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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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2008) 개봉 2년쯤 지났을까. 김기덕 감독이 외진 산골에 처박혀 직접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영화기자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그 즈음, 그가 키운 장훈 감독(과 송명철 프로듀서)의 배신으로 폐인처럼 살고 있다는 기사가 각종 포털 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기덕의 열여섯 번째 영화 <아리랑>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칸 현지에서 전해지는 국내 언론의 <아리랑> 관련 기사는 영화와는 별 상관없는 속보성 가십 기사라는 인상이 짙었다. ‘”장훈은 기회주의자” 폭로 파문’, ‘”개xx” 원색적 韓 영화계 비판 파문’, ‘영화 <비몽> 촬영 중 이나영 죽을 뻔 고백’, 모 신문의 논설위원이라는 사람은 <아리랑>을 두고 ‘위험한 복수’라며 문화․예술로 복수를 감행하는 김기덕의 행보가 섬뜩하게 다가온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 헛소리다.

<아리랑>은 한국영화계를 표적삼은 비판의 영화가 아니다. 김기덕의 처절한 자기고백이자 <비몽> 이후 3년 동안 영화를 만들고 있지 못한 자신을 향해 자기쇄신을 강력히 요구하는 영화, 혹은 셀프카메라다. 김기덕은 디지털 카메라를 세워두고 그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연출과 촬영과 배우와 편집을 모두 김기덕이 담당한, 말하자면 원맨 시스템 영화다.) 그 모양새는 흡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뭔가를 숨기거나 꾸미고 싶은 마음이 한 톨도 없어 보인다. 그런 의도는 <아리랑>을 만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패(?)를 영화 시작과 함께 벌거벗듯 공개하는 태도에서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인가가 드문 산 어귀에 직접 집을 짓고, 땔감이 없으면 난방이 힘든 집 안에 텐트를 쳐놓은 후, 물이 나오지 않아 쌓인 눈으로 물을 대신해 밥을 해먹는 야인의 생활이 전시되듯 펼쳐지는 것이다.

세계적 명성의 감독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오랫동안 김기덕의 신작을 기다리던 팬들의 의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독 본인이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은 그를 괴롭히는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탓이었다. <비몽> 촬영현장에서의 여배우의 사고, 제자와의 갈등, 메이저 배급사의 횡포, 기타 등등.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 김기덕은 영화판과 연을 끊고 강원도 산골에서 칩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속되는 무기력과 침체의 꼬인 끈을 풀기 위해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영화의 상상 선을 이용해)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자아 분열한다. 질문하는 김기덕과 답변하는 김기덕, 냉소하는 김기덕과 고통에 찬 김기덕, 꾸짖는 김기덕과 울부짖는 김기덕, 화면 속의 이들을 지켜보는 제3의 김기덕까지.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의 이전 열다섯 편의 영화와 이를 둘러싼 평가와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이 말은 필모그래프에서 전작과 관련한 모든 것을 지우겠다는 김기덕의 비극적 결단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해해야 타당하다. 실제로 김기덕은 극 중에서 <비몽> 당시의 사고를 두고, 죽음이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신비의 문인 줄 알았지만 흰색이 검은색이 되는 무(無)의 세계였다며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한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 그 지점에서 김기덕에게는 무로 화한 뒤 새롭게 출발할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리랑>에서 보듯 솔직하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한 내려놓기에 있다.

이때 김기덕의 심정이란 일종의 한(恨)에 가깝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리랑>인 이유 중 하나!) 영화감독이 되기 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받았던 인간적인 수모,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 등 이를 떨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김기덕에게는 그래서 극 중 상징적인 죽음, 즉 자살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조하지만 한국영화계가 아닌 김기덕 그 자신에게로 향하는 총구인 것이다. 그 자살은 유용했던 것일까. 그 다음 순간 김기덕이 <아리랑>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상을 수상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수상 소감 대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미소를 짓는다. 이는 마치 성공적인 새 출발을 자평하는 제스처로 해석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김기덕은 <아리랑> 말고도 벌써 열 일곱 번째 영화 <아멘>을 완성했다. <아멘>은 김기덕이 칸에 초청된 이후 유럽 각지를 돌며 촬영한 작품으로 남자친구를 찾으려는 한국 소녀의 미스터리한 여행기로 알려진다. 짧은 줄거리를 제외하면 알려진 정보는 없지만 이전과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아리랑> 이후 김기덕은 새로운 출발점에서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KBS저널
2011년 10월호

