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사>(L’imbalsama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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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화의 결말에 대한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제사>(2002)는 마테오 가로네의 필모그래프에서 전환점 같은 영화다. 네오리얼리즘의 부활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실제적인 삶을 영화화했던 그가 <박제사>에 이르러 완전히 극영화의 세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박제사>는 마테오 가로네가 이후 만든 <첫사랑>(2004)과 함께 사랑의 엽기성을 탐구한다. 사실 엽기성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빗나간 사랑의 풍경이라고 할만하다. 더 정확히는, 동물 박제가 주업인 페피노(에르네스토 마이어)가 인간의 아름다움까지 소유하려 들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다. 

페피노가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는 대상은 발레리오(발레리오 포그리아 만질로)다. 나이 들고 추레한데다가 심지어 난쟁이이기까지 한 페피노에게 젊고 키도 크고 잘생긴 발레리오는 그야말로 완벽한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발레리오를 곁에 두고 지켜보고픈 페피노는 돈을 많이 주겠다며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고 둘은 붙어 다니는 사이로 발전한다.

마테오 가로네가 <박제사>와 같은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취향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박제사>를 발표하기 전까지 주로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만들기에 몰두했던 가로네가 주목했던 현실의 풍경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잔인함이었다. (<고모라>와 <첫사랑>에서도 가로네의 관심사는 줄곧 이어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공작새의 시점으로 페피노와 발레리오의 첫 만남을 바라본다. 그들은 공작새를 앞에 두고 박제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인연을 확인한다. 아무리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박제 얘기를 거리낌 없이 나눈다는 것, 공작새 시점의 카메라는 인간의 잔인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안 그래도 페피노는 박제 일 외에도 마피아를 위해 시체에 마약을 숨겨 운반하는 유통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페피노의 박제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동물에게만 한정하지 않는다. 원하는 바가 생기면 인간까지도 박제할 기세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첫사랑>은 관객의 예상에 부흥하는 듯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비틀어버리는 일종의 반전을 선보인다. 발레리오에게 미모의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페피노의 그를 향한 애정은 급기야 집착의 형태로 변모한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노출한 바대로 페피노의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은 앞으로 그가 발레리오를 박제하지 않을까, 어렵지 않게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예상하는 것이다.

정확한 이야기를 밝힐 수 없지만, 오히려 페피노가 위기에 빠지면서 상황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진행된다. 결국 박제라는 것은 힘의 권력에 따른 약육강식의 논리에 수반됨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 대상이 동물이 됐듯, 인간이 됐듯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자연스러운 형태이지만 그것을 소유하려들 때 늘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실은 늘 그런 식으로 운행한다는 것이 마테오 가로네가 최근 영화에서 주목하는 세상의 법칙이다. 하여 힘없는 자들은 갖은 애를 써도 원하는 바를 손에 넣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세상과 안녕을 고하기도 한다. 

<박제사> 이후 일련의 마테오 가로네 작품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비극 한편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미열의 동정심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무엇보다 약자의 위치에 발을 디디고 세상을 조망하는 이유가 크다. 가로네는 데뷔작 <이민자들의 땅>(1996)에서부터 가난한 이민자, 나폴리 극빈층, 난쟁이 등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 사람들을 주로 다뤄왔다. 그것은 한편으로 세상의 비극을 더욱 강조하려는 가로네 감독의 노림수로 보인다. 감독이 동정을 보내든 관객이 그에 동조하든 세상은 늘 하층민들에게만 비수를 꼽기 때문이다. 난쟁이 페피노의 최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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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

<무간도>(無間道)


1.

無間道. 보도자료에서 말하길, 열반경 제19권은 무간지옥에 대해 ‘불교에서 썰하는 18층 지옥 중 가장 낮은 층의 지옥’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전한다. 그니까 한마디로 ‘절라 조뙌 상황’이 바로 <무간도>라는 얘기되겠다. 그렇다면 당 영화에서는 이 지옥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지금 홍콩은 삼합회로 혼란스럽고 짭새들은 이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형국이다. 이 상황에서 삼합회의 조직원 유건명(유덕화 분)은 경찰 내부에 잠입하여 유능한 짭새로 인정받고 있고, 삼합회에 숨어든 짭새 스파이 진영인(양조위 분)은 보스 한침(증지위 분)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적의 내부에 몇 년간 숨어들어 생활한다고 생각해봐라. 아무리 유능하고, 신뢰를 받고 있다해도 걸리면 끝장인데 얼마나 살 떨리겠냐. 근데 어찌저찌해서 이 둘의 존재가 상대방에게 동시에 발각되고야 마니, 절라 후달리지 아니 할 수 없는 분위기다.

