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 프로젝트>(577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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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입이 문제였다. 하정우는 2010년 연말 모 시상식에서 주연상 획득 시 국토대장정에 나서겠다고 공약을 하는 바람에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무려 577km에 이르는 대장정에 나서게 됐다. 여기에 <러브 픽션>에서 함께 했던 공효진과 하정우와 연을 맺고 있는 동료들이 합류하면서 거대(?) 프로젝트가 되었으니, <577 프로젝트>는 그 22일간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즉흥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이니만큼 이 영화에는 정해진 시나리오라는 게 없다. 말 그대로 리얼 다큐멘터리인 셈인데, 하여 스타라는 껍질을 벗어젖힌 하정우와 공효진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실 <577 프로젝트>의 가장 큰 재미는 출연진 각자의 사정이 마치 ‘인간극장’을 연상시킬 만큼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데 있다. 스타의 말 한마디로 출발한 영화지만 하정우, 공효진을 제외한 대원들은 모두 무명의 연기자들이다. (그중 김성균은 먼저 촬영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가 흥행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 경우다.) 이들에게 국토대장정은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기 위한 중요한 시험대다.

배우로 활동하고 싶지만 찾아주는 영화가 없어 백수 상태거나 이 영화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이들의 사연은 대장정의 날짜가 거듭되고 체력이 소진될수록 인간승리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감동의 진폭이 더 큰 이유는 무료한 여정에 웃음을 주려고 하정우가 계획한 장난이 예상과 달리 파장이 커지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까닭이다. 가볍게 시작된 프로젝트라서 단순히 웃고 즐기는 대장정일줄 알았더니 여기에는 우리 인생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이 여정이 얼마나 만족스러웠던지 하정우는 이 프로젝트가 끝난 후 다시 한 번 국토대장정에 나서겠다고 또 하나의 공약을 남발(?)했다. 조만간 우리는 <577 프로젝트>의 후속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movieweek
NO. 544

<나나나 :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My 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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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나 :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이하 ‘<나 나 나>’)는 배우가 곧 감독인 영화다. 인디영화계의 여배우 트로이카로 통하는 김꽃비, 서영주, 양은용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그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부지영 총감독은 이들이 1년간 촬영한 분량을 추려 지금의 형태로 완성했다.

김꽃비는 <똥파리>로 각종 세계영화제를 돌며 알게 된 해외의 영화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는 과정을, 서영주는 여배우로서 갖게 된 고민과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양은용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옛사랑에 대한 혼란함과 외로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 나 나>는 우리가 스크린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여배우들, 그중에서도 인디영화에서 활약하는 이들의 무대 뒤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다만 그 이전 피사체로써 카메라에 찍히기만 했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이들의 사연이란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부지영 총감독은 이들에게 카메라를 나눠주며 구체적인 디렉션은 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나 나 나>는 말하자면 김꽃비, 서영주, 양은용의 ‘줄탁동시 프로젝트’, 즉 여배우라는 인위적 굴레를 뚫고 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환상보다 현실, 배우보다 자연인, 영화보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평범한 개인들의 모습이 담겨있을 뿐이다. 관객들에게는 여배우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관음의 기회를 제공할지 모르겠지만 배우들 각자에게는 그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 나 나>는 공적으로는 다큐멘터리이면서 사적으로는 비디오 다이어리라고 부를만한 작품인 것이다. 

movieweek
NO. 542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Two Weddings And a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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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 감독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하 ‘<두결한장>’)은 퀴어 영화다. 게이(와 레즈비언)에 관한 영화란 얘기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란 의미는 아니다. 같은 성(性)이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성애자와 다를 뿐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건 같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란 이유로 차별 받고 그로 인해 정체성을 숨기는 탓에 이들의 사연은 좀 더 특별해질 수밖에 없다.

민수(김동윤)와 효진(류현경)은 막 결혼식을 마쳤다. 근데 신혼여행을 가던 길에 효진이 차를 갈아탄다. 민수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표정이 없다. 오히려 기뻐하는 인상이 강하다. 위장결혼이기 때문이다. 게이 민수는 아들을 이성애자로 아는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효진은 아이를 입양, 레즈비언 커플인 서영(정애연)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서다. 하지만 효진의 과거를 아는 누군가의 폭로 때문에 이들의 위장 결혼은 위태로워진다.

