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분미> 새로운 영화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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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시즌은 가히 흥행 기대작들의 격전지라 할만하다. 올해 역시도 <시라노; 연애조작단> <무적자> <퀴즈왕> <레지던트 이블: 끝나지 않은 전쟁 3D> 등 관객의 구미를 끄는 소재, 대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스타(배우와 감독), 할리우드의 최첨단 3D 영화처럼 흥행 코드로 범벅된 작품들이 추석 시즌의 흥행을 주도했다. 이 와중에 끼어든(?) 두 편의 영화,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 서술, 흥행 코드와 접목한 전통적인 영화 만들기와는 안녕을 고한 작품 구성으로 눈길을 끌었다.


<옥희의 영화> 생물 같은 영화의 경지

홍상수 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극장전>(2005)을 전후해 그의 영화는 남녀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스크린 속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가 현실을,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도록 연결, 뫼비우스의 띠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이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살아있는 영화’의 경지에 다다랐다.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옥희의 영화>는 눈이 아닌 두뇌로 볼 것을 요구하는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4개의 단편이 각자 자체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서로에게 느슨한 형태로 개입하며 장편으로 확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의 진구는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다. 낮에는 지도편달중인 여학생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그 뒤엔 술자리에서 송 선생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저녁엔 자신이 만든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받곤 곤혹스러워한다. 두 번째 ‘키스왕’의 진구는 학생이다. 송 선생으로 불리는 지도교수에게 단편영화 연출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같은 과 친구 옥희다. 옥희가 송 선생과 깊은 관계인 것으로 보이자 진구는 그녀에게 더욱 집착을 보인다. 그렇다면 송 선생에게는?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세 번째 ‘폭설 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폭설로 수업이 지연되고 참석한 학생도 진구와 옥희 뿐이다 보니 질의응답 시간이 돼버린다. 우문에 현답으로 응하는 송 선생을 진구는 거부감 없이 대하지만 송 선생은 교수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다. 그리고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진구와 송 교수와 각각 아차산에 올랐던 경험을 영화로 찍어 교차해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처럼 스크린 속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앞서 요약한 줄거리에서 보듯 <옥희의 영화>의 이야기 서술과 캐릭터 설정에는 일관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진구, 옥희, 송 선생으로 지칭되는 인물의 등장은 일정할지언정 이들의 역할과 성격, 관계 등은 뒤죽박죽이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진구가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영화과 학생으로 등장하질 않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진구의 집이었던 곳이 ‘키스왕’에서는 옥희의 집인 것으로 보이고 돈을 받고 후배 강사에게 교수 자리를 주었다며 비난받던 송 선생이 ‘폭설 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쪽팔려서 이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며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인양 군다. 또한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내레이션을 통해 송 선생은 ‘나이든 분’으로, 진구는 ‘젊은 남자’로 호칭하기도 한다.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교란하고 인물을 중첩시킨 뒤 결국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마저 어지럽힌다. 그러니까 <옥희의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늘 보던 대로 교란된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재구획한 뒤 인물의 역할과 이야기의 합을 맞추려다가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옥희의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제품인 기존의 영화의 달리 주어진 4개의 단편을 보는 이의 기호와 취향, 생각 등에 맞춰 재구성하는,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제품이 되는 일종의 ‘상호작용’(Interactive) 영화라 할만하다. 그래서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순으로 구성된 순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아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현실의 비(非)확실성에서 유발되는 우연의 미학을 긍정하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잘 알겠지만 홍상수는 정해진 각본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그날그날의 조건에 따라 즉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폭설 후’의 경우, 눈이 가득 쌓인 날씨에 아이디어를 얻어 그날 이야기를 짜고 배우를 불러 무려! 촬영까지 마친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어쩔 때는 영화 속 영화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1997) 또는 <생활의 발견>(2002)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진화형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2009)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疊疊山中)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엉클 분미> 경계를 집어 삼킨 정글의 영화

