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하녀><시> 칸 진출 한국영화 삼인삼색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맘때의 한국영화 구도를 보면 지난해와 거의 판박이다. 홍상수(<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박찬욱(<박쥐>), 봉준호(<마더>) 등 한국의 대표감독들이 극장가를 이끌었던 것처럼 2010년 역시 홍상수(<하하하>), 임상수 (<하녀>), 이창동(<시>)의 영화가 주도한다. 앞선 세 영화가 한국을 넘어 칸영화제에 진출했던 것처럼 <하녀>와 <시>(이상 경쟁부문), 그리고 <하하하>(주목할 만한 시선) 또한 2010년 칸에 동반진출 해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칠 기세다.

특히 홍상수는 <하하하>가 벌써 여섯 번째 칸영화제 진출작이다. 칸에서 수상한 적은 없지만 그의 신작이 발표되면 으레 칸영화제 진출은 기정사실화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인간탐구를 즐기는 프랑스 영화와 흡사한 구석이 많다. 이번 영화 <하하하>의 경우, (역시나!) 남녀 연애담을 다루면서 연애의 속성을 가식 없이 까발린다.

영화감독 문경(김상경)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은 얼마 전 여름(夏) 각자 통영에 갔다 온 일에 대해 수다를 떤다. 문경은 해병대 출신 정호(김강우)의 방해를 뚫고 관광가이드 성옥(문소리)을 만나 커플이 된 사연을, 중식은 후배 정호를 만나러 갔다가 부인 몰래 사귀는 애인 연주(예지원)를 만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공교롭게도 문경과 중식은 조우하지 못했을 뿐 같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하하하> 속 연애의 세계는 ‘우연’이 지배한다. 그 우연을 인식하지 못한 채 떠들어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는 얼마나 유쾌한지.

프랑스인들에게 홍상수는 (어떤 면에서) 얼마 전 타계한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에릭 로메르 또한 연애담을 통해 남녀의 속성을 지적이지만 코믹하게 드러냄으로써 사랑을 받았다. 홍상수는 <해변의 여인>을 기점으로 음습함과 조롱의 시선을 걷고 남녀 사이의 가식을 긍정하고 포용하는 쪽을 택하면서 더욱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비록 칸의 수상은 박찬욱이 앞설지언정 (<올드보이> 당시 칸의 심사위원장은 미국의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장르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프랑스인들은 홍상수의 영화를 더욱 높이 평가한다.

임상수 감독 최초의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하녀>는 칸 패밀리의 후광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다. 신자유주의시대, 빈부격차와 계급 간의 갈등이 불러온 한국사회의 풍경을 대저택에 고용된 하녀라는 설정으로 은유하는 이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리메이크로도 유명하다. 김기영의 <하녀>는 마틴 스콜세지가 수장으로 있는 세계영화재단의 첫 번째 디지털 복원 작품으로 선정돼 2008년 칸에서 상영되며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칸은 <하녀>의 리메이크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 경쟁부문에 올리기 위해 제작 단계부터 예의주시했고 현재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의 프랑스판 리메이크 연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하녀 은이를 연기한 전도연은 칸이 사랑하는 배우중 하나다. 2007년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전도연에 대한 현지의 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초특급 게스트만 묶을 수 있는 최고급 호텔을 영화제 측으로부터 배정받았을 뿐 아니라 영화제의 골든타임에 상영시간을 확정했다. 더군다나 극중 전도연의 과감한 연기가 벌써부터 화제에 오르면서 <하녀> 또한 주목받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기자시사회를 통해 나온 평가를 보면 ‘훈(이정재)과 해라(서우) 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부와 지위를 유지하는 방식에 맞서 은이로 대변되는 하층민 계급의 존재증명이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는 <로빈후드>보다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2007년과 2010년 각각 <밀양>과 <시>의 경쟁부문 초청으로, 2008년에는 경쟁부문심사위원으로 3년 연속 칸을 밟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부장관을 지낸 전력 때문에 종종 ‘한국의 앙드레 말로’로 소개되는 이창동은 명실상부한 칸의 패밀리다. 이번 칸에서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꼽히는 <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소 철없어 보이는 할머니 미자(윤정희)가 시를 쓰는 과정을 묘사한다. 외손자의 성폭행 사건으로 세상의 추(醜)를 경험하면서 그녀는 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시>는 국내에서 <만무방>(1994) 이후 연기 활동을 중단했던 ‘왕년의 은막 여신’ 윤정희의 15년 만의 출연으로 관심을 모이기도 했는데 이는 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유럽에서 명성이 높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라는 점에서도 윤정희를 향하는 관심은 높다. 이창동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로애락을 품은 감정의 등고선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름살로 만개한 배우다. 그녀의 존재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적인 논쟁보다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영화에 높은 평가를 주저하지 않았던 칸으로써도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다. 만약 이번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하게 된다면 <시>의 가능성을 가장 높게 점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칸영화제는 올림픽처럼 경쟁을 중요하게 다루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다. 하지만 칸에서의 성과를 국내 흥행으로 이어가려는 시도 또한 꿈틀거리는 게 사실이다. 이맘때면 집중되는 한국 국가대표 감독들의 영화 개봉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rie clarie
2010년 6월호

