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트>(ロフ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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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2008) 이전까지 구로사와 기요시가 보여주는 공포에는 대부분 실체가 없었다. <큐어>(1997)의 최면 걸린 이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고, <회로>(2001)에선 실체 없는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타고 퍼졌으며, <절규>(2006)에서 역시 사람들은 이유 없이 유령에 씌어 지구멸망에 이르렀다. 마치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 없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에 반해 (국내에 뒤늦게 개봉한) <로프트>(2005)는 많은 것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들이 겪는 공포에 대해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소설가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청탁받은 가벼운 연애소설을 쓰던 중 심한 기침에 시달린다. 급기야 입에서 진흙 같은 것이 흘러나오자 집필 환경을 바꾸기 위해 교외로 이사한다. 바뀐 환경이 맘에 들 때쯤 레이코는 이웃 건물에 거주하는 남자가 시체로 보이는 물건을 운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고고학자인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쓰시)가 연구 목적으로 천년된 미라를 들여온 것. 요시오카의 부탁으로 미라를 맡게 된 레이코는 그날 밤부터 이상한 환상에 시달린다.

<로프트>는 기존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들에 비해 꽤 명확한 공포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도쿄 소나타>에 비해 추상적인 형태를 띤다. 한마디로 <로프트>는 구체(具體)와 추상 사이에서 알아주는 이 없이 묵묵히 공전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우주의 외로운 소행성 같은 영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천년된 미라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저주를 내린다는 자막으로 꽤 구체적인 설정을 제시한다. 그에 맞춰 이야기 역시 레이코가 겪는 몸의 이상이 미라와 관계돼있음을 암시하고 요시오카 또한 미라로 인해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일련의 사건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어지러운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라가 완전히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듯이 <로프트>의 촬영이나 극중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공포의 존재, 그리고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까지 대부분 경계에 선 듯한 양상을 보인다. 

단 2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는 HD카메라와 DV카메라를 통해 영화적인 화면과 거친 입자의 라이브한 화면으로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한편으론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기도 한데 미라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갑작스런 유령의 출현에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는 점입가경의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로프트>가 엔딩을 장식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형태로 딱 부러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해피엔딩처럼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에 골인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절망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현대 일본사회를 넘어선 좀 더 큰 범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좀 더 장르적인 영화에 충실하려 했다.”는 감독의 연출의 변을 상기한다면 <로프트>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어렵지 않게 이해 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 때문에 <로프트>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박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치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의 저변에는 기존 작품과 달리 꽤 설명적인 영화로 흘러가는 작품이 결국엔 설명을 회피하고 있다는 반응이 상당수다. 미라는 레이코에게 어떤 저주를 내린 것일까? 과연 레이코는 파멸에 이른 것일까? 요시오카는 왜 그렇게 미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극중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처럼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감독이 관객들에게 의도적인 혼란을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문제는 그런 연출 의도가 형식에 치우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단서가 너무 부족할 뿐 아니라 불친절한 설명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로프트>는 형식에의 지나친 집착이 이야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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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8)

<하바나 블루스>(Habana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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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지의 쿠바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건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을 통해서였다. 한동안 조국에서조차 잊혔던 쿠바의 노장 음악가들은 이 영화를 발판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마침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렇게 이들의 음악이 귀를 간질이는 동안 그만큼 궁금증도 커져만 갔다. 왜 이렇게 훌륭한 음악이 이제야 알려지게 되었을까. 또 하나. 훌륭한 노장 음악가를 둔 쿠바의 젊은 음악인들의 음악은 어떨까. 지금 소개하는 베니토 잠브라노 감독의 <하바나 블루스>는 이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영화다.