김조광수 감독은 단편(<소년, 소년을 만나다><친구사이?>) 시절부터 게이의 사랑을 ‘샤방샤방’하게 그려왔다. 동성애가 죄도 아닌데 어둡게 묘사하는 것은 사실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하나요, 게이들에게 세상 밖으로 나와 좀 더 떳떳하게 살자고 ‘커밍아웃’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두결한장> 역시 명랑하고 발랄한 게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정체성 때문에 어쩔 수없이 겪게 되는 아픔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과정의 연출이 김조광수 감독의 작품을 다른 퀴어 영화들과 다르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두결한장>에는 동성애의 사랑이라고 해서 키스 정도는 등장하되 파격적이라 할 만한 베드신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다!) 충격을 주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성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한 목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의 관점은 극 중 민수와 효진을 비롯한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이거나 거부감을 갖는 이들을 묘사하는 연출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컨대, 민수가 호모포비아 택시 기사 때문에 친구를 잃는 순간에도 김조광수 감독은 비난하거나 단죄하는 법이 없다.

이는 이성애 중심 사회라는 견고한 편견의 벽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동성애자 그들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의 우회적 반영이다. 커밍아웃에 대한 강요는 아니지만 <두결한장>은 결국 민수가 겪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을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동성애를 너무 어둡게만 보여주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밝게만 묘사, 게이와 레즈비언을 미화하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 될 수 있다는 김조광수 감독의 세심한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이다.

이처럼 <두결한장>에는 동성애의 진실과 오해에 대한 사연이 다양한 층위로 존재한다. 김조광수 감독의 첫 장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에피소드 위주의 전개가 단편 시절의 호흡을 연상시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동성애에 대해 알려줄 것이 많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여전히 동성애에 대해서는 경직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인데 그렇기 때문에 <두결한장>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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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plus
NO. 63

<해로>(Hand in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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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합니다>(2010)는 ‘노인의 사랑’에 집중함으로써 젊은 관객 위주의 콘텐츠가 절대적인 한국영화계의 빈틈을 공략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최종태 감독의 <해로>는 그 기세를 이어받은 작품으로 황혼의 사랑을 그린 또 한 편의 ‘어른 영화’라 할만하다. 다만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어른들의 사랑이 폭넓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로맨틱 코미디의 변형태로 기능했다면 <해로>는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에 가깝다.

민호(주현)와 희정(예수정)은 40년 넘게 결혼생활을 이어온 부부다. 아들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단 둘이 오붓하게, 하지만 정 하나만을 가지고 관성적으로 부부생활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경천동지할 일이 닥친다. 가벼운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민호에 이어 희정이 말기 암 진단을 받은 것. 그동안 희정에게 소홀했던 것이 미안해진 민호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기에 이른다. 병이 찾아오면서 서로가 더욱 절실해진 이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게 되고 예정된 죽음이 가까워오자 한낱 한시에 함께 죽자는 약속을 한다.

<해로>가 원작삼은 핀란드 소설가 타우노 일리루시의 <Hand in Hand>(국내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발행됐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노부부가 홀로 생에 남는 것이 싫어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는 결말로 인해 유럽과 미국에서 굉장한 이슈를 불러왔다. 다만 그 쟁점이 논쟁적이면서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동반자살의 전제가 서로에 대한 절실한 사랑인 까닭이다. 이승에서 얻은 인연을 저승으로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생사를 초월한 사랑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최종태 감독은 이를 그대로 스크린에 가져오되 생과 사가 전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긴밀하게 이어진 것임을 상영 내내 강조한다. 민호와 희정 부부가 별 탈 없는 생활을 이어가는 극 초반에는 폐차 직전의 자동차 두 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몽타주하며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가 하면, 동반자살을 앞두고 민호가 생명력 넘치는 꽃들로 집안을 장식한 미장센에서는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이다. 이와 같은 연출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세계관이 짙게 배어있다.