<마당을 나온 암탉>(Leafie, A Hen into the W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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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은 지금 새로운 전기를 마련 중이다. 그 중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흑(黑)역사, 즉 과거의 실패 사례를 거울삼아 한층 진보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그간 한국 애니메이션이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도 관객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던 ‘이야기’ 강화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고 전한다. 그런 의지의 반영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원작 선정에서부터 두드러진다. 1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이자 초등학교 5학년 읽기 교과서에도 수록된 황선미 작가의 동명 아동문학을 원작 삼은 것.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암탉 어미와 청둥오리 새끼 간의 사랑을 그린 일종의 가족영화다. 암탉 ‘잎싹'(문소리)은 양계장에서 알을 낳는 운명을 타고 났다. 잎싹은 그게 늘 불만이다. 알만 낳는 게 아니라 알을 품어 직접 새끼를 길러보고 싶은 거다. 그래서 나흘 동안 굶은 후 죽은 척 연기를 펼쳐 양계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드넓은 자연에서의 삶은 때때로 죽을 고비를 가져오지만 청둥오리 ‘나그네'(최민식)의 도움으로 적응에 성공한다. 그렇게 나그네에게 마음을 품기를 잠시, 족제비의 공격에 나그네 내외가 목숨을 잃자 암탉 잎싹은 이들이 남긴 알을 품어 청둥오리 새끼 ‘초록'(유승호)을 기르게 된다.

동물의 세계를 의인화 한 이야기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보편적인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우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방위적 관객층을 겨냥한다. 이는 아동을 타깃 삼은 원작소설과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이라 할만하다.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가 등장인물의 매력을 넘어섬으로써 다소 어두운 색채를 띤 원작과 달리 <마당을 나온 암탉>은 친근한 캐릭터 구축을 통해 더욱 밝아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나그네와 잎싹의 가족을 위협하는 족제비 캐릭터를 제외하면 모두가 호감형 일색인데, 이는 현대영화가 갖는 캐릭터에 대한 공평성, 다시 말해 방사형의 이야기 서술에 빚진 측면이 크다.

과거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선인과 악인의 구도를 선명히 갈라놓아 관객의 감정이입을 한쪽으로만 쏠리게 하는 이야기를 주로 선보였다. 다소 유아적인 형태의 캐릭터 구도는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는 저간의 선입견에 무임승차하며 성인 관객을 배제하는 우를 범해왔다. 그에 반해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무리 비호감의 족제비라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해명의 시간을 제공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동물의 운명은 닭과 청둥오리는 물론, 족제비도 피해갈 수 없다. 먹이사슬의 구도 속에 새끼를 키우기 위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모성애의 감정적 드라마는 ‘인간’ 관객들에게 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입체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영화가 등장인물에게 부여한 성격의 다면화이면서 한편으로 인간 세계의 의인화로도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까닭이다. 닭과 청둥오리의 관계는 서로 다른 종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다문화로 들어선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모성을 다루는 방식만으로 충분히 흥미롭다. 주인공 잎싹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식인 초록 외에도 모든 동물들에게 동등한 정도의 애정을 표하길 즐긴다. 상대방의 특징을 찾아 그 누구라도 이름을 붙여주는 잎싹을 보고 있으면 모성이라는 것이 그 자신의 새끼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야기, 누구나 고개 끄덕일만한 메시지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이야기에서만큼은 꽤 성공적인 만듦새를 취하고 있음을 설득한다. 시장에서 상품성이 증명된 원작을 취한 결과가 작용한 탓이 크다. 다만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애니메이션 특유의 리듬감을 살리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애니메이션은 동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실사영화와 달라서 편집의 개입이 절대적인 편인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실사영화에서 구현하기 힘든 다양한 프레임으로 장면을 이어 붙이는데 주력한다.

