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달리아>(The Black Dahlia)


사용자 삽입 이미지살인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히 사람의 숨이 멎었다는 사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生)의 유통기한을 다한 결과는 싸늘한 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블랙달리아>에서 입술이 양쪽으로 찢어지고 몸뚱이가 두 동강 난 채 내장이 깨끗하게 적출된 시체는 이 세상을 규정할 열쇠로써 또 다른 삶을 연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있는 것들을 증거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섬뜩하게 전시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를 밝혀내는 건 열쇠를 손에 쥔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1987년에 발표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블랙달리아>는 미국의 가장 충격적인 살인으로 기록된 ‘블랙달리아’ 사건을 소재로 당대의 사회를 치밀하게 읽어낸 하드보일드 소설의 걸작이다. 1947년 1월 15일 아침 LA 근교에서 발견된 젊은 여자, 검은 옷을 입고 포르노 필름에 등장했다 하여 일명 ‘블랙달리아’로 불리게 된 그녀 엘리자베스 쇼트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수사관을 통해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LA, 이 도시로 대표되는 전후 미국의 혼란을 치밀하게 읽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카페이스>(1983), <언터처블>(1987), <칼리토>(1993) 등의 범죄영화를 통해 타락한 시대적 징후를 탐구하는 데 일가견을 보여 온 브라이언 드 팔마가 <팜므 파탈>(2002) 이후 차기작으로 이를 영화화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특히 극중 ‘불과 얼음’으로 불리는 LA의 유능한 수사관 버키와 리가 ‘블랙달리아’ 사건에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천착해온 드 팔마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어릴 적 납치돼 마약에 중독된 채 시체로 발견된 여동생의 모습과 블랙달리아를 동일시하는 리의 모습, 블랙달리아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매들린에게 마음이 쏠려 있는 버키의 모습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1958)에서 매들린(킴 노박)에 집착하는 형사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의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 증세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버키와 리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주변인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무려 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가 된 소설의 구조와 달리, 영화는 드 팔마의 장기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버키와 리, 케이와 매들린 네 명에게 집중해 2시간의 이야기로 축소됐다.

그중 버키와 리, 케이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블랙달리아>의 주제에 접근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들 셋의 관계, 즉 두 남자 모두 케이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버키와 리의 사랑을 포용하는 관계 설정은 ‘파멸’이 아닌 ‘공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장르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블랙달리아 사건’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가해지자 각자가 숨기고 있는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서서히 붕괴시키고, 결국 그 빈틈을 파고드는 건 LA의 추악한 이면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 해결방식은 증거를 통한 ‘추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쇼트와 관계된 사람은 물론 이를 수사하는 형사까지, 영화는 모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파고든다. 결국 블랙달리아 사건의 전모는 우연으로 점철돼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우연의 끝이 할리우드의 거물급 인사와 LA 형사에게 이어져 있다면, 이는 사실상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그만큼 LA의 부패는 도시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LA의 혼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략적으로 꿈을 파는 이미지를 선전해온 미국의 타락한 이면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드 팔마는 인물간의 관계를 통해 도시의 이면을 읽어내는 한편, 도시에 대한 묘사를 전면에 드러내 당대의 비릿한 공기를 포착한다. 그런데 여기엔 원칙이 있다.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먼트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앞에 두고도 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갖는 태도로 일관한다. 가령,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이를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축이 되는 건물을 가운데 두고 마약범을 체포하는 버키와 리를 보여준 뒤 그 건물을 넘어 블랙달리아 사건의 시작을 포착한다. 시체 주변으로 펼쳐진 배경에서부터 이야기가 번져오고, 카메라는 도시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부터 살인사건의 이미지를 찾아나간다. 영화 <블랙달리아>의 이런 태도는 원작에 의지한 바가 크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사회의 이면을 읽어내는 소설의 화법 자체는 그대로 보존한다.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대폭 축소했을지언정 화법과 주제에 있어서는 큰 변화를 기하지 않으면서 연출의 안정화를 꾀하려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블랙달리아>는 그의 신작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좀 심심한 면이 없지 않다. 드 팔마 감독 특유의 복잡한 미스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듯 유영하는 이미지는 원작의 방대함과 누아르라는 장르가 지닌 이미지의 클리셰에 갇혀 힘을 잃고 만다. 브라이언 드 팔마 이전 <블랙달리아>의 영화화에 뛰어들었던 데이비드 핀처는 3시간 버전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을 매달린 끝에 포기를 선언했고 미국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살인 이야기 <조디악>(2007)을 내놓기도 했다. 그만큼 <블랙달리아>가 품고 있는 충격파는 단 몇 시간에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여전히 할리우드에는 엘리자베스 쇼트처럼 배우의 꿈을 안고 영혼을 팔며 살아가는 ‘블랙달리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미국은 이들의 타락을 자본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블랙달리아>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그 무엇도 명쾌히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무력감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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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59호
(2007. 10. 30)

