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의 계곡>(In the Valley of 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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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 감독의 <엘라의 계곡>은 2~3년 전부터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이라크전(戰) 관련 영화들 가운데 완성도 면에서나 메시지 면에서 가장 독보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다만 2007년 미국 개봉 당시 관객의 철저한 외면 속에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국내 개봉 또한 2년 뒤인 올해 십여 개 정도의 상영관에서 단출하게 이뤄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엘라의 계곡>이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퇴역군인 행크(토미 리 존스)는 이라크에서 막 돌아온 둘째 아들의 탈영 소식을 듣는다. 그 길로 아들의 부대를 찾는 행크는 곧이어 아들의 죽음 소식까지 접하게 된다.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된 것. 사건 당일 아들이 마약을 찾아다녔다는 주변의 증언이 잇따르자 행크는 그럴 리 없다며 스스로 사건을 수사하기에 이른다. 우연히 아들의 휴대폰을 손에 넣은 행크는 누군가에게 동영상 복원을 부탁한다. 거기에는 아들을 포함해 미군이 이라크에서 행했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엘라의 계곡>은 반전(反戰)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더 정확히는 미국적 선(善)의 가치의 붕괴에 따른 망연자실함과 절망을 다룬다. 미국이 자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이라크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겠다고, 종국엔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며 벌인 전쟁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는가. 이 영화는 행크가 아들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로 진행되지만 한편으론 미군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를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과 맞붙은 다윗의 처지에 비유한다. 성서에는 작은 체구로 거한을 이겨낸 영웅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했을 때 느낀 공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의문을 갖고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이라크에 파병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맞닥뜨린 공포로 인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괴물이다. 적의 심장에 총구를 겨눠야 그 순간만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 제 정신을 견지할 사람은 없다. 이 같은 이야기는 마이클 치미노가 <디어 헌터>(1978)에서 일찍이 다룬 적이 있다. 베트남에 참전한 젊은이들이 고문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은 주제 면에서 <엘라의 계곡>과 정확히 조응한다. 대신 <디어 헌터>가 전쟁의 참혹함을 사슴 사냥과 러시안 룰렛이라는 상징적인 게임으로 은유했다면 <엘라의 계곡>은 UCC와 유튜브 시대에 걸맞게 핸드폰 동영상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으로 제시한다.

<엘라의 계곡>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이 괴물이 되게끔 만든 것이 누구인지, 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것이 누구인지 영화는 이를 더욱 중요시 다룬다.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까지 담당한 폴 해기스(<아버지의 깃발> <007 카지노 로얄> 등에서 각본을 쓰기도 했다.)가 <엘라의 계곡>의 주인공으로 ‘아버지’ 행크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행크는 첫째 아들이 걸프전에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부인의 반대를 뿌리치면서까지 둘째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인물로 소개된다. 행크 자신이 베트남에 참전했던 군인출신인데 그는 여전히 ‘미국은 선’이라는 가치를 믿는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죽음에도 신념에 변함이 없던 그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전쟁의 진실을 깨닫는다. 전쟁은 선을 수호하기 위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냥 ‘악’일뿐이라는 것을

행크의 마음 속 변화는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엘라의 계곡>의 답변은 단호하다. 아버지 세대는 모두 죽었다(dead)고 말한다. (둘째 아들이 죽기 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디(daddy)가 아니라 대드(dad)라고 적혀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참혹한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크는 마을의 성조기를 거꾸로 건다. 위기 상황에 빠진 미국이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행동이다. (거꾸로 매달린 국기는 ‘긴급구조’를 의미한다.)

대신 영화는 자식 세대에게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의 유산을 남겨주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영화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자막이 뜬다!) <엘라의 계곡>은 직접적으로 이라크전을 겨냥하지만 죽은 아들의 짧은 동영상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이야기는 대부분 미국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엘라의 계곡>은 미국 그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고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폴 해기스의 바람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을 옹호하고 전쟁의 참혹함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엘라의 계곡> 같은 영화가 극장가에서 된서리를 맞은 건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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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12.21)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이케 다카시의 장기는 장르 혼합이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 <오디션> <비지터 Q> 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한 영화에 두 개의 장르가 섞여 있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과 일본의 ‘사무라이 활극’을 섞은 변종 서부극이다. 그리하여 제목도 이탈리아의 대표음식 ‘스파게티’를 일본의 쇠고기 요리 ‘스키야키’로 바꾼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단노우라 전쟁이 막을 내린 수백 년 후, 전쟁 중 유실된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해 겐지(사토 고이치)와 헤이케(이세야 유스케)가 수장으로 있는 두 부족이 산골마을로 찾아온다. 사무라이 정신을 앞세운 겐지 부족과 총으로 무장한 헤이케 부족의 충돌로 조용할 날이 없던 어느 날. 석양의 빛을 등지며 무명의 총잡이(이토 히데아키)가 홀연히 등장하니, 그의 현란한 총 솜씨에 매료된 두 부족은 마을을 평정하기 위해 그와 손잡으려 한다. 그러나 총잡이의 관심은 따로 있다. 아픈 상처를 짊어진 채 유랑생활을 하던 그가 이 마을에 거처하면서 아버지를 잃은 한 꼬마의 사연을 듣게 된 것.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총잡이는 아이를 보호해주기로 마음먹고 겐지와 헤이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다. 결국 아이의 어머니가 헤이케에게 능멸 당하면서 총잡이와 헤이케, 그리고 겐지 간의 목숨을 건 마지막 결투가 벌어진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에서 주인공과 배경을 가져온 후 그 안에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채워 넣은 듯한 모양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장르와 문화가 결합한 만큼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서부극의 배경인 ‘황야’가 등장하지만 그 위의 무대는 일본 특유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미장센이고, 말을 탄 총잡이의 장총과 사무라이의 날 선 검이 한 화면에 공존하며, 권모술수와 왜곡된 욕망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어느새 거친 들판에 핀 붉은 장미를 보여주며 희망적으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특히 희망을 상징하는 꼬마가 후에 ‘장고’라는 이름으로 성장한다는 자막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짬뽕’ 미학의 결정판이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매 장면 이질적인 요소가 대립 항을 이루지만 따로 노는 법이 없다. 장르의 규칙을 변용하면서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반체제적인 영웅과 전복적인 이야기 구조, 그리고 일본 활극의 비장미와 의리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동물적인 캐릭터 등 큰 줄기만큼은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재료를 가지고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미이케 다카시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닮았다. 다만 쿠엔틴 타란티노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현대영화를 만든다면 미이케 다카시는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가지고 새로운 종류의 장르를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타란티노의 출연은 역시 이 영화의 백미다. 젊은 총잡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쇠한 총잡이까지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그의 존재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의 영화적 좌표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표다. 타란티노의 출연을 절실히 바랐던 미이케 다카시는 친분을 이용, 노 개런티로 출연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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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53호
(2007.10.2)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The Bucket List)


사용자 삽입 이미지최근 할리우드가 죽음을 다루는 태도는 흥미롭다. 타마라 젠킨스 감독의 <사비지>(국내 미개봉), 사라 폴리 감독의 <어웨이 프롬 허> 등 죽음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려는 관조의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편 모두 ‘알츠하이머’가 소재로 등장하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는 처절한 삶은 극히 일부만 나올 뿐이다. 대신 홀로 남겨진 자를 통해 변화한 삶을 읽고 이를 감내하는 주인공들의 지혜로운 성찰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스탠 바이 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맨>으로 유명한 롭 라이너 감독의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하 <버킷 리스트>)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두 노인이 등장하지만 <사비지> <어웨이 프롬 허>처럼 죽음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삶에 대한 영화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즉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을 뜻하는 제목만 봐도 삶을 긍정하려는 기운은 여실히 감지된다. 그런 만큼 <버킷 리스트>에는 죽음에 대한 숭고한 의미나 엄숙한 분위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소재에 맞지 않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유머를 기반으로 한 따뜻함이다. “시나리오를 10페이지까지만 읽고 단번에 영화화를 결심했다. 삶에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유머다. 비록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말이다”는 롭 라이너의 말처럼 <버킷 리스트>의 기저에는 현실에 충실하려는 삶에 대한 용기와 죽음보다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깔려 있다.