그렇다. <무간도>는 이 두 쥔공, 유건명과 진영인의 절라 조뙌 상황을 그리고 있는 영화 되겠다.

당 영화와 같이 내부에 잠입한 첩자를 소재로 삼은 언더커버(undercover) 영화들은 그런 비밀스런 설정이 주는 긴장감 덕택으로 관객의 구미를 당기고 재미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 영화는 이들 영화와 같은 설정에서 한 똥꼬 더 나아가 양쪽 진영에 각각 숨어든 첩자를 대립시킴으로 해서 꼴림을 두 배로 유도하고 있다. 겁나게 흥미를 끄는 구도라 아니 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무간도>의 각본은 당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차별성을 최대한 살릴 요량으로 서로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쫓고 쫓기는 상황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극중 영화관에서 진영인이 유건명을 몰래 뒤쫓다가 갑자기 터진 핸드폰 벨소리로 사면초가에 놓이는 설정이라던지, 유건명이 황국장(황추생 분)의 핸드폰을 이용, 진영인에게 접근해 가는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감은 실로 똥꼬에 땀을 차게 할 정도로 당 영화의 백미라 하겠다.


2.

게다가 당 영화의 이야기가 더욱 재미를 주는 건, 각본을 공동으로 맡은 맥조휘와 장문강이 <무간도>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하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당 영화의 서두에서 제시되는 등장인물덜의 별 시덥지 않은 행동이나 하찮은 물건들이 종국에 가서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할 뿐 아니라 영화는 끝까정 두 쥔공간의 관계를 알 수 없게끔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당 영화를 보면 액숑장면이 별로 없다. 그나마 가장 큰 액숑장면이라 할 수 있는 거리 총격전 씬같은 경우도 몇 십 초 밖에는 보여주지 않을뿐더러 이런 류의 영화가 주는 역동적인 느낌도 거의 받을 수가 없다.

이 말은 곧 당 영화가 단순한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오락영화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아시다시피 당 영화는 유건명과 진영인의 대립이 전체의 분위기를 좌지보지하고 있음이다. 그럼 이 둘은 왜 대립하는가? 물론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살기 위함이란 곧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첩자 노릇을 해오다 보니 자기가 좋은 분인지 나쁜 쉐이인지 헤깔릴 때가 많다.

보스인 한침이 유건명에게 유반장이라고 부르자 놀라는 건 이 때문이다. 정체성에 혼란이 온 거다. 그러니 이 두 명의 쥔공, 심적으로 절라 고민 때림이다.

첩자를 다룬 영화가 대개 소재가 갖는 말초적인 점만 이용, 액숑에 그치거나 스릴만을 강조하는데 반해 정체성의 문제까정 건드려 쥔공의 심리를 이처럼 자연스럽게 녹인 점은 당 영화의 시나리오가 갖는 또 하나의 우수성이라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 영화에서 유건명, 진영인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절라 중요하다. 내적인 고민을 외면으로 드러내야 하자너.

쥔공 역을 맡은 배우는 양조위와 유덕화다. 양조위야 원래 세계가 인정한 연기파이지만 당 영화에서 유덕화의 연기도 이에 못지 않았음이다. 특히 아내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된 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라. 왜 그가 20여 년 동안 홍콩영화계의 주연으로 군림하고 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안 옴 말구…

당 영화의 감독은 이들의 캐스팅 배경에 대해 양조위와 유덕화가 아니었다면 제작비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마빡 하나만을 들이밀고 있는 스타급 배우였다면 영화가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비싼무>, <별루>의 신횬준처럼 말이다.

유위강이 겉으로는 우스개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배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연기력을 중요시한 속내가 숨어 있는 것이다.


3.

그러나 아무리 이야기가 훌륭하고 배우덜의 연기가 뛰어나도 이를 담는 화면이 형편없으면 영화는 조또 아닌 게 되기 십상이다. 시나리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촬영과 이야기의 구도를 잘 살려낼 수 있는 미쟝센이 서로 상호작용을 해야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법이니까.

당 영화의 촬영은 감독인 유위강과 크리스토퍼 도일이 맡아, 극중 유건명과 진영인의 암울한 처지를 그대로 화면에 반영하여 어둠이 강조된 검은 필름 즉, 필름 느와르의 촬영술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당 영화에는 지옥에 빠져있는 두 쥔공의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낮은 조도를 이용한 밤거리/극장/버스 안/엘리베이터 등 좁아터진 공간에서의 촬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유건명, 진영인의 절망적인 심정을 외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깊은 그림자를 강조한 촬영술을 구사하고 있으며, 여백이 강조된 넓은 공간에 쥔공이 서 있다거나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외따로 있는 등 버림받은 듯한 인상을 주는 구도가 많다.