<원스>(Once)


사용자 삽입 이미지뮤지컬영화는 음악에 관한 영화인가, 음악이 배경인 영화인가. 이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말 그대로의 뮤지컬(musical)은 음악을 앞세운 영화일 수 있지만 꼭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뮤지컬은 사랑이 주제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랑은 그것이 이뤄지기 전까지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이를 표현하기에 현실의 시간을 무시하고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하는 뮤지컬만큼 적당한 장르는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뮤지컬영화는 음악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음악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러브스토리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 모른다.

“때로는 음악이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존 카니 감독의 <원스>는 뮤지컬영화다. 그것도 단돈 십만 달러, 즉 우리 돈 약 9천만 원으로 불과 14일 만에 완성한 저예산 인디뮤지컬영화다. 적은 예산과 기간만으로는 화려한 뮤지컬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만큼 존 카니 감독은 우리가 과거에 보았던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뮤지컬영화와는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 아트필름 뮤지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원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거리에서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연주하는 가난한 뮤지션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룬다. 음악이 삶의 전부인 길거리 음악인을 등장시켜 지극히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주인공들이 표출하는 감정을 이들의 노래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 그런 까닭에 <원스>는 음악이 영화 내내 등장할 만큼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단순화해 최대한 음악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연주를 통해 하나의 호흡을 이루는 경지의 즐거움을 남녀가 합일하는 사랑의 순간처럼 구성함으로써 음악과 사랑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진행하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원스>는 음악이 주인공 남녀의 감정을 대체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닌 전면에 나서는 ‘진짜’ 뮤지컬영화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음악이 불쑥 끼어들어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든가 율동과 함께 등장해 현란한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가 없다. 존 카니 감독은 영화 기획단계서부터 “음악이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이 주인공 주변으로 모였다가 음악이 끝난 후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식의 뮤지컬영화의 클리셰를 철저히 배제하려 했다”고 나름의 원칙을 정했을 정도다. 대신 하루 일과 중 하나로 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거리를 걸으며 듣는 자연스러운 행위로서 음악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그 음악들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닌 등장인물의 심정과 사연을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백 퍼센트 구현한다. 가령, <원스>의 남녀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그’ 혹은 ‘그녀’로 지칭될 뿐. 이는 서로에게 감정을 품고 있지만 이름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할 만큼 미묘한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영화의 주제곡인 ‘Falling Slowly’의 가사는 “나는 당신을 잘 몰라요/ 하지만 당신을 원해요/ 이해 못 할 말들이/ 날 바보로 만들기에/ 난 대꾸할 수가 없어요/ 침몰하는 이 배를 붙잡아줘요/ 이제 당신이 자유로워질 때가 왔어요…”와 같은 식으로 그들의 감정을 적극 반영한다.

<원스>는 화려하거나 인공적인 맛은 전혀 없지만 지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뮤지컬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기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뮤지컬영화를 ‘립싱크’에 비유할 수 있다면 <원스>는 ‘라이브’라 할 만하다. 안 그래도 감독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최대한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자”고 배우와 함께 의기투합했다니 이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형식 외에 촬영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이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촬영기법은 ‘들고 찍기’와 ‘롱 테이크’다. 노래가 시작되면 라이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웬만하면 다른 각도의 장면이 삽입되는 경우가 드물고 카메라 한 대가 음악이 끝날 때까지 모두 촬영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들고 찍기는 뮤지컬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촬영법이라는 점에서 신선하다. 주인공인 그가 거리의 악사라는 점에 착안, 현장감을 최대한 살리려는 의도도 있지만 <원스>가 사실주의에 의거한 뮤지컬임을 알려주기 위한 인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취하고 있는 음악에 대한 존중에서 기인한다. <원스>를 연출한 감독에서부터 두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악을 업으로 삼았던 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감독인 존 카니는 베이시스트로 시작해 뮤직비디오 연출에 입문했으며 글렌 한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 역시 밴드 및 왕성한 음악활동 경력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이들은 음악이 내포하고 있는 충만함에 대해 누구보다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 터. 몇몇 되지 않은 관중을 상대로 펼치는 한산한 거리 음악회,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황량한 집 등 초라하기 그지없는 미장센으로 무장한(?) <원스>와 같은 사실주의 뮤지컬은 자칫 영화를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원스>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뮤지컬영화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음악과 이야기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뮤지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이 하나같이 관객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호소력 있기 때문. <원스>는 과거의 뮤지컬영화와는 정반대되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장르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장르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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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53, 354호
(2007. 10. 2)