단짝친구이자 함께 밴드생활을 하는 루이(알베르토 조엘 가르시아)와 티토(로베르토 산마르틴)는 음악을 통해 성공을 꿈꾸는 순수한 젊은이들이다. 첫 번째 콘서트를 기획하던 중 스페인 음악 관계자를 만나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손에 잡힐 줄 알았던 성공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하바나는 재능 있는 젊은 음악인들로 넘쳐나는 도시다. 그런데 이들은 공연장이나 클럽이 아닌 집안이나 주차장 등 최소한의 연주기능을 갖춘 곳에서 주로 공연을 한다. 음악을 산업적 파이로 키우기엔 쿠바의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따른 가난한 삶이 발목을 잡은 것. 그래서 쿠바의 음악인들이 꿈꾸는 건 단순한 부와 명예가 아니다. 이들에게 성공은 연주하는 도중 전기가 끊겨 녹음이 중지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활고 걱정 없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쿠바 음악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조국을 등지는 정치적 발언이 가사에 반영돼야 하고 미국과 유럽인들의 귀에 맞게 연주도 손을 봐야 한다. 응하지 않을 경우? 배곯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음악을 하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주인공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낸 후 초로의 나이가 되어서야 알려지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베니토 잠브라노 감독은 그런 쿠바 젊은 음악인들에게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는 대신 따뜻한 눈길을 선사한다. 12년 동안의 쿠바 생활에서 겪어본 바에 따르면 음악은 이들의 시름과 고통을 잊게 해줄 좋은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체제의 압박은 지긋지긋해요, 암거래도 이제는 지긋지긋해요.’, ‘제가 감히 어떻게 정치와 신에 맞서 싸우겠어요.’와 같은 이들 음악의 가사는 늘 자조적이고 불안해보여도 그 연주만큼은 귀를 파고들 정도로, 심장을 울릴 정도로 경쾌하고 쾌활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혼을 울리는 음악이란 건 바로 이를 두고 나온 말일 테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은 삶을 위해 밀항으로 미국에 넘어가도, 단짝 티토가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스페인 음악관계자의 제안에 쿠바를 떠나도 루이는 좌절하거나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시름을 잊게 해 줄 쿠바의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그런 루이가 언젠가는 지금의 고단한 삶을 벗어나 생활고 걱정 없이 늘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지 않는 음악으로 성공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들려줄 것이라고. 그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이고, 콤파이 세군도이며, 루벤 곤잘레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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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25)

<수면의 과학>(La Science des Reves)


<수면의 과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간의 뇌를 통해 들여다보는 영화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냐고. 미셸 공드리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린 이미 그런 그의 장기를 <이터널 선샤인>에서 확인한 적이 있다. 이번엔 또 어떤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할까.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을 곧잘 착각하곤 했던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화가로써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파리로 온다. 기대와 달리 그가 취직한 곳은 단순 업무가 주를 이루는 달력회사. 이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스테판은 앞집에 사는 이웃 여성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를 알게 되고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런데 스테판은 어찌된 일인지 사랑을 코앞에 두고 꿈과 현실을 착각하는 자신의 지병처럼 오락가락이다.
 
기억을 가지고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수면의 과학>은 <이터널 선샤인>과 닮았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닮은 듯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구석이 있다. 전작이 헤어진 연인들을 대상으로 사랑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연인을 등장시켜 상상과 현실 속 사랑 간의 괴리를 드러낸다. 이를 위해 미셸 공드리 감독은 <이터널 선샤인>을 말하는 데 있어 기억 속 아련하게 박혀있는 화석화된 추억의 이미지를 이용했다면 <수면의 과학>에서는 파이(π)처럼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상상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그 유명한 ‘큰 손바닥’처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특징이 있다면, 셀로판지와 마분지처럼 수공예적인 특수효과가 주를 이룬다는 것. 이는 마치 아이들이 보는 쇼프로를 연상시키는데 거기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수면의 과학>이 보여주는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닌 한없이 철없는 남자의 위악적인 행동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유아적인 그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영화 속 사랑이 감독인 미셸 공드리의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실 <수면의 과학>은 <이터널 선샤인>을 찍던 중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구상된 것인데 이런 경험을 겪으면서 그는 사랑과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나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수면의 과학>인데 그렇다면 현실의 공드리랄 수 있는 영화 속 스테판은 그런 자신의 유약함을 깨닫고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감독은 여전히 꿈과 현실을 착각하며 그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스테판의 모습을 통해 사랑에 대한 고민은 결국 뫼비우스의 띄와 같다는 결론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수면의 과학>은 과학은 과학이로되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말하는 과학인 셈이다.


