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Fahrenheit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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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라지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이미 1953년에 이를 예견한 사람이 있다. 바로 레이 브래드버리(Ray Douglas Bradbury)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서 C. 클라크(<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라마와의 랑데부>),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파운데이션>) 등과 함께 SF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작가다. <화씨 451>(Fahrenheit 451)은 그의 대표작으로, 책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제목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상징한다.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fireman)다. 책을 태우는 이유는 독서가 불법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비판정신이 생긴다는 이유로 오래전부터 정부가 금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화씨 451>은 사상이 통제되는 사회에 경고를 보내는 작품이다. 다만 통제사회라는 결과에 대해 그 책임을 세계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는 정치가 또는 기업가에게 묻지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화씨 451>의 진가가 드러난다.

번역한 박상준은 이 책을 두고 “시대가 바뀔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메시지를 담아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안 그래도, <화씨 451>을 읽다보면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접한다. TV의 가상현실이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깊이 있는 생각과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소설 속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현재와 닮았다. <화씨 451>의 초판이 1953년에 발행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레이 브래드버리가 보여준 통찰력은 가히 노스트라다무스급 예언에 가깝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책이 없어진 사회의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감정의 대척점에서 회복해야 할 가치로 자연을 꼽는다. 자연이야말로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료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작품 철학이다. <화씨 451>뿐 아니라 <민들레 와인>에서도 확인된 바, 정신을 도외시하는 현실에 우려하며 자연을 회복하는 것, 즉 정신적인 삶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는 것이 아닌 자연과 물질의 조화를 호소하는 것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늘 대상의 양면성을 바라보는 너른 자세로 문학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씨 451>의 주요 이미지인 ‘불’을 다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을 태움으로써 인간성을 말살하는 ‘부정적인’ 불이 있는 한편엔 추위에 떠는 인간의 몸을 따스하게 해줄 ‘긍정적인’ 불이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불이듯 인간의 무지를 구원할 빛이 책이라는 사실을 <화씨 451>은 역설한다.

우리가 소위 SF(Science Fiction)라 부르는 환상문학은 미래를 밝혀주는 빛과 같은 존재다. 훌륭한 환상문학을 읽다가 감탄하게 되는 건 작가의 상상력보다 실제성에 있다. 흔히 한국 사람들은 환상문학에 대해 미래를 배경으로 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물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기에 정확도는 떨어질지언정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토대로 미래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현실친화적인 것이 환상문학이다. 그런 점에서 <화씨 451>은 뛰어난 환상문학이다. <화씨 451>은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의 파수꾼으로 손색이 없는 소설이다.


          덧붙여,
          마이클 무어는 이 책의 제목을 빌어 <화씨 9/11>을 제작할 수 있었으며 1966년 프랑소와 트뤼포에
          이어 현재 프랭크 다라본트(<미스트><쇼생크 탈출>)가 <화씨 451>의 영화화에 착수했다. 가이 몬
          태그 역에 톰 행크스가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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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5.8)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아마 자칭 타칭 졸라 대단한 영화광이 아니라면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Henri-Georges Clouzot) 감독에 대해 아는 국내 독자제위는 별로 없을 것이라 본 우원 생각한다. 혹시 축구 선수 이름쯤으로 알아먹을 독자도 여럿 있을 거라고도 보고…

그도 그럴 것이 1940~5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대한 국내 팬들의 인식이라면 뭐였나? 하품을 과도 유발하며 결국엔 보던 자리에서 널부러져 자연스럽게 수면을 유도한 우아고상한 영화만의 본산이 아니었나.

결국 영화팬의 이 같은 편견과 국내 영화계의 소극적인 발굴자세가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여 취침성 기능 영화 양성소 프랑스에서 여집합의 위치를 점하고 있던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존재를 국내에 소개하는데 있어 상당한 빗장으로 작용했을 것은 눈감아도 비디오다. 세계적인 감독임에도 불구, 고작 두 편의 영화만이 떨렁 비디오 가게 귀탱이에 짱 박혀 있는 절라 무사안일한 상황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잖어…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잠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 대한 브리핑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클루조는 한마디로 세상에서 가슴벌렁 온몸꽁꽁 스릴러를 가장 잘 만든 감독이었다…

어허, 역성들 내지 마시라. 안다 알어. 이 방면에서 히치콕 대인 따라올 감독이 어디 있겠냐는 거. 히치콕 역시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스릴러 대인이셨다.