<레이디 채털리>


<죽음과의 작은 협상>(1994) 이후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한 파스칼 페랑 감독의 <레이디 채털리>는 ‘18禁 소설의 고전’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원작이다. 무엇보다 <레이디 채털리>는 ‘야한 영화’로 곡해되던 그간의 편견을 깨고 채털리 부인을 ‘에로 부인’에서 ‘시대를 앞서간 여인’으로 복권한다.

결혼 제도와 계급대립이 성적 억압을 통해 이뤄지고 있던 1920년대 초반, 채털리 부인은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시대의 룰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레이디 채털리>는 콘스탄스가 능동적으로 삶의 쾌락을 탐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하인 파킨과 관계를 갖는 장면을 묘사하면서도 이를 그녀의 엇나간 욕정으로 이해하는 대신 성적 억압에 맞서 성의 자유를 추구한 독립된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콘스탄스의 이런 모습을 무리 없이 그려낸 데에는 파스칼 페랑 감독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런 사실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령, 그동안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대부분이 콘스탄스를 욕망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면 <레이디 채털리>에서 콘스탄스는 파킨에게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리드하지 않는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감정을 교류할 뿐이다.

<레이디 채털리>에는 남자든 여자든 그 어떤 존재가 우위에 서는 순간이 없다. 감독은 “주인공 남녀의 사랑을 설명하지 않는 대신 경험으로 그려내기 위해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한다. 그러니, 과도한 성애 장면을 감상하려는 관객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콘스탄스와 파킨의 감정을 잡아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평등을 말하는 <레이디 채털리>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채털리 부인을 보여준다.







필름2.0 343호
(2007. 7. 14)

<상성: 상처받은 도시>(傷城: Confession Of Pain)


5월의 홍콩은 덥다, 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전 바라본 고층빌딩이 즐비한 풍경은 30도를 훌쩍 넘긴 날씨를 한방에 잊게 해줄 만큼 시원했다. <무간도> 시리즈 이후 3년 만에 다시 뭉친 유위강, 맥조휘 감독과 양조위의 신작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은 빅토리아 파크에서 내려다본 시원스러운 풍경으로 문을 연다. 그런데 두 감독이 바라보는 홍콩의 화려한 모습은,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캐럴과 느리게 이동하는 카메라 움직임 속에 쓸쓸함을 자아낸다. 외부인과 내부인의 시선 사이에 생긴 관점의 차이일까. 아니면 이게 진짜 홍콩의 모습일까.

지난 5월 13일과 14일, 이틀간에 걸쳐 <상성>의 주연배우 양조위와 유위강, 맥조휘 감독의 기자회견이 홍콩에서 열렸다. 첫 장면과 달리,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과장된 동작을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유위강 감독과 회견장에 들어서자마자 “한국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을 찾아뵙겠다”라며 환하게 미소 지은 양조위. 본색을 숨긴 채 다른 삶을 사는 <무간도>(2002)의 유건명(유덕화)과 진영인(양조위)이 그들 위에 겹쳤다면 과장일까?


상처 받은 도시의 상처 받은 남자들


<상성>의 유위강, 맥조휘 감독은 <무간도>에 이어 다시 한 번 깊은 시름에 잠긴 두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유정희(양조위)와 아방(금성무)은 오랫동안 형사로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온 절친한 선후배 사이.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아방은 그 충격을 못 이겨 형사생활을 접고 술에 절어 산다. 유정희는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고 결국 아방은 사립탐정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유정희의 장인어른과 집사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미심쩍게 여긴 유정희의 아내 숙진(서정뢰)은 남편 몰래 아방에게 사건을 재수사해줄 것을 요구한다. 비밀리에 수사에 들어간 아방은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하고 이 사건에 유정희가 연루되었음을 알게 된다.

