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과거가 없는 남자>(2002) 등으로 유명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판타지의 영역에 속한다. 당연하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되 웬만해선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적 설정으로 주제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일러 ‘블랙 코미디의 대가’라고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인데 <르 아브르>(2011)는 그런 감독의 장기가 절정에 달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마르셀 막스(앙드레 윌름스)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구두닦이로 연명하는 처지다. 벌이가 시원찮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단 둘이 생계를 이어가기에 곤란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벌어진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난민 소년 이드리사(브론딘 미구엘)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경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지병으로 쓰러지면서 막다른 벽에 부딪힌다. 하지만 위기에 처할 때면 아무 대가없이 도움을 주는 이웃이 함께 하기에 막스는 모종의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삭막한 현실(<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죽어라 일해도 변화시킬 수 없는 노동자의 처절하고 비참한 삶(<성냥공장 소녀>(1989)) 등 화려한 자본주의 사회 뒤쪽의 어둡게 드리운 진실을 폭로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르 아브르>에서 고발하는 현실 역시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현재 유럽의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아프리카 난민 문제가 그것. 다만 문제의식은 여전하되 이를 비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해결하는 결말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변화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난민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공권력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도록 소년 한 명을 위해 마을 사람이 총동원되는 극 중 상황은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종의 허구인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은 만인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에 속한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쏘냐. 아키 카우리스마키 왈, 법을 어겨서라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척박한 세상 최소한이나마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말한다. 어떻게?
<르 아브르>가 궁극에 내세우는 바는 가진 자들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못가진 자들끼리의 ‘연대’다. 태평한 성직자들 마냥 예배당에 앉아 “신의 가호를”과 같은 기도나 읊어댈 때가 아니다. (성직자들의 설교가 등장하면 감독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가차 없이 뚝 편집해 버린다!) 그럴 시간 있으면 일단 ‘닥치고’, 자유와 식량을 찾아 목숨 걸고 바다 건넌 난민 한 명이라도 더 보살피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 괴물 되지 않고 사람으로 사는 도리다. 지금처럼 가진 자의 폭거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못 가진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방법밖에는 없다. 일명 ‘이드리사 난민 구하기’를 시침 뚝 떼고 밀어붙이는 영화의 결말 앞에서 웃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한 편으로는 숙연해지는 이유다.
혹자는 현실을 매정할 만큼 쌀쌀하게 묘사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연출력을 두고 차갑다고 말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합당한 평가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전제하고 있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이민자에 적대적인 유럽사회를 비판하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르 아브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품고 있는 사람다움이 비등점에 달한 영화인 것이다.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