한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풍경에서 뛰어노는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예컨대 나그네와 족제비의 대결, 청둥오리 파수꾼 비행 대회와 같은 장면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란한 시각화를 위한 프레임의 잦은 변화는 이야기의 진행을 툭툭 끊는 인상을 준다. 이야기와 스펙터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제작진의 의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균형의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같은 이유로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완성형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는 망설여진다. 오히려 과거 한국 애니메이션의 단점으로 지적됐던 부분의 보완을 통해 일취월장한 진화의 형태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KBS저널
(2011년 8월호)

<심장의 뛰네>(My Heart B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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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주리(유동숙)는 매사에 의욕이 없다. 지금껏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는 “하고 싶어, 많이 하고 싶어, 남자도 자주자주 바꿔 가면서”라고 주문을 외지만 좀체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에로영화 제작사를 운영하는 대학동창 명숙을 찾아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뱃살은 출렁 늘어졌고 남자 경험도 없는 그녀에게 에로 연기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심장이 뛰네>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의 여자 버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가 어떻게든 여자와 관계를 갖고자 하는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을 코믹하게 바라봤다면 <심장이 뛰네>는 일종의 자아 찾기로 묘사한다. 주리가 그렇게 남자와 자고 싶은 것은 단순히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사랑’의 한 행위로써 (에로영화를 빙자한) 성관계가 전면에 나설 뿐 주리는 상대 남자배우와의 심리적 교감을 통해 죽어있던 감정의 ‘심장이 뛰는‘ 짜릿한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여자의 몸은 대개 관음과 탐닉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는데 허은희 감독은 탐구하고 알아가는 시선으로 주리의 몸과 감정을 대한다. 그래서 <심장이 뛰네>의 주인공들은 헐벗은 몸이 아닌 그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싶어 하고, 이를 알아주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상대방을 만날 때 비로소 감정이, 심장의 박동이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허은희 감독은 <심장이 뛰네>의 인상 깊은 연기로 로마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신종플루로 사망한 고(故)유동숙에게 이 영화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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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천영화제
카탈로그
(2011.7.14~7.22)

<플레이>(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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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뮤지컬이라고 부르던 장르는 극 중 현실에 노래와 춤이라는 환상이 인위적으로 끼어드는 형태였다. 반면 최근의 뮤지컬 영화는 음악이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이 주인공 주변으로 모였다가 음악이 끝난 후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식의 클리셰를 철저히 배제하는 추세다. 몇 년 전 국내에서 푹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아일랜드의 음악 영화 <원스>(2006)가 대표적이었다. 한국에도 <원스>와 같은 영화가 등장했다. 바로 남다정 감독의 <플레이>다. <원스>처럼 실제 뮤지션이 등장해 연기를 하고, 뮤지션이 되기까지의 고단한 현실이 있으며, 음악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음악이 중심에 선다는 점에서 그렇다.

준일(정준일)은 대중에 너무 영합하는 대신 자기만의 음악을 하겠다며 음반사를 뛰쳐나온다. 우울한 기분에 들어간 한 카페에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헌일(임헌일)의 음악성에 반한 준일은 그에게 밴드를 제안한다. 평소에 준일과 알고 지내던 드러머 현재(이현재)가 합류하면서 이들은 모던록 밴드를 결성한다. 자신들의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희망에 넘치지만 현실은 이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때론 사랑에 갈등하고, 때론 그들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대중에 속상해하지만 극적으로 기회가 찾아온다.

대부분의 극 중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플레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라면 (당연히!) 정준일과 임헌일과 이현재다. 3인조 인디밴드 ‘메이트’의 멤버인 이들은 첫 번째 영화 출연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모나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것은 이들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펼치기 때문인데 이는 영화를 연출한 남다정 감독의 다분히 의도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실제 뮤지션의 사연을 토대로 하고 있다 보니 청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합주실로 개조한 방안에서 연주 연습을 하고, 거리를 걸으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등의 자연스러운 행위로써 ‘뮤지컬’이 현실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다. 여기에 뮤지션의 고뇌와 맺어질 수 없는 사랑과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의 배경 같은 음악 영화의 클리셰가 적절히 가미되면 고전적인 뮤지컬에 사실주의를 접목한 최신의 음악 영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원스>를 따라하는 거 아니냐고. 실제로 극 중에는 메이트가 <원스>에 출연했던 글렌 한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로 구성된 밴드 ‘스웰 시즌’의 내한 공연 포스터를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메이트는 내한 공연 차 한국에 왔던 글렌 한사드의 눈에 들어 (그 순간을 찍은 실제 비디오 영상이 영화에 등장한다.) 데뷔한 독특한 이력의 밴드로 유명하다. 2009년 스웰 시즌 내한 공연 중 밴드 이름도 없던 이들이 공연장 로비에서 버스킹(busking,  길거리 연주)을 선보이던 중 글렌 한사드를 매료시켰다. 글렌 한사드는 이들에게 본 공연의 깜짝 게스트 출연을 제의했고 ‘친구'(mate)라고 소개받은 이들은 스웰 시즌의 무대에서 데뷔 공연을 펼치게 됐다.