실제로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기 이전 노부부의 삶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서로에 대한 무료한 감정 때문에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자 이들은 서로에게 더욱 애착을 느끼면서 오래된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남다른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든 사랑과 설렘, 그중에는 죽음의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유의지도 포함된다. 배우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죽음을 초월한 자유에 이르게 되는 민호화 희정 부부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해로>는 제목처럼 부부가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영화다. 죽음의 시기를 선택하고 죽음을 초월한다는 설정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특별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 영화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바로 삶의 찬미. 죽음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삶이 소중해지는 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민호가 병상의 희정을 향해 “우리에게 지금 시간 많아”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해로>는 사랑이 무엇인지, 평생을 함께한다는 가치가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죽음을 통해 포장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 시선으로 어른의 면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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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58

<가비>(加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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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는 장윤현 감독의 연출력이 2000년대 들어 시효가 다 됐음을 <황진이>(2007)에 이어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남자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여자 캐릭터, 애국심을 건드려 울음을 조장하는 이야기, 그럼으로써 전체적으로 시대와 역행하며 촌스러워지는 영화적인 만듦새까지, <가비>는 저 먼 지방 변두리에서나 찾을 법한 다방에서 마시는 싸구려 커피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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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호

<화차> 변영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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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화차>는 변영주 감독의 8년만의 신작이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치고는 꽤나 길어 보인다. 그런데 영화라는 건 제작과 촬영 기간 외의 숙성의 시간이 더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까 변영주 감독은 다른 감독에 비해 숙성의 시간을 더 거쳤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더 좋은 감독으로 거듭나기 위한 그 ‘더’의 시간을.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스포일러가 소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7년이었을 거다. 개인적으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의 도도한 물결에 발을 적시고 있을 때 변영주 감독이 <화차>를 연출할 거란 소식을 들었다. 어머나, 헛소문인줄 알았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로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 후 충무로로 넘어와 전경린의 동명소설 <밀애>(2002), 발레 하는 남학생들이 등장하는 <발레 교습소>(2004)를 만드는 등 장르와는 전혀 무관한 감독이지 않았던가. 

<화차>를 만나다

<화차>를 통해 미스터리라는 장르물로 형식 전환을 꾀한 계기가 있었다. 사실 그녀는 <낮은 목소리>의 후광을 등에 업고 상업영화를 만들었지만 <밀애>와 <발레 교습소> 모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특히 <발레 교습소>는 당시 국민그룹 ‘GOD’를 갓 탈퇴한 윤계상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으며 어느 정도의 기대를 모았지만 전국 관객 8만 명을 간신히 넘기는 수치로 흥행에 참패를 기록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초조한 마음에 변영주 감독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자신의 지난 연출가 생활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 친한 PD와 함께 무작정 여행가방을 쌌다. “그때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볼루션 No.0> <GO> 같은 책을 가져가 읽었다. 무릎, 탁! 내가 <발레 교습소>에서 못한 게 이거구나. 유쾌하게 접근했어야 할 아이들의 얘기를 너무 꼰대처럼 바라봤구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발레 교습소>의 패인을 분석한 후 변영주 감독은 가까운 서점을 들러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일본의 장르소설을 모두 사들여 독파했다. 그때 만난 작품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였다. 장르의 형식을 빌려 현실의 이야기를 펼치는 <화차>를 보며 그녀는 발상의 전환을 가질 수 있었다. “장르라는 건 어떻게 이야기를 다루느냐에 따라서 대중에게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그 당시 내가 쓰고 있었던 시나리오는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망가지는 모습이었는데 뭐, 영화로 만들면 재미없는 거지.” 그때 마침 <화차>의 연출 제안이 들어왔고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예” 덜컥 물어버렸다.

