화가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호라시오의 답변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헤어질 필요 없겠네.’

이처럼 해체된 가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를 전통적인 의미의 재결합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타렐라 패밀리>는 스페인 버전의 <가족의 탄생>이라 할만하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 남자 없는, 핏줄 없는 가족의 탄생을 보여줬다면 <산타렐라 패밀리>는 여자가 없어도 가족을 이루는데 하등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고집하지 않으니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안가족들은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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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2)

<나무없는 산>(Treeless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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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없는 산>의 카메라는 집요하다싶을 정도로 두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는다. 그렇게 드러난 아이들의 표정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김희연)과 빈(김성희)은 도시에서 생활하던 중 엄마(이수아)를 따라 고모(김미향)를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 남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가 아빠를 찾으러 가겠다며 아이들을 고모 손에 맡긴 것. 아이들은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채우며 엄마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진과 빈은 고모에게 이끌려 다시 시골의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나무없는 산>은 여러 모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와 닮았다. 부모가 부재한 아이들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아이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연기경험이 전무한 비전문배우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감독의 주관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켜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지켜본다’는 카메라의 행위를 다루는 촬영의 미묘한 차이로 두 영화를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아무도 모른다>가 4명의 아이들로 화면을 꽉 채우는 것에 반해 <나무없는 산>은진의, 빈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아낸다. <아무도 모른다>가 아이들의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카메라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기능한다면 <나무없는 산>은 반응을 포착함으로써 아이들의 시선을 대리한다. 그런 까닭에 <나무없는 산>은 종종 고발 시사 프로그램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아무도 모른다>에 비해 다큐멘터리적인 필치가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무없는 산>의 카메라는 <아무도 모른다>의 카메라에 비해 이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진과 빈의 표정에서는 녹록치 않은 세상사가 빚어낸 어른들의 피곤한 삶이 목격되고 나무 없는 산처럼 헐벗은 세상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감독의 세계관도 엿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의 얼굴에 밀착한 카메라는 도시, 지방소도시, 시골 순으로 공간이 변화할수록 서서히 배경의 각을 넓혀 가는데 그럴수록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의 삶이 초록빛 자연의 기를 받아 회복 가능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나무없는 산>이 결말에서 보여주는 이 같은 시선은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카메라의 기능과 형식으로 (나는 이 영화처럼 클로즈업으로 일관하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현실의 그늘진 현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태도는 인정할만하지만 결말에서는 이것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감독에게 주어진 결정권을 미루고 희망이라는 조각배에 이들을 띄워 보내는 듯한 영화적 관성이 느껴진다. 오히려 <아무도 모른다>처럼 아이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 삶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감독의 태도가 더욱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없는 산>이 이룬 성과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나무없는 산>은 응시하는 카메라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일례다. 로베르 브레송에서부터 다르덴 형제까지, 이들의 카메라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없는 산> 역시 지독한 바라보기로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구원을 이야기한다. 이는 감독의 철저한 윤리의식과 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담보한다. 그런 점에서 <나무없는 산>은 영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감독의 일관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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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

<세비지 그레이스>(Savage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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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칼린이 베이클랜드 가문의 이야기에 매료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분명히 근친상간과 근친살해에 대한 실제 사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베이클랜드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그는 데뷔작인 <졸도>에서 완전범죄를 꿈꾸는 게이커플의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졸도>에서는 게이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만들어낸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살인을 선택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세비지 그레이스>는 상류사회의 비정상적 관계에 대한 고발? 미국 가족관계의 종말?

<세비지 그레이스>는 1972년 런던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사건을 영화화했다. 아들 안토니 베이클랜드(에디 레드메인)가 엄마 바바라 베이클랜드(줄리언 무어)를 부엌에서 식칼로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이 후에 더욱 파장을 일으킨 건 베이클랜드 가문의 비극적 종말에 비정상적인 가족 간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 브룩스 베이클랜드(스티븐 딜레인)는 부인 바바라와 관계가 좋지 못해 늘 밖을 나돌며 젊은 여자를 만나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안토니의 여자 친구와 살림을 차리기까지 한다. 그러는 동안 바바라와 토니의 관계는 모자의 관계를 넘어서고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은 스리섬, 근친상간과 같은 굴절된 섹스 형태로 나타나면서 결국 비극을 초래하고야 만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부모를 증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났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흘러나오는 토니의 내레이션은 톰 칼린 감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살인 사건 하나만 가지고 토니를 희대의 살인마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왜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지 가문의 역사를 추적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흡사 에드워드 양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보여준 시선을 연상시킨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에서 벌어진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다뤘다. 에드워드 양은 주인공 소년의 살인을 가족사를 통해 사회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폭력적인 시대의 실체를 보여줬다. 다만 <세비지 그레이스>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 베이클랜드 가문의 사연이 결코 당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가문의 범위에서 한발자국도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 감독의 시선은 오로지 바바라와 토니에만 맞춰져있다. 심지어 브룩스가 최초의 플라스틱을 발명한 리오 베이클랜드의 손자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않는다.