사려 깊고 진중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 모건 프리먼과 여전히 귀여운 악동의 모습을 한 잭 니콜슨의 조합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각각 카터 체임버스와 에드워드 콜로 분한 이들의 모습은 명백하게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그런 익숙함의 공백에는 서로를 통해 각자의 삶을 깨닫는 성찰이 담겨 있다. 평생 자동차 정비사로 일해왔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단란한 일생을 보낸 카터, 종합병원을 소유하고 있는 재벌 사업가이지만 홀로 지내는 에드워드는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짝패에 다름 아니다. 카터는 에드워드의 부(富) 덕에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한 세계여행을 하게 되고 에드워드는 카터의 배려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들이 버킷 리스트에 따라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호랑이 사냥을 즐기고, 오토바이를 타고 중국의 만리장성을 질주하고, 무스탕 셀비를 타고 카레이싱을 벌여도, 중요한 건 어디를 가고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순간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바로 그 사실이다. 삶의 변화가 이뤄지는 순간은 평생 접하지 못한 경험을 해보며 느끼는 ‘어떤’ 감정이고 이는 서로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성찰’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즉, <버킷 리스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다. 역설적으로 죽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버킷 리스트는 반드시 성공하지 않더라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함께 버킷 리스트를 공유했느냐가 더욱 의미 있는 삶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신을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후회된다”며 카터에게 건네는 에드워드의 대사는 그런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의 빼어난 연기호흡에 감탄을 금치 못한 이들에겐 두 배우가 좀 더 일찍 영화에서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 점을 강조한다. 극중 카터의 내레이션을 통해 “당신이 기억하는 사람들 또한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관계를 이뤘다면 당신은 의미 있는 삶을 산 것이다”라고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에서 기인한다는 얘기. <버킷 리스트>의 내레이션 활용이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버킷 리스트>는 <선셋 대로>의 조셉 길리스(윌리엄 홀든),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처럼 죽은 이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다르다면 이 두 영화의 내레이션은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냉소적인 기운을 더한다면 <버킷 리스트>는 죽음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것. 특히 에드워드에 대한 회상조로 일관함으로써 죽은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설정의 재미뿐 아니라 친구의 존재를 기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또한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버킷 리스트>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견지하지만 낯설거나 당황스럽지 않다. 비록 당장 죽음과 대면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발자취에 대한 복기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것과 봐야 할 것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가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거나 롭 라이너 감독의 최고 작품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관람해야 할 영화의 버킷 리스트임에 손색이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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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82호
(2008. 4. 15)

달콤한 장악의 경지 – 주드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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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로는 왕가위 감독과 함께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한없이 순수한 남자 제레미로 분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1년 가까이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주드 로의 모습에서 강함을 넘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거친 갑옷을 걸친 달콤한 기사. 잔뜩 날이 선 새파란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지만, 한순간 이완되는 눈웃음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지닌 주드 로에게 어울리는 수사다. 시야에 들어온 적군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소련의 저격수였다가(<에너미 앳 더 게이트>)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는 뉴욕의 바람둥이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나를 책임져, 알피>), 약속한 의뢰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 끝을 보고 마는 잔인한 살인청부업자에서(<로드 투 퍼디션>) 첫눈에 반한 사랑에 운명을 거는 순수한 소설가 지망생으로 환골탈태가 가능했던 것도(<클로저>), 그런 이중적인 인상 덕이 크다.

다면체 인간성의 극단을 횡단하며 필모그래프를 채워온 주드 로는 양가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눈빛과 표정은 물론 인공적인 분장()과 의도적인 탈모(<로드 투 퍼디션>까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연기 수단을 총동원한 배우다. 그런 주드 로가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기대만큼이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랑보다 이별에, 과정보다 순간에, 사건보다 감정과 관계에, 여자보다 남자 캐릭터에 집중한 왕가위는 언제나 남자 주인공의 눈 속에 무거운 눈물을 봉인해왔다. 하여 표정보다 눈빛을, 흔들림보다 떨림을, 변신보다 변화를, 과장보다 절제를 선호해온 왕가위의 페르소나 양조위와 비교해 주드 로가 상극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 아무래도 왕가위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주인공으로 그를 낙점한 건 모험으로 보였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주드 로는 뉴욕 소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제레미로 등장한다. 적당히 바쁘고 영업시간 틈틈이 담배 한 대 피워 물 여유도 즐길 줄 아는 그 앞에 연인과의 이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지(노라 존스)가 서성댄다. 감정을 추스를 말벗이 필요했던 그녀를 위해 스스럼없이 친구가 돼주고 블루베리 파이 한 접시를 대접하는 그의 친절에서 사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리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지만, 그녀가 여행을 하겠다며 곁을 훌쩍 떠난 지는 53일째. 매일같이 그녀의 엽서를 기다리지만 조급해하지 않는 그는 그리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순간이 만족스럽다. 300여 일이 지나고 카페로 찾아온 리지. 제레미는 예전과 다름없이 얘기를 들어주고 파이도 만들어주지만, 블루베리보다 달콤한 키스도 잊지 않는다.

제레미는 왕가위 영화라면 모름지기 기대할 법한 인물의 전형성을 배반한다. <해피 투게더>의 아휘처럼 사랑에 지쳐 상처받지도, <화양연화>의 차우처럼 사랑 앞에 머뭇거리지도, <2046>의 차우처럼 옛사랑에 얽매이지도 않는 제레미는 비극성이 배제된 순수의 캐릭터다.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왕가위 영화로는 드물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사랑을 긍정하는 기운이 짙게 서려 있는 건 제레미의 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에서 작업한 홍콩영화가 아니라 ‘그냥’ 미국영화를 만들려 했다”는 왕가위가 제레미 역에 처음부터 주드 로를 염두에 둔 건 그의 표정에서 미국식 여유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주드 로의 표정엔 삶에 발목 잡힌 어두움이 없다.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로 손색이 없다”고 이유를 단 왕가위는 주드 로가 가진 여유로움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한 장면을 여러 개로 쪼개 갖다 붙이는 편집을 택했다.