<화차>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통해 갖가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의 초상을 응시한다. 문호(이선균)는 선영(김민희)과 함께 부모님을 뵈러가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그녀가 사라지자 전직형사 출신의 사촌 형 종근(조성하)에게 행방을 의뢰한다. 종근은 그 과정에서 그녀의 실제 이름은 경선이고, 선영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선의 가짜 선영 행세가 신분상승, 부의 획득과 같은 세속적 욕망에서 비롯됐음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미스터리라는 인위적인 장르의 틀을 취하지만 등장하는 인물과 욕망은 모두 우리가 발 딛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극 중 교코, 그러니까 영화의 경선에게 네가 잘못해서 빚을 진 게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몰고 간 거다,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라, 이다. 지금 2000년대 한국에서 그 얘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원작소설과 다른 접근법을 가져가기 위해 변영주 감독은 시나리오를 무려 20고까지 썼다. 그래서 얻게 된 지금의 버전은 관객이 경선에게 연민이나 동정심 따위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선영을 죽인 사람이 경선이라는 사실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 경선’도’ 불쌍하네 이건 안 된다. 관객이 스스로 그런 감정을 갖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영화가 그걸 유도하면 못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변영주 감독은 예쁘기 때문에 동정 받아야 하는 여자 캐릭터 설정을 두드러기 날 정도로 싫어한다. 오히려 예쁜 여자여서 더 벌을 받아야 해, 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다. 그 자신이 예쁘게 생긴 게 아니어서? 물론 그건 아니고. 그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심리를 잘 파악해서다. 오히려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에 취향의 더듬이가 더 끌린다. 해석할 여지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데 그렇게 변영주 감독은 여자 캐릭터와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 남(<화차>)과 여(<밀애>) (그리고 노(<낮은 목소리>)와 소(<발레 교습소>)) 모두에게 시선을 고루 나눠주는데 능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좋은 사람을 만나다

그것은 그녀가 특정한 성(性) 혹은 위치라는 자각 없이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형성된 영화관(觀)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변영주 감독은 영화판만큼 여자가 편견 없이 일할 수 있는 분야가 없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여자 스태프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하는 경우가 없다. 1990년대 이후 영화판이 물가리가 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버렸다. 외국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젊은 축에 속하는데 한국에서는 어른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 현장은 권위적이기보다는 가족적이다.”

<화차>의 현장이 실제로 그랬다. 배우 김민희는 변영주 감독을 처음 본 순간 카리스마가 느껴져 무서웠다고 회고하지만 지금은 <화양연화> 같은 영화를 연출해 자신을 한국의 장만옥으로 만들어달라고 장난처럼 떼를 쓰는 중이다. 이선균의 경우, 변영주 감독을 만났던 첫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낮에 모처의 음식점에서 수육을 앞에 두고 각각 소주 10병씩을 들이키며 새벽 4시까지 토론을 빙자한 잡담을 나누다 즉석에서 출연을 결정했을 정도다. 이들과 함께 변영주 감독은 <화차> 홍보를 위해 난생 처음 <놀러와>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까지 했다. 그녀는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키득키득 웃어주는 바람에 가족 같은 유대감을 느껴 뿌듯했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닌 변영주 감독이 함께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건 현장에서 화를 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철직처럼 한 가지만은 꼭 지켜온 것이 있다. “평소 친절한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단, 영화 현장에서는 친절하다.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에게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 앞에 가서 조용히 얘기한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변영주 감독의 겉모습만 보면 귀에 대고 소곤소곤 얘기할 사람 같지는 않지만 <화차>의 홍보 때마다 영화보다 배우에 대한 자랑을 장시간 늘어놓으니, 세상에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이는 그녀가 20년 가까이 감독으로 충무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특유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변영주 감독은 영화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한 가지 훈련을 받으라고 조언한다. 자기의 욕망을 풀어 설명하는 능력을 반드시 배우라는 것. 영화 현장이라는 곳이 수십 억 가까운 돈이 오가고 수많은 인원의 의견과 선택이 빈번한 곳이니 직설적이지 않으면 오해가 발생한 소지가 빈번하고 그것이 결국 인간관계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영화인이 아니라 삶의 미스터리에 통달한 현자(賢者)가 내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좀 짓궂은 질문을 던져봤다. 영화와 삶,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냐고. 거두절미하고 “삶”이라는 대답이 빛처럼 입에서 발사됐다. “내게 삶은 영화보다 중요하다. 감독도, 배우도, 스태프도 영화인이기 이전 사람이다. 영화라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삶이 그 바탕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겠나.” 변영주 감독의 대답을 이어 받아 이렇게 질문하면서 글을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화차>는 좋은 영화인가? 좋은 사람이 만들었다면 그렇지 않을까.

