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Primo A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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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은 만고불변이지만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랑도 ‘조각’처럼 한다. <첫사랑>(2004)의 두 주인공 비토리오(비타리아노 트레비잔)와 소냐(미셸라 세스콘) 역시 조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금속 공예사로 활동하는 비토리오와 화가를 위해 모델을 서주는 소냐는 블라인드 데이트로 만난 사이다. 첫 만남의 서먹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비토리오는 조각 같은 몸매의 소냐가 맘에 들고, 그녀 역시 자상해 보이는 그가 싫지 않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시작한 이들은 곧 동거를 시작하고 비토리오는 소냐에게 좀 더 날씬해질 것을 요구한다. 

<첫사랑> 미국 포스터의 태그라인은 ‘욕망에 대한 공포영화’(A Horror Movie about Desire)다. 즉, 달콤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육체에 대한 집착이 낳은 비극적 사랑에 대해 다룬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비토리오의 유별난 관점에서 기인한다. 정신적인 사랑이 퓨즈를 꽂아야 육체적인 사랑으로 전이된다는 항간의 속설과 달리 그는 상대방의 육체에 혹해야 비로소 정신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 남자다. 비토리오의 사랑이 에로스(Eros)와 구별된다면, 소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시각적으로 완벽한 형태의 육체를 갈구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 욕망은 소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비토리오의 요구를 차치하고, 그녀도 현재 자신의 몸매에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다. 비토리오와의 첫 만남 당시 소냐가 그에게 던진 첫 말은 “제 몸매가 맘에 들지 않나요?”다. (이에 비토리오는 “좀 더 날씬한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감독 마테오 가로네는 촬영에 능한 감독답게 비토리오와 소냐가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3분간의 롱테이크를 담당했다. 그때 카메라는 마치 상대방의 몸매를 훑듯이 장면을 찍어나간다. 

이는 음흉한 남자의 눈빛이라기보다는 오브제를 관찰하는 조각가의 시점에 더욱 가깝다. 아닌 게 아니라, 비토리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카메라는 등장인물, 특히 소냐를 조각하듯이 촬영한다. 처음엔 고정된 구도로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덩어리를 깎아가듯이 온 육체를 내지르고, 마지막 순간엔 미술품을 감상하는 양 섬세하게 소냐를 지켜보는 식이다. 이렇게 비토리오는 조각가의 마인드로 모델을 물색하듯 여자 친구를 고르고 완벽한 형체를 빚듯이 사랑을 나눈다. 

다만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지 못하는 조각과 달리 인간의 사랑에는 자유의지가 작용한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육체 역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법이다. 비토리오가 소냐의 몸매를 가장 완벽한 형태로 구현하겠다며 먹을 것을 관리하려들수록 그를 향한 그녀의 거부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이 종국엔 파국을 맞이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하다.

비토리오의 사랑은 비록 육체가 결부되어 있지만 이상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사랑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를 연상시킨다. <첫사랑>도 그렇지만 마테오 가로네는 전작 <박제사>(2002)에서도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남자를 내세웠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드러난 마테오 가로네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정신과 육체의 균형이고 무엇보다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랑은 결국 공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첫사랑>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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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Vsadnik po imeni Smert)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비에트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카렌 샤흐나자로프는 한동안 코미디와 뮤지컬 영화의 동격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소비에트 연방이 ‘글라스노스트’(Glasnost)로 지칭되는 개방 정책을 펴면서 샤흐나자로프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처럼 소비에트 삶의 정통성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던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Boris Viktorovich Savinkov)가 쓴 <창백한 말>(The Pale Horse)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제정 러시아 시절 지하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혁명당 리더로서 테러를 주도했던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다. 그중 1905년에 벌어졌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을 다루는데 영화 역시 이를 그대로 다룬다. 극중 테러리스트 집단의 리더로 등장하는 조지(안드레이 파닌)는 원작자의 분신인 셈인데 그는 자신들의 활동이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 예상했다. 