<엉클 분미>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แนะนำให้ดู: ลุงบ,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다.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생의 정체는 구체적이지가 않다. 당연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평면적인 형태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볼거리가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입체화(化)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오히려 설명적인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엉클 분미>는 아핏차퐁의 전작들과 비교해 친절한 편이다. 어느 정도 줄거리 요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야기가 잡힌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쉽게 이해 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엉클 분미>의 분미(타나팟 사이세이마)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다. 시골 농장에 머무는 동안 그의 곁에 처제와 젊은 청년 통이 남아 분미를 돌본다. 분미 곁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도 등장한다. 저녁식사를 하던 중 오래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고 실종됐던 아들이 원숭이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오랜 만에 아들, 아내와 함께 회포를 푼 분미는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분미는 주위의 가족을 대동하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미지의 동굴을 발견한 분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화면은 곧 어느 호텔방으로 옮겨간다. 침대 위에서 분미의 처제와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성이 부조금을 정리 중이고 스님 한 분이 이들과 합류한다.

이해가 쉽도록 요약은 했지만 <엉클 분미>는 일관된 이야기의 맥락을 붙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 혹은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앞의 문장 중에서 빌리자면, ‘~같지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사실 <엉클 분미>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비하다. 분미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중 뜬금없이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점핑해 못생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가 끼어들기도 한다. 분미와 못생긴 공주, 메기 사이에 구체적인 연관성을 잡아내는 것도 애매하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 묘사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더 방점을 맞춘 까닭이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보다는 동일한 공간(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숲 (혹은 정글)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다. 그의 영화에서 숲은 현실과 비현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마술적인 공간’, 즉 영화적 환상이 기능하는 장소다. 아마도 <열대병>(2004)이 대표적일 텐데 문명과 야만, 로맨스와 민담 등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확연히 가르며 우리가 경계 지었던 대비되는 개념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소우주로 구현해 보였다. 하여 아핏차퐁은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이미지를, 아니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엉클 분미>에서도 숲은 그냥 숲과는 거리가 멀다. 현세와 내세가 공존하는 공간이면서 원시적 생(生)과 관념적 사(死)가 근접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럼으로써 전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전생을 둘러싼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인 정성일은 <엉클 분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실제로 <엉클 분미>의 분미는 실존하는 인물이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에 착수하게 됐다. 하지만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감독은 다분히 개인적인 영화로 개비했다. 예컨대, 분미처럼 아핏차퐁의 아버지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고 극중 투석기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라오스 접경지역은 과거 타이와 라오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고 원숭이 인간의 붉은 눈 역시 감독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태국 TV 시리즈물의 특정 장르 요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영화란 ‘기억’이다, 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기억은 사실(Reality)의 소환이면서 한편으론 재현이라는 점에서 환상(Illusion)이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사실을 재현한다. 엄밀히 말해 모든 영화가 사실을 재현하지만 아핏차퐁은 사실과 재현 사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가령, 분미의 아내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는 별도의 영화적 장치를 이용해 관객의 눈길을 끄는 대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 넘긴다. (오히려 아내 귀신 대신 분미와 처제의 얼굴을 비추는 식이다.) 이런 작품을 일러 ‘무경계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Media City Seoul 2010’가 한창인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다큐멘터리 영상 ’프리미티브‘ 중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Letter to Uncle Boonmee) 전시가 한창이다. 그는 이참에 영화와 전시를 한 묶음하며 스크린의 경계마저도 넘어선 것이다.


미래의 영화 혹은 21세기 영화?

살펴본 바, 우연처럼 같은 날 개봉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새로운 영화 보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전통적인(?) 영화가 난립하는 추석 극장가에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확연히 다른 영화 문법으로 관객을 (긍정적, 부정적 의미로든) 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의 제공과 주입식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전혀 다른 영화의 차원을 선사했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영화. 영화가 문제를 제시하고 관객이 이에 답하는, 혹은 감독이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해석하는 영화. 영화가 스크린에 머물지 않고 스크린 밖으로 넘어오는 시대. <옥희의 영화> <엉클 분미>와 같은 영화가 이번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개봉영화 시장에서 대중성과는 동 떨어진 두 편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영화의 세기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린 과거와 현재의 영화 보기에 익숙한 나머지 이미 도달한 미래의 작품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외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우리 곁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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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년 9월 28일

<옥희의 영화>(Oki’s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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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는 하나의 소우주다. 큰 변화는 없지만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종종 동어반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읽어낼 수 있는 거리들은 많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며 하나의 원을 구성토록 하는 홍상수 특유의 연출법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런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옥희의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4개의 단편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또한 이것이 영화 속 영화로 다시 한 번 재구성되는 것.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 또는 <생활의 발견>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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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2010년 10월호