그 결과, 이들에 대한 묘사는 오로지 베이클랜드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럭셔리한 공간과 그들의 화려한 패션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우아한 퇴폐미로 귀결될 뿐이다. ‘잔인하고 우아한’이라는 뜻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세비지 그레이스>의 의도는 상류사회의 껍데기 같은 삶이 빚은 비극적 말로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격적인 살인 이후 토니의 나머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 마지막 장면의 자막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는 시대에 대해 코멘트하려는 목적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를 철저히 외면하는 <세비지 그레이스>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감독 자신조차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만이 명확해질 뿐이다.

톰 칼린은 <세비지 그레이스>에서 전작 <졸도>가 이룬 성과를 스스로 폐기한다.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은 계승했을지언정 그의 영화미학을 돋보이게 했던 사건을 전후한 여파는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비지 그레이스>는 톰 칼린이 아니어도 그 누군가가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찌된 일일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졸도>에서 보여줬던 톰 칼린의 재능이 우연이었거나, 혹은 그의 재능을 먹어치운 또 다른 재능이 <세비지 그레이스>에 존재하거나.

아닌 게 아니라, <세비지 그레이스>에서 보여준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영화를 잡아먹는 수준이다. 그녀가 맡은 바바라는 <부기 나이트>에서 17세 어린 청년과 포르노를 찍으면서도 유사 모자 관계를 유지하며 따뜻함을 보여줬던 역할에서 인간미를 쏙 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다. 물과 불처럼 반대되는 역할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어떤 경지의 수준을 증명한다. 그래서 나는 톰 칼린이 그녀의 연기에 그만 넋을 잃은 나머지 영화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믿고 싶다. 그만큼 <세비지 그레이스>는 <졸도>의 톰 칼린을 생각하면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대신 <세비지 그레이스>는 줄리언 무어의 영화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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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12)

<걸어도 걸어도>(步いても 步いて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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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1995)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자와의 사별, 사후 세계, 버려진 아이 등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왔다. 그것은 결국 현대 사회가 잃은 또는 잊은 가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재라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항상 ‘남겨진 자’에 방점이 찍혀있다. <걸어도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극중 주인공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10년 전 바다에서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장남의 기일 때문이다.

그러나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형만 편애했던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어머니(기키 기린)에게 걱정을 끼쳐드릴까 염려스러울 뿐 아니라 늦은 결혼으로 아내(나츠가와 유이)의 아들까지 얻었는데 가족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료타는 부모님은 물론 누나(유) 내외와 한때를 보내면서 가족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2007) 이후 차기작으로 20대 후반의 여자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를 구상 중에 있었다. (후에 이 작품은 내용이 바뀌어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으로 개봉했다!) 그러나 3대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의 하루를 묘사한 <걸어도 걸어도>로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년 동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가족의 단절, 소통부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출발점삼아 완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는 모습이랄지 그 주변에서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경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족의 일상을 다루는 <걸어도 걸어도>는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계보에 두고 설명이 가능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개인의 경험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 (감독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영화 촬영 중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 영화와 비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 감독은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섣불리 희망을 드러내거나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료타의 가족을 차분히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에는 가족의 의미를 한 발 늦게야 깨닫는 현대 가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어머니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스모 선수의 이름을 헤어진 뒤에야 생각하는 료타의 경우처럼 가족은 함께 할 때나 헤어질 때나 계속해서 평행을 긋기에 애틋한 존재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뒤늦게야 가족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극중 주인공들이 결코 성취를 이루는 법이 없다. 정신적 성장은 이룰지언정 목적을 이루는 성질의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 끝맺음되지 않았기에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안 그래도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 제목은 19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이시다 아유미의 히트곡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의 가사에서 가져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록 흔들릴지언정 계속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한 발 늦게서야 가족의 의미는 찾아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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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28)