(2006. 11. 15. <스크린>)

<방문자>(Host & Guest)


세상이 불안한 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으뜸은 대화의 기술이 부족한 탓이다. 시대가 첨단화될수록 사람간의 교류가 줄어드니 대화는 사라지고 이득에 눈 먼 자들이 많아지니 일방적인 소통이 주를 이뤄 세계는 점점 혼란 속에 휩싸인다.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는 바로 그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대학 강사 호준(김재록)은 아내와 이혼을 했고 교수 임용에 탈락해서인지 세상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신의 심사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욱’하는 성질을 드러낼 정도. 호준의 앞에 계상(강지환)이 나타난다. 계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 그것도 여호와의 증인의 신자다. 이처럼 각자의 기준에 맞춰 자신들의 세계가 뚜렷한 이들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방문자>는 표면적으로 이 둘 간의 우정을 묘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은 우정의 근간을 이루는 소통의 방식이다. 감독이 보기에 이 세상은 만성적인 소통 부재에 시달리는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려든다면 그 해결방법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목적이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입하려는 호준과 넓은 이해심을 갖추었지만 사람들이 꺼려하는 종교를 가진 계상을 등장시켜 소통을 말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감독은 주인공의 자화상을 비추며 이들이 극장에서, 택시에서, 노래방에서 어떻게 주변사람과 불화하는지 그 주변부를 통해 소통 부재에 시달리는 이 사회의 모습까지도 아울러 보여준다. 하지만 <방문자>는 그런 대화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어 우리 사회로만 한정하지 않고 그 범위를 전 세계로까지 넓힌다. 사실 그래봤자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을 등장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그치야 말로 일방적인 소통으로 불안을 야기한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방문자>는 이처럼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를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투박하거나 거부감을 주지 않는 것은 감독이 유머를 이 영화의 주요한 화법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수의 영화제를 돌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부시의 사진이 실린 신문 위로 라면을 흘려 소통부재의 원인자를 놀려먹는 식의 유머러스한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무거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

이처럼 목표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지 않은 채 직구처럼 쏘아붙이는 감성과 적절한 유머를 혼합한 세련된 연출은 확실히 메이저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독립영화만의 미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런 신동일 감독만의 직접 화술이, 서로를 이해하자는 판에 박힌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감수성으로 느끼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방문자>를 통해 한국 영화계는 또 한명의 주목할 만한 감독을 얻었다.


(2006. 11. 14. <스크린>)

<브라더스 오브 더 헤드>(Brothers of the Head)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라는 장르가 있다. 허구의 이야기를 진짜처럼 보이게 연출한 가짜 다큐멘터리. 이 장르는 허구를 다루면서도 이것을 허구가 아닌 것처럼 연출하는데 그 매력이 있다.

테리 길리엄의 무산된 프로젝트 <돈키호테>의 메이킹 다큐멘터리 <햄스터 팩터와 12 몽키즈의 다른 이야기들>과 <로스트 인 라만차>로 명성을 얻은 영국 출신의 키스 풀튼(Keith Fulton)과 루이스 페페(Louis Pepe) 감독의 <브라더스 오브 더 헤드>는 샴쌍둥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SF 소설가로 유명한 브라이언 올디스가 1977년에 발표한 동명의 원작을 실제 사건인양 연출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톰(루크 트리다웨이 분)과 배리(해리 트리다웨이 분)는 가슴이 붙은 채로 태어났다. 이들에게 상업적인 가능성을 본 흥행업자는 밴드 계약 제의를 하고 자신들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길 원하는 아버지는 계약서에 사인한다. 톰은 기타를 잡고, 배리는 솔로를 맡아 결성된 밴드 ‘뱅뱅’. 독특한 외형과 펑크록으로 무장한 이들은 큰 인기를 얻는다.

이처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장애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들은 늘 무언가에 억눌릴 수밖에 없다. 억눌림은 풀어야 뒤탈이 없는 법. 이럴 때 저항의 음악 록은 좋은 활로가 된다. <헤드윅>의 헤드윅은 남자로 성전환을 하나 잘못된 수술로 인해 생긴 정체성 혼란의 고통을 록으로 이겨내고 <하바나 블루스>의 루이는 생활고 걱정에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시름을 역시 록으로써 해결한다.