다시 말해, <플레이>는 <원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는 영화다. 그런 배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게 되면 <원스>와의 유사함이 재미를 반감시킬지도 모르겠다. 전문 연기자가 아닌 까닭에 메이트가 말 그대로 ‘연기’처럼 구사하는 연기도 종종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하지만 글렌 한사드와 메이트의 인연이 실제임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공연의 감동은 몇몇 영화의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음악이 가진 힘일 테다. 그리고 그것이 음악이 전면에 나서는 최근 음악 영화의 매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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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plus

no. 40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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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감독 김곡, 김선(이하 ‘곡사’)은 독립 영화계에서 이미 유명 인사다. <고갈>(2008)이 그해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자가당착>(2008) <bomb! bomb! bomb!>(2006) <뇌절개술>(2005) <빛과 계급>(2004)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그 범위가 독립 영화 쪽에 한정될지언정) 화제의 중심에 섰고 이를 통해 주요한 상을 수상했으며 그렇게 유명세를 탔다.

곡사의 작품은 영화가 가진 본령, 즉 이미지로 이야기를 사유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고갈>(심지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아 개봉 당시 등급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을 예로 든다면, 공장 지대 근처에서 활동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낯선 남자를 상대로 매춘도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도 나누고 그러다가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오는 내용이 전부다. 실은 <고갈>에서 이야기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제되지 않은 캠코더 영상과 같은 현혹의 이미지로 관객의 눈과 감정을 극중 여자 주인공의 처지처럼 말 그대로의 ‘고갈’ 상태로 내몬다. 

그들 자신이 비타협영화집단이라고 명명한 ‘곡사’도 그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짐작된다.) 사전적 의미의 곡사(曲事)는 바르지 못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 법을 어기는 일 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같은 맥락에서 김곡과 김선 형제는 기존 영화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을 곡사라는 이름에 담았을 테다. 그런 이들이 독립 영화가 아닌 메이저 상업 영화를, 그것도 여름 한 철 장사의 대명사로 인식된 공포 영화를, 그 누구도 아닌 걸 그룹 ‘티아라’의 함은정과 함께 찍을 거라고 했을 때 곡사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영화가 나올지 쉽게 감을 잡지 못했다. 대신, 그들의 경력을 감안하건데 적어도 클리셰로 점철된 뻔한 수준의 공포 영화는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이하 ‘<화이트>’)는 곡사가 가진 네임밸류에서 가장 떨어지는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4인조로 구성된 핑크돌즈는 인기가 별로 없는 걸 그룹이다. 멤버끼리 사이도 좋지 못해 리더 은주(함은정)는 백댄서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은주가 기획사 건물에서 15년 전 발생한 화재로 몰살 당한 옛 걸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하는 것. 돈이 되겠다고 생각한 기획사 사장은 뮤직비디오의 노래를 타이틀 곡으로 삼는다. 예상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핑크돌즈는 인기 걸 그룹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인기를 얻는 순간부터 멤버들에게 차례차례 알 수 없는 죽음의 저주가 닥친다.

곡사는 그들이 ‘춤추는 마리오네트’라고 칭한 아이돌의 이면을 반영하기 위해 실제 걸 그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철저한 조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화이트>는 공포 영화라는 장르로 파헤치는 걸 그룹의 실체다. 겉으론 네온 사인처럼 화려하고 연예 산업의 최일선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걸 그룹의 실상이란 연예 ‘찌라시’만 달라붙을 진흙탕 루머 수준이다. 기획사 사장은 은주에게 노골적으로 ‘스폰서’를 뛸 것을 강요하고, 멤버들은 성형 중독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서라면 동료 하나쯤은 매장 시킬 수 있는 성격 파탄에, 우리가 걸 그룹을 상상할 때 가장 질 나쁜 멤버들을 모두 모아 놓은 그림이다.

춤추고 노래하도록 길러진 마리오네트로써 <화이트>가 반영하는 걸 그룹의 모습은 이 세계의 가십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 갖는 이들이라면 전혀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만 뒤져도 쉽게 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에 불과하다. 이를 일러 우리는 영화적으로 ‘클리셰’라고 부른다. 현대 공포 영화에서 클리셰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시대를 반영하는 장르로써 이는 적절하게 조절될 필요가 있다. 이미 10년도 더 전에 유행했던 <링>(1998)의 사다코가 지금에 의미를 갖기 힘든 노릇 아닌가. 근데 <화이트>에는 실제로 사다코 유령이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다!