“특정 순간의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그렇게 집중적으로 촬영해본 적이 없었다. 왕가위 감독의 연출은 내게 매우 특별했다.” 제레미와 리지의 키스 장면을 위해 주드 로와 노라 존스가 3일 동안 100번도 넘게 입을 맞춘 건 널리 알려진 일화. 배우 입장에선 무한 반복되는 연기에 진이 빠질 만도 한데, “리지의 입에 묻은 크림을 1갤런이나 먹어치웠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노라 존스와 그렇게 키스를 할 수 있었을까. 하하.” 실없는 농담을 날리는 걸 보니 꽤 유익한 경험이었던 모양이다. “촬영 가능한 각도에서 모든 앵글로 키스 장면을 찍었다. 즉석에서 무언가 계속 결정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재미있었다”는 주드 로는 “다만 매번 바뀌는 요구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왕가위 감독이 요구한 건 역할에 대한 완전한 신뢰였다. 그의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안정감을 부여할 것이라 여겼던 감독은 “주드 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며 캐릭터를 대하는 그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노력과 열린 자세 덕분이었을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연출보다 주드 로의 연기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영국 영화비평지 ‘사이트앤사운드’는 “결핍된 연출 속에서 주드 로의 연기는 오래된 불꽃처럼 강렬하다”고 이런 심증에 힘을 실어줬다. 거친 인상이나 찌푸린 표정과 카리스마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비춰, 주드 로는 부드러움으로 장악할 수 있는 카리스마의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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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77호
(2008. 3. 11)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사용자 삽입 이미지올해 일흔을 맞이한 리들리 스콧(1937년 생) 감독의 최근 행보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2000년대 들어 <글래디에이터>(2000), <블랙 호크 다운>(2001), <킹덤 오브 헤븐>(2005) 등 기복 없는 완성도를 보인 그의 작품들은 관객은 물론 평단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리들리 스콧이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리들리 스콧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는 연출력으로 황금기를 구가했던 할리우드 고전기의 하워드 혹스나 빌리 와일더 같은 감독을 연상시킨다. 장르와 장르를 유영하며 주어진 틀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는 장인에 가까워 보이는 감독인 것이다. 필모그래피를 훑어봐도 범죄(<블랙 레인>(1989)), 여성버디(<델마와 루이스>(1991)), 호러(<한니발>(2001)), 로맨틱 코미디(<어느 멋진 날>(2006)) 등 편식하는 장르 없이 폭 넓은 행보를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스튜디오의 주문에 따라 영화를 찍어내야 하는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동안 그가 A급 감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의 새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는 또 한 편의 장르영화다. 1970년대 뉴욕 일대를 주름잡았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그를 집요하게 쫓는 마약반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갱스터영화다. 갱스터는 범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계의 절망과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 장르로 할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지극히 관습적인 스타일로 장르의 ‘규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는 1940년대 말 전성기를 누렸던 고전 할리우드 갱스터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흑인 마약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장르의 정통성마저 부인한다. 영화적 세공 기술이 절정에 달한 리들리 스콧이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했을지 내심 기대감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흑인을 앞세운 갱스터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난 2000년 프로듀서 브라이언 글레이저가 접한 하나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됐다. 니콜라스 필레기(<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의 원작자)가 권유한 기사는 지역문화지 ‘뉴욕’에 실린 ‘거물의 귀환’(Return of the Superfly)으로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죄 이야기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에 매료된 글레이저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맡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뉴욕 할렘 암흑가의 두목 범피 존스는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날이 갈수록 대형화되는 마약시장이 못마땅하다. 형제애가 강한 조직의 특성상 중간 도매상들이 없어질수록 조직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은 범피를 대신해 뉴욕 할렘을 접수하게 된 프랭크 루카스. 두목과 달리 거대한 마약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루카스는 머리를 짜낸다. 마약 재배지인 태국으로 직접 건너가 대량 구입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이용, 밀반입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을 없앤 것. 기존 마약보다 순도는 높고 가격은 더 저렴하니 루카스의 마약 브랜드 ‘블루 매직’은 삽시간에 뉴욕의 마약시장을 장악한다. 허나 사업가처럼 깔끔한 옷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행동을 보이는 그가 불법을 일삼는 조직의 두목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는 뉴저지 형사 리치 로버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뇌물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때에 동료 형사의 뇌물을 상부에 고발한 일로 ‘또라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로버츠. 타고난 바람기와 바깥으로만 나돌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설상가상으로 파트너가 마약복용으로 숨지는 일이 발생해 수사에 나서지만 별다른 단서가 없다. 급기야 특별마약반이 편성되고 로버츠는 전방위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연출을 의뢰받은 건 <킹덤 오브 헤븐> 촬영이 한창이던 2004년이었다. <트레이닝 데이>(2001)의 안톤 후쿠아, <호텔 르완다>의 테리 조지 감독이 이미 포기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자 그는 즉각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는 흥망성쇠의 전개가 흥미를 끌었다.” 다만 그는 이것이 프랭크 루카스 개인의 영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뉴욕 할렘이 배경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적절한 소재였고 이를 위해서는 ‘흑과 백’ 두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여야만 했다. 스티븐 자일리언은 리치 로버츠의 비중을 루카스에 버금가게끔 키웠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비로소 서로의 세계를 걸고 운명적인 대결을 펼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이룩한 프랭크 루카스, 가족과 동료를 모두 잃고 범인을 쫓는 일에만 몰두하는 로버츠. 각기 다른 환경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를 일러 스콧 감독은 “2007년판 <프렌치 커넥션>(1971)이자 흑인 버전 <대부>”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마약조직과 부패한 경찰이 결탁한 거대한 음모는 <프렌치 커넥션>을, 화려한 가족모임 뒤에서 추악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면의 이야기는 <대부>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그뿐인가. <형사 서피코>(1973)를 비롯 <좋은 친구들>, <히트>(1995)에 이르기까지, <아메리 갱스터>는 아메리칸 갱스터 장르의 걸작 목록들을 일별하는 전시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이런 시각에 대해 경계한다.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확연하게 차별되는 요소가 있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우두머리가 다름 아닌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갱스터영화를 본 적이 있나?” 그의 말처럼, 아이들(역시 백인이다!)이 갱으로 등장하는 알란 파커 감독의 <벅시 말론>(1976)을 본 적은 있어도 흑인 갱스터를 본 기억은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새로움과 파격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암흑가의 무하마드 알리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답지 않게 감정의 파고를 느낄 수 없는 영화다. 자극적이지 않고 점잖다. 흔히 갱스터영화라면 스크린 밖으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폭력의 에너지를 떠올리지만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이런 파토스가 적다. 대규모 총격전은 루카스의 마약 제조공장을 소탕하는 결말 부분에 가서 한 번 등장할 뿐이고 루카스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한 살인 장면이 오프닝과 짧게 삽입되는 것이 고작이다. 갱스터 장르의 꽃이라는 총격전 없이 장르물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 주인공이 프랭크 루카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비주얼 감각으로 치자면 둘째가 서러운 리들리 스콧이 시각적 쾌감을 연출할 수 있는 총격전에 무심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미국을 주름잡은 거물급 범죄자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뉴욕’ 지에 ‘거물의 귀환’을 송고한 마크 자콥슨 기자에 따르면 “루카스는 새로운 도시 범죄를 꿈꾼 인물”이었다. “화려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이전의 흑인 갱들과 달리 회사의 CEO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진취적인 마약 딜러”였다. 그는 뉴욕의 터줏대감이었던 이탈리아 갱들에 한 발 앞서 마약사업의 대형화를 주도했고 맥도날드처럼 브랜드의 힘을 간파하고 마약 대신 ‘블루 매직’이란 이름을 도입했으며 공급처에서 물건을 직접 구입해 공수하는 획기적인 유통과정을 생각해냈다. 특히 범죄자 특유의 눈에 띄게 드러나는 행동을 자제했던 그는 언제나 깔끔한 슈트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며 사업가처럼 행동하는 등 교묘하게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들리 스콧은 ‘나서지 않는’ 루카스의 성격을 영화의 스타일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앞서 언급한 과도한 폭력 묘사는 물론이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 장르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를 대부분 배제한다. 마약이 소재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2000)까지는 아니더라도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는 감독 특유의 현란한 장면 연출은 찾아볼 수 없다. 배신과 죽음으로 확실하게 종결되는 장르 관습에서 한 발 나아가 비극과 해피엔딩 사이에서 애매하게 종결된다. 대신 실화를 바탕으로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영화답게 장르적 속성은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묻힐 뿐 캐릭터에 모든 걸 의존한다. 즉, <아메리칸 갱스터>의 장르성을 결정짓는 것은 중심인물 프랭크 루카스다. 캐릭터 자체가 장르로 귀결되다보니 루카스는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만큼 영화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보다 사회적인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루카스의 비주류적인 감성에 매료된 덴젤 워싱턴은 안톤 후쿠야 감독에 의해 루카스 역에 낙점된 이후 테리 조지 감독을 거쳐 리들리 스콧에 이르기까지 역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 같은 대가가 버티고 있는 장르에서 6년 넘게 출연을 기다린 이유는 주인공이 바로 프랭크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갱스터의 ‘러쉬모어 산’ 같은 인물이다. 그 어떤 캐릭터도 ‘아메리칸 갱스터’와 같은 지위를 얻은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루카스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를 일종의 영웅처럼 다루는데, 이는 백인의 슈퍼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흑인 영웅은 태생적인 배경 탓에 기존의 지배세력인 백인의 기득권을 이겨내고 지위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인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루카스가 거물 백인 갱인 도미닉 카타노(아만드 아산트)와 손잡고 결국 그의 위치를 넘어서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1970년대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을 루카스와 빗댄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리는 단순한 권투선수가 아니었다. 70년대 전성기를 누린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징집을 거부했고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등 미국 정부(백인)에 저항한 대표적인 흑인 영웅이었다.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1971년 벌어진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전설적인 권투시합이 나온다. 리들리 스콧은 여기서 잠깐이나마 프랭크 루카스의 삶을 알리와 병치시킨다. 그는 암흑가의 알리, 할렘의 영웅인 셈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는 루카스의 마약왕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처럼 그려진다. 백인 중심의 시스템에 저항한 알리와 백인의 비호를 받는 프레이저(군 입대를 거부한 알리와 달리 프레이저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방에서 편안하게 근무했다)의 시합으로 명명된 이 경기에서 루카스는 최고급 옷을 걸치고 백인 마약왕 카타노보다 앞자리에 앉아 그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웅변하려 한다. 갱스터 비즈니스까지 장악하고 있는 백인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그만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아이러니컬하다. 1971년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알리와 프레이저의 세기의 경기는 두 선수가 가진 세 차례의 ‘사생결단’ 대결(미국인들에게 알리와 프레이저의 경기는 백인 보수주의와 흑인 진보주의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중 유일하게 알리가 패배한 시합이었다. 마약 커넥션의 뿌리를 찾아 눈에 불을 켠 리치 로버츠가 잠행하던 프랭크 루카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간파하게 된 계기, 즉 루카스의 거대한 왕국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합을 통해서다. 바야흐로, 루카스가 ‘세계의 왕’임을 선포하는 순간 그의 괴멸은 예정됐던 것이다.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법칙