톰과 배리 역시 그렇다. 한낱 장애를 지닌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은 ‘뱅뱅’을 통해 기타를 잡고 마이크를 잡음으로써 자신들을 조롱하는 관중들을 향해 역으로 조롱하는 법을 배운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 만든 락의 매력에 거부감을 가질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톰과 배리는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한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록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일깨워주는 운명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몸은 하나이되 머리는 두개라는 것. 이것이 톰과 배리에게 장애보다 더 큰 아픔을 주는 것이다. 이들은 똑같이 생긴 외모와 달리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톰이 내향적이고 수동적인 것에 반해 배리는 외향적이고 공격적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바탕으로 서로를 보완해왔던 이들이 갑자기 적대하기 시작한다. 톰이 저널리스트 로라(타니아 에머리 분)와 사귀게 된 것. 배리는 질투하기 시작하고 이런 그를 못마땅해 한 로라는 분리수술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 몸으로 살아왔던 톰과 배리에게 분리는 곧 끝을 의미할 뿐.

키스 풀튼과 루이스 페페 감독은 평생을 한 몸으로 생활해오다가 분리의 문제에 직면한 이들의 혼란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 중간 중간 샴쌍둥이에 관한 또 하나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투 웨이 로미오>를 삽입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진짜와 가짜,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게 함으로써 톰과 배리의 심적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군다나 <투 웨이 로미오> 이것을 켄 러셀 감독이 연출했다고 하여 인터뷰 화면까지 삽입하여 보여주니 보는 입장에서는 톰과 배리처럼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게 진짜 이야기야 아니면 가짜 이야기야.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허구의 이야기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인양 믿게 되는 혼동 또는 착각. 이것이 키스 풀튼과 루이스 페페 감독이 <브라더스 오브 더 헤드>를 통해 노리는 점이자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묘미다.


(2006. 5. 4. <JIFF Web Daily>)

<농부의 초상>(Profils Paysans: Le Quotidien)



프랑스 출신의 레이몽 드파르동(Raymond Depardon) 감독의 이력엔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사진작가로 출발하여 저널리스트를 거쳐 영화감독에 안착한 전방위 문화 활동가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에는 전직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사진작가답게 꾸미지 않은 생생한 화면을 지향하고 있으며,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는 영화감독으로써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더군다나 1966년에는 세 명의 동료 기자와 함께 이윤추구의 목적이 아닌 자유로운 작업 활동을 우선시하는 자신의 에이전시를 세우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건 드파르동 감독의 특기다.

<농부의 초상>은 총 3부작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지난 2001년 1부에 해당하는 <농부의 초상: 접근(Profils Paysans: L’approche)>이 완성되었으며 2부가 바로 지금 소개하는 <농부의 초상: 일상>이다.

영화는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프리바의 장례식에서부터 진행된다. 그렇다고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르와르 지방에 거주하는 농부들을 상대로 단조로운 일상에 관한 잡다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맞춰 멀찌감치 세워둔 카메라는 프리바의 절친한 친구였던 루이 브레스를 비치다가 그의 조카인 마르셀르 브레스에게로 넘어가고 이웃인 로제르 오뜨르와뜨와 아만다, 폴 야르고, 로베르 만느발 등을 돌며 이들의 대답과 일상을 그저 무작위로 보여줄 뿐이다.

농부의 삶이란 것이 의례 그렇듯 이들의 대답을 듣고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똑같이 단조로워지고 지루해진다. 그리고 하나 더. 쓸쓸해진다. 레이몽 드파르동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이들의 얼굴에는 쓸쓸함과 회한이 그림자처럼 검게 드리워져있다. 풍요로운 대지, 하지만 그 위를 흐르는 공기는 무겁기만 하다.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버린 젊은이, 농촌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한 채 마흔의 나이를 넘긴 농부, 첨단 산업의 육성에 맞춰 줄어만 가는 정부의 지원책, 거대 농장의 출현으로 점점 죽어가는 소작농 등등.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일상의 실체는 이처럼 어둡기만 하다. 레이몽 드파르동 감독이 보여주는 농부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프랑스 르와르 지방의 농부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터다. 우리네 농촌의 현실 역시 오히려 더 나쁘면 나빴지 이들의 그것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위에 언급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현재는 한미 FTA라는 신자유주의 무역 협정의 횡포로 인해 고사 직전의 위기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객관성은 이처럼 프랑스 농촌이라는 특수성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런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라면 카메라를 들고 농촌과 농부들의 현실을 비춰 실상을 알리고 이를 고발하는 것이 의무일 테다. 비록 카메라는 한대고 지휘하는 사람은 한명이지만 영화를 보고 또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의 카메라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 듯 하지만 실상은 많은 말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농부의 초상>은 바로 이런 카메라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다.