<하녀>와 <시>에서 비치는 노무현의 죽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주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창동의 <시>와 임상수의 <하녀>는 영화 외적으로 많은 걸 공유하지만 (올해 한국영화 최고 기대작이랄지, 5월 13일 동시 개봉이랄지, 칸영화제 동반 경쟁부문 진출이랄지 등등) 극중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른 지향점을 향한다. <시>의 이창동은 세상이 아무리 험할지라도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고 <하녀>의 임상수는 이 더러운 세상 굳이 아름답게 바라볼 필요 뭐가 있냐며 냉소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우연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유사한 이미지로 서두를 연다.

<시>에서는 한 소녀가 다리 위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어 물에 떠내려가고 <하녀>에서는 30대로 추정되는 한 여자가 일산의 한 유흥가 건물 위에서 투신한다. 두 영화가 제시하는 ‘자살’ 혹은 ‘추락’의 이미지는 현실에서도 결코 낯선 광경이 아니다. 1년 전 이맘 때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9.11 테러가 미국 국민에 남긴 트라우마처럼 우리에게 깊은 정신적 내상을 입혔다. 물론 <시>와 <하녀>가 그날의 사건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점에 비춰 2009년 5월 23일 이후 여전히 시퍼런 멍 자국으로 남은 한국 국민의 내상을 두 작품 역시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시> 고통을 위로하는 법

사실 <시>는 여중생의 투신을 직접적으로 이미지화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물에 떠내려가는 시체를 근처 물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목격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를 발견하는 아이는 다름 아닌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로 출연했던 아역배우다.) 다만 그 이후 제시되는 파편적인 상황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창동 감독은 여중생의 추락 장면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것이 <시>를 만든 이창동 감독의 이유다.  

잘 알려졌듯, <시>의 주인공은 <만무방>(1994) 이후 15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는 윤정희다. 그녀가 맡은 ‘양미자’는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수한, 한편으로는 철없는 영혼의 소유자다. 미자는 동그랗게 입 벌린 꽃봉오리에 감탄사만 늘어놓지 않고 무료 강좌 전단을 본 참에 시로 한 번 아름다운 세상을 표현해볼 생각이다. 근데 이게 쉽지 않다. 세상에는 아름다움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도사린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비보가 찾아든다. 홀로 키우는 외손자 욱이(이다윗)가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연루됐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 그때부터 미자에게 세상은 단순히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시>는 미자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미(美)에서 추(醜)로 추락하는 과정을 통해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영화다. 사실 이창동 감독은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에서부터 <밀양>(2007)까지, 삶은 미와 추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이라는 사실을 늘 명시했다. <시>에서 미추의 삶을 모두 전시하는 건 미자가 유일하다. 예컨대, 아름다움만 추구하던 미자가 욱이의 사건을 무마할 위자료를 벌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남자 구실을 하고 싶다’는 강 노인(김희라)의 청에 조건을 걸고 응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위악적일 수가 없다. 요는 눈물을 알아야 웃음을 알 수 있고, 고통을 알아야 삶을 이야기할 수 있듯이 추함을 알아야 아름다움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시>를 통해 이창동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바다.

그런 관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일종의 삶의 추한 광경이다. 그가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추하다는 게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황들이 추하다는 얘기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길!)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은 그 상태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진다. 그의 죽음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절망 혹은 원망?) 앞으로 우리는 이 고통을 어떻게 끌어안아야 할 것인가. (위로 혹은 복수?) 결국에 이것은 우리의 문제다. 세상이 끝까지 선할 줄만 알았는데, 아니 믿었는데 갑자기 날아든 비보로 삶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미자처럼 우리 역시 상식이라고 믿었던 가치가 추락하는 순간, 정신적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사실 미자에게 여중생의 죽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해자 부모들 사이에 껴서 피해자 부모에게 적정한 위자료를 주어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면 세상은 다시 아름다워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외손자 욱이가 저지른 성폭행이었지만 그렇게 키운 미자 본인도 가해자에 다름 아니었다. (자살한 여중생의 추모 미사에 미자가 몰래 참석하자 그곳에 있던 여중생들이 그녀를 가해자인 냥 쳐다본다.) 그 순간, 망치로 가격 당한 듯이 미자는 생전 처음으로 ‘윤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여중생의 살아생전 마지막 발자취를 쫓기에 이른 것. 그것은 성폭행을 당한 이후 자살의 순간까지 여중생이 겪었을 심적 고통을 공유하려는 미자의 감정적 후체험에 가깝다. 그제야 시상이 떠오른 미자는 ‘눈물의 시’(미자가 펴든 수첩 위로 빗물이 떨어져 서서히 번져나간다.)를 완성함으로써 자살한 여중생에게 속죄를 구한다.  