그런 전차로 당 영화는 유기적으로 잘 연결된 세 요소(이야기/연기/촬영)가 위기에 빠진 두 쥔공이라는 중심 틀에 맞춰 별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며 통일성을 확보, 제목이 주는 지옥스런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하겠다.


4.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에 단점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당 영화는 유건명과 진영인의 어릴 적 장면을 영화의 시작과 끝에 놓고, 이야기를 베베 꼼으로써 끝까정 두 쥔공 간의 관계를 관객에게 오리무중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럼으로 해서 당 영화는 반전을 숨기고 있다. 근데 한 번만 꼬아놓았어도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을 텐데, <식스센스>처럼 다시 봐야 이해가 되는 그런 차원의 스토리가 아님에도 한 번을 더 꼬아 영화의 이해에 혼란을 준 건 어찌됐던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홍콩 영화계도 반전에 대한 압박이 꽤나 심한가부다.

게다가 많은 재래식 언론덜이 ‘홍콩 느와르가 다시 똥꼬를 열기 시작했다!’는 삘루다가 당 영화를 홍보하고 있는 까닭에 <무간도>를 보려는 예비 관객덜에게 괜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하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홍콩 느와르는 시절이 하 수상하던 때,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초상을 어두운 화면에 담는다는 점에서 필름 느와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쥔공이 돈과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의(義)와 협(俠) 등 인간관계에 매달린다는 점에선 차별화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동양적 감성이 먹혔던 이유 중의 하나는 홍콩 반환을 앞둔 시점에서 홍콩 느와르가 홍콩민들의 불안한 시대적인 감성을 반영하고 있던 탓이었다.

근데 시대는 바뀌었다. 홍콩은 중국의 한 도시로 편입되었고, 사람들의 감성도 변하였다. 물론 시대를 반영하는 영화도 달라졌다. 그러니 당 영화도 홍콩 반환 이전 시절과 달리 홍콩 느와르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할 리 없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당해 영화 <무간도>의 쥔공들은 절대 의리, 우정, 협 이런 카인드 오부의 감정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의 안위에 따른 욕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 결과 당 영화 어두운 인간들을 어두운 화면에 담은 전체적인 모양새에 있어선 홍콩 느와르의 냄새를 풍기나 이를 이루는 요소들 – 쥔공들의 감정 표현이 개인에 우선하고 별루 폭력적이지 않다 – 은 전혀 홍콩 느와르스럽지 못함이다.

만약 오우삼 감독의 홍콩 느와르 스타일을 기대하고 당 영화를 볼작시엔 심히 조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당 영화의 관람에 앞서 고려하시라.


5.

롱롱타임동안 침체를 거듭하던 홍콩 영화계에서 오랜만에 자국민의 호응을 듬뿍 얻고 있는 당해 영화 <무간도>가 울 영화계에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남의 나라에서 크게 성공한 영화 수입하면 대박난다,는 수입사의 입장은 차치하고라도 시나리오가 말이 되고, 촬영이 이를 뒷받침하며, 배우의 연기가 연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기본 명제에 충실 할 경우, 관객이 알아서 찾아든다는 사실.

근데 이를 묵과하고 이야기에 상관없이 오로지 돈만 때려 박는 볼거리에만 치중하거나, 어찌됐든 우끼는 영화에만 주력하며, 계속해서 조폭 붕알만 만지고 있다간 홍콩 영화계 꼴 안 나리라는 보장은 엄따.

부디 한국 영화계는 <무간도>가 재미있다는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된 그 연유, 그 과정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럼 이상!!


<딴지일보>

<스파이더맨>(Spider-Man)




“당 영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정 그것을 알기 원하는가?

누군가 당 영화를 향해 돈만 댑따 쏟아부은
그저 그런 블락빠스타 무비라고 설레발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뉴욕의 마천루를 무대로 한 <스파이더맨>의 휙휙 줄타기와 공중 13회전 그네 타기, 무지막지한 번쩍 착지 필살기로 도배가 돼있는 예고편은 개봉도 하기 전부터 당 영화를 올 여름 시장의 주인공으로 입도선빵하기에 매우 충분한 것이었다 사료된다.

그런 화려번쩍기예스런 맛배기는 논외로 치더라도 만화와 외화시리즈를 통해 이미 울 마음 속 똥꼬 알알한 추억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은 이산가족 상봉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가 연출을 맡는다고 했을 때의 본 검열-MAN 심정은 당 영화의 개봉에 맞춰 입장료 7,000원 갖다 바치기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삐대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물론 먹고 싸기 조카튼 울덜에게 미제산 <스파이더맨> 나부랭이 따우를 왜 영화로 만드는지, 누가 감독하는지 뭔 소용이 있겠냐마는 당 영화에 바라는 바, 직장 상사의 씨바거림으로 축적됐던 스트레스를 한큐에 뚜레뻥해주고 여친과의 빠굴 전 작업 모색의 일환으로 분위기 UP해주는 그런 거 아니었겠냐.