그래서 역시 당대 최고의 스릴러 감독이었던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과의 관계를 통해 비교 썰하는 것이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니덜의 흥미를 쪼금이나마 유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본지의 서비스 정신 항시 니덜을 우선하고 있다는 거 알아주시라.

우짰든 이 클루조 감독, 가슴벌렁 온몸꽁꽁 긴장감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는 스릴러 영화를 만드는데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던지, 히치콕이 평생의 거머리로 생각한 감독이 또한 클루조였다.

클루조 감독이 1955년에 만들고, 이를 1996년 샤롱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를 캐스팅해 제레미아 체칙이 리메이크한 <디아볼릭 Les Diabolique>의 원작소설 <악마같은 뇬 Celle qui n’ etait plus>의 판권을 따내기 위해 클루조와 히치콕 두 감독이 모두 달라붙어, 히치콕에 몇 시간 앞서 클루조가 구입했다는 일화는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설명하는데 아주 좋은 잣대이다.

특히 히치콕은 <사이코 Psycho>를 만들고 극찬을 받은 후, 그의 영화가 <디아볼릭>보다 훨 뛰어나다고 호들갑스럽게 주디 나불거리고 다닐 정도로 클루조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는 건 그 바닥에서 하나의 전설로 통하고 있는 썰이다.

재밌는 건 주 활동바닥이었던 미국에서 그저 오락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폄하받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에 의해 작가의 반열에 오른 히치콕처럼 클루조도 그와 비스무리한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자국의 오락영화가 폄하받던 프랑스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미국에서 더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지금 본 우원이 소개할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는 바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를 알리게 한 영화이다.

2.

사실 클루조의 영화하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디아볼릭>이다. 허나 본 우원이 <디아볼릭>을 제껴두고 <공포의 보수>를 소개하는 건, 당 영화가 이미 비디오로 국내에 소개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웬만해선 본 우원 이야기 까발리는 짓 따우는 안 한다만 당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로 한다. Why? 왜? 뭐땀시? 비디오루 출시는 됐지만 당 영화의 비디오 껍디조차 구경 못 한 독자들 지천에 깔려있을 거라 본다. 해서 걍 줄거리를 까 밝힌다.

혹시 만에 하나 당 영화를 울나라에 있는 모든 비디오 가게를 몽조리 뒤져서라도 찾아보겠다 기염을 토하는 사람 있다면 당 보고서의 정독은 뒤로 미루는 편이 낫겠다 싶다.

당 영화의 배경이 되는 라틴 아메리카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는 이국인덜이다. 그래서 이들의 소원은 하루 빨리 메잌 더 빅 머니해설랑 굶부림과 질병에 휩싸인 이 조까튼 곳을 벗어나는 것.

근데 이곳에 지부를 두고 있는 미국 석유회사는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월급에 일만 졸라 부려먹고 직원을 착취하며 그덜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던 원데이, 유전 폭발로 인해 직원이 사망하는 젓같은 일이 발생한다. 회사는 이 사태를 무마하고 폭발의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 운반책을 큰돈을 걸어 모집한다. 그러나 이 화학물질은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폭발력이 엄청나 이것을 운반하는 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

너같으면 하겠냐? 안 하지. 근데 당 영화의 주인공 마리오(이브 몽땅 분)와 죠(샤를로 바넬)는 한다. 왜, 얼마나 돈이 궁했으면 그러겠냐…

3.

Georges Arnaud의 원작을 클루조가 각색한 당 시나리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자칫 뻘짓거리했다간 골로 가 버리는 화학물질을 운반한다는 설정이다.

한 마리의 불나방처럼 돈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불사파 주인공덜의 심정, 삶과 죽음 앞에 존나게 갈등 때리는 인간의 심리, 무엇보다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위기의식.

그래서 이것이 주는 똥꼬 바짝 타 들어갈 듯한 긴장감은 실로 엄청나다 아니 할 수 엄따. 당 영화의 런닝타임이 140분인데, 초반 30분을 제외하곤 윗윗 단락의 설정이 주는 윗 단락 같은 분위기땀시 숨쉬기를 까먹을 지경이라니까.

허나 아무리 이야기가 뛰어나도 연출이 받쳐주지 못하면 관객을 오르락 내리락 쥐락 펼락 할 수 없는 법.