<하하하><하녀><시> 칸 진출 한국영화 삼인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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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의 한국영화 구도를 보면 지난해와 거의 판박이다. 홍상수(<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박찬욱(<박쥐>), 봉준호(<마더>) 등 한국의 대표감독들이 극장가를 이끌었던 것처럼 2010년 역시 홍상수(<하하하>), 임상수 (<하녀>), 이창동(<시>)의 영화가 주도한다. 앞선 세 영화가 한국을 넘어 칸영화제에 진출했던 것처럼 <하녀>와 <시>(이상 경쟁부문), 그리고 <하하하>(주목할 만한 시선) 또한 2010년 칸에 동반진출 해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칠 기세다.

특히 홍상수는 <하하하>가 벌써 여섯 번째 칸영화제 진출작이다. 칸에서 수상한 적은 없지만 그의 신작이 발표되면 으레 칸영화제 진출은 기정사실화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인간탐구를 즐기는 프랑스 영화와 흡사한 구석이 많다. 이번 영화 <하하하>의 경우, (역시나!) 남녀 연애담을 다루면서 연애의 속성을 가식 없이 까발린다.

영화감독 문경(김상경)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은 얼마 전 여름(夏) 각자 통영에 갔다 온 일에 대해 수다를 떤다. 문경은 해병대 출신 정호(김강우)의 방해를 뚫고 관광가이드 성옥(문소리)을 만나 커플이 된 사연을, 중식은 후배 정호를 만나러 갔다가 부인 몰래 사귀는 애인 연주(예지원)를 만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공교롭게도 문경과 중식은 조우하지 못했을 뿐 같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하하하> 속 연애의 세계는 ‘우연’이 지배한다. 그 우연을 인식하지 못한 채 떠들어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는 얼마나 유쾌한지.

프랑스인들에게 홍상수는 (어떤 면에서) 얼마 전 타계한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에릭 로메르 또한 연애담을 통해 남녀의 속성을 지적이지만 코믹하게 드러냄으로써 사랑을 받았다. 홍상수는 <해변의 여인>을 기점으로 음습함과 조롱의 시선을 걷고 남녀 사이의 가식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쪽을 택하면서 더욱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비록 칸의 수상은 박찬욱이 앞설지언정 (<올드보이> 당시 칸의 심사위원장은 미국의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장르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프랑스인들은 홍상수의 영화를 더욱 높이 평가한다.

임상수 감독 최초의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하녀>는 칸 패밀리의 후광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다. 신자유주의시대, 빈부격차와 계급 간의 갈등이 불러온 한국사회의 풍경을 대저택에 고용된 하녀라는 설정으로 은유하는 이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리메이크로도 유명하다. 김기영의 <하녀>는 마틴 스콜세지가 수장으로 있는 세계영화재단의 첫 번째 디지털 복원 작품으로 선정돼 2008년 칸에서 상영되며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칸은 <하녀>의 리메이크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 경쟁부문에 올리기 위해 제작 단계부터 예의주시했고 현재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의 프랑스판 리메이크 연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하녀 은이를 연기한 전도연은 칸이 사랑하는 배우중 하나다. 2007년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전도연에 대한 현지의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초특급 게스트만 묶을 수 있는 최고급 호텔을 영화제 측으로부터 배정받았을 뿐 아니라 영화제의 골든타임에 상영시간을 확정했다. 더군다나 극중 전도연의 과감한 연기가 벌써부터 화제에 오르면서 <하녀> 또한 주목받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기자시사회를 통해 나온 평가를 보면 ‘훈(이정재)과 해라(서우) 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는 방식에 맞서 은이로 대변되는 하층민 계급의 존재증명이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는 <로빈후드>보다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2007년과 2010년 각각 <밀양>과 <시>의 경쟁부문 초청으로, 2008년에는 경쟁부문심사위원으로 3년 연속 칸을 밟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부장관을 지낸 전력 때문에 종종 ‘한국의 앙드레 말로’로 소개되는 이창동은 명실상부한 칸의 패밀리다. 이번 칸에서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꼽히는 <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소 철없어 보이는 할머니 미자(윤정희)가 시를 쓰는 과정을 묘사한다. 외손자의 성폭행 사건으로 세상의 추(醜)를 경험하면서 그녀는 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시>는 국내에서 <만무방>(1994) 이후 연기 활동을 중단했던 ‘왕년의 은막 여신’ 윤정희의 15년 만의 출연으로 관심을 모이기도 했는데 이는 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유럽에서 명성이 높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라는 점에서도 윤정희를 향하는 관심은 높다. 이창동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로애락을 품은 감정의 등고선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름살로 만개한 배우다. 그녀의 존재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적인 논쟁보다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영화에 높은 평가를 주저하지 않았던 칸으로써도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다. 만약 이번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하게 된다면 <시>의 가능성을 가장 높게 점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칸영화제는 올림픽처럼 경쟁을 중요하게 다루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다. 하지만 칸에서의 성과를 국내 흥행으로 이어가려는 시도 또한 꿈틀거리는 게 사실이다. 이맘때면 집중되는 한국 국가대표 감독들의 영화 개봉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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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rie
2010년 6월호