거대한 운명에 휘말려 이중적인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상성>과 <무간도>는 닮아 있다. 하지만 “가장 전형적인 홍콩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 맥조휘 감독의 바람처럼 <상성>은 도시와 인물 간의 관계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10년간 홍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침체의 연속이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점으로 홍콩 사람이 떠난 자리에 본토 동포가 대거 유입됐지만 상이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오해가 빚어졌고, 2003년 홍콩을 할퀴고 간 사스의 창궐은 오랜 시간 소통단절을 불러왔다. ‘상처 받은 도시’를 뜻하는 <상성>은 홍콩의 사연을 유정희와 아방이 처한 상황과 쓸쓸한 감정을 도시의 풍광 속에 담아낸다. 유위강의 카메라는 젊음의 거리 소호에서 옛 홍콩을 머금은 금정까지, 중심 주룽반도에서 변방 마카오까지, 홍콩에서 담아낼 수 있는 모든 풍경을 훑는다. 특히 영화의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초반 야경 장면의 경우, 고공 촬영을 금지한 정부를 설득해 홍콩영화사상 처음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감정을 공간 속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상성>은 코넬 울리치로 잘 알려진 윌리엄 아이리시의 추리소설 <환상의 여인>이나 <상복의 신부>를 연상시킨다. 축축한 재즈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1940~50년대 뉴욕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고독한 도시인의 정서를 잡아낸 서술방식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런 상관성 덕분인지, 이 영화는 추리적 요소가 유난히 강하게 부각되는 작품이다. 사건을 쫓는 자와 사건을 은폐하려는 자의 대결구도 속에 ‘누가 죽였을까?’가 아닌 ‘왜 죽였을까?’에 집중하는 이야기 방식이 그렇고, 극중 인물의 사연이 하나하나 단서로 쌓여가며 마지막 순간, 한방에 비밀이 폭로되는 구조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추리극의 익숙한 구조를 차용한 듯 보이지만 <상성>의 재미는 그 구조를 비트는 데서 나온다. 극 초반에 범인의 정체를 노출하고 그런 가운데서 범인의 사연을 추리해가는 것. 이는 추리를 활용한 영화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황에서 관객에게 새로운 충격을 제공하려는 맥조휘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에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범인을 미리 밝힌다는 것은 장르적으로 신선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추리극은 관객의 흡인력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상성>의 경우, 범인을 알게 된 관객들이 그 뒤의 사연을 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관객이 시선을 놓지 않을 만한 전개로 끌고 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유위강의 말처럼 중반 이후 <상성>의 극적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또한 유정희와 아방의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부 역시 <무간도>로 기대치가 높아진 관객의 기대감을 채우기엔 2% 모자란 감이 있다.


양조위, 악한이 되라


<상성> 역시 요즘 유행하는 반전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반전을 위한 영화가 아닌, 철저히 영화에 복무하는 반전을 만들어냈다는 건 신선하다. 유위강과 맥조휘 콤비는 기존 홍콩영화에서 무한 반복했던 요소뿐 아니라 장르영화의 습관적인 룰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데 인색하다. <무간도>는 그런 이들의 방식이 가장 최대치로 발휘된 경우였다. 그리고 <상성>은 <무간도>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맥조휘의 표현을 빌자면 “스토리와 감정 선의 변화에 더욱 신경을 쓴 영화”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유정희로 분하는 양조위의 변신이다. 20년이 넘도록 양조위의 연기를 지켜봐왔던 유위강은 유약한 이미지의 그에게서 악한 모습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양조위의 연기 중 <상성>보다 악랄하고 간사한 건 없었다. 그런 역할을 맡겨 놓고 흥분했다”는 유위강의 호언은 영화 속에서 그대로 증명된다. 단순한 악의 모습이 아닌 악한 행동마저 정당성을 획득하는, 기존 단세포적 악한과 사뭇 다르게 유정희를 묘사한 것이다.