<빈얀>(Vin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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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의 파브리세 두 웰츠 감독은 정체 모를 숲속을 헤매는 가수의 이야기를 담은 공포영화 <칼베이어 Calvaire>(2004)로 장편 데뷔했다. 4년 만의 신작 <빈얀> 또한 어딘가를 헤매는 자의 이야기다. 벨마 부부는 쓰나미로 아들을 잃은 후 사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아들의 생존 소식을 접한 후 구출에 나선다. 허나 태국과 버마의 국경지대 정글로 들어선 이들 벨마 부부는 아들을 찾기는커녕 초현실적인 경험을 겪으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빈얀>은 자식 잃은 부모의 지옥 같은 심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목적은 아이를 찾는 데 있지 않고 그 과정에서 보이는 벨마 부부의 심리적 불안감의 묘사에 있다. 주된 배경으로 정글을 택한 건 이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겪게 되는 혼란스러운 광경이 아이를 찾겠다는 처절한 부모애와 맞물려 비극의 전조를 풍기는 것이다. 하여 미로 같은 정글에서의 폐쇄된 공간 미장센, 생명을 상징하는 물이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오프닝과 엔딩의 이미지는 <빈얀>의 백미다. 벨마 부인 역으로 등장하는 엠마누엘 베아르는 서서히 미쳐가는 연기로 찬탄의 경지를 보여준다. 흡사 아들 찾기 버전의 <지옥의 묵시록>이라 할만한 <빈얀>에서 그녀는 마틴 쉰에 버금가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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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bian Vampire Kil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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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트와일라잇> <박쥐> 등 뱀파이어물은 세계적인 유행이다. 공포물에 일가견 있는 영국이 이를 가만둘 리 없다. 뱀파이어가 영국으로 넘어가니 코믹하게 바뀌었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는 흡사 뱀파이어 버전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라 할만하다.

주인공 역시 두 명의 남자로 사회부적응자다. 비카(폴 맥건)는 여자 친구에게 차여, 플레처(제임스 코든)는 직장을 잃어 울적한 마음에 시골로 주말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저주에 휩싸인 곳. 비카와 플레처는 아리따운 여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지만 이네 레즈비언 뱀파이어들의 공격을 받는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에겐 정치적, 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다. 오로지 이들의 ‘쭉쭉 빵빵’한 육체를 볼거리로 전시하며 오락적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필 클레이든 감독은 작가적 자의식 따위 저 멀리 날려버리고 <이블 데드> <데드 얼라이브>처럼 조악하지만 통쾌한 고어와 썰렁하지만 유쾌한 코미디를 뒤범벅 하여 악취미적 스타일을 뽐내는데 집중한다. B급영화의 즐거움이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에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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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바트>(Krab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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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크라우츠 감독은 늘 여정을 다룬다. 소재가 유괴이던(<Trade>) 학창시절의 경쟁이던(<Sommersturm>) 그 이면에는 집 떠난 자의 귀환의 감성이 담겨 있다. 특히 청소년을 주인공 삼는다는 점에서 성장영화로 기능하는 것이다. <크라밧>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 크라밧이 마법사를 만나 능력을 키워 평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키워준 스승을 내쳐야 하는 제자 크라밧의 심리적 갈등이 주를 이루는데 영화는 흡사 <반지의 제왕>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타워즈> 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다만 크라밧의 성장과정에 집중한 영화는 흑마술의 볼거리와 결합함으로써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CG의 사용이 실재감보다 환상을 부풀리는데 집중돼있을 뿐 아니라 극중 내레이션을 빌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이끄는 구조가 동화의 요소를 강조한다.

주인공 크라밧의 정신적 스승으로 등장하는 톤다 역의 다니엘 브륄(<굿바이 레닌><에쥬케이터>)은 “감독의 연출 능력을 신뢰했기에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한 첫 번째 영화”라고 <크라밧>을 지지했다. 볼거리 면에선 다소 심심한 감이 없지 않지만 브륄의 말처럼 탄탄한 연출력과 밀도 높은 이야기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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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Sa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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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주시 안닐라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사우나>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데뷔작 <제이드 워리어>(2006)는 핀란드와 중국의 신화를 차용했다!) 1595년을 배경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죄와 용서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러시아와 핀란드 간의 25년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형제는 한 소녀를 살해한다. 그러나 소녀는 귀신으로 부활해 형제 곁을 맴돌며 이들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그러던 중 사우나를 발견한 형제는 죄를 씻는 의식을 거행하지만 일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다.

흔히 ‘사우나’는 육체를 정화하는 곳이지만 안닐라 감독은 정신을 정화하는 장소로 이곳을 묘사한다. 바꿔 말해, 정신은 육체처럼 쉽게 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우나>는 죄의식을 통해 고통 받는 형제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들이 소녀의 원혼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장소가 환하게 뻥 뚫린 장소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공간이 협소해지며 결국 사방이 은폐된 사우나에서 막을 내리는 구조는 폐쇄공포를 통해 불안정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잔재주를 배제한 채 선 굵은 연출을 선보이는 안닐라 감독은 구원이란 주제에 공포를 접목해 충격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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