니트로글리세린을 실은 마리오와 죠의 트럭이 산 중턱을 오르던 중 헐거운 나무다리를 버팀목삼아 유턴(U-turn)하는 장면은 당 영화 연출력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조금만 벗어나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이 살벌하게 각잡고 있는 낭떠러지, 적은 무게에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힘아리없어 뵈는 다리. 천하의 마이크 타이순이라도 심장이 죠리뽕되지 않고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당 장면은 당 영화에 수없이 많은 가슴 벌러덩거리며 심장이 꽁꽁어는 장면 중에서도 결정판이다.

당 장면이 얼마나 살이 떨렸던지 당 영화에 삘 받고 감동 이빠이 먹은 <엑소시스트 The Exorcist>의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dken)은 그 자리에서 당 영화를 리메이크 하기로 마음먹고, 1977년 <Sorcerer>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허나 우리가 언제 리메이크 영화랍시고 제대루 된 작품 본 적이 있었나, 그런적 별루 없었찌. 역시 프리드킨의 영화 망했다. 쫄딱…

4.

하지만 본 우원이 당 영화 <공포의 보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단지 보여주는 시각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도한 분위기와 소리(sound)의 사용이다.

당 영화를 포함해서 클루조 영화덜의 특징은 굉장히 메마르고 음산하며 한기가 서려있다. 흑백필름이란 사실이 이같은 성향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설명이 될 수는 없는게, 흑백으로 만든 필름 중에서 프랭크 카프라(Frank Cafra)의 영화라든가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는 그럼에도 따땃한 감성이 난로의 군불타듯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지 않는가.

클루조의 영화가 마치 한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 신문지 한 장을 깔아놓고 쓸쓸히 변을 보고 있는 것처럼 황량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이유는 최소한의 음악사용과 이를 커버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귀를 자극하는 소음이다.

다시말해 당 영화에서 음악은 시작 씬과 자막이 올라가는 마지막 씬에서만 들을 수 있고, 영화진행 내내 들리는 소리라고는 트럭의 엔진소리, 바쿠 굴러가는 소리, 비행기 소리, 닭이나 염소 등의 동물 울음소리 등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리들이 음악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 소리덜이 한큐에 모두 들리는 것이 아니고 장면마다 하나씩 낑궈져있어 그것이 주는 쓸쓸함과 날카로움은 예사롭지가 않다.

또한 클루조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화면의 구도를 설정하는데 있어 특히 야외촬영 장면의 경우, 하늘과 지상을 거의 50:50으로 분할함으로써 공간의 여백이 주는 공허함을 잘 살리고 있다.

그래서 당 영화는 후덥 지근한 여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같은 소리의 사용과 비어있는 듯한 공간 설정으로 인해 매우 쌀쌀하다는 삘을 준다.

이와 같이 상반된 대비가 주는 예비효과는 존나게 커서 영화초반 사건이 없으면서도 웬지 모를 긴장감이 괄약근을 슬슬 조여오며, 위험스러운 악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보이는 것 이상의 똥꼬 타 들어가는 효과를 발휘한다.

5.

당 영화가 <Wages of Fear>란 명찰로 미국에서 처음 개봉하였을 당시, 필름은 거의 걸레가 된 상태였다. 영화상에 설정된 미국의 유전회사가 도덕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라나 모라나… 해서 배급 업자덜이 이를 우려, 스스로 삭제를 해버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넘들 항상 있다. 씹새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덕에 원판을 보고 싶은 관객의 애무성 호소는 사그러들 줄 몰랐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1992년 원판(Original Cut)이 재개봉하였을 때 로저 이버트(Roger Ebert) 할배는 드디어 <공포의 보수>를 두 개의 버전으로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며 그렇게 좋아했을까…

당 영화가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에 일갈의 똥침을 찌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클루조가 진짜루정말루리얼리 썰하고 싶은 바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인간의 최후란 건 말 안해도 눈치일발 가능할 거라 본다.

클루조에 따르면 돈만을 좇는 잉간덜의 모습이란 니트로글리세린을 싣고 평양기예단 곡예운전을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인 마리오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운반을 맡은 4명의 운전수 중 홀로 서바이벌해 쩐을 거머쥔 마리오가 결국 그의 동료들에 뒤이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쫌 억지스럽긴하지만서두 의미심장한 당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겠다.

6.

당 영화는 앞의 썰에서 밝혔듯이 그나마 국내에 출시가 되어 있긴 하지만 보유하고 있는 비디오가게도 별루 없을 뿐더러 조악한 필름 상태와 뭉개지는 사운드로 인해 당 영화가 노리는 효과를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저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영화가 출시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에만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졸라 아쉬울 뿐이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