곡사의 이전 작품들을 상기한다면, 클리셰의 남발은 ‘비타협’을 전면에 내세운 그들의 영화적 철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물론 그것이 <화이트>를 위해 조사했다는 내용의 파격과 신선함의 층위에 일치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사실 이 영화가 다루는 걸 그룹의 이미지와 소재는 이미 여러 매체를 거친 뒤다. 그리하여 <화이트>에 남는 것은 유행처럼 돌고 도는 걸 그룹에 대한 소비 그 자체다. 점멸하는 귀신 이미지나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울 장면처럼 곡사의 장기가 발휘되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익숙한 설정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화이트>는 굳이 곡사가 아닌 그 누군가가 만들어도 될법한 수준의 영화다. 보편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메이저 영화와 타협하되 곡사의 장기를 살릴 만한 프로젝트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두 번째 메이저 영화가 그런 작품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kbs저널
2011년 7월호

<종로의 기적>(Miracle on Jongno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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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LGBT영화제’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6월 2일부터 8일까지 열렸다. 일종의 퀴어영화 축제로, 종로3가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되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종로는 온갖 인종이 집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인, 외국인, 남녀노소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종로3가 일대에는 게이바가 1천 여곳에 달할 만큼 동성애 커뮤니티가 가장 발달되어 있어 서울LGBT영화제와 같은 행사를 진행하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혁상 감독의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은 이처럼 종로3가를 거점으로 형성된 동성애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끝나지 않은 숙제’ ‘일터에 핑크를 허하라’ ‘내 게이 인생의 황금기’ ‘사랑의 정치’ 4막으로 구성된 영화는 4명의 게이의 사연을 따라가며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단편영화 <올드랭 사인>으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소준문, 청년한의사회 사무처장이자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장병권, 작은 스파게티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게이 합창단 ‘G-Voice’에도 참여하는 최영수, 평범한 회사원이면서 퇴근 후에는 적절한 치료 및 약을 공급 받지 못하는 에이즈 감염자를 위해 투쟁하는 정욜이 바로 그 주인공.



이들은 편견이 평배한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데 개의치 않고 오히려 게이의 인권 및 권리 보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발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래서 <종로의 기적>은 소수자에 관대하지 못한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부각하기보다 이를 극복하려는 이들의 활동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소준문은 색안경을 끼고 게이를 바라보는 영화 현장에서 꿋꿋이 버티며 작품을 완성해 대중과 소통하고, 장병권과 정욜은 성소수자는 물론이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과 같은 한국 사회의 소수자와 연대해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며, 최영수는 커밍아웃 이후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게이 동료들과 함께 취미 활동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소수자인 까닭에 이들의 삶은 평범한 일상이기 이전 하루하루가 편견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종로의 기적>이 무겁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커뮤니티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유희가 이들의 삶을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병권은 “동성연애를 하려고 동성애 운동을 하는 건데”라며 웃음 띤 얼굴로 얘기하는데 바로 그런 커뮤니티에 대한 욕구가 이 풍진 세상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꼭 동성애자에게만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서 이 나라의 소수자들이 처한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연대와 같은 커뮤니티의 형성은 권리로써 삶을 영위하는 방패요, 세상의 모진 시선에 맞서는 창이 되기도 한다.



다만 경직된 우리 사회에서 4명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동은 아직까지 지축을 흔들 만큼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처럼 ‘종로의 기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뿔뿔이 흩어져 정체를 숨기며 살았던 게이들이 용기 내어 커밍아웃 하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종로가 힘을 주는 터전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들은 이곳의 동성애자 커뮤니티로 인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적처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성 정체성을 밝히기를 꺼려했던 최영수의 경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종로의 케이 커뮤니티를 발견한 후 제2의 인생을 얻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게이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것은 최영수에게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일상으로 환원됐기에 가능해진 변화다.