문제는 멤버들 각자가 다양한 동기로 활동에 참여한 까닭에 테러 방식에 이견을 보인다는 것. 가령, 농부인 표도르는 대공뿐 아니라 부르주아도 제거해야한다는 강경주의자인 반면 바냐는 대공이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암살을 거절하는 순진한 학생이다. 이처럼 테러에 대한 상반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원칙에 입각해 활동을 벌이다보니 대공 암살은 몇 번의 실패를 맞게 된다. 그러면서 테러에 대한 조지의 생각은 애초 목적과 달리 암살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그의 삶은 철저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의 목적은 암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암살에 임하는 멤버들의 내적 모순 상태를 드러내며 ‘테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영화는 중반까지 멤버들의 입장 차를 드러낼 목적으로 장면(scene) 위주로 진행하다가 암살이 본격화되면서 숏(shot) 위주로 전환해 이들의 심적 반응에 집중한다. 즉, 이상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테러리즘의 애매모호한 속성을 묘사하는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의 능력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고의 성취다. (다만 동일한 인물이 몇 번의 암살을 시도함에도 단 한 번의 추적이나 의심을 받지 않는 등 상황 묘사의 허술함이 종종 노출되기도 한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고민의 실체는 이것이다. 극중 대사를 빌리면, “테러리즘은 개인이 국가에 맞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 희생이 따르는 테러는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영화는 조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극 말미 죽은 자의 목소리란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선셋대로>의 그것처럼 회한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 당시를 전후해 정치시대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현재와도 연관성을 갖는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현재 러시아가 처한 불안한 정국은 조지를 비롯한 멤버들이 원한 행복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 다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관객들에게 이들이 처했던 상황에 동정심을 가지길 바라는 듯 보인다. 행복에는 어떠한 죄악도, 기만도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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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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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31~4.26)

<13구역>(Banlieue 13)


제작자로 돌아선 뤽 베송의 요즘 행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서브웨이> <레옹> 등으로 독특한 프랑스만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그가 이제는 태생만 프랑스일 뿐 할리우드 영화로 보아도 무방한 범작들을 대거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13구역>도 그렇기 한데, 다행히 이전의 ‘뤽 베송 제작’의 실망스런 영화들에 비해 재미를 느낄 만한 구석이 있다.

파리의 13구역. 이곳은 정부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부패로 얼룩진 도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마약으로 악의 세력을 늘려가는 독재자 타하(비비 나세리)에 맞서 우리의 주인공 레이토(데이비드 벨)는 강력한 액션을 앞세워 이 도시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음모에 빠진 레이토는 다미엔(시릴 라파엘리)과 짝을 이뤄 도시 수호에 나선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국내에는 ‘야마카시’로 잘못 알려진 ‘파쿠르’가 보여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생짜 액션의 쾌감이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일종인 파쿠르는 주변의 지형을 이용한 액션이 그 특징이다. 맨몸으로 지붕을 뛰어다니고, 높은 점프력을 이용해 방해물을 넘으며, 벽을 발판삼아 가볍게 담을 넘는 파쿠르의 리얼 액션은 <옹박>을 연상시킨다.

그렇다. <13구역>의 액션은 <옹박>의 토니 쟈가 보여준 무에타이와 겹친다. 분명 무에타이와 파쿠르는 동양무술과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차이가 있지만, <13구역>의 데이비드 벨이 보여주는 무릎치기는 <옹박>을 참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파쿠르가 무기로서 기능이 없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무에타이와 같은 동양무술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는 마시길! 파쿠르가 무에타이의 하위 장르에 속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쿠르를 이용한 <13구역>은 영화의 성격에서부터 액션의 합을 가르는 설정과 이를 보여주는 구도까지 많은 부분을 <옹박>에서 빌려와, 자기 것인 양 행동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장르를 빌려와 참조만 한 듯 태도를 취하면서 실은 그 장르의 속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 <제5원소>에서 시작해 <밴디다스>까지 이어지며 증명된 뤽 베송의 전략이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보다 남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살을 붙이는 뤽 베송. ‘제작자 뤽 베송’의 영화가 조금씩 재미없어지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06. 8. 16. <스크린>)

<스파이더맨 2>(Spider-Man 2)


‘형 만한 아우 엄따’며 이 바닥을 호령했던 불문율은 올해 <슈렉2>에 이어 지금 소개할 <스파이더맨2> 앞에서도 또 한 번 무참하게 명함 일 장 못 내미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음이다. 한마디로 당 영화, 여러 모에서 능히 전편을 능가할 정도로 잼나다는 본 특위의 말씀.