<시>에서 이창동이 말하는 ‘시’란 이제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무엇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만큼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머지않아 일상을 되찾았지만 그것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 후 1년의 시간은 노무현의 고통과 진심을 이해하는 참회의 순간이면서 또한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은 결국 우리가 심적으로 써내려간 시의 창작 과정과 다르지 않다. 시는 세상의 미를 바라보는 시각만 가지고는 써지지 않는다. 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여 독자를 위로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예술이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 이후 펼쳐진 상황들을 보고 겪으며 당신은 어떤 시를 보았는가.

나는 그 많은 수십, 수백만의 시중에서 한 편이 이창동의 <시>라고 생각한다. <시>에서 이창동은 여중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대신 그 죽음을 껴안는데 몰두한다. 고통을 위무하고 삶을 긍정하며 인생을 성찰하는 시가 실종된 시대에 윤미자라는 우리중의 한명을 내세워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한 숭고한 노력을 보여준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심에 사로 잡혀 세상에 더한 독을 뿌려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상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의 죽음은 세상에 남은 최소한의 ‘시’를 사수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하녀> 유령과 싸우는 그들

<하녀>가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시>와 달리 공격적이다. <시>가 여중생의 자살을 암시하는 것에 반해 <하녀>는 대놓고 30대 여성의 투신자살을 보여준다. 그곳을 지나치던 은이(전도연)는 함께 있던 친구에게 “왜 죽었대? 가서 구경해보자.”라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여자의 시체 대신 핏자국만이 남아있다. 그녀는 왜 죽었을까? <하녀>는 바로 그 핏자국의 사연을 따라가는 영화다. 다시 말해, 그 여자가 왜 투신자살에 이르렀는지 밝히는 것이 임상수가 보여주려는 바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다. 은이다. 영화는 투신한 30대 여성의 사연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돌려 은이의 사연을 포착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첫 장면, 일산 유흥가를 비추는 카메라는 유흥을 착취하는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구도를 전시한다. 그런 점에서 임상수 감독이 보기에 투신한 여자와 은이는 모두 ‘하녀’인 셈이다. 그렇다면 투신한 여자가 자살을 통해 무언가 알리고자 하는 대상은 자신과 같은 하녀 계층이 아니라 그 위의 계층을 향하는 것이 된다. 과연, 이후 영화는 상류층의 대저택에 들어간 은이의 삶이 훈(이정재)과 해라(서우) 부부에 의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보여준다. 훈과의 정사로 임신을 하게 된 은이는 그저 아이를 낳아 자식과 단 둘이 오순도순 살고 싶었을 따름인데 높으신 분들에겐 그게 아니었나보다.