물론 그 누구도 프랭크 루카스를 진짜 영웅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 하나로 뉴욕 할렘의 블랙마켓을 장악한 과정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사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프랭크 루카스를 무조건 영웅으로만 묘사했다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리더였지만 명백한 범죄자이기도 한 그의 이중적인 면모가 <아메리칸 갱스터>를 연출한 중요한 이유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루카스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과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루카스의 실제 삶을 매력적으로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윤리적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조롱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닌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를 비롯해 갱스터물이 원형으로 삼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실화이거나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랭크 루카스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덴젤 워싱턴은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예로 들며 “이 작품이 범죄를 조장했다는 주장은 과장됐다. <스카페이스>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그 전부터 사람들은 영화처럼 살고 있었다”며 갱스터영화의 현실 반영이 터무니없다는 일각의 반응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갱스터영화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퇴치돼야 할 악당이지만 늘 동정적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그들의 영웅적 풍모와 기질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그 장르를 즐기는 고유한 방법이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 개인이 아니라 ‘미국식 갱스터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리들리 스콧은 루카스의 마약왕국이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아이디어는 그에게서 시작됐지만 사업 번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었던 미국의 군부대와 부패한 경찰이었다. 마약이 밀반입되는 데 운송역할을 한 미군과 거래를 눈감아주는 대신 큰돈을 챙긴 경찰에게서 정의의 모습을 찾는 건 요란한 장신구를 걸친 루카스의 옷차림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갱스터영화에서 정치적인 함의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아메리칸 갱스터>는 일개 미국인에 불과한 루카스를 통해 미국의 본질을 꿰뚫는 문화인류학적인 작업이었다. “단순한 마약상의 시점(vision)이 아닌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관점(point)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루카스의 마약사업이 베트남전의 시작과 함께 이뤄지고 철수와 동시에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전쟁과 같은 이벤트(?)만 벌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외부적으로 구축한 폭력의 커넥션을 통해 배를 불려온 전지구적인 미국의 사업방식, 그 뒤를 보조하는 시스템과 논리를 떠올려보라. 그 흥망성쇠는 미국이 지금껏 쌓아올린 업적의 이면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미국의 이상 역시 그에 맞게 변질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를 꿈꾸던 루카스의 조카 스티브(팁 해리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촌 곁에서 일을 돕던 중 전도유망한 야구선수가 누구나 선망하는 양키스 행을 포기하고 마약상의 길을 걷는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의 그늘진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르 장인의 내공

공교롭게도 <아메리칸 갱스터>의 국내 개봉 일주일 전, 리들리 스콧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 DVD 파이널 컷이 공개된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 나의 창조력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라는 자조 섞인 스스로의 평가처럼 리들리 스콧은 지금까지 <블레이드 러너>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있었다. 하지만 장르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아메리칸 갱스터>의 야심은 SF 장르의 거대한 기념비였던 <블레이드 러너> 못지않다.

“1970년대 클래식 갱스터영화의 유령버전 같다”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아메리칸 갱스터>가 <프렌치 커넥션>, <대부> 등 1970년대 미국영화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근래 발표된 리들리 스콧의 영화 중 최고이며 갱스터 장르로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기왕의 영화적 유산을 흡수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솜씨는 ‘장르 장인’의 내공을 느끼게 한다.

<리틀 시저>(1930), <공공의 적>(1931)부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까지, 갱스터 장르의 역사적인 이정표들을 한데 모으면 곧 미국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된다. 여기서 ‘완성’이란 표현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 백인 갱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로 쓴 기존 폭력의 역사의 공백을 채우려는 작업처럼 보인다. 흑인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이 영화의 개봉과 함께 비로소 미국의 뒷골목 역사책이 탈고된 셈이다. 갱스터영화의 대표라도 되는 듯 선언조로 지어진 영화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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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6호
(2007. 12. 25)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사용자 삽입 이미지리처드 매드슨은 자신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1954)를 영화화한 <지상 최후의 사나이>(1964)와 <오메가 맨>(1971)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부터 나온다. 가명 ‘로건 스완슨’(Logan Swanson)으로 각색에 참여한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 대한 평가는 ‘원작을 다룬 첫 번째 영화’라는 역사적 의미로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당시 유행하던 흡혈귀 설정에 치중해 원작의 매력을 퇴색시키고 만 것이다.

두 번째 <오메가 맨>은 기억하는 것조차 끔찍할 정도. 슈퍼스타 찰턴 헤스턴이 나왔지만 액션만 강조해 원작의 묵시록적 세계관이 꼴사나운 영웅물로 변질된 것이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 전부터 러브콜을 보냈던 영국 공포영화 전문제작사 해머 스튜디오와의 작업도 좌초되고 말았다. 제목을 <밤의 피조물 The Night Creature>로 바꾸고 시나리오를 완성했건만 영국 검열관들이 “너무 진짜 같다”고 경고하자 해머 스튜디오가 손을 뗀 것이다.

워너브러더스는 <오메가 맨>이 끝난 후 일찌감치 판권을 확보하고 적당한 영화화 시기를 모색 중이었다. 각색문제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하던 프로젝트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1994년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서다. 그러나 불어나는 제작비, 시나리오를 둘러싼 견해차로 물 건너간 뒤 스티븐 스필버그, 마이클 베이, 기예르모 델 토로를 전전하는 계륵 신세로 전락했다. 대가들도 감당하지 못한 전설의 프로젝트가 뮤직비디오로 잔뼈가 굵은, 그러나 고작 한 편의 퇴마영화를 완성한 애송이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콘스탄틴>(2005)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이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 <나는 전설이다>를 만든 건 기적처럼 보인다. 하지만 완성만으로 ‘기적’이라 말할 순 없다. 과거의 불쾌한 기억을 떨치지 못한 리처드 매드슨이 새로운 <나는 전설이다>의 개봉을 눈을 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

‘멸망한 지구에서 홀로 생존하는 인간’이라는 한 줄의 설정만으로도 구미를 당긴다. 생존만이 일상인 그를 좀비가 공격한다는 설정은 원작이 세 번씩이나 영화의 부름을 받는 원천이었다.

때는 2012년 9월 14일.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애견 ‘샘’이 있지만 인간과 대화한 건 3년간 한 번도 없다. 전세계를 먹어 삼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간의 씨는 말라버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네빌의 일과는 단조롭다. 거리를 배회하며 식량과 옷가지를 구하고 무료한 시간을 이기기 위해 DVD를 구한다. 귀가 시간도 일정하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 밤은 그의 시간이 아니다.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다가 부작용으로 다시 살아난 좀비들의 시간이다. 좀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요새처럼 집을 꾸민 네빌은 어둠이 지배하는 동안 좀비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해독제를 구하려 연구에 몰두한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그는 모든 AM 주파수를 동원해 어딘 가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생존자를 구하는 작업도 잊지 않는다.

프랜시스 로렌스는 <콘스탄틴>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전설이다>의 연출 제안을 받았다. 후반작업 중이던 그는 <콘스탄틴> 개봉 즈음 차기작을 물색했고, 그제야 시나리오를 접할 수 있었다. 각본가 마크 프로토세비치가 쓴 시나리오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작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설정을 빌린 <28일 후>(2003)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이미 이룩한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28일 후>는 대단한 영화다. 하지만 리메이크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로렌스는 <콘스탄틴>에서 작업했던 프로듀서이자 각본가 아키바 골즈먼을 끌어들여 원작의 기본 골격만 남기고 많은 부분을 새로 구성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전설이다>는 ‘지상 최후의 사나이가 펼치는 생존사투’라는 설정 외에 <28일 후>와는 많은 지점에서 차별된다. 그중 바이러스 발생 3년 후의 사연을 다룬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8일 후>가 좀비의 탄생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기존 좀비영화와 설정을 달리한 로렌스 감독은 장르적인 접근을 피하려 했다. 좀비물이 갖는 재미 중 하나는 주인공과 좀비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인데 로렌스는 이런 장면들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건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을 자제하고 로버트 네빌에 집중해 캐릭터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에 등장하는 인간과 좀비 외 신인류의 존재는 극중에서 자취를 감췄고, 따라서 영화의 3분의 2를 네빌 혼자 이끌어가는 영화가 됐다. 둔중한 버디액션영화에서 진가를 발휘했던 윌 스미스는 기존 캐릭터에서 벗어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무인도에 홀로 남아 삶을 이어가는 <캐스트 어웨이>(2000)의 톰 행크스처럼 윌 스미스는 대화 없이 고요하게 진행되는 영화 속에서 미묘한 감정과 섬세한 행동만으로 근 미래의 묵시록적 비전을 전달하는 ‘원맨쇼’를 펼친다.