사진 최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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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페이스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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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메이커>는 <퍼펙트 게임>(2012)처럼 TV 스포츠뉴스의 하이라이트를 옮겨놓은 것처럼 뻔하다. 동료 마라토너의 1등을 위해 그의 곁에서 레이스를 돕는 ‘페이스 메이커’ 주만호(김명민)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급기야 동료와 승부를 겨룬다는 인간승리의 영화다.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는 주만호(그는 <신석기 블루스>(2004)의 이성재가 연기한 신석기처럼 ‘뻐드렁니’로 등장한다.)의 외모, 거액의 사채로 어려움을 겪는 생계 곤란의 상태, 그리고 갑작스러운 국가대표 합류로 찾아오는 인생역전의 기회까지, 오프닝만 보아도 결말이 쉬이 짐작되는 것이다.

이건 한국의 스포츠영화가 갖는 고질적인 한계다. <페이스 메이커>는 등장인물들을 엘리트와 비엘리트로 이분화하고 주만호의 인간승리를 신화화하기 위해 전자를 비호감으로, 후자를 호감으로 묘사하는 의도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엘리트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이 노골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예컨대,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이 기대되는 민윤기(최태준)는 잘생긴 외모와 정상급 실력을 갖췄지만 안하무인격의 인간성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그와 달리 주만호는 동료의 업적을 위해 자신의 성적 따위 연연해하지 않고 동생의 출세에 방해가 되는 스스로의 존재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관객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는 한국사회의 직접적인 축소판이랄 수 있는 한국 스포츠 계를 이끌어가는 근간이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일개 선수의 희생이 당연시 되고 은메달, 동메달의 수십, 수백 개의 가치가 금메달 한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변의 의식은 개인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경직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풍토를 반영해야 하는 한국의 스포츠영화가 흥미를 끌 리 만무하다. 한국의 스포츠영화가 웬만해서 흥행에 재미를 못 보는 이유는 한국 스포츠계의 경직성을 그대로 이식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인데 은메달의 가치가 조명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영화의 전형성을 완전히 비껴간다)  