일단 당 영화는 1탄처럼 영웅 스또리 뿌라스 성장 영화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옆집 쭉빵걸에 발정 난 십대’s Way와 스파이더 맨이라는 영웅’s Way에서 절라게 번민하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 분)는 당 영화에서 루저로서의 남루칙칙한 일상과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한 스파이더 맨 노릇사이에서 대구빡 터지게 고뇌한다.

이처럼 당 영화는 속편이라고 해서 풍선껌 부풀리듯 안일하게 스케일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과 비범, 두 갈래 인생극장의 기로에 선 쥔공의 고민을 집중 공략,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욱 깊이를 더하는 것은 물론이요, 현실친화적인 영웅이라는 정체를 더욱 확고부동히 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2>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뭣보다 장면장면의 연출에서 보여지는 재미가 훨 쏠쏠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1탄에서 전혀 샘 레이미스럽지 않다는 겐세이 세례가 여린 맘에 상처를 준 탓인지 당 영화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지 영화라는 티를 팍팍낸다. 일명 ‘오징어 박사’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 분)의 경우, 생긴 꼬라지라든지 서식하는 지역, 하는 짓 등은 의심의 여지없이 <다크맨>의 2004년 버전이고, 닥터 옥의 사지절단 장면에서는 공포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답게 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블데드>의 수전증 걸린 시점샷? 당삼 나온다.

물론 왕년에 샘 레이미 영화 못 봤어도 상관없다. 매력 만점의 나쁜놈 캐릭터 닥터 옥이 펼치는 활약과 피터와 MJ(커스틴 던스트 분)의 삼삼한 러부, 심지어는 쫄쫄이 유니폼을 가지고 펼치는 자해수준에 가까운 개그 등 괄약근을 농락하는 스파이더 맨 퍼레이드가 여러분을 지둘리고 있으니까.

주목할 점은 전편의 촬영이 곤두박칠치는 스파이더 맨의 상하 움직임을 강조했다면 당 영화는 시계불알처럼 이 건물 저 건물 옮겨다니는 좌우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스파이더 맨이 브레이크없이 질주하는 지하철을 멈추는 장면이나 닥터 옥이 자동차를 패대기 치는 장면처럼 액숀씬은 대부분 좌우로 길게 늘어뜨려 구성했는데 그럼으로써 굉장히 션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암, 여름철 영화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확실히 <스파이더맨2>는 이야기도 그렇고, 똥꼬 옴쭉달쭉한 액숀까지 대박영화 속편 성공전략은 단순히 스케일에 달려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당 영화가 무결점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악독하게 굴던 닥터 옥이 나쁜놈으로써 응당 지켜줘야 할 ‘쥔공에게 극적으로 져주기’ 압박을 견디다 못해 막판 싸대기 몇 대에 버럭 어린 양이 되어 회개하는 장면, 이거 민망했다. 게다가 이것저것 얘기하느라 스파이더 맨의 활약상이 영화 시작 1시간이나 지나야 펼쳐진다는 점, 성미 급한 관객은 필히 주지하시라.

하지만 당 영화는 말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본 특위는 이렇게 수정한다, 대박영화에는 대박급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리고 당 영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그 책임을 완수하고 있으니 본 특위 입장에서 어찌 베스트 주녀의 등급으로 보답 안 해 줄 수 있으리요.

확실히 올해는 <슈렉2>도 그렇고 당 영화까지 속편이 아주 풍년이다, 풍년.


<딴지일보>

<인어공주>(My Mother The Mermaid)


잔잔 멜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만든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당 영화 <인어공주>는 판타지다. 어떤 판타지일까.

때밀이 엄마(고두심 분)의 억척스러움도, 그런 엄마의 기에 눌려 힘 한 번 못 쓰는 순딩이 아빠(김봉근 분)도 불만인 나연(전도연 분).

어느 날 우리의 쥔공, 쉬고싶다며 가출한 아빠 찾아 삼만리 나섰다가 허걱! 별안간 시간이 과거로 뿅~ 처녀 적 엄마 연순(전도연 분)과 총각 적 아빠 진국(박해일 분)을 해후하게 되니, 오옷! 과연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까나.  