2009년 한국 ‘명품’ 감독들의 신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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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명품’ 감독들의 격전지다.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등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들의 기대작 소식이 한꺼번에 들려오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올드보이> 등 한국영화사(史)에 길이 남을 작품이 대거 쏟아졌던 2003년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평가까지 나올 정도.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모으는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봉준호 감독의 <마더>다. 각각 4월, 5월 개봉예정인 두 영화는 칸영화제로부터도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박쥐>는 잘 알려진 대로 ‘뱀파이어’ 영화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신부가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했다가 수혈을 잘못 받아 뱀파이어가 된다는 이야기. 기존 뱀파이어 영화와 달리 액션보다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전언이 이채롭다. 안 그래도 <박쥐>는 제작단계부터 높은 수위의 베드신으로 여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기도 했는데 부부로 출연하는 송강호와 김옥빈 조합이 만들어낼 ‘러브스토리’는 <색, 계>의 그것을 넘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 점에서 <박쥐>는 송강호가 연기하는 첫 번째 사랑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때문에 그가 연기하는 신부가 과도하게 흡혈귀로 변하거나 뱀파이어 액션을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찬욱 감독이 전작을 통해 늘 제기해왔던 ‘도덕적 딜레마’, 즉 <박쥐>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흡혈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니,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위반하면서 슬며시 한발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더욱 독특한 작품을 기대케 한다.

반면 봉준호 감독이 <마더>에서 다루는 사랑은 모성애다. 단,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모성애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마더>는 살인사건에 휘말린 아들의 누명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사실 이 영화에서 대해서는 간략한 줄거리와 김혜자와 원빈이 모자(母子)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다. 그중 <마더>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의식적으로라도 전작들과는 좀 다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마더>는 기존에 봉준호 감독이 보여줬던 작품들처럼 평범한 주인공을 앞세워 장르의 전형성을 파괴하는 주특기는 그대로 가져간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던 변희봉이 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성(父性)이 중요한 기능을 작용했던 <괴물>과 달리 <마더>는 엄마와 아들간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전작과는 많은 지점에서 달라졌다. <마더>에서 보게 될 생소한 요소는 그로 인해 생긴 결과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가족의 이야기로 축소됐고 ‘화성’(<살인의 추억>), ‘한강’(<괴물>)과 같은 공간의 구체성이 사라졌으며 그 결과, 감정이 사건을 압도하는 영화가 됐다. 그래서 규모는 작아졌지만 봉준호 감독은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금껏 만든 영화중에 가장 셀 것 같다”고 표현한다. 

