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Fahrenheit 4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씨 451>은 Sci-Fi 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2012년 6월 6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제목이기도 한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크레딧은 여느 작품처럼 관객이 읽을 수 있도록 자막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화씨 451>은 사람들이 비판정신을 갖지 못하도록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태그(오스카 워너)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fireman)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세상에 대한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웃 여인 클라리세(줄리 크리스티)를 만나면서부터 꼭두각시 같은 삶에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삶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 그때부터 몬태그의 생각과 행동은 극적인 변화를 맞지만 동료 방화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트뤼포는 <화씨451>을 유니버설 제작으로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었지만 스튜디오 시스템 전통 바깥에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1961)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1965) 로제 바딤의 <바바렐라>(1967),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1968)와 같은 Sci-Fi처럼 미래사회에 대한 현란한 볼거리의 설정은 최소화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다 부각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때문에 원작자 브래드버리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작품이었어요. 응당 따라야 할 원작의 줄거리도 지키지 않았죠. 몇몇 중요한 캐릭터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하지만 엔딩은 정말 멋있었어요.”라며 동명영화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화씨 451>에 대해서 트뤼포의 걸작은 아닐지언정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 후세에 전달하는 일명 ‘북 피블’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비추는 영화의 결말은 원작이 품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화씨 451>은 비록 책이 금지된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는 획일화된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가깝다. (동성애의 억압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전까지 흑백 필름으로만 작업했던 트뤼포가 첫 번째 컬러영화로 <화씨 451>을 선택한 건 획일화를 반대하고 다양성의 가치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촬영은 <쳐다보지 마라> <지구로 떨어진 사나이>를 연출한 니콜라스 뢰그가 맡았다.) 하여 미장센은 물질과 자연의 철저한 대비 속에서 이뤄진다. 방화수의 유니폼, 비슷한 모양의 집 등과 같은 물질문명의 반대편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대표되는 정신문명의 회복을 역설하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현실은 <화씨 451>이 묘사하는 사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 때문일까, 브래드버리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화씨 451>은 프랭크 다라본트(<쇼생크 탈출><미스트>)에 의해 리메이크가 추진 중에 있다. (몬태그 역에는 톰 행크스가 물망에 올랐다.) 그에 비해 트뤼포의 <화씨 451>은 오래된 과거의 작품이지만 다소 촌스럽게 보이는 화면과 달리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 메시지 덕분에 지금에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지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오르페브르의 부두>(Quai des Orphevr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반(反)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논쟁에 휩싸여 상영금지 당했던 <까마귀>(1943) 이후 영화를 찍지 못하다가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조르주 심농과 함께 벨기에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 S.A.스티만(Stanislas-André Steeman)의 <정당방위 Légitime défense>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각색의 과정이 독특하다.

클루조는 활동을 중단했던 4년 동안 새로운 스타일로 무장한 스티만의 소설을 각색하기를 즐겼는데 (이미 그 전에도 <21번가의 살인자 L’assassin habite… au 21>(1942)와 같은 스티만 원작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정당방위>를 영화를 만들어 싶어 시나리오 작업을 하려다가 절판된 사실을 알고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장 페리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소설책을 어렵게 구해 읽어본 뒤 시나리오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원작과 비교해 살인범의 정체가 달라졌고 레즈비언 사진가 도라 모니어의 캐릭터 또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니(수지 들레어)는 스타가 되고 싶어 안달 난 뮤직홀 소속의 가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외모도 뛰어난 탓에 접근하는 남자가 많지만 피아노 연주자 모리스(버나드 브리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유부녀다. 그녀에게 호색한이지만 돈 많은 노인이 접근해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하고 제니는 이에 응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남편 모리스의 질투심은 극에 달하고 욱하는 심정에 노인의 저택을 급습하게 된다. 하지만 노인이 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모리스는 놀란 가슴을 쥐어 잡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 후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만 한다. 형사 안토니(루이스 주베)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모든 정황이 모리스의 범죄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영화잡지 <포지티브>는 1995년 영화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영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가장 뛰어난 스릴러 영화 2위에 올려놓았다. <공포의 보수>(1953) <디아볼리끄>(1955) 위주로 클루조의 작품을 생각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다소 의외의 결과처럼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촘촘한 미스터리 그물망을 만들어내는 연출력은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발군이다. 클루조 영화의 모든 사건이 항상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오르페브르의 부두>도 남녀 관계의 의심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파멸 직전까지 내몰리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관객에게 사건 추리의 핵심이 되는 모든 패들을 공개하지만 극 중 인물들은 상대방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제니와 모리스, 모리스와 형사 안토니의 사이를 비롯해 극 중 인물 서로가 의심을 공(ball) 삼은 핑퐁게임을 벌이는 데 여기서 중요한 건 피의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숨기고, 형사의 입장에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승부의 면모가 아니라 의심의 관계 속에 오고가는 진짜 감정의 정체에 있다.