기대와 달리 별 사건 벌어지지 않는다. <백 투 더 퓨처>의 마티처럼 남의 연애사(史)에 낑궈들어 난장판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오스틴 파워>의 닥터 이블마냥 시공을 초월해가며 뻘짓거리에 여념이 없는 것도 아님이다. 당 영화는 그냥 멀찍이 떨어진 나연의 시점으로 풋풋 쌉싸름한 연순과 진국의 연애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잔잔시럽게 보여줄 뿐이다.

근데 이게 왜 판타지냐고. 당 영화에 따르면 척박한 현실에 찌든 울 엄니, 아부지에게도 스무살 청춘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판타지라는 거다. 하긴 꼭 타임머쉰 등장하고 우주선 슝슝~ 날아댕겨야 판타진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을 그리는 것 역시 판타지지.

그렇다고 당 영화가 현실을 부정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 영화는 생기 넘치는 꽃띠 시절도, 현실에 치여 각박해진 세상살이도 모두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허구헌 날 남편 구박하고, 계란 하나 땜에 손님과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는 등 인정머리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던 엄니가 옛 기억에 웃음 지으며 삶을 긍정하는 건 이런 맥락일테다. 그래서 인생이란 과거와 현재, 두 바쿠로 가는 자전거라고 당 영화의 포스터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런 속 깊은 의미도 이야기가 잼나야 관객에게 삘이 오는 법. 그럼 재밌느냐. 허파가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당 영화 잼나다. 그리고 이 재미는 연순과 진국의 소꿉놀이스런 연애과정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막 글을 깨우친 연순이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를 보고 떠듬떠듬 “조.영.호, 왕좌~지” 이러는데도 막 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처럼 초등교 얼라 아니면 전혀 안 우낄 것 같은 유치원적 개그가 먹히는 이유는 관객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인데 그만큼 캐릭터 구축이 탄탄하고, 또 그만큼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잘 하고 있다는 얘기. 그 중에서도 본 특위의 작지만 날카로운 눈에 걸려든 배우가 있으니 연순의 동생으로 나오는 까까머리 얼라 영호(강동우 분). 얘 앞에서는 전도연의 1인 2역도, 두심 아주매의 웃통 훌렁훌렁 까는 연기도 무릎 끓어야 한다. 연기 초짜라는데 먼 놈의 얼라가 이렇게 능청시러운지, 쉐이 참 똘똘해.

하지만 당 영화의 약점은 나연이 시간여행을 한다는 컨셉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등 판타지적 요소가 다분한 사건 위주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상당부분 호소하는 생활밀착형 이야기에 가까워 설탕 덜 넣은 듯한 미숫가루처럼 그 밍숭맹숭함에 지루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도 그랬던 건데 당 영화 역시 몬가 결정적 ‘한 방’이 아쉽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고만고만한 한국영화들 틈바구니 속에서, 대박영화들 사이에서 소리없이 강하게 마빡을 디밀고 있는 영화라 아니할 수 없음이다. 아쉽지 않게 입장료 7,000원을 만족시켜주고 있다는 말씀.

그런 까닭에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딴지일보>

<슈렉2>(Shrek 2)


관객에겐 재미를! 한없이 투명한 순수 디즈니에겐 똥침을! 동화적인 재미는 살리면서 그 재미를 보좌했던 범생이적 사고관은 뽀싸삐는 악취미적 전략으로 디즈니를 엿먹임과 동시에 디즈니가 호령하고 있던 애니메이숑 천하를 일거에 뒤집기 한판한 3D 애니메이숑 <슈렉>의 속편, <슈렉2>.

1탄에서 파콰드 왕국의 온갖 편견질투시기멸시따돌림을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우리의 문제적 쥔공 ‘큰 감자바우 얼굴’ 슈렉과 ‘못다 핀 꽃 한송이’ 피오나 공주(카메론 디아즈 분). 당 영화에서는 무대를 얼짱, 몸짱이 아니면 가까이 하기엔 ‘겁나 먼’ 왕국으로 옮겨 둘의 사이를 삼팔선 놓으려는 프린스 챠밍(루퍼트 에버렛 분) 이하 악의 미남미녀 세력의 겐세이에 맞서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미모를 사수하는데 온 미모(?)를 바친다.