그래서 2시간여에 걸쳐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벗겨본 결과…

예고편에서 보여준 화려번쩍기예스런 장면들은 매우 볼 만하다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선 말짱 꽝이라는 것이 본 검열-MAN의 최종입장이다.

잘 알다시피 만화가 원작인 당 영화는 고등학생으로 짐작되는 10대의 피터(토비 맥과이어 분)가 유전자 조작 거미에 기습 쏘임 당해 <스파이더맨>이 되는, 본 검열-MAN의 입장에선 매우 배알이 꼴리는 일종의 영웅스토리이다.

하지만 당 영화는 <스파이더맨>의 선배격되는 <슈퍼맨>, <배트맨> 류의 영웅이야기와는 매우 다른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덜이 우주에서 떨궈진 외계인, 돈 많은 부모를 둔 덕에 떵떵 거리는 갑부집 자식과 같이 범접하기 힘든 신분인 것과 달리 피터는 울덜이 반드시 겪은 적이 있는 아니면 지금 겪고 있는 평범한 10대 학생인 것이다.

그래서 피터는 당 영화에서 숙명으로 점지받은 전 지구적 대의로 번민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옆집 쭉빵걸 함 꼬셔 볼까 그런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 거미에게 물려받은 능력을 엄한 데 쏟아 붓는다.

물론 벽타고 줄타고 공중그네 도는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철없는 10대인 관계로 묘기 과신에 날 세는 줄 모르던 피터는 삼촌의 죽음을 계기로 드디어 자신이 나아갈 영웅’s Way를 깨닫고, 그때부터 고무장갑스런 스판쫄쫄이를 입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참고로 작업복을 입은 <스파이더맨>의 후복부 하단 낭심부위를 자세히 보면 자쥐가 불쑥 튀 나와있으니 앉아쏴 관객덜은 관람에 참조하시라. 거 물건 한번 튼실하데…

각설하고, 이렇듯 당 영화의 전반부는 성장기 영화와 진배없다. 그런데 문제는 감독 샘 레이미가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전반부 동안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부모 부재의 문제 건드려야지, 계급문제도 들쑤셔 줘야지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당 영화의 주제도 드러내야지, 무엇보다 <스파이더맨> 출현의 당위성도 낑궈야지 판 벌리기에 존나게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다.

원작에 충실하겠다는 의도야 모르는 바 아니다만, 그러다 보니 당 영화의 전반부는 <스파이더맨>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에도 무려 1시간 이상을 잡아먹는다. <스파이더맨>이 줄창 나온다고 미리 예상때리고 관람에 임했단 심히 곤난하다는 야그 되겠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의 본격적인 나쁜놈 퇴치작전이 펼쳐지는 후반부에는 스파이더맨의 영웅적 면모, 그린 고블린(윌렘 데포 분)과의 결투와 같은 중심 스토오리가 연관성을 갖지 못한채 따로국밥을 이루니 당 영화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매우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동춘 서커스 기예가 빛을 발하는 후반부는 컴터 그래픽 난무, 휙휙 공중부양 일색을 기대했던 관객의 똥꼬를 애무하기에 매우 충분타.

특히 63빌딩은 명함 일 장도 못 내미는 높이의 빌딩 사이를 가르고 평점 10.00의 가뿐한 착지로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의 액숑은 그 CG(만화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컴퓨터 애니메이숑 처리)장면 하나만으로 7000원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음이다. 그 속도감이 눈으로 훤히 보일 정도라 쟤가 저러다 스크린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까지 든다니까.

주최측은 이를 두고 ‘<매투릭스>, <가락지의 제왕>도 보여주지 못했던 SFX 공간 혁명’이라 스스로 똥꼬 애무하느라 매우 노력하는 눈치다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러면 정글을 무대로 줄타기의 미학을 처음으로 선보이셨던 <타잔> 옹은 지금 이 시점에서 공간 혁명의 창시자로 재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외에 당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의 특징은 소재가 거미인지라 거미의 감각을 최대한 활용한 액숑 장면과 또 하나는 액숑 동작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체에 밀착한 촬영을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거미마냥 적을 앞에 두고 움츠리고 있는 장면이라든지 거미줄에 대롱 까꾸로 매달려 있는 장면 등은 거미와 매우 흡사하여 피터의 거미스런 행동이 결코 오바질이 아닌 자연스런 현상임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액숑 촬영은 주로 동작시점에서 적용되므로 스파이더맨의 빠른 움직임이 몸으로 확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레슬링 장면에서의 쌈박질 신 같은 경우는 그 박진감이 하늘을 찌른다…고 하면 좀 그렇고 우짰든, 시원타.