이 부분이 <오르페브르의 부두>의 핵심이랄 수 있을 텐데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은 놀랍게도 비극의 형태로 영화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니와 모리스가 피의자의 혐의를 벗고, 또한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면서 사랑을 재확인하는, 클루조의 영화치고는 드물게 해피엔딩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스릴러물로 분류되지만 이를 감싸고 있는 더 큰 구조는 멜로에 가깝다. 뮤직홀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 역시도 어두움 일색이라기보다는 극 중간중간 노래와 춤이 삽입되면서 스릴러를 완충하는 무대극 위주의 아기자기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포지티브>는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2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평했다. ‘감정의 극단을 오가면서도 은근하게 드러내는 솜씨가 극작가처럼 발군이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가장 뛰어난 연출력이 발휘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영화의 황금기 1930-1960
(2011.10.12~11.13)

<디아볼리끄>(Les Diaboliqu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아볼리끄>의 영화화 판권을 두고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피에르 부왈로와 토마스 나르세작의 <악마 같은 여자 Celle qui n’était plus>판권 확보를 위해 두 감독이 모두 달라붙었다가 히치콕에 몇 시간 앞서 클루조 감독이 극적으로 구입한 것. 이를 놓친 히치콕의 격노는 대단했는데, (이 때문에 부왈로와 나르세작은 히치콕을 위해 특별히 <죽음의 입구 D’Entre les Morts>를 집필했고 후에 <현기증>(1958)으로 영화화됐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로 생각한 감독이 앙리 조르주 클루조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심정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후에 제레미아 체칙 감독이 샤론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를 기용해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디아볼리끄>는 1명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여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빗나간 사랑의 정략에 대한 영화다. 기숙사 학교 교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셸 들라살은 인정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인물이다. 학생들에게는 싸구려 음식을 먹여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무엇보다 부인 크리스티나와 정부 니콜에게 서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기도 하다. 이에 격분한 크리스티나와 니콜은 공모 하에 미셸을 살해하려 한다. 니콜은 위스키에 독약을 타고 크리스티나는 남편을 외딴 방에 불려들어 일을 꾸미는 것. 하지만 그 후로 미셸의 양복이 배달되고 그를 봤다는 목격담이 전달되면서 크리스티나와 니콜은 공포에 휩싸인다.  

클루조와 히치콕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온도 차에 있다. 히치콕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감성으로 스릴러를 운용함으로써 따뜻한 감성을 발하는 것에 반해 <디아볼리끄>의 클루조는 사랑을 소재 삼아도 남녀 사이에 권력 관계를 형성해놓고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 약자의 위치를 점한 인물을 메몰 차리만치 몰아붙이는 것이다. 안 그래도 클루조의 영화 속에서 불운한 최후를 맞는 인물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고향으로 갈 날을 학수고대하는 트럭 노동자(<공포의 보수>)이거나 남편에게 대접 못 받아, 천성적으로 심장은 약해, 가까운 인물에게 이용당하는 여자(<디아볼리끄>)처럼 약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클루조의 미스터리는 종종 호러의 관점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디아볼리끄>에서 관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네모 상자는 미셸을 물속에 처넣어 익사시키는 욕조로, 시체를 숨기기 위한 옷상자로, 실제 관으로 형태를 달리하며 극중 중요한 도구의 콘셉트를 이루는 것은 물론 극한 상황에 처한 여자, 그중 크리스티나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대리하기도 한다. 그것은 미셸로 상징되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해 살해를 실제로 옮기는 행위의 과감함, 하지만 그 자신의 행위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더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크리스티나의 처지, 즉 남성에 의해 삶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여성의 공포가 담겨 있는 것이다.