잘 생기고 예쁜 놈뇬=착한 놈뇬이라는 디즈니의 등식을 ‘마음이 외모에 우선하는 마빡’으로 바로 잡은 전편에 이어 같은 맥락에서 이번엔 이미지로 먹고사는 헐리웃을 겨냥해 ‘지금의 니 모습이 최고의 마빡’이라는 메시지를 어린 영혼에 호소하고 있는 것.

때문에 디즈니에서 헐리웃으로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 동일한 방식의 비틀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이유로 기존 동심의 허를 찌르는 기발함이 떨어져 그만큼 재미도 떨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으나 본 특위는 얄짤없이 기각한다. 전혀 그렇지 않음이다. 당 영화 재밌다. 그것도 졸라.

위에 썰한 대로 <슈렉>의 재미를 완성했던 反동화적 정서와 해피엔딩 전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속편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전편을 능가하는 캐릭와 영화, 티비를 넘나드는 대규모의 패러디 공세를 펼치며 개그와 재미의 강도를 두큰술 반 높이고 있기 땜시롱이다.

더군다나 감독은 전편과 동일인물. 이미 <슈렉>에서 관객의 빤스끈을 조였다 풀었다 갖고 논 경험이 있다보니 이를 바탕으로, 당 영화에서는 캐릭도 늘고 이들 간의 관계도 복잡해지는 등 전편에 비해 어수선해졌음에도 불구 마치 탁구 랠리하듯 리듬감 있는 전개를 펼쳐 관객으로 하여금 헤벨레~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들고 있음이다.

하지만 뭣보다 본 특위 소속우원들을 히껍 감동의 도가니탕 뚝배기 속으로 안내한 당 영화의 백미가 있으니. 쾌걸 조로 이미지를 베껴온 듯 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꽈배기 틀어 버리는 슈렉 패밀리의 뉴페이스 ‘장화 신은 고냥(안토니오 반데라스 분)’. 얘가 또 아주 골 때린다. 잘 키운 캐릭 하나 열 쥔공 부럽지 않다는 걸 온 몸으로 실천하며 기염을 오바이토하는데 특히 절체절명의 순간에 빠질 때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손 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이 올려다보는 영롱한 그 눈, 아~ 근래 보기 드문 개그 중의 명개그였다.

이처럼 당 영화 전편과 비교해 크게 변화된 건 없지만서도 슈렉과 동키(에디 머피 분)의 아성을 위협하는 거대 캐릭의 출현, 그리고 한층 더 능수능란해진 구렁이 담 넘어가는 필의 연출로 성인이면 성인, 얼라면 얼라 너나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숑 최강 넘버로 이참에 완전 자리매김 해 버렸음이다. 어이~ 디즈니, 속 좀 쓰리겠어..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당 영화 <슈렉2>, 베스트에 봉한다.


<딴지일보>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거의 매년, 있는 재난, 없는 재난 다 끌어들이며 스스로 재난이 되는 것마저도 두려워 하지 않던 헐리웃이 올해도 겁대가리없이 재난영화 한편을 들고 나왔으니.. <고질라>로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재난을 맛본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모로우>.

이런 류의 영화는 포스터만 봐도 척하면 삼천리.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급작스런 기온 급강하로 허벌 살 떨리는 빙하기 사태를 맞게된 인간들이 생전 겪은 적 없던 지구 대재앙에 맞서 우왕좌왕 옥신각신하다가 간신히 목숨 부지한 후 결국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그래서 당 영화의 주인공은 하나뿐인 인간의 별 초록빛 지구를 순식간에 빙의(氷依)하는 비, 바람, 폭풍, 눈 이하 각종 버라이어티한 기후들. 땜시롱 씨쥐로 재현해 낸 이들의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활약상이 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볼거리인데 재난 비스무리한 거만 일어나면 수난 당하기에 바뻤던 자유의 여신상이 이번엔 꽁꽁 얼어붙고, 뉴욕 시민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마냥 집요하게 따라댕기면서 괴롭히는 추위를 피하느라 존나 정신없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인디펜던스 데이>, <패트리어트> 등에서 재수없게스리 미국 만쉐이를 노골적으로 부르짖었던 에머리히 감독이 어머나 세상에! 당 영화에서는 180도 안면을 싹 바꿔 멕시코로 대표되는 제3세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실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대전환을 방풀케하는 설정을 낑궜다는 사실. 어허, 놀랍도다.