(2006. 5. 3. <JIFF web Daily>)

<병사들의 귀환>(Homecoming)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명분이 거짓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전쟁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부시와 그를 지지하는 공화당원뿐이다. 이들에게 정의는 곧 거짓인 셈. 그래서 우리는 늘 부시와 미국 정부를 향해 진실을 요구하고 재촉해왔다. 영화 역시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필두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진실 규명에 그 어떤 매체보다 적극적이고 선동적이었다.

조 단테(Joe Dante) 감독의 <병사들의 귀환>은 바로 이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 ‘쇼타임’에서 존 카펜터, 토브 후퍼, 다리오 아르젠토, 미이케 다카시 등 호러 영화에 한 획을 그은 감독들을 모아 기획한 TV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Masters of Horror)>의 결과물 중 한 에피소드이다.  

대통령 선거일 며칠 전 정치 토론쇼에 출연한 한 어머니가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요구한다. 이에 공화당원(으로 보이는) 정치고문 데이비드 머치(존 텐니 분)는 “전사자들이 돌아와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녀를 위로하자 정말 그의 말처럼 병사들의 시체가 무덤을 뚫고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대통령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 측에 좀비 병사들은 악재로 작용한다.

이처럼 <병사들의 귀환>은 좀비영화의 공식을 빌려 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더 나아가 앞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영화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좀비들이 자신들을 전쟁으로 몰고 간 이들을 죽임으로써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좀비 영화 특유의 공포를 기대한 이들에게 <병사들의 귀환>은 다소 심심한 것이 사실. 대신 조 단테 감독은 영화 기교 상으로 드러나는 공포대신 현실을 환기시키는데 더욱 집중한다. 이미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고 있는 부시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지금의 현실 자체가 공포영화보다 더욱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공포를 자아내기보다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에 더욱 무게를 둔다. <병사들의 귀환>의 좀비들이 뜬금없게도 대통령 투표권을 요구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점에 기인한다.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에 대한 후회이자 재선이라도 막는 것이 최선이라는 얘기.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인물에 표를 던지면 좀비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면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 현 정부의 재선을 막으면 억울하게 죽은 죄 없는 시체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지 언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권력을 잡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조장하며 투표결과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한 적이 있다. <병사들의 귀환>은 이 역시 놓치지 않고 2000년 대선 당시의 플로리다 개표상황을 끌어와 이를 노골적으로 놀려먹는다. 이처럼 부시 정부와 이를 지탱하는 언론간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 영화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럼으로써 조 단테 감독은 이런 공포스런 현실을 유지하고 진실을 가리는데 여념이 없는 부시와 그의 행정부에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영화의 요구를 들어줄리 만무한 터. 영화의 결말처럼 부시는 재선을 하게 되었고, 이라크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죄 없이 죽어간 무고한 인명들의 진실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병사들의 귀환>을 재미있게 보면서도 그럴수록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던 이유.


(2006. 5. 2.<JIFF Web Daily>)

<카뮈 따윈 몰라>(Who’s Camus Anyway?)


야나기마치 미츠오(Mitsuo Yanagimachi) 감독의 <카뮈 따윈 몰라>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다.

일본의 한 대학. 영화 동아리 학생들은 <지루한 살인자>의 촬영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의례 그렇듯 촬영 전날까지 예상외의 사건들로 넘쳐난다. 이들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 감독은 영화 촬영을 전후한 이들의 8일간의 험난한 여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5분여에 이르는 롱테이크로 포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카뮌 따윈 몰라>는 이 영화의 모든 걸 담아내고 있다.

첫째, 이 롱테이크는 명백히 오손 웰즈 감독의 <악의 손길>에서 빌려온 것이다. 영화에 대한 영화 혹은 영화에 대한 인용이 될 것이라는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의 일종의 선언이다.