‘센 이야기’라면 이창동 감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에서 ‘불편한 진실’을 대놓고 이야기하며 모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신작은 <시>다. 그런데 의외로 사건이 아닌 일상을 다룬다. 그것도 60대 중반의 여성이 등장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시>는 60대 중반의 여성이 시를 쓴다는 이야기다. 파출부 생활을 하면서 외손녀와 단 둘이 살고 있고 딸은 이혼을 한 후 함께 지내지 않은지 오래다. 이렇게 무료한 생활을 영위하던 중 무료 문학 강좌를 듣게 되는데 시를 한 편 써야 하는 과제를 받게 된다. 이처럼 표면상 드러난 이야기만 가지고는 이창동 감독 특유의 고통스런 묘사를 예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시를 영화로 바꿔보는 가정은 어떨까. <시>의 주인공 여성이 평생 관심을 두지 않던 시를 써야 되는 상황은 흔히 창작의 고통에 비견될 만하다. 영화 역시 그렇다. <시>는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연출작이지만 그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여전히 고통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 <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묻는 질문 같은 작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은 없지만 <시> 자체가 하나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이창동표’ 영화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생활의 발견>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 영화감독이 제천과 제주도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이상한 사건을 겪는다는 얘기다. <생활의 발견>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 사랑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 그리고 홍상수 영화를 통틀어 가장 웃긴 작품이라는 점이다. 하긴 사랑을 빙자한 수컷의 찌질함을 방관자의 시점에서 묘사한 그의 영화가 언제 안 웃긴 적이 있었냐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 단계를 뛰어넘는다. 물론 큰 이야기 틀을 정해놓고 현장에서 즉석으로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만드는 그의 방식을 감안하건데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두 번의 여행길에서 모두 부부를 만난다는 점에 비춰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가식’의 정체를 발가벗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절묘하다. (싱글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은) 주인공은 부부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부 또한 각자의 진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벌이는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웃음을 줄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덧붙여,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지금 언급한 감독들이 2009년 한국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섭섭해 할 이름이 꽤 많다.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 박진표 감독의 <내사랑 내곁에>,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까지. 2009년 한국영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거 출현으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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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ire
2009년 3월호

<해변의 여인>(Woman On The Beach)


홍상수가 이번엔 ‘해변의 여인’을 맞이했다. 물론 그의 영화가 제목의 청량한 느낌처럼 낭만적일 리가 없다.


중래(김승우)는 후배 창욱(김태우)을 꼬드겨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중래의 목적은 후배의 애인 문숙(고현정). 눈이 맞은 중래와 문숙은 창욱의 눈을 피해 하룻밤 잠자리를 갖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중래의 마음이 하룻밤 새 바뀐다. 새 목표는 선희(송선미). 중래는 또 다른 해변의 여인과의 잠자리에 성공한다. 이를 안 문숙이 중래를 사이에 두고 선희와 신경전을 벌인다.


<해변의 여인>은 <생활의 발견> 이후 오랜만에 홍상수 영화 특유의 구조가 등장한다. 바로 상황별로 막을 나누는 것이다. 그 구조로 인해 관객은 동일한 인물이나 사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데, 이번엔 중래와 문숙이 시험대에 오른다. 남녀(혹은 여남) 2:1 구도에서 한 번은 선택하는 입장에 놓였다가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선택당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이 <해변의 여인>의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번의 잠자리를 위해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하는 이들의 치졸하고 위선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홍상수 감독은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는 개를 등장시켜, 너희들의 사랑이 버려진 개를 거둬 키우다 싫증나면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냉소한다. 역시 홍상수! 이런 구조를 통해 남녀의 사랑을 비웃는 홍상수의 방식은 <생활의 발견> 이전의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홍상수는 <해변의 여인>을 통해 다시금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개인의 성격만을 들여다보던 홍상수의 영화가 그 범위를 넓혀 남녀 집단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숙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던 중래와 창욱은 이후 다시 만나지 않는데, 이것은 창욱이 그의 패배(?)를 인정했거나 둘 사이가 멀어졌음을 암시한다. 그에 반해 중래 때문에 대립했던 문숙과 선희는 영화 막판에 이르면 관계를 회복하는 사이로 등장한다. 남성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여성들. 그저 잠자리 상대이거나 선택당하는 입장에 놓였던 여성 캐릭터가 <해변의 여인>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화는 중래를 중심에 놓고 흐르다가 중반이 지나면 문숙을 주인공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동안 여성을 희생해가며 수컷들의 찌질한 모습에 집착하던 홍상수가 이번엔 암컷의 찌질한 모습에도 관심을 보인다. 중래를 차지하기 위해 난리를 피우며 온갖 못 볼꼴을 보이다가도 결국 그를 놓아주는 문숙의 행동에서 홍상수의 변화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 변화가 나쁘지 않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했던 홍상수 감독은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 개인에서 집단으로, 무엇보다 남성에서 여성 캐릭터로 나아감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이룬 셈.

여자는 홍상수 영화의 미래다!


(2006. 8. 16.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