<종로의 기적>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이 꿈꾸는 세상은 최영수의 커밍아웃이 기적처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질 때이다. 동성애는 사랑하는 대상이 이성애와 다를 뿐 단지 개인적인 성적 취향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종로의 기적이 일상이 될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이들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KBS 저널

(2011.5.22)

<써니>(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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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는 중년이 된 여고 동창들이 극적 재회를 통해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우정을 재확인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이런 설정은 사실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데뷔작 <과속스캔들>(2008)에서 뻔한 이야기를 세련되게 연출했던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여성 버전의 <말죽거리 잔혹사> 혹은 <품행제로>로 비틀어 버린다. 말하자면 ‘7공주 신화 창조 프로젝트’라 할 수 있을 텐데  감독은 작품성보다 상업성에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하다. 중년의 7공주, 학창 시절의 7공주, 합이 14명의 등장인물들을 각각 단 한 줄의 성격으로 요약이 가능하게 설정하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장면 전환이 튀지 않도록 연출의 묘를 발휘하며, 이야기가 단순 신파로 빠지지 않게끔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는 정도다. 특히 스타 캐스팅은 아니지만 유호정, 진희경, 홍진희, 이연경 등은 그 자체로 추억의 볼거리일 정도로 7080 트렌드를 꿰뚫어보는 강형철 감독의 기획 능력은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재능이라 할만하다.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 끓은(?) 연출 태도야 말로 그의 영화에 많은 관객이 몰려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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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6월호

<무산일기>(The Journals of M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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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일기>라는 영화가 화제다. 탈북자의 남한 생활을 다룬 이 영화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모로코의 마라케쉬 등 해외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수상하며 개봉 전부터 2011년의 발견으로 평가 받을 정도다. ‘탈북자’는 최근 한국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다. 장훈의 <의형제>, 김동현의 <처음 만난 사람들>, 김태균의 <크로싱> 등에서 탈북자의 삶은 주요하게 다뤄졌는데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좀 더 현실에 밀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일당 2,000원 짜리 전단 돌리기와 벽보 붙이기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승철(박정범)은 탈북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동네 깡패들은 벽보를 붙이지 말라며 잔인한 폭력을 서슴지 않고 남한 내 유일한 탈북자 친구인 경철(진용욱)은 잔꾀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승철이 미련하기만 하다. 그가 마음을 붙이는 곳은 교회가 유일한데 마음에 두고 있는 숙영(강은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노래방에 취직한 승철에게 교회에서는 모른 척 행동해 줄 것을 강제한다.

<무산일기>가 끝나면 화면에는 ‘고(故) 전승철 군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살아 생전의 전승철과 친구로 지내며 남한 내 탈북자의 현실을 목격했던 박정범 감독은 2008년에 이미 단편 <125 전승철>을 통해 그들의 극빈층 삶을 영화화 한 적이 있다. 여기서 ‘125’는 탈북자를 의미하는 주민등록증 끝의 세 자리 숫자를 말한다. <무산일기>는 <125 전승철>을 확장한 경우라고 할 만한데 이 영화에는 125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지금은 무산계급으로 전락한 탈북자의 비극적 초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남한 사회의 실상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무산일기>의 진가가 발휘된다.

승철은 남한 사회에 편입한 타자인 동시에 자본주의적 삶에 적응하려 애쓰는 목격자다. 그의 이중적인 정체성은 영화의 카메라 운용 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승철이 대상화 되는 장면의 경우, 숙영을 욕망하지만 교회의 창 밖에서 몰래 지켜볼 수밖에 없는 외부인이다. 반면 뒤통수에 밀착한 카메라가 승철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네온 사인으로 현란한 유흥가이거나 한때 생활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철거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승철이 발을 디딘 이곳 서울은 나이키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상품으로 인격을 무력화 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약자를 철저히 짓밟는 엄혹한 경쟁 사회다.

결국 승철 역시 자본주의 논리를 체득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과정은 충격에 가깝다. 자신을 괴롭히는 동네 깡패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논리로 응징하고 그를 이용해 먹으려는 경철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모습에는 우리네 삶의 경쟁 논리가 그대로 겹쳐진다.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화를 감내하는 것, 익숙한 풍경이지만 <무산일기>가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기고 싶은 우리네 욕망을 단호할 정도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극적 장치나 첨가물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현실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비극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과연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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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저널
(2011.4.19)