살아난 시체들의 전설

윌 스미스가 로버트 네빌로 분해 보여주는 원맨쇼는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소설 <나는 전설이다>가 전설 혹은 신화의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건 현실의 비극을 극단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작자 리처드 매드슨은 좀비에게 흡혈귀 신화를 덧씌우고 이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괴물도, 흡혈귀도, 심지어 죽은 것도 아니다. 신체적으로만 살아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의학적인 방법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들에게 발생하는 많은 증상과 징후는 우리가 바이러스에서 얻었던 증상과 많은 부분 닮았다.” 악랄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흡혈귀가 빛이나 마늘의 고약한 냄새에 맥을 못 추는 이유를 과학적 분석을 통해 실제로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불길한 신화를 현실화하는 데 공을 들인 이유는 당대 미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신경질적인 징후를 은유하기 위해서다. 소설 속 좀비가 체내에 침투한 박테리아로 인해 더욱 폭력적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리처드 매드슨은 인간의 폭력성이 시간을 더할수록 도를 더해간다고 믿었다. 인간의 진화를 폭력으로 증명하는 그에게 현실은 비극이다. 더 큰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출구라는 점이다. 그래서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은 더 큰 폭력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닌 공포를 익숙한 생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설 속 네빌처럼 인간을 갈망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신인류의 공격에 별다른 저항 없이 평화를 갈구하는 태도는 흘러간 태고적 과거, 즉 전설에서나 가능할법한 꿈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결국 <나는 전설이다>는 현실의 비극과 통하는 이야기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와 <오메가 맨>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를 간파하고 영화에 활용한 것은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었다. 로메로는 <나는 전설이다>를 읽고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초안이 된 단편소설을 썼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현대 좀비물의 원형이라는 극찬을 받았지만 로메로가 매드슨의 소설에서 가져온 건 ‘살아난 시체들’만이 아니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메타포로 좀비를 가져왔다. 백인 경찰이 좀비 대신 흑인에게 총을 겨눠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 결말은 지금 봐도 충격적이다.(매드슨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밝혔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요 설정을 고스란히 차용한 대니 보일의 <28일 후> 역시 다르지 않다. 광대한 런던 거리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모습은 대단한 스펙터클이지만 ‘인간과 좀비의 대결‘에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으로 마무리 짓는 마지막 장면은 <나는 전설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암울함을 이어받고 있다.

프랜시스 로렌스의 <나는 전설이다>는 이들 영화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큰 도시에 점처럼 존재하는 인간, 좀비의 공격을 피해 폐쇄 공간에 고립된 인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벌이는 좀비와의 사투, 그리고 집단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간을 갈망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출발은 사뭇 불길하다. 영화는 인류 멸망의 원인으로 암을 치유하는 바이러스를 지목한다. 이는 치유의 가능성과 함께 인간에 대한 희망을 기저에 깔고 있다. 원작의 주인공이 인간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희망에 목매지 않는 것에 반해 영화 속 로버트 네빌은 매일 라디오 송신을 통해 인간을 찾는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지향점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28일 후>, 무엇보다 원작과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은 미국의 전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설이다>는 슈퍼히어로물의 변형태다. <28일 후>와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들겠다던 프랜시스 로렌스의 호언은 할리우드 주류 영웅물에서 해답을 찾은 듯 보인다. 캐릭터에 집중하겠다는 그의 말은 로버트 네빌이 가진 능력, 즉 후천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혹은 운명적으로 물려받은) 그의 면역력에 대한 할리우드식 접근법으로 구체화됐다. 이는 슈퍼히어로물에서 익히 봐왔던 설정으로, 기존 영웅물이 파괴적인 능력에 주목했다면 로버트 네빌은 좀 더 평화로운 방식으로 지구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좀 더 과장한다면 영화 속 네빌은 미국, 그 자체다.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의 유일한 인간이라는 설정은 과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발을 디딘 이방인을 연상케 하고,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나아가 인류영웅으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는 미국적 이상과 다르지 않다. 애초부터 로렌스의 고민은 좀비영화와의 차별성보다 홀로 세상을 감당하는 <캐스트 어웨이>, 영웅적 인류 구원기인 <아마겟돈>(1998) 사이에서 그럴싸하게 균형을 잡는 게 아니었나 싶다. “<캐스트 어웨이>와 <아마겟돈> 두 이야기가 나란히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갈팡질팡할 가능성이 컸다. 감독과 작가 사이에서 <나는 전설이다>를 정확히 어느 지점에 놓고 진행할 것인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각본가 아키바 골즈먼의 말이다.

원작과 달리 무대를 LA에서 뉴욕으로 옮긴 것도 의미심장하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건데 영화의 무대는 LA보다 뉴욕이 더욱 상징적(iconic)일 거라 생각했다”는 로렌스 감독의 말에서 ‘뉴욕’의 지정학적 의미가 다시 한 번 환기된다. 뉴욕의 주요 도심을 통제해가며(박스 참조) 촬영한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단순한 눈요깃감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파괴된 곳에서 새롭게 영웅이 탄생하는, 현실의 종말이자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인 셈이다.

미국처럼 역사가 일천한 나라는 그들의 전설과 신화를 영화로 창조해 전파하려 한다. <나는 전설이다>는 그 상징적 전설 만들기를 시도한다. “<나는 전설이다>의 설정은 많은 영화에서 흔하게 사용됐던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실제처럼 느끼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나는 전설이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아름답다.” 원작과는 정반대의 결말을 접하고 감독의 이 말에 수긍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원작자 리처드 매드슨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렌스 감독의 영화는 결과적으로 가장 원작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 다시 한 번 반복된 영화의 실패가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전설적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리라는 건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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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5호
(2007. 12. 18)

<죽어도 해피엔딩>(Happy 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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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해피엔딩>은 안팎으로 뚜렷이 비교되는 두 편의 작품이 있다. 원작인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와 저예산 HD로 제작된 코믹 잔혹극 <달콤, 살벌한 연인>이 그 작품이다. 다행히 <죽어도 해피엔딩>은 이 영화들의 장점을 취하되 자기만의 차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1998년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김상윤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 대표(당시 새롬엔터테인먼트 부사장)는 프랑스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1998)를 보고 즉시 판권을 구입했다.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는 잔혹한 이야기지만 혐오스럽지 않게 구성한 방식과 무뚝뚝하게 웃음을 주는 설정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귀국 후 가장 먼저 영화의 성격과 부합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상영을 제안했다. 그해 7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는 영화제 기간 동안 화제작으로 떠오르며 인기를 누렸고 1999년 4월에는 10개관에서 3주 동안 상영되며 5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그동안 김 대표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를 리메이크하는 것. 적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자가 남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설정과 잔혹한 표현 등이 당시 국내 관객의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김상윤 대표는 소리 소문 없이 등장한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을 보며 ‘무릎 팍!’ 리메이크를 진행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여주인공이 살인을 한다는 설정을 코믹하게 묘사한 영화가 절찬리 상영되는 것을 보며 국내 정서가 7년 전과는 크게 변화했음을 목격한 것이다. 결국 <달콤, 살벌한 연인>을 제작한 싸이더스FNH의 김미희 대표를 만나 함께 리메이크하기로 결정,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를 본 후 8년 만에 <죽어도 해피엔딩>을 내놓게 됐다.


원작보다 강화된 캐릭터와 소품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는 서른다섯 살의 여성 추리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생일을 맞아 네 명의 남자친구를 초대, 배우자를 선택하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모두를 죽인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을 코믹하게 다룬다. 싸이더스FNH 측에서는 무엇보다 원작에서 약하게 다뤄졌던 멜로코드를 강화하기 바랐다. 관객의 관심을 모으는 데 유리하겠다는 판단에서다.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매니저를 배치, 멜로라인을 수월하게 하는 한편 시체를 함께 옮기도록 설정해 원작과 달리 현실성을 높이도록 했다. 하지만 제작자의 바람과 달리 <죽어도 해피엔딩>은 멜로가 두드러지지도 리얼리티가 강화되지도 않았다. 각본을 담당한 강경훈 감독은 “로맨스가 많아지면 소동극인 영화의 성격과 맞지 않아”서, “비현실적인 면이 강해 리얼하게 접근하면 무리하게 논리관계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멜로의 비중을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그래서 <죽어도 해피엔딩>은, 여배우 지원(예지원)이 청혼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남자들을 예기치 않게 살해하게 되고 매니저 두찬(임원희)과 시체를 숨기기 위해 벌이는 코믹소동극으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했다.