그래서 <카뮈 따윈 몰라>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면 그리고 상황들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에서 빌려오고 따오고 인용한 것들로 넘쳐난다. 학생들이 촬영할 영화 <지루한 살인자>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섞어놓은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또한 영화 속 감독 나오카와 그의 여자 친구가 사랑을 두고 갈등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아델 H의 이야기>다. 영화과 학생의 지도교수는 또 어떤가. 젊고 예쁜 여학생을 쫓아다니며 집착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둘째, 조감독을 맡은 히사다는 5일 앞으로 다가온 촬영을 앞두고 주연배우가 펑크를 냈다며 심각한 목소리로 감독 나오카에게 전달한다. 감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영화 만들기의 험난한 과정이 주요 이야기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는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연출한 <아메리카의 밤>의 일본판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 만들기를 두고 각자 고민과 문제를 안고 있다. 가령, 감독은 영화를 만드느라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여자 친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조감독 히사다는 그런 감독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그녀 역시 고민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고민이 <아메리카의 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대학생답게 순수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갖는 고민 중 상당수과 사랑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화 촬영 중 사랑에만 목매다는 것은 아니다. 주연배우의 경우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배역에 깊이 빠져드는데 재미있는 건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이 그의 살인 장면을 두고 현실인지 아니면 영화 속 장면인지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매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영화란 무엇인가,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순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영화에 출연하는 주요 배우들이 비슷한 분량의 시간을 배정받아 얼굴을 비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처럼 <카뮈 따윈 몰라> 역시 다수의 인물이 출연하는 다중 스토리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영화란 일종의 집단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에서부터 영화 말단 스텝에 이르기까지 그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이탈이 되면 영화는 눈에 띄게 덜컹거리기 마련이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협력이 되어야만 하나의 영화가 완성될 수 있는 법. 이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민이 있겠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갈등이 있겠나. 이 험난한 과정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카뮈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나. 그래서 영화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거다.

카뮈 따윈 난 몰라!  


(2006. 4. 30. <JIFF Web Daily>)

<폴리스 비트>(Police Beat)


로빈슨 드버(Robinson Devor) 감독의 <폴리스 비트>는 세네갈의 무슬림 이민자이자 시애틀의 자전거 순찰 경관인 자카라(파프 사이드 냥 분)의 정신적 혼란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단순히 미국에서 차별의 시선으로 인해 적응하지 못하는 이민자의 불안을 묘사하고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그보다 한 차원 아니 두 차원 더 깊은 부분까지 파고든다.

자카라는 이미 미국에서 경찰관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통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인물. 그에게 차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은 없다. 다만 자카라의 혼란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캠핑을 떠난 것에서 발생한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가 나를 떠난 것일까. 그 때문에 자카라는 자신의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사고를 처리하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다.

그래서 영화는 그가 여자친구를 상상하는 모습과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교차하며 보여주고 있다. 내부와 외부, 상상과 현실. 상반되는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전자의 상황에서 그가 세네갈어로 독백하는 모습을, 후자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그 의도를 명확히 한다. 에릭 사티의 피아노 음악이 나오면 그 반대쪽엔 에이펙스 트윈의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나오는 식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개의 가치가 연속적으로 맞붙음으로 인해서 영화는 자카라의 불안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보는 이조차도 그 혼란스러움에 지루할 정도로. 다시 말해 자카라의 정신적인 혼란은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충돌의 실체는 무엇일까. <폴리스 비트>는 몰이해에 따른 소통부재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자카라가 목격하는 많은 사고들이 실은 편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자카라의 동료형사가 창녀와 사귀는 것에 대해 그녀를 사랑한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것이 단적인 예. 더군다나 이것이 그저 영화 속 일이라고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는 것이 시애틀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 비트>는 시애틀 지역 신문의 범죄를 다룬 동명의 칼럼을 영화화한 것.

하지만 영화는 그 실체만 보여주고 문제만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이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 해결책이란 ‘보기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라는 것. 자카라는 여자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근무 중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핸드폰 사서함을 붙들고 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메시지 없음. 그럼에도 자카라는 계속해서 그녀와 소통하려 노력한다. 경찰관으로서 많은 사건을 목격하고 그 원인이 소통부재에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난 그녀를 이해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그녀와 그 남자 모두 사랑하기로.

그것이 쉬운 일일까.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폴리스 비트>는 사람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임을 자카라의 충격적인(?) 결심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하는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이 영화는 단순하지만 전혀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폴리스 비트>는 지난 2005년 ‘필름 코멘트’가 선정한 최고의 미개봉작 중 한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6. 4. 29. <JIFF Web Da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