인물을 통해 스토리의 변화를 주었다면 감정 선의 변화를 가져온 건 이제는 변한 홍콩 사람들의 감성이다. 이전까지 우리가 ‘홍콩 누아르’라고 칭한 일련의 영화들은 의(義)와 협(俠) 등 인간관계를 극도로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간도>를 기점으로 홍콩영화 속 인물들은 개인의 안위에 따른 욕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홍콩을 가로지르는 시대의 감수성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가령, 홍콩 반환을 앞둔 시점에서 홍콩영화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불안한 시대적 감성을 묘사하기 위해 끈적끈적한 남자들의 의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홍콩이 중국으로 편입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해졌고 친구와 적을 규정하는 선 역시 희미해졌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간파해 먼저 영화에 반영한 것이 <무간도>였고 신작 <상성>에서는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유정희와 아방은 절친한 파트너 이상의 유사 형제관계를 이루면서, 또 한편으론 한 사건을 사이에 두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가 된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이 보기에 지금 홍콩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대부분 유정희와 아방처럼 애매한 삶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래서 인연의 끈은 희미해지고 사람 사이의 소통은 주파수가 안 맞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홀로 파열음을 낼 뿐이다. 그 결과, 도시를 가득 매운 건 상대방을 잃은 채 말없이 부유하는 인간들. <상성>의 첫 장면에서 빌딩 창 밖으로 흘러나온 빛들이 뭉치지 않고 흩어져 보이는 건, 선에서 점으로 변한 인간관계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아닐까. <상성>은 상처 받은 도시를 채우는 건 상처 받은 인간이라는 지당한 사실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필름2.0 336호
(2007. 5. 22)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을 무대로 노동착취와 인권탄압으로 얻어진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밀수되어 세계 시장에 진입하는지 피로 얼룩진 과정을 고발하는 영화다.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범죄와 마약으로 얼룩진 브라질 빈민촌의 이야기를 담은 <시티 오브 갓>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말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이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보여주다 말미에 이르러  동명소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폴로 린스가 직접 출연한 TV화면을 삽입,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밝혀 충격을 자아낸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식의 이야기와 영상을 통해 브라질이 처한 현실의 처참함을 강조한 것.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이와 반대되는 연출을 보여준다. 시에라리온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인물인 대니 아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솔로몬(디몬 하운수)을 넣어 둘 간의 관계 묘사를 통해 우리 눈에 익숙한 할리우드 영웅이야기로 채색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연출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보여주고 있는 시에라리온의 현실,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 벌이는 잔혹한 전쟁과 이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들, 이에는 아랑곳없이 다이아몬드를 밀수하여 배를 불리는 선진 국가들의 자본가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를 외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흔히 ‘생각 없이’ 보아왔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달리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가 자신이 보여준 이야기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영화가 끝나면 감독은 자막을 통해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를 구매하지 말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관객의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데 영화 내내 비인간적이던 아처가 마지막 순간 솔로몬을 위해 영웅적으로 산화한 뒤 나오는 자막이라는 점에서 이는 시에라리온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요구라기보다는 할리우드 영웅주의에 관한 강요로 비춰진다.

<시티 오브 갓>과 <블러드 다이아몬드>, 아니 느끼게 하는 것과 강조하는 것, 그 차이는 이렇게 크다.


(2007. 1. 14. <스크린>)

<미스 리틀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


<미스 리틀 선샤인>은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처럼 해체되기 일보 직전인 콩가루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바람난 가족>이 가부장의 위기에 따른 가족 해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은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가족 구성원들 개인의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한국의 가족 해체가 집단에서 온다면 미국은 개인에게서 오는 셈이다.

할아버지인 에드윈(앨런 아킨)은 헤로인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났고, 아버지 리차드(그렉 키니어)는 사회적 성공만이 최우선이지만 실패의 연속이고, 어머니 셰릴(토니 콜레트)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고, 아들 드웨인(폴 다노)은 공군사관학교를 꿈꾸지만 9개월째 말이 없고, 딸 올리브(애비게일 브레슬린)는 통통한 몸매에도 미인대회에 집착하는 꼬마숙녀이고, 외삼촌 프랭크(스티브 카렐)는 게이 애인을 경쟁 학자에게 뺐기고 자살시도를 한 경력이 있다. 하나같이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는 가족들이 붙어있으니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이들은 올리브의 미인대회를 며칠 앞두고 함께 길을 떠나게 되는데…
 