강제로 아이를 지우고 심신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은이가 택하는 마지막 수단은 자살이다. 물론 자살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 (훈과 해라, 그리고 그들의 딸인 나미)에게 충격을 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힘없고 ‘빽’없는 이들이 행하는 최후의 자기 존재 증명인 셈이다. 임상수 감독은 이를 두고, “모든 자살에는 시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맞다. 노무현 대통령도 넓게는 자신이 평생에 고수해왔던 청렴을, 좁게는 대통령 재직 시절 결코 검은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결국 죽음으로써 현세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때로 진심은 죽음을 통해야만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노무현의 죽음도, 노동자들의 분신자살도, 연예인의 잇따른 자살 소식도, 그리고 은이의 죽음에도 거기에는 선명한 핏자국 같은 메시지가 남겨져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행동을 통해야만 진심을 알릴 수 있고,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금 세상이 야속할 뿐이다. 근데 세상이라는 게 그렇다. 소위 우리가 신자유주의시대라고 부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초들의 목소리는 윗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했고, 노동자들의 아우성은 짓밟혔으며, 힘없는 자의 외침은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하녀>의 은이도 다르지 않다. 강제로 낙태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자 그녀는 큰 하녀 병식(윤여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복수할 거야. 난 찍소리라도 내야겠다고.” ‘찍소리’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은이는 자신의 자살이 훈과 해리네 가족에게 직접적인 복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녀>의 마지막 장면, 훈과 해라가 딸 나미(안서현)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경을 보면 은이의 죽음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근데 나미의 무표정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머릿속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은이는 자살하기 전 병식에게 자신의 죽음이 나미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으로도 성공한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당장의 효과는 없을지언정 나미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거대한 정신적 상처로 작용하기 충분하다는 게 은이가 자살이라는 시위를 통해 드러낸 욕망의 정체다. 약간의 비약을 허락한다면, <하녀>에서 배경이 되는 대저택은 정치권과 대기업 인사들을 포함한 상류층의 생활 방식을 은유하는 그들만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은이로 대표되는 하층민들에겐 최소의 자유만 허락될 뿐 (훈과 해라가 잠든 후에야 발 뻗고 누울 수 있고 운이 좋으면 훈과의 정사를 통해 가욋돈도 챙길 수 있다.) 철저히 이용당하고 무시당한다. 그런 광경을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게다가 은이의 죽음까지 목격한 나미가 자신 안에 생겨난 괴물과 평생을 싸우며 괴로워할 것임을 자명하다.

여기서 나미가 어떤 인물 층을 대변하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어느 블로거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과 표정이라고는 생전 지어본 적 없는 나미의 얼굴을 두고 모 대기업의 회장을 언급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그의 대통령 재직 시절부터 반대를 위한 반대를 목 놓아 부르짖었던 인사들에게는 공포로 다가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번 지방 선거 구도가 ‘반(反)이명박 vs 반노무현’의 구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야당을 심판하겠다는 소리는 평생에 처음 들어본다!) 실제로 그들은 노무현이 자살한 순간부터 그 후폭풍을 차단하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울광장을 봉쇄했고 촛불을 강탈했으며 집회를 금지했다. 노무현의 죽음이 남긴 메시지가 들불이 되어 번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그들은 법을 무시했고 국민의 의견을 한 귀로 흘렸다. 자신 속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안의 괴물을 키우며 노무현이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다.


노무현 죽음 이후의 영화(들)

<시>와 <하녀>가 노무현의 죽음을 다룬 영화라고 말하는 건 비약이다. 이창동 감독과 임상수 감독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시>와 <하녀>를 만들지 않았을 뿐더러 일부러 5월 개봉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칸영화제의 후광을 엎기 위한 개봉 전략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하지만 <시>와 <하녀>에 대해 ‘노무현 죽음 이후의 영화‘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에 대해 노무현의 죽음을 어느 정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와 <하녀>의 공개 이후 이창동과 임상수가 여러 영화잡지와 가졌던 인터뷰를 보면 그런 시선이 어느 정도 목격된다.

이창동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753호 ‘<시> 이창동 감독이 말한다’)에서 ‘<시>를 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요지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겠다. (웃음) 이거야말로 수용자의 몫이다. (중략) 이것에 대해서는 의도를 말하고 싶지 않다. 질문을 바꿔보자. <시>가 정치나 그 비슷한 얘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런 점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걸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무슨 힌트가 있는 걸까? 거기에 무슨 맥락이 닿아 있는 걸까? 그건 관객이 느끼는 것 같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어떤 의도였다 아니다 말하기는 싫고, 사실은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임상수 감독은 ‘스크린’과 인터뷰(316호 ‘아름다운 것들 속에서 고통을 목격하는 임상수’)를 가지면서 “그만큼 한국사회가 각박한 거예요. 자살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거지만 자살이 많아진 건 사실이죠. 최근 한국에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고. 모든 자살에는 시위하고 싶은 욕망이 있거든요. <오래된 정원>(2006)에서 (극중 미경이) 분신하는 것은 대중을 위한 시위였지만 개인적인 자살도 남편이나 친구에게 내가 죽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의 영화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2010년의 우리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스크린에서건, 브라운관에서건, 무대에서건, 지면에서건 자살과 추락의 이미지는 일종의 힌트가 되어 우리에게 그날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만큼 노무현의 죽음이 남긴 인상은 컸다. 마치 우리 발밑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처럼 정치는 물론 우리 삶과 문화, 그리고 예술까지 한국의 모든 지형도를 ‘노무현 죽음 이후의 무엇’으로 적셔놓았다. 영화로 그 스펙트럼을 좁혀보자면, <시>와 <하녀>는 그 증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1주기를 앞두고 두 영화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이 내겐 어떤 징후처럼 느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10.5.19)