<달빛 길어올리기>(H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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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은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경력 처음으로 디지털을 시도한다. 날로 그 가치를 잃어가는 한지의 복원 과정을 담기 위한 극중 다큐멘터리 제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에 필름이 아닌 디지털 촬영을 끌어들인 것. 그렇다고는 해도 200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주요한 특징이랄 수 있는 한국에서 장인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픔과 이에 대한 복권, 즉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물위에 뜬 달빛을 길어 올리는 자세로 한지를 만드는 과정이 집요하게 전시된다. 문제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설득이 아니라 계몽의 성격을 띤다는 데 있다. 영화의 어조가 잘못되었다는 뜻인데 극중 한지 복원의 배경이 되는 전주시가 지원한 까닭인지 관련된 인사들이 빈번히 등장, 어설픈 연기로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감을 더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지만 임권택 감독이 갖는 극영화로서의 강점과 눈에 띄게 충돌하며 극의 몰입을 저해한다. 경력에 안주하지 않는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시도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영화 전체적으로는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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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4월호

<파수꾼>(Bleak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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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영화다. 올해 3월 3일에 개봉하지만 이미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신인감독을 대상으로 한 경쟁부문 ‘뉴컨런츠’ 상을 수상하며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영화는 어느 고등학생의 자살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가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는 것이 <파수꾼>이 의도하는 바다. 사건의 중심에는 기태(이제훈), 희준(박정민), 동윤(서준영) 세 친구의 살얼음 같은 우정이 놓여있다. 사이가 좋을 땐 평생이라도 함께 할 것 같은 이들이지만 사소한 말 한마디, 가벼운 행동 하나가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이들의 우정은 금세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이다.

이처럼 <파수꾼>의 등장인물들은 겉으로는 강한 척 속으로는 관계의 어긋남에 대해 갈등하고 도망치려 하는 등 하나같이 나약하게 그려진다. 세 친구들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방어기제로 친구에 대한 폭력을 서슴지 않는 까닭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의 자살을 뚜렷한 하나의 이유로 제시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인간의 관계학에서, 특히 기태, 희준, 동윤과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는 청춘들에게 감정은 한치 앞의 상황도 예측불가능하게 만드는 불완전한 체계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복잡 미묘한 감정의 파장을 잡아내기 위해 윤성현 감독은 인물별로, 시기별로 장면을 교차하며 최대한 진실에 다가설 수 있도록, 다만 그 판단은 관객의 몫이 될 수 있도록 연출에 주안점을 둔다. 사실 제목의 ‘파수’(把守)에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그리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극중 내용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회피하는 ‘모순’을 취한다. 이는 또한 영화를 작동하는 서술과 형식의 중요한 기제이기도 하다. 청춘을 다루면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성장영화이면서 느와르처럼 잿빛을 띤, 과연 <파수꾼>은 정의하기 힘든 청춘의 모순된 이미지를 신인답지 않게 노련한 형태로 구현한다.

이 영화의 탄생 자체도 흥미로운 모순(?)의 배경 위에 자리 잡는다. 사실 <파수꾼>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중에서도 <파수꾼>은 다른 작품에 비해 작업시간이 유독 더뎠다고 알려진다. 시나리오부터 촬영까지 학교에서 제시한 날짜에 맞춘 적이 없었던 것. 이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측에서는 작업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PD 배정을 취소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것은 오히려 작품 혹은 장면의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 기동성이 생긴 까닭에 감독의 미학이 그대로 살아났다는 점일 테다.

<파수꾼>은 핸드 헬드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촬영감독의 수전증을 의심할 정도로 카메라가 과하게 흔들린다. 메이저 상업영화라면 거의 모험이라고 해도 좋을 시도인데 이에 대한 윤성현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다. 모순된 청춘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헨드 헬드가 적합한 카메라미학이고 또한 그럼으로써 심리가 주가 되는 영화 속 배우들에게 연기의 자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심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연기가 매우 중요했다. 좋은 연기가 나오려면 기술적인 부분들이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촬영감독과 합의를 보길, 배우들을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핸드 헬드를 통해 자유롭게 풀어주자고 했다. 그래서 촬영, 조명, 그리고 녹음까지 모두 배우의 동선에 맞춰 움직였다.”

청춘은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특권계급이라 할만하다. 극중 세 친구, 아니 한 친구의 자살 이후 남게 된 우리의 주인공들 역시 차가운 시련을 이겨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숙을 이뤄낼 것임이 자명하다. 그것은 <파수꾼>을 장편 데뷔작으로 발표한 윤성현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그는 촬영 과정에서의 불리한 조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졸업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극장 개봉을 이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청춘의 본질을 영화 내외적으로 구현한 예는 한국영화에서 좀체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그만큼 <파수꾼>은 두드러진 영화이면서, 그래서 또한 윤성현 감독의 미래가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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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저널
201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