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소나타>(2008) 이전까지 구로사와 기요시가 보여주는 공포에는 대부분 실체가 없었다. <큐어>(1997)의 최면 걸린 이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고, <회로>(2001)에선 실체 없는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타고 퍼졌으며, <절규>(2006)에서 역시 사람들은 이유 없이 유령에 씌어 지구멸망에 이르렀다. 마치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 없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에 반해 (국내에 뒤늦게 개봉한) <로프트>(2005)는 많은 것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들이 겪는 공포에 대해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소설가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청탁받은 가벼운 연애소설을 쓰던 중 심한 기침에 시달린다. 급기야 입에서 진흙 같은 것이 흘러나오자 집필 환경을 바꾸기 위해 교외로 이사한다. 바뀐 환경이 맘에 들 때쯤 레이코는 이웃 건물에 거주하는 남자가 시체로 보이는 물건을 운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고고학자인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쓰시)가 연구 목적으로 천년된 미라를 들여온 것. 요시오카의 부탁으로 미라를 맡게 된 레이코는 그날 밤부터 이상한 환상에 시달린다.
<로프트>는 기존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들에 비해 꽤 명확한 공포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도쿄 소나타>에 비해 추상적인 형태를 띤다. 한마디로 <로프트>는 구체(具體)와 추상 사이에서 알아주는 이 없이 묵묵히 공전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우주의 외로운 소행성 같은 영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천년된 미라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저주를 내린다는 자막으로 꽤 구체적인 설정을 제시한다. 그에 맞춰 이야기 역시 레이코가 겪는 몸의 이상이 미라와 관계돼있음을 암시하고 요시오카 또한 미라로 인해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일련의 사건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어지러운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라가 완전히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듯이 <로프트>의 촬영이나 극중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공포의 존재, 그리고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까지 대부분 경계에 선 듯한 양상을 보인다.
단 2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는 HD카메라와 DV카메라를 통해 영화적인 화면과 거친 입자의 라이브한 화면으로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한편으론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기도 한데 미라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갑작스런 유령의 출현에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는 점입가경의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로프트>가 엔딩을 장식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형태로 딱 부러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해피엔딩처럼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에 골인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절망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현대 일본사회를 넘어선 좀 더 큰 범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좀 더 장르적인 영화에 충실하려 했다.”는 감독의 연출의 변을 상기한다면 <로프트>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어렵지 않게 이해 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 때문에 <로프트>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박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치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의 저변에는 기존 작품과 달리 꽤 설명적인 영화로 흘러가는 작품이 결국엔 설명을 회피하고 있다는 반응이 상당수다. 미라는 레이코에게 어떤 저주를 내린 것일까? 과연 레이코는 파멸에 이른 것일까? 요시오카는 왜 그렇게 미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극중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처럼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감독이 관객들에게 의도적인 혼란을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문제는 그런 연출 의도가 형식에 치우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단서가 너무 부족할 뿐 아니라 불친절한 설명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로프트>는 형식에의 지나친 집착이 이야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만하다.

(200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