클루조의 메마르고 음산하며 한기가 서려 있는 <디아볼리끄>를 감상한 히치콕은 이를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사이코>(1960) 완성 후에는 그의 영화가 훨씬 뛰어나다며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원작소설 <사이코>의 저자 로버트 블록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호러영화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끄>를 꼽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

<일루셔니스트>(The Illusionis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솔직히 <일루셔니스트>를 많은 사람들이 볼 것 같지 않다. 한국 관객에겐 낯선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실뱅 쇼메의 작품, 지금은 거의 사라진 슬랩 스틱 연기를 구사하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 자크 타티를 모델로 한 주인공, 첨단의 3D가 아닌 고전적 2D 애니메이션이라니. 게다가 극중 주인공 타티쉐프의 직업은 록 스타와 텔레비전의 유행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마법사다. 여러 모에서 현대 영화의 리듬과 역행하는 <일루셔니스트>에는 ‘순수’에 대한 향수의 정서가 충만하다. <윌로씨의 휴가>(1953) <나의 삼촌>(1958) <플레이 타임>(1967) 등 자크 타티의 영화는 날로 고도화되는 사회를 풍자하면서도 한줌의 순수를 긍정하는 낭만이 풍만했다. 살아 생전 자크 타티가 딸에게 남긴 편지를 시나리오로 한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영화적 유산을 가감없이 계승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사보다 이미지로,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다만 CG로 대변되는 규모의 스텍타클에 익숙한 현대의 관객들이 <일루셔니스트>가 그려내는 고전적 가치의 마법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Q
2011년 7월호
 

<코파카바나>(Copacabana)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크 피투시 감독의 <코파카바나>(2010)에는 제목과 달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휴양지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삼바 음악을 즐겨 듣고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코파카바나 해변을 꿈꾸는 중년의 여인이 등장한다.

바부(이자벨 위페르)는 한가롭게 쇼핑을 즐기고 술을 마시다 흥겨운 음악만 들리면 자연스럽게 몸을 흔드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다만 그녀의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는 그런 엄마가 맘에 들지 않는다. 쉽게 남자를 갈아 치우고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한 데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바부가 철없어 보이는 것이다. 마침 결혼을 결심한 에스메랄다는 오랜만에 엄마와 속 깊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바부가 못 마땅해 하자 폭발하고야 만다. 급기야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화를 내고 모녀 관계는 그렇게 서먹해진다.

바부는 여자로서 매력이 넘치지만 엄마로서는 별로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의 가족 배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친해지지만 조금이라도 지내본 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유분방한 여자가 아니라 자식에게 헌신하는 엄마가 되어 에스메랄다에게 좀 더 충실할 것을 바란다. 물리적 나이가 아닌 심리적 어른으로서의 성장, <코파카바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두 모녀의 화해를 통해 바부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과정이 흥미로운 건 마크 피투시 감독이 바부의 고유한 성격을 구태여 교정하려 않는 데 있다. 오히려 인정하는 태도를 기저에 깔고 두 모녀가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해피엔딩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떠나는 곳은 바로 코파카바나, 가 아니라 벨기에의 오스탕드. 코파카바나와 달리 생기 없는 해변 도시이지만 바부는 새로운 직장을 얻어 콘도 이용권을 팔면서 딸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어 보려 노력한다. 다행히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직장에서의 일도 잘 풀리고 새로운 남자 친구도 사귀지만 그녀의 성격 상 끝까지 버텨내기는 요원하다. 그로 인해 바부는 좌절하는가? 그렇지 않다. 늘 그렇듯 별 일이냐며 툭 털어내지만 대신 관계에서의 성숙을 이뤄내는 데는 성공한다. 짧은 동안이지만 자신과는 성격도, 세계관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계의 어긋남이 발생했을 때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대신 우회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운 성격 탓에 주변과 불화하기 일쑤지만 맘에 담아두지 않는 그녀의 삶의 태도는 편견과 오해가 빈번한 이 세계에서 종종 마법을 일으켜 뜻하지 않는 행복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렇게 딸과의 화해에 이르면서 꿈꾸던 코파카바나를 향하게 되는데, 마크 피투시 감독은 바부가 그 전에 마음 속 코파카바나, 그러니까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 속에서 안식을 얻는 과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목이 <코파카바나>이면서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 역설의 영화가 가능했던 이유다.