이와 같은 시각적 연출이 바로 샘 레이미가 당 영화의 감독으로 낙점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샘 레이미가 <이블데드>에서 선보인 기관총마냥 연발되는 긴장감있는 화면과 스피디한 카메라 기법은 블록 빠스타 무비의 제1조건이자 마천루를 누비는 <스파이더맨>의 속도감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임은 말할 필요두 없구.

사실 당 영화의 감독을 맡은 샘 레이미는 이야기 진행에 그닥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이름을 만 천하에 알린 <이블데드> 시리즈를 함 바바라. 그 영화는 결코 이야기가 훌륭해서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이 아니다. 쉴틈 없이 몰아치는 피칠갑 장면, 뱀같이 빠르게 기가는 카메라 꽁수로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그 확 가는 스타일이 샘 레이미가 여지껏 영화판에서 굴러먹을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메이저리그로 올라와 <다크맨>을 제외하곤 <이블데드> 시절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몬 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었던 건, 자신의 특기를 더욱 심도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되려 이야기적인 면에 더 치중하다보니 나온 결과이다.

여자가 총잡이라는 거 외엔 별 감흥없는 <퀵 앤 데드>, 퇴물 배우 캐스팅하여 뻔한 야구영화 만든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 <파고>랑 흡사한 <심플 플랜>, 글고 소재는 좋아 보이지만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는 <기프트> 등등등.

결국 이야기 구성은 미흡하고 시각적 연출에 탁월한 샘 레이미의 특징은 당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결과론이지만 계속적인 실패에 빠져있던 샘 레이미가 당 영화를 통해 예전의 명성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이야기의 비중을 좀 더 줄이고 액숑에 더 치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이 점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 바라는 관객의, 제작자의 마음이기도 하고.

다시 함 결론 때려보자.

당 영화는 샘 레이미의 장점과 단점이 하얀 이빨에 낑궈있는 고춧가루처럼, 본지와 좃선의 도덕성마냥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뮝기적한 영화다.

그래서 현란한 액숑을 기대하는 자에게는 <스파이더맨>의 거미 액숑이 한치의 의심도 없는 베스트가 될 수 있다. 동심의 영웅을 영화로 알현하고 싶은 자 역시 당 영화는 베스트일 거다.

비유띠, 벗뜨, 하지만 그 이상의 거시기한 것, 가령 짜임새있는 이야기같은 거까지 바랬다간 큰 좃 다칠 수 있음이다.

그러니 이 점 유의하시고 당 영화의 가면을 벗기도록 하시라.


<딴지일보>

<시카고>(Chicago)


앙~ 깨물어주고 싶은 외모, 올록뽈록 각선미, 살살거리는 애교,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춘 무희지망생이 여우근성을 십분 발휘, 우여곡절 끝에 시카고의 최고 스타가 된다는 내용의 <시카고>는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된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

제목처럼 당 영화는 폭력과 부패, 빗나간 욕망으로 맛간 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당해 영화 <시카고>는, 쥔공 록시 하트(르네 젤뤼거 분)와 타락 변호사 빌리 플린(리처드 기어 분)이 꾸민 각본을 언론이 자극적으로 포장하고, 이를 대중이 소비함으로써 스타가 만들어지는 조까튼 행태에 시원스레 받드러 똥침을 날리고 있다.

이렇게 원작 뮤지컬이 노린 것처럼 당 영화의 똥침권 역시도 조작된 기사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치 무대 위의 쇼를 보며 발광을 떠는 관객과 같다는데 착안하여 뮤지컬로 구성하고 있으니…

그 결과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꾀하고 있는 당 영화는 쭉빵 무희들의 야리한 춤사위와 음악으로써 극장을 관광버스화 하고 있는 가운데 이 형식 자체가 조롱을 내포하는 효과까정 발휘하고 있다. 이게 다 원작의 힘이 큰 덕분 아니겠냐.

그래서 당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원작의 기운도 살리고, 영화적 느낌도 모두 잡으려 뮤지컬과 현실을 교차로 편집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 영화의 또 하나 주목할 특징은 앞썰했듯 <시카고>의 어두운 무대 뒤편을 집중 공략하고 있기 땜시롱 이 점을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가장 적합한 필름느와르 촬영술을 도입, 뮤지컬과의 크로스짬뽕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해서 시끌벅쩍 아수라장과 같은 디스코텍 분위기 속에서도 당 영화의 화면은 어둡게 구성되어 냉소적인 냄새도 풍기고, 게다가 못된 여성(팜므파탈)적인 락시와 벨마(캐서린 제타 존스 분), 타락한 탐정의 변주로 보이는 변호사 빌리까정 쥔공들의 모습은 필름느와르의 캐릭들처럼 비정하게 비춰진다.