임상수 감독은 그런 가족을 봉합시키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게 한 것에 반해 <미스 리틀 선샤인>은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뿔뿔이 흩어진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정상적인 가족이 되도록 봉합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재미있다. 감독은 이를 끔찍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웃음이 쏟아질 만큼 유쾌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여주는 가족 화해의 방식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고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흔히 경쟁사회에서의 최고 덕목이랄 수 있는 1등에 대한 가치를 놀려먹고 그와 대척점에서 불량한 가치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벌이는데 주력한다. 풍자의 대상으로 꼬마 미인대회 ‘리틀 미스 선샤인’을 설정해 제대로 ‘엿’을 먹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일견 편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낙오자를 배제시키는 작금의 사회에 맞서 우리 주인공들의 체면도 세워주고 용기도 북돋아주려는 목적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 감독의 저항 방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부정의 가치를 긍정의 삶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미스 리틀 선샤인>은 <바람난 가족>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흥미로운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자가 가족보다 개인의 가치를 우선하는 쪽에서 결말을 맺었다면 전자인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개인에서 가족으로 가치의 중요도를 이동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을 바탕삼아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미스 리틀 선샤인>의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2006. 12. 15. <스크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I’m a Cyborg, But That’s OK)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싸이보그)>는,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과 그녀를 도와주려는 일순(정지훈)의 신세계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로맨스 영화다. 전작을 통해 무거운 소재의 핏빛 어린 연출력으로 악명을 높였던 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정신병원을 무대로 하고 있으면서 이 장르의 룰을 의도적으로 배반해 이를 로맨스 영화의 틀로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기 때문에, <싸이보그>에서 영군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의사들의 치료가 아니라 일순의 사랑이다. 특히 그것이 상대방의 차이를 없애는 쪽이 아니라 인정하는 순간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감독은 정신병원이지만 흰색타일이 깔린 건조한 공간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문양이 돋보이는 컬러풀한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고 여기에서 환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맘껏 표출하도록 한다(건전지로 밥을 대신하고 형광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군과 남들의 성격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오는 것이 특기인 일순). 의사 역시 환자를 억압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니, <싸이보그>는 마치 한편의 동화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지, 또한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박찬욱 감독은 그 빈 공간을 상징과 기호 또는 공식의 배반과 같은 의미체계로 이미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군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지만 카메라는 이를 영군의 시점이 아닌 일순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전체가 일순의 상상이 아닐까 추론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싸이보그>는 불친절한 영화로 다가온다. 사람을 통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사람을 보니 자연스러움보다 인공성이 더욱 앞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주인공 아이들의 엉뚱한 행동과 말투가 그들에게서 온 것이기보다는 이들보다 영리한 감독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지문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생뚱맞고 썰렁한 것 역시 사실. 그래서 <싸이보그>는 이미지를 초점에 맞추느냐, 이야기를 초점에 맞추느냐에 따라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릴 영화다.


(2006. 12. 15. <스크린>)

<아주 특별한 손님>(Ad-Lip Night)


<여자, 정혜>와 <러브 토크>에서 드러났듯 이윤기 감독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특별함을 뽑아내는 흔치않은 재능의 소유자다. 신작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는 일본의 여류 소설가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소설 <애드리브 나이트>를 원작 삼아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반추하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보경(한효주)에게 낯선 청년들이 접근한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부탁하기를 누가 죽어가고 있으니 하루만 그의 딸 역할을 맡아달라는 것. 망설이던 그녀는 절박한 그들의 사연에 마음이 움직여 하루 동안 타인 행세를 하게 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윤기 감독의 작품에서 사건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도 사건이라고 하면 고작(?)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뿐이지 그 전후사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사건을 접하는 사람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손님>의 카메라는 무관심하게 보경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뿐이다.

그러다보니 한 인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 가족들의 반응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왜냐고? 이런 인간군상의 모습이야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극중 보경은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 그럼으로써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던 이야기는 특별함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윤기 감독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성찰의 내용은 좀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전형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어지는 결말이 그 특별한 순간의 감흥을 저하시키는 까닭이다. 이를 두고 감독은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표현을 했더랬는데 세 번째 작품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는 결말에 비추어 앞으로 그의 과제는 이 틀을 어떻게 깨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2006. 11. 15. <스크린>)

<누가 그녀와 잤을까?>(Who Slept with Her?)


