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여름>(Estate Rom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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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출신의 마테오 가로네가 고향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든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그에게 지역성은 가로네의 영화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만 <로마의 여름>(2000)에서 감독이 바라보는 로마의 풍경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은 극중 변호사 출신의 예술 감독 로셀라(로셀라 오르)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탓이 크다.

정확한 사연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로셀라는 인생에 혼란을 느껴 어딘가에서 요양을 하다가 돌아온 인상이 짙다. 로셀라가 보기에 로마에 있던 친구들도, 풍경도 어딘가 많이 변한 것 같다. 다만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어느 수도사로부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는데 너무나 변모한 로마의 모습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가로네는 <로마의 여름>에서도 여전한 네오리얼리즘의 면모를 포기하지 않지만 현실의 풍경보다 로셀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더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가미하지 않은 무정형의 필터는 <로마의 여름>에 이르러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활용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고 주관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감정을 포착하려 든다. 그뿐이 아니다. 사실주의에 가까웠던 전작과 달리 <로마의 여름>에서는 극중 인물들의 관계에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은유적인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다.

로셀라가 로마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살바토레(살바토레 산소네)는 연극무대에 쓰일 지구모형을 제작 중에 있다. 완성 후 연극 스태프들과 함께 이를 옮기려 하지만 방문보다 큰 까닭에 빼는데 애를 쓴다. 그리고 결국엔 감정이 폭발하여 지구모형 사용은 없었던 일이 된다. 근데 그 광경은 꼭 지구에 발붙여 사는 우리들이 사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아마도 로셀라가 로마에 돌아와서도 여전한 혼란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자신을 포함한 그런 인간들의 반목과 갈등 때문이다. 그렇게 지구는, 세상은 흘러가는 법이다. 그것 역시 우리네 삶의 풍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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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

<초콜릿 고마워>(Merci pour le choco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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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일군의 사람들이 미카(이자벨 위페르)와 폴론스키(자크 뒤트롱)의 결혼에 대해 숱한 의심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럴만한 것이, 첫 번째 결혼 실패 이후 이들은 동일한 상대방과 다시 한 번 결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두 번째 결혼까지 시간 간격이 무려 18년에 이른다. 그러니, 미카와 폴론스키의 재결합에 대한 무수한 말들은 의심의 실타래를 만들어 이렇게 따져 묻는 듯하다. ‘너희들의 관계가 순수하다고?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야?’

미카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유명 초콜릿 회사 사장이다. 그녀는 18년 전 짧게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 피아니스트 폴론스키와 재결합한다. 그동안 폴론스키에게는 아들 기욤(로돌프 파울리)이 생겼는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은 모습이다. 한편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는 잔느(아나 무글라리스)는 태어나던 날 산부인과에서 폴론스키의 아들과 뒤바뀔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흥미를 느낀다. 그 길로 폴론스키를 방문하는 것이다.

<초콜릿 고마워>는 ‘의심의 미스터리’라 부를 만하다. 극중 인물들 모두에게는 의문으로 남은 상실된 가족사가 존재한다. 폴론스키는 기욤의 생모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여전히 그 진상을 모르고, 기욤은 자신이 진짜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며, 잔느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폴론스키에게서 찾으려 애쓴다. 현실이 더욱 중요한 이들에게 가족의 비밀은 그냥 묻어둘만한 일이다. 헌데 미카는 그렇지가 않다. 겉으론 태연한 척 속으론 폴론스키와의 사이에 끼어든 잔느가 못마땅하고 거치적거리는 기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진다.

웬만하면 의문의 사연을 미스터리 구조 삼아 충격적인 가족사의 기원을 파고들 법도 한데 샤브롤은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탈골된 가족사로 빚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문 의심이 어떻게 가족 관계의 해체로 발전하는지에 주목한다. 더 정확히는 잘 나가는 기업 사장에, 유명 피아니스트 남편과 이룬 가정 등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미카가 유별난 ‘의심’ 때문에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따라간다.

<초콜릿 고마워>는 미국의 범죄소설가 샬롯 암스트롱의 <초콜릿 거미집 The Chocolate Cobweb>을 영화화했다. 샤브롤은 원작소설의 ‘거미집’을 제목에서 빼버리는 대신 극중 미카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상징물로 그물모양의 ‘나이트캡’을 활용한다. (이 영화의 영제는 다름 아닌 <Nightcap>이다!) 예컨대, 미카가 소파에 앉아 조용히 나이트캡을 짜고 있을 때면 세상 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족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해 머릿속으로 온갖 음모들을 짜내고 있을 때다. 하여 그 모습은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거미집을 짜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샤브롤은 <초코릿 고마워>에서 주변 도구를 활용한 심리 묘사에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트캡은 물론이고, 이 영화가 주요하게 다루는 초콜릿 또한 그저 달콤한 먹을거리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외적 배경을 갖춰 단단해 보이는 미카가 실은 내부에서 발열하는 의심으로 녹아내리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샤브롤이 묘사하는 초콜릿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초콜릿 고마워>의 미스터리의 경지는 심리로 완성한 액션물에 맞닿아있다. 성룡이 주변 도구들을 적극 활용해 액션의 동선을 짜는 것처럼 샤브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심리가 충돌하고 합을 겨루는 미스터리의 액션을 만들어낸다. 이를 보고 있으면 <초콜릿 고마워>가 아니라 ‘샤브롤 고마워’를 외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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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