당 영화가 첫 작품인 롭 마셜 감독은 거의 멸종된 장르인 뮤지컬을 다시 꺼내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필름느와르와 자연스럽게 섞어찌개한 관계로 초짜인 주제에 벌써부터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 게 아니겠냐.

하지만 당 영화는 결국 춤과 노래가 주를 이루는 뮤지컬이다 보니 배우의 역할은 그 어느 영화보다도 중요하다 아니 할 수 엄따. 특히나 당 영화에 출연하는 쥔공들은 그 존나게 비싼 몸을 몇 달 동안 굴려가며 노래와 춤을 직접 몽조리 소화하고 있다 하지 않나.

그로 인해 르네 젤뤼거는 자신의 이미지처럼 깜짝발랄구여운 댄스로 뭇 남성의 애간장을 스리슬쩍 애무하고 있으며, 임신한 탓에 더 글래머가 된 캐서린 제타 존스는 그 특유의 빠워풀한 딴스로 관객의 꼴림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리처드 기어, <뉴욕의 가을>로 느끼함의 치사량이 절정에 올랐던 그는 당 영화에서 기름기를 쏘옥 뺀 건 아니지만서도 원래 뮤지컬 경력이 있던 넘이다 보니 꽤 괜찮게 씽잉과 댄쓰를 소화하고 있다.

종합해 볼 때, 당 영화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드라마가 있으며 거기다가 여자까정 있는데 이 아니 잼있을쏘오, 술만 있으면 왓따겠지만…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에 봉함이다.

당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받은 게 헛이 아니더라구…


<딴지일보>

<오! 해피데이>(Oh! Happy Day)


<오! 해피데이>는 무대뽀女 희지(장나라 분)가 느끼男 현준(박정철 분)을 자기 꺼 만들려 별 오도방정 난리부르스를 친다는 스또리의 영화다.

이를 통해 감독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다 말하고 있으나 본 특위가 본 결과, 그런 메시지는 개코도 찾아 볼 수가 없음이다.

오로지 당 영화는 최근 한국영화판에서 흥행이 잘됐던 코믹영화덜의 인기요소를 총망라, 섞어찌개함으로써 어떻게든 우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흥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획영화인 관계로 감독이 말한 의도가 살아날 구석이 별루 없다는 얘기.

그렇다면 주최측의 의도대로 당 영화의 코미디가 관객의 허파에 바람을 들게 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음이다.

일단 당 영화는 여자 쥔공의 엽기적인 행각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공희지 역시도 지 한 몸 처절히 망가뜨려 가며 욕하고, 자학하고, 뽀사고, 치질까정 걸려가며 엽기녀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까닭에 간간이 우껴주기는 한다. 하지만 강도만 더 쎄다뿐이지 저질 코믹영화에서 흔히 보는 억지 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뿐인가,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이 <나 항상 그대를>을 불러 관객몰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데 착안, 당 영화도 현준이 피아노를 치며 <이 밤을 다시 한 번>을 부르는 장면을 낑궜는데… 닝기리, 재밌기는커녕 박정철의 오바스러운 연기와 느끼함에는 어의가 없을 지경이다.

이처럼 익숙한 설정을 끌어다 오바만 덧칠했으니 당 영화가 펼쳐놓는 코미디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강 감 잡히리라 본다. 근데 당 영화의 이야기 역시도 단세포적인 개그에 못지 않은 수준을 자랑함이다.

봉천여상을 나온 희지가 본 우원처럼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현준과 결합함으로써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다는, 고리타분하다 못해 곰팡내까정 풍기는 설정. 그게 뭔 자랑꺼리라고 대통령 출신까정 들먹이며 자빠지구 있냐, 70년대 계몽영화두 아니구 말이야…

그리고 이런 구태와 의연의 파노라마는 아무런 개연성 없이 걍 들어가면 우끼겠다싶은 감독의 무사안일주의에서 비롯된, 거의 초특급울트라니뽕스러 뮤지컬 장면에서 올해의 대좃상 최고 추태장면의 강력한 수상을 예고하며 쒯행각의 마침표를 찍는다. 흐미~.

비유띄 버뜨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해피데이>는 한마디로 장나라의, 장나라에 의한, 장나라 ‘팬’을 위한 영상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개인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만약 장나라 팬클럽 소속이거나 남몰래 사모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넘씨들은 당 영화를 관람해도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 본다.