한 남자 고등학교에 여자 교생이 들어온다. 엄지영(김사랑). 그 미모가 심상치 않다. 가슴 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예사요, S라인도 그렇게 잘 빠진 S라인이 없다. 그러니 치맛자락만 보아도 엉큼함을 드러내는 우리의 남학생들, 어찌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던 어느 날 엄지영 교생이 남학생과 잤다는 증거가 포착된다. 용의자는 태요(하석진), 재성(박준규), 영섭(하동훈). 도대체 누가 그녀와 잤을까?


이를 밝히는 건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노골적인 제목만큼이나 <누가 그녀와 잤을까?>의 노림수를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제작사는 <가문의 부활> 시리즈로 유명한 태원. 잘 빠진 여배우의 몸을 이용해 관객을 눈을 현혹하고 음담패설 류의 코미디로 웃음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대신 김유성 감독은 형식적인 면에서 좀 더 색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탐정영화처럼 범인(?)이 마지막에 밝혀지는 구조를 취한 것. 물론, 이 또한 어떻게 하면 한번이라도 더 여배우의 섹시한 자태를 드러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에 지극히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극중 남학생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겠다는 일종의 꼼수 아닌 꼼수다.


다 좋다. 웃음의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관객이 시름을 잊을 수만 있다면. 다만 이런 말은 할 수 있겠다. 그럼 영화라도 짜임새 있게 만들어달라고. 한 예로, 아무리 장르가 코미디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만듦새와 동의어가 아닌 다음에야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을 단순히 플래시백에만 의존하는 건 그만큼 신경을 안 썼거나 고민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를 가지고 관객 운운하는 건 모순이 아닌가. 웃음 이전에 ‘영화’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06. 11. 14. <스크린>)

<프레스티지>(The Prestige)


영화와 마술의 공통점은 트릭, 즉 속임수를 기본으로 하는 장르라는 점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마술은 무대장치를 통해 관객을 황홀경에 빠뜨린다. <메멘토><배트맨 비긴즈>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프레스티지>는 영화이면서 한 편의 마술이자 거대한 속임수다.

앤지어(휴 잭맨)와 보든(크리스천 베일)은 런던의 잘 나가는 마술사. 그런데 둘 사이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마술쇼를 벌이던 중 보든의 속임수로 앤지어의 아내 줄리아(파이퍼 페라보)가 목숨을 잃은 것. 이후 앤지어와 보든은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던 중 목숨을 건 마지막 마술 승부를 펼치기에 이른다.

<프레스티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술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힌다. 평범한 것을 보여주는 1단계, 이를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2단계, 그리고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마술 ‘프레스티지’는 3단계라는 것. 그래서 영화는 이를 형식으로 구조화한다.  앤지어가 보든의 마술 책을 보는 시점, 보든이 앤지어의 일기장을 보는 시점, 그리고 두 주인공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시점으로 나누어 3개의 상황대별로 교차해 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속임수의 최고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감독은 마지막 순간 영화의 ‘프레스티지’랄 수 있는 반전을 심어놓는다. 

하지만 <프레스티지>의 그것은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오로지 반전을 향해서만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전이 생겨난다. 그 내용과 상관없이 반전이 형식상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반전이 허무한 건 사실이다. 그 트릭이 관객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만큼 싱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레스티지>를 실패한 영화로 본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될 듯하다.  이미 언급했듯 이 영화에서의 반전은 그 내용보다 ‘왜’ 등장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프레스티지>는 극 사이사이마다 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을 강조한다. 마술은 그 황홀함의 결과와 달리 속임수의 방법이 의외로 간단할 뿐더러 그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신비감이 깨져 매력이 사라진다는 것. 이를 인지한다면, 이 영화에서의 반전의 쓰임새가 훌륭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술에서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허무해지는 속성을 <프레스티지>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건, 이 영화의 홍보다. ‘침묵서약’ ‘경악할만한 반전’ 등의 문구를 앞세워 <프레스티지>가 오로지 반전으로만 존재 의미를 갖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프레스티지>는 마술이라는 장르를 영화 속에 구조로, 또 형식으로 체화해 보여주는 데 더욱 공을 들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2006. 11. 11.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