<죽어도 해피엔딩>이 리메이크 과정에서 원작과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캐릭터 묘사에 더욱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먼저 원작은 캐릭터 자체보다 영화의 형식에 더욱 공을 들인다. 추리소설가가 주인공이라는 점에 착안, 막을 4장으로 나눠 소설 느낌을 살리고 대사의 비중을 높인 것이다. 반면 <죽어도 해피엔딩>은 캐릭터를 강화하는 쪽으로 변주를 꾀했다. 원작이 상황의 변화에 맞춰 캐릭터를 끌고 간다면 이 영화는 캐릭터가 상황을 이끌어가는 셈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4명의 남자친구는 그다지 개성이 뚜렷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죽어도 해피엔딩>의 남자들은 모두 강력한 디테일을 갖추고 있으며 저마다 인상적인 대사와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강경훈 감독은 “정형화된 인물의 단면을 하나만 비트는 쪽”으로 캐릭터를 구성했다.

‘바람둥이’ ‘속물 지식인’ ‘무식한 조폭’ ‘소심한 연출가’ 등 한 마디로 설명 가능한 캐릭터를 창조한 뒤 특정 행동에 대한 묘사를 과장했다. 개인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을 희화하고 판타지적인 성격을 강조해 사건을 극적으로 끌고 갔다. 담배 연기와 강한 하이라이트 조명으로 강조되는 누아르풍의 형사 캐릭터(장현성)는 원작을 따른 것이지만, 여주인공을 보조하며 살인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매니저 캐릭터는 <죽어도 해피엔딩>만의 고유한 점이다.

<죽어도 해피엔딩>의 또 다른 차이는 캐릭터의 성격을 강조하고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종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첫 번째 희생자는 날카로운 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다면 <죽어도 해피엔딩>의 데니스(리차드 김)는 꽁꽁 얼어붙은 동태에 찔려 숨을 거둔다(김기덕 감독의 <야생동물 보호구역>에도 비슷한 설정이 등장하긴 한다). “원작과 똑같이 진행하는 것보다 도구 하나라도 다르게 적용해 색다른 면모를 제공하려”는 감독의 연출 의도로, 살인 플롯의 전개과정은 더욱 밀도 있게 바뀌었다. 원작은 살인 장면에서 칼이나 유리 등이 사용돼 잔혹한 느낌이 강화됐지만, <죽어도 해피엔딩>의 도구들은 잔혹함 대신 코믹함을 강조한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주크박스는 원작에도 등장하는 것이지만, 지구본, 라이터, 시계, 사탕과 같은 소품을 통해 캐릭터를 재치 있게 설명할 뿐 아니라 화장실 유머 같은 지저분한 설정도 거부감이 없도록 만든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원작의 후광에서 벗어나 그만의 독특한 재미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HD 저예산영화의 업그레이드

<죽어도 해피엔딩>은 제작방식과 이야기의 설정 면에서 여러모로 <달콤, 살벌한 연인>과 견줘볼 만하다. 잔혹한 이야기를 희화화해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것, 스릴러로 포문을 열지만 결말은 남녀의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점은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다만 비슷한 아이디어를 장르로 치환하는 면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 로맨틱 코미디인 것에 반해 <죽어도 해피엔딩>은 소동극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이자, 로맨틱 코미디가 리얼리티를 근간으로 한다면 소동극은 판타지적인 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어도 해피엔딩>과 <달콤, 살벌한 연인>의 밀접한 연관성은 저예산으로 고효율의 완성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죽어도 해피엔딩>이 <달콤, 살벌한 연인>을 통해 HD 저예산영화 경험을 축적한 싸이더스FNH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한 건 이 때문이다. 특히 로케이션을 최소화한 연출로 10억 원 안팎의 제작비만을 소비했던 <달콤, 살벌한 연인>은 사건의 95%가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죽어도 해피엔딩>으로서는 최적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컨셉의 HD영화라 하더라도 레퍼런스 모델을 그대로 따를 수만은 없는 법. <달콤, 살벌한 연인>의 공간이 자연스러운 일상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면 <죽어도 해피엔딩>의 공간은 판타스틱하게 가공된 느낌이 강하다. 또한 전자가 캐릭터 수를 최소화하면서 공간이동의 다양화를 꾀했다면 후자는 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대신 등장인물의 수를 최대화했다.

<죽어도 해피엔딩>의 공간, 즉 세트로 지어진 예지원의 집은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길 정도로 철저히 연극무대화돼 있다. 2층집 구조의 세트를 따로 구분해 짓지 않고 함께 세워 무대의 느낌을 부풀렸고 살인이 발생하는 부엌과 화장실 같은 주요 무대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공간보다 두 배 이상 넓게 잡아 카메라와 조명의 동선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죽어도 해피엔딩>의 화면 구성은 기존 영화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띤다. 거리 확보가 쉽지 않아 촬영 대상에 타이트하게 접근, 과장된 느낌과 극적인 느낌을 동시에 살려 소동극에 적합하게 했다. 또한 가구와 같은 소품을 빼곡 차도록 배치, 카메라 각도의 변화를 수시로 가져가 다양한 앵글의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다보니 <죽어도 해피엔딩>에는 인물의 유려한 동선이나 카메라 움직임은 절제된 편이다. 이를 대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장면의 빠른 컷 호흡이다. 94분의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편집의 역동성에 있다. HD카메라의 사용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테스트 없이 바로 촬영에 들어가도 경제적인 손실이 크지 않은 카메라의 특성상 많은 장면을 얻어 영화에 적합한 편집의 묘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필름 촬영은 두 번 테스트 촬영을 하고 한 번 본 촬영을 하는 반면, <죽어도 해피엔딩>은 테이크당 평균 세 번 촬영했다. 필름 소비로 인한 제작비 누수에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어도 해피엔딩>의 HD 저예산 촬영은 <달콤, 살벌한 연인>의 경제적인 연출을 그대로 계승한 면이 있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달콤, 살벌한 연인> 2.0’ 혹은 ‘HD 저예산영화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전히 남은 숙제, 철저한 프리프로덕션

<죽어도 해피엔딩>은 최종적으로 16억 8천만 원의 제작비에 31회의 촬영(1회 보충촬영 포함)으로 완성됐다. 수십억 원의 영화가 즐비하고 평균 촬영횟수가 50회를 넘기기 일쑤인 지금의 한국영화 풍토에서 의미 있는 성과임은 분명하다. 다만 이것이 한국영화계에 있어 의심의 여지없는 모범사례인지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30억 원 수준의 제작비가 적정선으로 평가받는 시장 상황상 <죽어도 해피엔딩>의 17억 원은 상대적으로 저예산임은 분명하지만 “예산의 효율적인 사용 면에 있어서 여전히 줄일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 김영화 PD의 설명이다.

이는 결국 표준화되지 못한 한국영화계의 제작 시스템 문제로 귀결된다. 김 PD는 <죽어도 해피엔딩>의 작업에 대해 “프리프로덕션이 짧아 좀 더 계획적인 진행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원래 내정된 감독이 있었지만 영화의 성격과 맞지 않아 작가로 참여했던 강경훈 감독이 연출자로 결정되면서 두 달의 공백기간이 생겼다. 아쉽게도 예정된 촬영기간에 맞추기 위해 시나리오 수정작업이 철저히 뒷받침되지 못했고 형식에 대한 고민 역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네 남자의 죽음에만 힘을 쏟은 관계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산만해지고 강약조절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영화의 흠으로 남는다. 좀 더 꼼꼼한 계획에 맞춰 프리프로덕션이 선행됐다면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제작비도 좀 더 절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제작비가 30억이 됐든 17억이 됐든 액수 자체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제작비의 총액에 걸맞는 계획의 수반 여부에 있다. 이에 대해 김영화 PD는 “표준 제작 시스템의 정착으로 작업방식의 안정화를 꾀해야 할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강경훈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로케이션과 같은 요소가 모두 결정돼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프로덕션이 더욱 철저해야 한다”고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영화뿐 아니라 영화제작을 둘러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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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50호
(2007. 9. 1)



 

<푸른 눈의 평양 시민>(Crossing the Line)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1년 6월, 중국에 머물고 있던 대니얼 고든은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천리마 축구단>(2002) 촬영을 위해 북한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고려여행사 대표이자 공동 프로듀서인 니콜라스 보너였다. 메일을 통해 그는 미국인 네 명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미국과 철천지원수 지간인 북한에 미국 사람이 살고 있다고, 정말?