게다가 당 영화의 관람에 결정적이 역할을 하지는 못해도, 까메오로 출연한 욕쟁이 할무이 김수미. 요즘 귀신들렸다 모다 시끄럽던데 당 영화에서의 연기, 우꼈다. 좀 더 많이 나왔더라면 그나마 좋았을 거슬…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당 영화에 쥐똥 만한 부스러기 하나 기대하지 말지어다. 그래서 본 특위는 당 영화를 워스트 주녀에 뽕한다.


<딴지일보>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제목이 뭘 지칭하는지 알아보자.  

때는 바야흐로 1972년 1월 31일 일요일, 장소는 북아일랜드 데리시. 이곳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시민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다. 왜? 영국정부가 이들의 주권을 마구 침해하니까. 근데 영국진압부대는 씨바스럽게도 비폭력 평화 시위를 벌이던 데리시 주민에게 총을 난사한다. 아작난 평화, 그리고 피로 물든 북아일랜드. 이것이 소위 피의 일요일, 즉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라 불리는 사건이다.

당 영화는 바로 이 문제적 실화를 거머리처럼 밀착 들러붙은 카메라 출동 필로 딱 하루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카메라가 수전증 걸린 것 마냥 쉴새없이 지랄발광을 떠는데 그러다보니 연출되었음에도 불구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왜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을까. 왜 그러긴, 사실감있게 보이려고 그런거지. 감독이 이를 통해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그럼 또 왜 30년이나 지난 사건의 진실을 이제서야 말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이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썰했듯 북아일랜드의 비폭력시위를 악랄한 폭력으로 제압한 영국, 진실이 알려지는 날엔 전지구적 개망신은 물론이요 그 후한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가라로 왜곡하거나 은폐, 축소하는 것.

이제 눈치들 좀 채셨는가. 그렇다, <블러디 선데이>는 탈골한 진실을 제 자리 찾아주는 영화인 것이다. 게다가 감독인 폴 그린그래스는 사건의 가해자측인 영국 출신. 진실을 숨기는 자신들의 역사가 부끄러웠나보다. 하지만 감독은 북아일랜드, 영국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양측의 상황을 교차로 편집해 보여주면서 사건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졸라게 땀 흘린다.    

허나 이처럼 중립을 지킨다고 해서 이 사건이 주는 충격이 쪼그라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시선이 어디에도 고정돼있지 않고 보여주는 화면이 느무느무 사실적이다보니 관객은 마치 사건의 목격자가 된 듯하고 그 앞에서 무고한 잉간덜이 군바리덜의 총탄에 하나둘 죽어 나가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음이다. 게다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보게되니 어디메선가 이글이글 분노가 뚜껑을 열고 치솟아 오를 지경이다, 씨바!

무엇보다 당 영화가 우리 관객에게 남의 일 같지 않은 건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18 광주 학살. <블러디 선데이> 속 북아일랜드 주민과 영국군을 광주 시민과 전두통 살인마로 치환해도 무방한고로 우리에게도 당 영화처럼 진실을 과감하게 폭로할 수 있는 작품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단순히 ‘재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당 영화인 것이다.

따라서 당 영화를 통해 재미, 스펙타클, 볼거리 등 블록버스터 영화가 제공하는 오르가자미를 기대하는 건 우물가서 숭늉 찾는 격. 다른 영화를 찾아보심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 사료된다. <블러디 선데이>는 그런 영화가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에 올림이다. 이상!


<딴지일보>

<이도공간>(異度空間)


당해 영화의 가장 큰 프리미엄은 한마디로 장국영의 유작이란 점이다.

장국영이 누군가? <영웅본색>, <천녀유혼> 시리즈와 투유 쪼꼬렛 씨에푸로 지금의 2,30대 애간장을 살살 녹이며 학창시절을 그의 브로마이드로 도배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물론 <아비정전>, <패왕별희>, <춘광사설>도 좋았찌..

그런 장국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지막 출연작이 된 <이도공간>은 그 사실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영화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엄따.

하지만비유띄벗뚜, 이렇게 말하기 미안시럽지만 아쉽게도 당 영화는 장국영 팬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잉간덜에겐 큰 재미를 줄 만한 작품이 아니다. 홍콩에서 개봉된지 1년이 지나도록 눈길 함 안 주다가 그가 죽자 급작스레 수입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당 영화는 구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신과 의사 짐(장국영 분)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구신을 보는 옌(임가흔 분)의 정신치료를 맡으면서 벌어지는 무서븐 사건을 다루고 있다.