환경에 관심을 갖기는커녕 되려 환경을 파괴하는 뻘짓거리에 여념이 없는 부시 정부의 똥꼬를 겨냥하고 있는 대목으로 미제 대박영화만 보면 자연스럽게 미 제국주의가 연상되었던 그간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 부분 꽤나 의외다. 그 걸 보는 재미 또한 꽤나 쏠쏠하구.

물론 영화의 원제처럼 설정 자체가 내일 모레 혹은 언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환경 보기를 돌같이 했던 본 우원과 같은 이들을 비롯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예전 에머리히의 단순 과격 무식했던 일방통행적 전작들과는 달리 한층 발전했다는 의미이니 만큼 이 역시 칭찬 안 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당 영화에서의 자연,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어찌 손 써볼 수 없을 만큼 느무느무 천하무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맞짱 떠서 물리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고 영화 내내 당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재미없다. 그래서 각본까지 손수 쓴 감독은 인간측 주연인 아버지 잭(데니스 퀘이드 분)과 아들 샘(제이크 길렌할 분)을 등장시켜 가족애를 부각시키고 막판에 감동 한 판 멋들어지게 때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데…

그러나, 평소 사이가 소원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특정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부자의 정을 회복한다는 설정, 아~ 씨바! 이런 거 이제는 눈에 인 박힐 정도로 잼없는 얘기 아니냐. 너무 뻔하다. 해서 당 영화는 골 때리게도 인간들이 등장하는 장면에만 이르면 특히 잭과 샘의 얘기만 나오면 십자포화 맞은 듯 긴장감이고 모고 갑자기 재미가 싸악~ 없어진다.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샘의 여자친구로 나오는 로라(에미 로섬 분)와 샘의 러부씬을 더 부각했으면 얼마나 좋아. 예쁘고, 청순하고, 구엽고, 섹시한 로라 얼굴 뜯어먹는 재미라도 더 있지 말이야.. 꼴까닥.

우쨌든 결론 때려보자. 당해 영화 <투모로우>, 씨쥐의 본산답게 볼거리 아주 훌륭하다. 게다가 소재도 좋고 주제도 쌈빡하고 말이다. 근데 이를 풀어 가는 이야기는 형편없음이다. 영 멕아리가 없는 게 별로 재미가 없다.

이렇게 장점과 단점이 삐까삐까하게 용호상박하고 있는 전차로 본 특위는 <투모로우>를 뮝기적에 봉한다. 끝.  


<딴지일보>

<킬빌 Volume 2>(Kill Bill Vol.2)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은 두 편으로 구성된 ‘복수’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당 영화 <킬빌 vol.2>는 전편에서 시간 관계상(?) 미처 다루지 못했던 제거대상 5人 가운데 나머지 3人인, 빌(데이빗 캐러다인 분), 버드(마이클 매드슨 분), 엘르(데릴 한나 분)에 대한 쥔공 #%$!(우마 써먼 분)의 처절한 응징을 다루고 있는 시리즈의 최종편이다.  

그리고 타란티노는 이와 같은 단선적인 이야기를 전편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열광하고 침 흘렸던 홍콩 쇼 브라더스 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를 위시한 수많은 b급 및 액숀 영화들로 도배하고 있고(당 영화는 그 중에서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배경음악이 인상 깊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을 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를 시간 재배열이라는 특유의 연출에 따라 앞서에서 제시된 의문을 다음 장에서 풀어주는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크게 달라졌다면, <킬빌 vol.1>이 이유여하 막론하고 오로지 핏빛 영롱한 액숀으로 화면을 수놓았던 것에 반해 당 영화에서는 의문부호로 남겨졌던 사건의 시발점이 된, 빌의 일당이 그녀를 식장에서 죽이려 했던 이유, 그녀와 빌과의 관계, 그녀의 정체 등 전편에서 누락됐던 쥔공의 복수의 전말과 관련된 사안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사실.