<페이스 메이커>는 그 실패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한다. 감정을 쥐어짜는 최근 한국영화의 하향 평준화된 연출력은 차치하고 도무지 극 중에 집중할 구석이 없다. 영화가 (그나마) 공들여 묘사하는 인물이라고는 (당연히) 인간승리의 주역인 주만호 정도다. 그 과정에서 금메달 지상주의라는 상징적 기호를 뒤집어쓴 민윤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1등과 엘리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비호감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그리고 주만호마저도 민윤기의, 잘 나가는 동생의 행위에 따라 반응이 결정되니 주인공 개인의 매력에 대해서는 뽐내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주만호의 인간승리의 대가로 미녀 새라고 불리는 조카뻘의 장대높이뛰기 선수 유지원(고아라)의 사랑까지 얻게 되니, <페이스 메이커>는 급기야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국가적, 집단적, 남성적 폭력의 시선의 3종 경기가 되고야 만다. 한국의 스포츠영화가 왜 시시한지 이 영화에는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아멘>(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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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리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몽>(2008) 이후 3년, 그동안 김기덕 감독은 그와 관련한 갖가지 소문(후배 감독과 프로듀서와의 불화, 폐인설 등)으로부터 벗어나 강원도 산속에 칩거하며 와신상담 속에 <아리랑>을 만들었다. 처절한 자기고백과 자기쇄신이 난무하는 이 영화 속에서 김기덕 감독은 데뷔 이래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그간의 힘겨웠던 과정을 셀프카메라 형식을 빌려 과감하게 드러낸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고, 힘겨워하고 냉소하고, 꾸짖고 울부짖고,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등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영역의 창작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아닌 게 아니라,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한 달 남짓 유럽에 머무는 동안 <아멘>을 완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김기덕 감독이라면 가능하다. 직접 개조하 DSLR 카메라 1대를 가지고 유일하게 캐스팅한 여배우와 함께 어떤 스태프도 없이 프랑스 파리와 아비뇽, 이탈리아 베니스를 돌며 영화를 만들었다. 김기덕 감독은 제작부터 각본과 연출, 촬영과 편집과 사운드, 그리고 극 중 연기까지, 무려 1인 7역을 담당한 것이다. <실제상황>(2000) 당시 영화의 러닝 타임과 동일하게 실시간 촬영했던 실험적인 연출을 감안해도 이번 경우는 꽤나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미니멀한 제작 환경답게 <아멘>의 이야기 역시 단출하다. 남자친구 이명수를 찾기 위해 무작정 유럽으로 쫓아온 한 여자(김예나)가 방독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 기이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굴곡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극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설정은 여자의 임신이다. 관계를 맺는 장면을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차 안에서 잠을 깬 여자의 팬티는 무릎까지 내려가 있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방독면 남자는 “아이를 낳아달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남긴다. (이후 그는 여자에게 “경찰에 자수해 벌을 받을게요”라는 메모를 남긴다.) 제목이 ‘아멘’인 점을 감안하면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연상케 하는 극 중 여자의 임신은 김기덕 감독이 그만의 방식으로 ‘어떤’ 구원을 의도하려는 바가 짙다. 실제로 방독면 남자는 드러난 눈 부분을 어둡게 처리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김기덕 감독이 연기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멘>을 <아리랑>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아멘>은 <아리랑>을 가지고 칸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다작의 감독으로 통했던 그를 기억한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3년의 공백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아우라(aura)가 감지된다. 오두막 ‘안’에 스스로 갇혀 고통스럽게 만든 <아리랑>으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발동시킨 창작욕은 일련의 행보 탓에 깊은 의미를 생성한다. 확실히 <아리랑>과 <아멘>은 짝패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결되는 지점이 다양하다. 그 중 <아리랑>의 내부 깊숙이에서 회오리치던 이야기 구조가 <아멘>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된다는 점은 주목해 볼 만하다. <아멘>은 유럽을 돌아다니는 여주인공의 특성상 로드무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장르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그 행위로써 장르적 의미를 갖는다.  

나는 글 중간에서 김기덕 감독이 <아멘>을 통해 찾는 것이 구원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진술했다. 어떤 구원일까. 김기덕 감독은 <아멘>의 작품의도에 대해 “연인은, 사랑은, 범죄란, 불행은, 행복은, 생명은, 죽음은, 믿음은, 영화는 무엇인가? (중략) 나만 알고 있는 내 생각이 가능하길 기도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아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김기덕 감독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아멘>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던 <아리랑>과 떨어뜨려 설명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리랑>의 내부에서 <아멘>의 외부를 지향하는 구조는 여자 주인공의 임신과 연결되면서 ‘낳는다’는 의미, 즉 창작의 고통으로 치환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발언이 극 중 강간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에서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영화계에 대한 한()을 고해성사하듯 쏟아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의지인 듯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총구를 겨눈 후 자신을 향해서도 총을 발사, 자살이라는 상징적인 죽음으로 묵은 한을 씻어낸다. 그리고 <아멘>을 통해 새로운 출발의 다짐처럼 영화적 구원(Amen)의 길에 다다른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가시면류관처럼 옥죄던 방독면을 벗는 장면은 정확히 이에 조응한다. 아기를 낳아달라고 줄곧 여자를 괴롭히다 끝내 약속을 받아낸 후 파리의 첫 번째 감옥이었던 콩시에르주르(La Conciergerie)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이 영화에 테마에 걸맞은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 본인의 영화적 구원에 대한 욕망이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그가 원하는 평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멘>과 <아리랑>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김기덕 신작열전’이라는 제하로 함께 묶여 상영이 되지만 정식 개봉 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2주간의 상영 기간을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한국의 어느 극장에서도 상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김기덕 감독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두 영화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동반 시산부 개봉은 어떤 면에서 적절한 형태로 보인다.) 이는 여전히 한국 영화계와 불화한 김기덕 감독의 불편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길에 이르렀으되 완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구원.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더욱 개인적인 행태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김기덕 감독은 국외자처럼 힘겹게 영화를 찍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은 열릴 것이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힘겨워하는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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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다슬이>(The Lovely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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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 뇌 장애를 가진 이들 가운데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레인맨>(1988)에서 자폐증 환자이지만 숫자를 모조리 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더스틴 호프만의 역할이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박철순 감독의 <다슬이>는 말하자면, 한국판 <레인맨>이다. 자폐증이지만 그림 실력이 뛰어난 서번트 증후군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레인맨>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슬이(유해정)는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인적 드문 어촌 마을인데다가 또래 친구도 없고 할머니와 삼촌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폐증이 심한 다슬이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심심할 새가 없다. 낮에는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눈사람이 나오는 TV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까닭이다. 9살 소녀의 미술치고는 꽤나 근사하지만 이웃들의 눈에는 담벼락을 어지럽히는 눈엣가시로 비칠 뿐이다. 다슬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크레파스 대신 페인트를 가지고 온 동네에 칠을 하기 시작한다.