호기심이 발동한 고든은 그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북한에 사는 미국인들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한창이던 시기 남한에 파견된 군인들로, 직접 북한으로 넘어가 40년이 넘도록 그곳에서 살고 있는 미국 망명자였던 것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던 고든은 그들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든은 <천리마 축구단>을 촬영하는 동안 ‘조선영화 수출입 공사’ 관계자를 통해 망명 미국인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천리마 축구단>에 호의를 가지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워 했지만 곧 문제의 미국인들이 누구인지 고든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네 명 중 두 명은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 두 명이 평양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의 이름은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과 ‘찰스 로버트 젠킨스’였다.


기대하지 못했던 이야기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하 <평양 시민>)에는 드레스녹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하지만 고든은 이 영화를 드레스녹 개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연출하지 않았다. 드레스녹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범위를 넓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 사이에 월북한 네 미국인의 정체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미국 정부를 경악케 한 사건은 1962년 8월에 일어났다. 드레스녹이 순찰을 돌던 중 월북을 시도한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유년 시절, 군생활 중 파탄 난 결혼생활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망명을 선택한 것이다. 북한에는 ‘래리 알렌 앱셔’라는 미국인이 드레스녹과 비슷한 사연을 안고 이미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드레스녹과 앱셔는 처벌을 받는 대신 선전용으로 이용됐고 이들의 선전에 혹한 ‘제리 웨인 패리쉬’와 ‘젠킨스’ 두 미국인이 북한으로 넘어왔다. 미국 정부는 당황했지만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하고 사건을 은폐했다. 네 미국인의 존재는 부정됐다. 그러는 동안 푸른 눈의 네 병사는 적국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평양 시민>에는 이런 소재의 영화에 기대할 법한 정치적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을 배제한 채 북한으로 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북한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평양 시민>은 이들이 누구인지, 왜 북한으로 망명을 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밝힐 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비범한 사건을 겪었지만 거기서 역사적인 맥락을 걷어내면 이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고든 감독은 <천리마 축구단>과 <어떤 나라>를 통해 북한, 그것도 평양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평양 시민>에서는 월북한 미군병사라는 민감한 소재로 범위를 넓혔지만 감독의 목적은 정치적 선전효과가 아닌 평범한 이들의 사연에 있다. 드레스녹이 주인공이지만 네 병사 모두의 이야기로 영화를 구성한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평양 시민>은 우리가 상상하는 혹은 기대하는 북한의 모습을 철저히 배반한다. 어느 체제가 더 우월하다는 이분법에 기초한 정치적인 시선은 배제하고 철저히 다큐멘터리적 중립성을 유지한다.

양쪽의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평양 시민>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반된 의견이 도출될 수 있게 만든다. 즉, “어떤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진실은 판이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감독의 입장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평양 시민>은 부정국가의 이미지로만 덧씌워진 북한에도 인간적인 면모가 존재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카메라 한 대로 증명해 보인다.


자족의 행복을 말하다

대니얼 고든 감독의 중립적인 시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천리마 축구단>으로 시작해 <어떤 나라>를 거쳐 <평양 시민>에 이르기까지 ‘편견 없음’은 ‘북한 삼부작’을 일관되게 관통한 태도였다. ‘천리마 축구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을 때부터 비교적 쉽게 북한의 취재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비방하는 영화가 아닌 중립적인 시각에서 북한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2002년 평양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천리마 축구단>은 매진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국영방송을 통해 열 번 이상 방영되는 등 소위 ‘대박’을 기록했을 정도다.

<천리마 축구단> 촬영 중 우연히 접한 매스게임에 매료돼 기획된 <어떤 나라>는, 북한에겐 일종의 도박이었다. 다름 아닌 평양 사람들의 일상이 주요 소재로 차용됐기 때문. <천리마 축구단>의 경우, 1966년 영국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던 까닭에 기록화면이 영화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실생활이 공개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중학생 소녀가 주인공인 <어떤 나라>는 그들의 집과 가족이 영화 내용으로 포함됐기 때문에 북한의 ‘속살’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했다. 발전 시설이 부족해 정전이 잦고 밤이면 어둠에 잠기기 일쑤였던 평양의 일상은 <어떤 나라>를 통해 가감 없이 외부에 공개된 것이었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위험부담을 안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불순한 의도가 없는 이들의 촬영을 거절할 이유가 그들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니얼 고든은 <어떤 나라>에 대해 “북한의 실생활이 공개된 사실보다 주체사상에 대한 본질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산물인 북한의 집단 매스게임을 두고 ‘집단의 필요가 개인의 욕구에 우선한다’는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사례로 언급한 것. 이를 통해 북한의 폐쇄성이 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 박탈이 아닌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부분적’ 자유 박탈에서 기인하는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같은 연출의도에 자기의 운명은 자기가 개척한다는 주체사상의 본래적 의미가 담겨 있음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니얼 고든이 북한 삼부작을 통해 보여주는 중립적 시각은 어떤 견해도 삽입하지 않는 기계적인 의미에서의 중립성이 아니다. 그 전에 체제보다 개인을, 복종보다 개척을, 운명보다 삶을 우선하는 전제로 한다. 그래서 1966년 월드컵의 업적을, 매스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두 소녀의 성과를 북한이 아닌 이들 개인의 공으로 돌린다(<어떤 나라>는 현순과 송연의 공연을 보여주며 ‘김정일은 끝내 어떤 공연에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평양 시민>에서 더욱 강조된다. 여기서 감독이 네 병사에게 갖는 가장 흥미로운 의문은, 오늘날도 북한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적의가 더욱 강력했던 당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네 병사 중 유일하게 현재도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드레스녹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그가 북한의 체제에 대해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은 자신이 꾸려나가야 한다는 주체사상을 마음에 들어 하는 그의 모습을 확실하게 포착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라는 그의 대사는 영화를 통해 고든이 말하고 싶었던 바를 짐작케 한다. <평양 시민>에는 정치적인 견해는 없지만 감독의 견해는 존재한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모두 환경에 맞게 적응해 살아간다는 것. 이는 견해라기보다는 진리에 가깝다.


관객에게 판단을 넘기다


만약 고든 감독이 정치적 견해를 밝힐 요량이었다면 체제나 삶의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는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관계를 더욱 파고들었을 것이다. 촬영 전 <평양 시민>은 두 사람을 중심에 놓고 진행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젠킨스의 부인이 일본에 넘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고(그녀는 납북된 일본 여성이다!) 이 문제가 북한과 일본, 미국의 정치문제로 비화돼 촬영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젠킨스의 이야기 추이를 지켜보며 바로바로 영화에 삽입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다.

감독은 촬영을 진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평양 시민>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었기에 당시 벌어지고 있던 사태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 달 후 이는 감독의 입장에서 올바른 선택임이 밝혀지는데 젠킨스는 부인을 따라 일본의 미군에 투항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상반된 진술로 드레스녹과 진실공방을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양 시민>은 “북한에서 문제없이 살고 있다”는 드레스녹과 “노예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젠킨스 두 사람의 진술을 공정하게 들려줄지언정 그 결과에 대해서만큼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이와 관련해 진실을 캐볼 수 있는 주변인물과 관련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체제의 본질에 깊게 다가서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한 고든의 반응은 단호하다.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 감독으로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이 내용을 보고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다.” 감독은 사실을 밝히는 데 있어 관객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만한 편향된 시각에는 가차 없이 편집을 가하기도 했다. 가령, 고든은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남한 근무 당시의 상관을 만나 이들에 대한 평가를 들었지만 영화에는 삽입하지 않았다. 상관 개인의 견해일 뿐 사실의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양 시민>은 북한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이,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감독의 입장이 북한 삼부작 중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말하려는 바에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걸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없는 일을 꾸미지도, 사실을 왜곡하지도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평양 시민>은 북한도 인간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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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9호
(2007. 8. 20)


 

<리턴>(Return)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국의 장르영화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신세다. 매년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공포영화는 몇 년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스릴러영화는 제작되는 편수가 많지 않아 성과를 언급하기에는 민망할 지경이다. 다행히 올해 초 개봉한 <극락도 살인사건>이 괜찮은 흥행을 기록했지만 그 역시 정통 스릴러라고 하기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규만 감독의 <리턴>은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 스릴러영화다. 소재 자체도 구미를 당긴다. ‘수술 중 각성’, 즉 ‘전신마취를 한 환자가 수술 도중 의식이 깨어나 모든 통증을 느끼지만 정작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다룬다.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니(?) 독특한 소재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스릴러의 소재로도 꽤 그럴듯해 보인다.