그로 인해 당 영화는 전체적으로 액숀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고 그 자리를 대화가 채우고 있는 형국인데 한마디로 <킬빌 vol.1>이 클라식 액숀의 A부터 Z까지 엑기스만을 모아 간추린 모음집이었다면 <킬빌 vol.2>는 이에 대한 전모를 모두 풀어서 설명해주는 해설집이라 할만하다.

그럼으로써 당 영화는 캐릭터의 성격이 한층 입체감을 띄고 인물간의 관계가 복잡해져 단순했던 이야기가 깊이를 더하는 등 전편에 비해 스또리가 더 풍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장일단이라고 했던가. 문제는 베일에 쌓인 인물 빌이 정체를 드러내면서부터 흥미가 배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가 많아진만큼 그에 비례해 사건의 긴장감은 떨어지고 줄어든 액숀 장면만큼 경쾌함도 떨어져 뒤로 갈수록 상당히 지루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장시간의 대화가 주는 느슨함을 방지하기 위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등 전작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수많은 문화들을 재료 삼은 수다를 통해 사건전개의 이해를 돕고, 상황을 은유하는 등 입담을 과시하는데 이번엔 그 효과가 영 시원치가 않다.

그것이 쥔공 #%$!과 빌의 마지막 멋진 한판 승부를 바랬던 관객의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한 결과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수다 자체가 영 재미가 없는 것인지 콕 찝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전편처럼 쉴새없는 그러면서 똥꼬까정 박진으로 조이는 액숀을 기다려왔던 제위들께서는 그 기대감을 한층 낮추고 당 영화를 관람하시는 것이 실망감을 최소화할 방법이라 사료된다.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뮝기적에 봉한다.


<딴지일보>

<효자동 이발사>(The President’s Barber)


제목과 포스터만으로는 그 정체를 눈치 까기 힘든 당 영화 <효자동 이발사>로 말할 것 같으면, 4.19 혁명, 5.16 쿠데타, 10.26 대통령 살해사건 등 격동의 시기인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정치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한 아버지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부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를 동화로 구성한 점에서 <포레스트 검프>, 비극적인 역사 속에 피어나는 부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생은 아름다워>라 할 만한 당 영화. 좀 더 보충설명을 하자면,

효자동 소재 청와대 앞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깍새 성한모(송강호 분)가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전속 이발사로 재직하던 중 ‘마루구스’라는 설사병이 창궐하는데 이것이 무장공비에 의해 퍼진 전염병으로 알려지면서 정부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마루구스의 공포는 한모의 집안에까지 그 위력을 떨치는데…

물론 당 영화 속 마루구스 병은 실제로 존재하는 병도 아니거니와 무장공비가 퍼뜨린 전염병도 아니다. 다만 당 영화는 이와 같은 허황된 설정을 통해 정형그니나 김용개비가 잘 써 먹는 수구꼴통식의 트집을 잡아 성한모와 같은 소시민을 탄압했던 당시를 풍자하고 있음이다.

이처럼 당 영화는 부조리했던 시대를 직접적으로 걸고넘어지는 것이 아닌 효자동 이발사라는 허구의 인물과 허구의 설정에 빗대 현대사의 그늘을 들춰내는 우화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역사를 이렇게 다루는 영화는 울나라에서 거의 처음 있는 시도인지라 꽤 참신해 보이는데 그래서 당 영화는 무거운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속에서 소시민적 웃음과 부성애의 감동을 통해 관객에게 쉽게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살벌했던 시대의 공기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비유띄 벗뜨! 영화 속 특정인물, 특정 역사와 관련된 인사가 지금에 실재한 까닭인지 우화의 비중이 커지는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당 영화의 이야기는 해당 역사 속에 똥꼬 깊쑤키 개입한다기보다는 그저 재현 수준에서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시대는 잘 포착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보여주는 우화는 그닥 힘있지 못하다는 얘기.