<레인맨>을 비롯해, 직접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을 다루지 않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한 핏줄 영화로 이어지는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어거스트 러쉬>(2007) 등은 재능의 발현을 중심에 두고 이를 가능케 하는 주변인들의 노고에도 고루 시선을 분산한다. <다슬이>는 좀 차별된 경우인데, 다슬이의 재능을 의도적으로 폭발시켜 감동을 자아내지도, 이를 돕는 친지들의 자기희생을 칭송하는 낯 뜨거운 전략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슬이의 재능 주변으로 무성하게 꽃을 피울만한 인물과 에피소드는 최소화한 채 오로지 다슬이에만 집중한다. 그녀를 소개하는 첫 장면을 제외하면 (다슬이가 등대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감시원이 제지하고 이에 맘 상한 그녀가 마구잡이로 덤벼듦으로써 캐릭터가 설명된다.) <다슬이>는 온전히 그녀의 시선만 좇을 뿐이다. 다슬이의 눈과 마음이 가는 대로 관객 역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의 의도는 내려다보는 동정이 아닌 수평적인 이해를 전제한다. 거리를 둔 바라보기가 아니라 다슬이가 되어 그 처지를 직접 경험해보자는 거다.

여기에 바로 <다슬이>의 진가가 존재한다. 그런 불편한(?) 조건으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일방적인 동정심 따위 철저히 배제한다. 극 중 다슬이의 입장이 되어보면 세상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영화의 배경은 거친 파도가 난무하는 어촌 마을이지만 다슬이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드넓은 캔버스가 되니 그 위에 다양한 상상의 이미지들을 그려 넣을 수가 얼마나 좋은가. 다슬이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이 넘실대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벽에 낙서하지 말라며 불평을 토로하는 이들의 각박함이라니.

이런 세상의 ‘다슬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응원이다. 영화는 결국엔 홀로 남겨지는 다슬이의 모습을 비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결코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 여전히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는 모습에서 흐뭇해지는 건 우리 자신이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박철순 감독이 다슬이를 대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 편으로 감독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슬이를 연기한 유해정에 대한 응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유해정은 <다슬이>가 영화 데뷔작이다. 그럼에도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다. ‘천재 배우’라는 홍보문구가 한낱 수사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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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돼지의 왕>(The King of Pi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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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부산영화제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근원을 찾아가는 상영작이 두드러졌다. 증오를 먹고 자란 모자간의 관계가 콜럼바인 총기 사건과 같은 비극을 야기하는 린 램지의 <어바웃 케빈>(2011), 대지진 이후 여전히 기성세대의 욕심으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청년 세대의 갈등과 좌절을 묘사하는 소노 시온의 <두더지>(2012) 등이 대표적이라 할만하다. 또한 학창시절에 경험한 폭력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도 그중 한 편인데 주요 상 6개 부문 중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무비꼴라쥬상, 넷팩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까지 무려 3개 부문을 수상하며 ‘부산영화제의 왕’으로 등극했다.