그리고 또 하나. 천진난만한 엉뚱함 속에서 삶의 철학을 길어 올릴 수 있게끔 노련한 연기를 펼친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의 세계 그 자체다. 심지어 <코파카바나>에서는 실제 친딸 롤리타 샤마와 모녀 연기를 펼치며 극과 현실의 경계를 무화하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가벼운 코미디로 치부하기에 <코파카바나>가 보여주는 삶의 신비는 단순한 웃음 이상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NEXT plus
38호

<지옥>(L’Enfer)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옥>은 원래 앙리 조르주 클루조(<디아볼릭><공포의 보수>)의 프로젝트이었다. 클루조 경력 상 가장 큰 야심이 집약됐던 작품인 만큼 그가 가진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예컨대, 의처증 남편에게 지독한 의심을 받는 부인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색색의 조명들을 그녀의 얼굴에 쏘는가 하면, 남편의 비뚤어진 정신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수십 개의 거울 이미지를 활용하는 등 주로 실험적인 연출을 통한 미스터리를 선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옥>은 클루조 경력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남편 마르셀 역의 세르주 레지아니가 촬영과 동시에 병에 걸려 자크 갬블링으로 대체됐고 부인 오데트 역의 로미 슈나이더를 못미더워했던 제작사는 베레니체 베조로 일방적인 교체를 감행했다. 이에 따른 압박감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클루조 감독은 그만 심장 발작 증세를 보여 결국 영화는 중단되고야 말았다. (이 과정을 담은 메이킹 다큐멘터리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 2009년 공개됐다.)

클로드 샤브롤이 <지옥> 프로젝트를 넘겨받은 건 그로부터 28년 뒤인 1992년이었다. 클루조의 미망인으로부터 시나리오 저작권을 양도받은 샤브롤은 이야기의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리조트 구입을 위해 차용한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폴(프랑스와 클루제, 원작의 마르셀)이 부인 넬리(엠마뉴엘 베아르, 원작의 오데트)가 바람을 핀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신병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큰 맥락은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대신 디테일한 부분에서 자신이 즐겨했던 집 안을 벗어나지 않는 스케일의 이야기로 꾸미는데 주력했다.

<지옥>은 클루조와 샤브롤 버전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클루조가 꽉 짜인 게임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계산적인 미스터리를 선보이는 것에 반해 샤브롤의 경우, 영화적인 느낌은 철저히 배제한 채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느껴진다. 샤브롤이 클루조의 중단된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인 것도 클루조의 영화치고는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탓이 크다.

클루조의 영화는 대개가 영화적인 유희를 위해 현실을 포기하는 편이었다. (<디아볼릭>의 숨진 남편이 마지막 장면에 살아 돌아오는 장면을 상기해보라!) 샤브롤이 아무리 히치콕의 영향력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클루조는 히치콕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구현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영화적인 표현보다 실제에 바탕을 둔 현실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히치콕에 비해서, 또 클루조에 비해서 원작을 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샤브롤의 영화는 갑작스런 사건이 서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부에 상존하고 있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구체화를 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계급의 문제일수도 있고(<미남 세르쥬><의식>), 남녀 간의 사랑을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일수도 있으며(<도살자><초콜릿 고마워>), 역사가 가족사에 남긴 상흔의 흔적일 수도 있다(<여자 이야기><악의 꽃>). <지옥>은 강박증에 따른 이상심리의 비극이라 할만하다. 폴의 의처증은 실제로 넬리가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 아니라 리조트 구입 당시부터 안고 있던 빚 문제가 부인에 대한 의심으로 드러난 경우이었다.

샤브롤은 늘 이성이 작동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늘 중산층 혹은 부르주아 계급을 즐겨 배경 삼은 이유는 최소한 이들이 인간이라는 가식을 내세울 만큼 삶의 조건을 갖춘 까닭이었다. 다만 샤브롤이 인지하는 인간의 이성이란 불완전한 형태로써, 도덕 혹은 윤리의 수면위로 흘러넘칠 듯한 지나친 욕구와 본능을 가리기 위한 (‘제어’가 아니다.)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성의 둑이 터졌을 때 펼쳐지는 상황이 바로 그가 주목한 소재요, 다루는 주제이었다. 하늘에 있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샤브롤 버전의 <지옥>을 맘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샤브롤 자신이 관심 가질법한 소재를 충실하게 영화로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샤브롤의 영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

<초콜릿 고마워>(Merci pour le chocola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가 시작되면 일군의 사람들이 미카(이자벨 위페르)와 폴론스키(자크 뒤트롱)의 결혼에 대해 숱한 의심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럴만한 것이, 첫 번째 결혼 실패 이후 이들은 동일한 상대방과 다시 한 번 결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두 번째 결혼까지 시간 간격이 무려 18년에 이른다. 그러니, 미카와 폴론스키의 재결합에 대한 무수한 말들은 의심의 실타래를 만들어 이렇게 따져 묻는 듯하다. ‘너희들의 관계가 순수하다고?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야?’