일례로, 한모의 아들 낙안(이재응 분)이 전기고문을 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당 영화는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역사의 부조리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몸속에 흐르는 전기로 오색빛깔의 전구를 켜는 낭만적인 판타지로 업종전환을 감행한다. 우화로써 역사를 말하는 당 영화에 있어 이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닌데 문제는 환상성이 너무 강해 이 지점에서부터 현실과 우화간의 균형이 깨져 지루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별 감흥없는 낙안의 판타지처럼 후반부를 장식하는 성씨 부자의 감동 에피소드는 감독이 의도한 만큼 관객의 정서를 깊이 파고들지 못해 멕이 빠지며, 위와 같은 애매한 모습으로 인해 풍자의 칼날은 그리 날카롭지 못하니 당 영화의 우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힘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그 결과, 신인감독의 입봉작치고는 무난한 만듦새를 보이고 있고 또한 쥔공 한모의 희노애락을 담아내고 있는 송강호의 연기는 관객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임펙트를 발하고 있지 못하는 바,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뮝기적에 봉한다. 끝.


<딴지일보>

<아라한 장풍대작전>(Arahan Jangpung Daejakjeon)


<피도 눈물도 없이>에 이은 류승완 감독의 메이저 입성 두 번째 영화 <아라한-장풍대작전>이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이름하여 도시무협액션이라고 붙여진 당 영화, 평범한 짭새였던 상환(류승범 분)이 자운(안성기 분) 이하 七仙도인들의 수련을 받고 ‘마라치’가 되어 ‘아라치’ 의진(윤소이 분)과 합체, 나쁜넘 흑운(정두홍 분)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당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장르명에서 드러나듯 축구와 쿵후를 결합한 <소림축구>처럼  2004년 서울이라는 현대 배경 속에 무협을 접목하여 만화책 속에서나 가능한 황당한 상상력을 스크린에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고층빌딩을 강호 삼아 공중부양을 하고 경공술을 뽐내며 장풍을 쏘아대는 등 도시무협을 펼치는데 아뿔싸! 이와 같은 현대와 무협이라는 짬뽕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는 형세다.

왜일까? 두 요소사이의 이질적인 간극을 메꾸어 줄 수 있는 류승완 감독의 장기인 ‘지 멋대로 스피릿’이 당 영화에서 부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류승완 영화의 백미는 기존의 영화 재료를 자양분 삼아 그것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가운데 지 멋대로 자기화 시켜 쌈마이화 한 점에 있다.

그런데 <아라한-장풍대작전>에는, 우리 눈에 익숙한 짱깨영화를 호러, 다큐멘터리 등 장르 뒤섞기 속에 버무려넣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새로운 형식미도, 오로지 6~70년대 국산 액숀영화들을 재료 삼아 <킬빌>보다 먼저 컴플레이션 영화를 만들었던 <다찌마와리>에서의 기깔난 상상력도 없다.

대신 ‘지 멋대로 스피릿’이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림축구>에서 이미 써먹은 아이디어와 <매트릭스>의 전매특허인 촬영기술,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서의 절대반지 사수하기류의 이야기 등 따라하기에 급급한 모습만 있을 뿐이다.  

물론 당 영화, 한가닥했던 왕년의 액숀배우를 등장시켜 6~70년대 액숀영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고, 류승완 영화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똥꼬박진한 액숀을 시원스레 구사하고는 있지만 그 뿐, 이를 새롭게 구성하거나 류승완만의 상상력으로 재해석하는 등의 ‘지 멋대로 스피릿’은 어디다 엿 바꿔 먹었는지 온데간데없다.  

그나마 류승범의 코믹연기가 당 영화를 재미없음의 나락에서 간신히 건져내고는 있지만 앞썰에서 밝혔듯 우리가 류승완 감독에게 바라는 건 이와 같은 코미디가 아니지 않나.  

상상력으로 먹고사는 본 공사,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다찌마와리>에서 보여줬던 류승완의 상상력에 뿅가 한국의 타란티노가 되기를 바랬거늘 메이저에 입성한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도 그렇고 당 영화 <아라한-장풍대작전>까지, 타란티노가 아니라 헐리웃으로 가 방황하고 있는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연상돼 그에게 실망을 금치 않을 수가 없음이다.

그런 전차로 하루 빨리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마와리> 시절로 복귀하기를 바라며, 당 영화를 워스트 주녀에 봉하는 바이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