<돼지의 왕>의 수상이 좀 더 의미를 갖는 것은 부산영화제 사상 ‘애니메이션’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다. 안 그래도 <돼지의 왕>은 부산 상영 이전부터 한국 최초의 ‘잔혹’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 때문에 눈길을 끌어왔다. 이미 학원폭력과 동물살해 장면이 포함된 1차 예고편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심의 반려를 당했을 정도. 수위가 어떻기에? 애니메이션 묘사가 잔인하면 얼마나 잔인하겠는가. 게다가 연상호가 주도한 작화는 선이 정교하기보다는 굵은 쪽에 가깝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폭력 구조가 빚은 폐해를 학교라는 공간에 압축한 이야기가 더 모질고 숨을 옥죄어 오는 것이다.

소설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서전 대필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는 종석(양익준 목소리 출연)은 중학교 동창 경민(오정세)을 만나 생각지도 않은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나약한 경민은 힘센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처지였고, 종석은 집이 넉넉하지 못한 까닭에 학교생활이 고역인 형편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위안 삼으려 했지만 소위 잘나가는 이들의 계속된 괴롭힘으로 최악을 맞는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철이(김혜나)가 보호해주며 학교생활에 숨통이 트이지만 이들 셋 사이에는 또 다른 폭력이 야기된다. 그리고 그 폭력의 기억이 15년 뒤에 다시금 찾아와 종석과 경민을 괴롭히는 것이다.   

종석과 경민이 공유하는 기억 속의 학교는 부와 폭력의 재화(財貨)에 맞춰 철저히 분리된 계급의 전시장이다. 그럼 <돼지의 왕>은 계급을 학습하도록 학생들을 방치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애니메이션인가? 연상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놓인, 그러니까 이 영화가 ‘돼지’로 칭하는 종석과 경민 같은 무리들이 지위 상승을 이뤄보겠다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는 풍경 속에서 이 사회의 고착화된 비극을 갈무리해낸다. 이것이 극 중의 특수한 상황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말하기를 꺼려할 뿐이지 이미 경험하고 학습한 이 사회의 엄연한 생존규칙이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에 따르면, 학창시절부터 생존규칙을 뼛속부터 체화시키는 이 사회의 계급 시스템은 균열하지 않는 견고한 어떤 것이다. 다만 거기서 떨어진 코딱지만 한 콩고물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돼지들은 서로에게 계급적 동지가 아니라 그냥 절벽에서 떨어뜨려야 할 경쟁 상대이고 종석과 경민처럼 좀 더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에 불과하다. 하여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학교 내 계급구조의 공고한 틈을 비집고 튀어나와 똑같은 방식의 폭력을 휘두르는 철이 같은 이는 ‘돼지의 왕’으로 불리며 우상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계급 피라미드의 최하층 내에는 또 하나의 약육강식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의 생리 또한 상위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먹이사슬의 형태를 이룬다. 이 부분이 <돼지의 왕>의 핵심이랄 수 있는데 철이 또한 끝까지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경우 종석 혹은 경민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비극이 놓여 있다. 이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계급 구조에 대한 분노를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에게로 폭발시키는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란 힘들다. <돼지의 왕>이 묘사하는 바라면 우리 사회는 지옥 그 자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실 연상호는 그의 이름을 알린 중편 <지옥: 두 개의 삶>(2003) 때부터 이 세상을 지옥으로 묘사해왔다. 첫 번째 장편 <돼지의 왕>을 완성하기 위해 연상호는 5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강산이 반 정도 변하는 시간이었지만 이 사회의 계급 구조는 개선의 여지는커녕 좀 더 견고해진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돼지우리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는 상황이고 돼지끼리의 갈등은 더욱 빈번해졌으며 이들을 지배하고 관망하는 개들의 횡포는 극에 달한 상황이다. <돼지의 왕>의 잔인성은 특정장면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치부를 대놓고 응시하는 이 애니메이션의 시선에 있다. <돼지의 왕>은 연상호가 우리 시대의 돼지들에게 보내는 애가(哀歌)인 것이다.
 

KBS 저널
201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