<박쥐>의 불균질함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쥐>는, 상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고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으로 관심이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할 얘기가 남아있는 작품이다. 그처럼 <박쥐>에 대해서는 호오가 갈리는 많은 글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질적 요소의 양립을 통해 영화적 미학이 기능하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욕망을 갈구한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발현의 태도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상현(송강호)과 적극적인 태주(김옥빈),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한복을 판매하는 ‘행복한복집’, 매주 수요일 벌이는 마작 판 위로 흐르는 이난영과 남인수의 뽕짝, 신나게 모여 앉아 게임을 즐기는 한국인들 주변에서 가사를 돕는 필리핀인 이블린(메르세데스 카브럴), 닫힌 문에서 시작해 시원하게 트인 바다에서 끝맺음되는 이야기 구조 등등. ‘박쥐’가 포유류와 새의 중간에 위치한 경계의 존재이듯 영화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상현과 태주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아닌 게 아니라, 상현과 태주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바니타스의 대표적인 회화 <바닷가의 월출>과 무척이나 닮았다!)

불균질의 성향은 박찬욱 영화가 보여주는 특유의 무국적성의 주요한 원인으로 인식돼왔다. 더욱이,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피로 결합한 뱀파이어 모티브가 <박쥐>의 원형임을 감안할 때 무국적성이 더욱 눈에 띔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박쥐>의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경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 그리고 이질적 요소의 충돌이 영화의 미학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할 때 서구로 대표되는 <테레즈 라캥>, 뱀파이어물과 대립하는 한국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단서는 행복한복집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2층으로 이뤄진 집의 구조와 남편을 위해 ‘하녀’처럼 시중을 드는 부인들(현대 한국에서 하녀의 대표적인 존재를 찾는다면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시집온 여자들이 아닐까?), 그리고 외간남자에 의해 눈을 뜨는 여자의 욕망이라는 단편들을 종합해보면 어렵지 않게 하나의 작품이 연상된다.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주제 의식이 집약된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하녀>는 비틀린 욕망이 가져온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다룬 작품이다.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당시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다룬 지점은 태주의 욕망이 불러온 기존 질서의 파괴에 따른 상현의 공포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단적인 예로,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공격하는 대상은 승대(송영창)와 영두(오달수), 남자 의사와 남자 운전수, 그리고 상현까지 공교롭게도 모두가 남자다. 다시 말해, 행복한복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불륜과 살인의 이중주는 <하녀>의 변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특히 <하녀>가 이질적 요소의 대립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박쥐>에서 보이는 무국적성의 핏줄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어느 인터뷰(‘<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하겠다’ <씨네21> 704호)에서 자신의 영화가 갖는 무국적성과 관련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박쥐>가 사실성이나 지역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사실성과 지역성이 오히려 어떤 다른 한국영화보다 더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순수한 한국적 모습 그런 건 아닐 수 있지만 한국적인 잡스러움이랄까,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박쥐>가 보여주는 이질적 형태의 총합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때 ‘한국적’의 의미를 획득하는 건 <박쥐>라는 단일작품 자체가 아니라 <하녀>라는 직계혈통의 역사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하녀>는 1960년에 이미 외부의 것과 내부의 것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으로 당대의 사실성과 지역성을 효과적으로 압축했다. 도시로 유입된 지방 노동력, 실직한 엘리트 가장과 집안 일 돕는 여자, 한복을 입은 여주인과 서양식 복장을 갖춘 하녀 등등. 김기영 감독은 지방에서 상경한 새로운 노동계층의 대두에 따른 도시 중산층의 불안과 잠재적 공포를 이층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조화했다. <박쥐>에서 태주가 자신의 흡혈을 저지하는 뱀파이어 상현을 향해 “식구들끼리 잘 사는 집에 들어와 가지고. 너는 병균이야. 퉤!”하는 대사가 영화의 구도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듯 <하녀>가 보여주는 이질적 요소들의 대립 역시도 외부에서 온 하녀라는 병균의 침입에 따른 가정(혹은 가부장)의 혼란, 더 나아가 파국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삶이란 허무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녀>를 비롯해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를 장식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을 살펴보면 사실성의 측면에서나 지역성의 측면에서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의 혼란을 하나의 세계로 삼은 작품이 적잖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태주와 라여사(김해숙)의 관계처럼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와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행복한복집의 하얗게 페인트칠한 공간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주요한 특징이랄 수 있는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가 만났을 때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 역사의 봉합을 위한 영화적 움직임, 즉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프레시안
(200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