당연히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곳은 병원이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으로 열연을 펼쳤던 김명민이 유능한 외과 전문의 류재우로 등장하는 까닭에 <리턴>은 자칫 <하얀거탑>의 영화 버전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같은 배우의 동일한 배역, 그리고 극중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두 작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얀거탑>이 장준혁 개인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리턴>은 류재우는 물론 그의 동료 장석호, 오치훈, 강욱환 네 명의 균형을 극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또한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류재우는 장준혁과 달리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차이라면 차이. 이야기 구성 측면에서도 <리턴>은 복수를 위해 저지른 연쇄살인사건이 플롯을 이끌어가는 핵심요소로 작용한다. 방영은 <하얀거탑>이 빨랐지만 촬영은 <리턴>이 먼저 이뤄졌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리턴>은 미국 드라마 <하우스>와 닮았다. 미스터리한 의학사건을 전문적인 분석을 통해 풀어가는 것처럼 <리턴> 역시 의학적 현상을 가지고 두뇌싸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소재를 취하는 데 있어 1982년에 벌어졌던 사건을 2007년에 끌어들여 마치 거대한 운명론적 관점을 펼쳐보이듯 이야기를 풀어간다. 수술 중 각성을 겪은 한 소년이 이상증세를 보이다 사라진 뒤 25년 만에 나타나 그의 수술과 관련 있는 의사와 주변 인물에게 복수극을 펼치는 것. 그래서 <리턴>은 과거에 벌어졌던 수술 중 각성과 관련한 사연의 묘사와 살인범이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 극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비교적 탄탄한 드라마와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리기법을 도입해 한국 스릴러영화로는 근래 보기 드문 만듦새를 갖춘다. 소재주의에 머물고 마는 과거 스릴러영화와 병원을 무대로 사랑이야기를 펼쳐 보이기 일쑤였던 그간의 메디컬영화들과 비교해 보건데 소재 발굴 측면에서나 깔끔한 연출력 면에서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리턴>은 소재 자체가 품고 있는 특수성을 깊이 파고들지는 못한다. 많은 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탓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단순한 구성을 통해 친절하리만치 자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주요 등장인물 역시 최소화해 관객이 범인을 추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진행, 가장 안전한 방식의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스릴러영화는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백미인데, <리턴>의 경우 그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수술 중 각성과 같은 특별한 소재를 현상으로 다루지 못하고 사연으로 소개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는 건 이 영화가 가진 한계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객이 고통을 간접 체험해 극에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드는 연출이 필요했지만 <리턴>은 이해를 돕는 데 치중한 나머지 소재가 가진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이는 수술 중 각성을 너무 거대한 이야기 속에,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풀어가는 효과적이지 못한 연출에서 기인한다. 가령,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혐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심한 디테일이 필요한 주요 인물들의 혐의는 간단한 트릭으로 마무리 짓는 것에 반해 주변 인물들의 계략은 복잡하게 구성하는 등 이를 풀어가는 추리 효과는 인물간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 묘사는 풍부하되 그 속의 디테일은 한쪽으로 치우쳐 고르지 못하고 장면에 대한 설명은 친절하되 차고 넘쳐 예상 가능한 내용 전개가 펼쳐진다. 구조상의 불균형이 눈에 띄는 것이다.

<리턴>은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스릴러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일정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게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을 확인한 정도에서 머문 수준이라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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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7호
(2007. 8. 6)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 Days in Paris)


사용자 삽입 이미지<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이하 <뉴욕 남, 파리 여>)는 연애 2년차에 접어든 남녀가 이틀 동안 파리에 머물며 벌이는 연애담을 경쾌하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게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특히 여자 주인공 매리온으로 등장하는 줄리 델피가 감독과 각본, 편집과 작곡까지 1인 다역을 맡아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줄리 델피의 실제 삶과 경험, 성격을 토대로 기획된 <뉴욕 남, 파리 여>는 출발부터가 그녀의 원맨쇼를 예고한다. 줄리 델피 자신이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다보니 뉴욕에 사는 남자와 파리에 사는 여자를 주인공 연인으로 설정했다. 양국 간 문화 차이에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것. 각본 구성에 있어서는 자신과 친한 주변 지인들을 캐릭터의 ‘재료’로 삼았다. 대부분의 출연배우들이 시나리오 단계에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정해져 있던 상태였다. 가령, 극중 매리온의 남자친구 잭은 이 역을 연기한 배우 아담 골드버그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러다보니 촬영과정에서도 배우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등 가족 같은 친밀한 호흡 속에 진행됐다.

이런 방식의 작업이 가능했던 건 줄리 델피가 <비포 선셋>(2004)을 통해 비슷한 분위기를 경험한 바 있고 그 결과물 또한 좋았기 때문이다(줄리 델피는 <비포 선셋>으로 리처드 링클레이터, 에단 호크와 함께 2005년 아카데미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사실 <뉴욕 남, 파리 여>는 유럽여행 중 벌어지는 상황극이라는 점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30대 중반의 남녀가 파리에서 사랑에 관한 달콤 쌉싸래한 로맨스를 나눈다는 점에서 <비포 선셋>을 닮았다. 즉, <뉴욕 남, 파리 여>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하지만 줄리 델피는 “로맨틱하고 달콤했던 <비포 선셋>과 달리 <뉴욕 남, 파리 여>를 다소 거칠고 삐딱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보이게끔 만들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밝힌다. <비포 선셋>에서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 셀린이 프랑스 여자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게끔 긍정적인 면만 부각됐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를 위해 줄리 델피는 잭을 보수적인 남자로, 매리온을 개방적인 여자로 설정, 각자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생활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주요하게 다룬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낭만과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프랑스 여자의 모습을 강조한다. 체온계를 항문에 넣고(!) 재고 토끼의 머리고기를 먹을 뿐 아니라 전 남자친구와 시도 때도 없이 음담패설을 나누는 등 <뉴욕 남, 파리 여>의 매리온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여자의 모습일까 의심마저 든다. 일련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기획의도가 마치 ‘프랑스 여자에 대한 환상 깨기’가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뉴욕 남, 파리 여>가 말하는 차이는 국적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격 차원의 문제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남녀 사이의 생물학적인 차이도 중요한 잣대다. 한때 장안의 화제였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이성 간에 서로 다른 감성, 언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면서 잭과 매리온 사이의 시각차에서 오는 갈등을 전반부에 배치하는 것.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행복한 남녀관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가벼운 대사로 일관하며 웃음만 유발하는 작품이 아니다. 잭과 매리온의 성과 사랑에 대한 폭포수 같은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랑에 관한 묵직한 잠언까지 들을 수 있다.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데릭 엘리는 ‘우디 앨런 감독이 초기작에서 보여줬던 특기가 파리의 거리에서 부활했다’고 평가했을 정도. 결국 <뉴욕 남, 파리 여>가 보여주려는 건 달콤한 로맨스에 가려진 씁쓸한 사랑의 뒷모습인 것이다.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뉴욕 남, 파리 여>의 메시지는 평가받을 만하지만 스토리와 연출력이 그에 상응하는 건 아니다. 특히 경쾌한 에피소드 위주로 진행되던 영화가 사랑의 본성을 설파하는 지점에 이르면 갑작스럽게 마무리된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에피소드와 메시지 사이의 균형 맞추기에 실패한 까닭이다. 이는 프랑스인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해 또 다른 면모를 필요 이상 극단으로 밀어붙인 데서 기인한다. <뉴욕 남, 파리 여>에 등장하는 프랑스인은 대부분 무례하고 흉물스럽고 예의라고는 희박한 존재로 묘사된다. 더군다나 이를 프랑스인 전체로 일반화하다보니 캐릭터의 성격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국가적 특징만이 부각돼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워진다. 캐릭터들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랑은 논리적으로 규정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지만 정작 영화 자체가 논리 모순에 빠져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뉴욕 남, 파리 여>는 로맨틱 코미디로서 만족할 만한 재미는 주지만 줄리 델피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성과는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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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4호
(2007.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