보시다시피 장르는 공포지만 당 영화는 <무언의 목격자>처럼 초반엔 공포 후반엔 미스터리, 이 두 가지 필이 듀오를 이루고 있음이다. 사실 옌이 구신을 보며 공포를 제공하는 당 영화의 초반 이야기는 주제와는 크게 상관없지만,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후반에 관객을 놀래키려는 속셈이었는데 이를 차용한 건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구신과의 사투가 짐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공포에서 미스터리로 안면을 싹 바꾸는데 그 상황이 자연스럽지 몬하고 너무나 급작스럽다보니 관객에게 속았다는 기분을 별루 주지 못하고 결국 그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전반과 후반의 이야기가 통일성을 갖지 못해 마치 2개의 긴 단편영화를 본 것 같은 삘을 다분히 풍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겁나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이 눈에 보인다는 설정이나 이것이 과거의 비극적인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원혼’ 이야기는 다른 영화에서 흔하게 본 소재인데 별 차별점을 갖지도 못하니까.

게다가 공포를 자아내는 연출에 있어서도 당 영화는 약간 후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의 영화문법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답습에만 그치니 심심스럽고 밋밋할 뿐이라는 얘기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결정적 구신의 등장도 정말이지 이제는 신물이 난다. 왜? <링>의 사다꼬 출현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동작은 무섭기는커녕 이제는 오래된 친구 만나는 기분이 들 정도라서. 그래설까, 그 귀신 쫌 귀엽더라.

그러다 보니 영화자체로만 놓고 보면 당 영화는 절대 남에게 추천 때리고 싶지 않음이다. 그러나 장국영 팬이라면 당 영화 꼭 봐라. 이들에겐 당 영화의 관람이 재미있고, 엄꼬의 차원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본인이 굳이 시어머니 잔소리처럼 이렇게 얘기 안해도 알아서들 보시겠지만서리…

<8명의 여인들>(8 Femmes)


<스위밍 풀>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프랑소와 오종의 작품인 <8명의 여인들>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폭설로 고립된 집안에서 쥔공인 8명 여인들의 남편이자, 아빠이자, 사위이자, 형부이자, 오빠이자, 주인이자, 불륜 상대가 어느날 아침 살해된 채 발견되자 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이처럼 당 영화는 살해범을 찾는다는 추리구조가 뼈대를 이루고 있음으로 해서 영화 내내 단서가 하나하나 드러나며 사건에 대한 본질에 다가가고 있음이다.

그런데 감독 프랑소와 오종은 전작들을 통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즐겨해 왔던 대로 당 영화에서도 역시 무대와 쥔공들의 모습을 색깔 있게 치장한 뒤 죽은 남자와 관련된 8명의 여인들의 속내에 감추어진 위선을 까밝히고 있다.

그런 관계로 당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쥔공들의 속사정을 밝히기 위한 인물묘사에 공을 들이는데 그 특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짬뽕하여 하나로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보다 이를 풀어 가는 감독의 재치 있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당 영화는, 일단 기본적으로 추리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된 장소에서 극이 진행되고 영화의 마지막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모여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연극적인 요소도 지닌다. 무엇보다 압권은 극 중간에 불쑥불쑥 튀나오는 노래로, 쥔공들이 자신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각자 한 곡씩 떙긴다는 점에서 뮤지컬까지 오지랖을 넓히고 있다.

게다가 감독은 원래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조지 큐커 감독의 <여인들>을 리메이크하려다가 판권문제가 여의치 않아 당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꽃으로 인물을 상징하는 도입부나,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설정 등 <여인들>에서 많은 부분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프랑소와 오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물들간의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동성애, 근친상간과 같은 악취미적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으니, 이처럼 당 영화는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이 장르, 저 장르 삼팔선 넘나들 듯 겁대가리없이 크로스 오버하는 자유로움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결과, 당 영화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유쾌하고 발랄하며 밝은 인상을 풍기고 있음이다. 물론 여기에는 제목 그대로 8명의 여인들이 뿜어대는 매력이 한 몫 하는 것은 당근이다.

특히 노년부터 신예까지 우리로 치자면 선우용녀에서부터 송혜교까정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로 출연해 맘껏 기량을 과시하는데 이런 그들을 한데 어우른 솜씨는 바꿔 말해 감독의 현장 장악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소리니, 당 영화 <8명의 여인들>은 여배우들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그 보다는 오종 감독의 체취가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이다.

하지만 한가지, 당 영화가 이러코롬 범인이 누군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보니 별 임팩트없이 범인의 정체 및 살해 동기가 밝혀지는 결말은 긴장감이 빤쓰줄 끊어지듯 탁 풀어져 버리는 바람에 관객에게 미치는 힘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다른 건 다 좋았는데 결말 매조질이 시원치 않았던 관계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에 봉한다.

덧붙여,
당 영화에는 <스위밍 풀>에서 쭉빵한 몸매로 뭇 남성관객의 환호성을 받은 뤼디빈 사니에르가 출연하고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찾아보는 것 역시 당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 중 하나다. 아마 쉽게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