미카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유명 초콜릿 회사 사장이다. 그녀는 18년 전 짧게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 피아니스트 폴론스키와 재결합한다. 그동안 폴론스키에게는 아들 기욤(로돌프 파울리)이 생겼는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은 모습이다. 한편 피아노에 재능을 보이는 잔느(아나 무글라리스)는 태어나던 날 산부인과에서 폴론스키의 아들과 뒤바뀔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흥미를 느낀다. 그 길로 폴론스키를 방문하는 것이다.

<초콜릿 고마워>는 ‘의심의 미스터리’라 부를 만하다. 극중 인물들 모두에게는 의문으로 남은 상실된 가족사가 존재한다. 폴론스키는 기욤의 생모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여전히 그 진상을 모르고, 기욤은 자신이 진짜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며, 잔느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폴론스키에게서 찾으려 애쓴다. 현실이 더욱 중요한 이들에게 가족의 비밀은 그냥 묻어둘만한 일이다. 헌데 미카는 그렇지가 않다. 겉으론 태연한 척 속으론 폴론스키와의 사이에 끼어든 잔느가 못마땅하고 거치적거리는 기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진다.

웬만하면 의문의 사연을 미스터리 구조 삼아 충격적인 가족사의 기원을 파고들 법도 한데 샤브롤은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탈골된 가족사로 빚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문 의심이 어떻게 가족 관계의 해체로 발전하는지에 주목한다. 더 정확히는 잘 나가는 기업 사장에, 유명 피아니스트 남편과 이룬 가정 등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미카가 유별난 ‘의심’ 때문에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따라간다.

<초콜릿 고마워>는 미국의 범죄소설가 샬롯 암스트롱의 <초콜릿 거미집 The Chocolate Cobweb>을 영화화했다. 샤브롤은 원작소설의 ‘거미집’을 제목에서 빼버리는 대신 극중 미카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상징물로 그물모양의 ‘나이트캡’을 활용한다. (이 영화의 영제는 다름 아닌 <Nightcap>이다!) 예컨대, 미카가 소파에 앉아 조용히 나이트캡을 짜고 있을 때면 세상 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족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해 머릿속으로 온갖 음모들을 짜내고 있을 때다. 하여 그 모습은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거미집을 짜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샤브롤은 <초코릿 고마워>에서 주변 도구를 활용한 심리 묘사에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트캡은 물론이고, 이 영화가 주요하게 다루는 초콜릿 또한 그저 달콤한 먹을거리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외적 배경을 갖춰 단단해 보이는 미카가 실은 내부에서 발열하는 의심으로 녹아내리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샤브롤이 묘사하는 초콜릿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초콜릿 고마워>의 미스터리의 경지는 심리로 완성한 액션물에 맞닿아있다. 성룡이 주변 도구들을 적극 활용해 액션의 동선을 짜는 것처럼 샤브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심리가 충돌하고 합을 겨루는 미스터리의 액션을 만들어낸다. 이를 보고 있으면 <초콜릿 고마워>가 아니라 ‘샤브롤 고마워’를 외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

<마스크>(Masqu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은 쇼다.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는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최소한 클로드 샤브롤의 생각은 그렇다. TV쇼 사회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브라운관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그의 경악할만한 가정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마스크>(1987)만 봐도 알 수 있다.

범죄소설가로 활동하는 롤랑(로빈 르누치)은 어쩐 일인지, TV쇼 사회자 크리스티앙(필립 느와레)의 전기를 써보려고 한다. 이에 크리스티앙은 흔쾌히 응하며 자신의 별장으로 롤랑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롤랑이 관심을 갖는 인물은 크리스티앙의 양녀인 카트린(안느 브로쉐)이다. 실내에서도 벗을 줄 모르는 선글라스와 그에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는 뭔가 비밀을 감춘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과연, 롤랑은 그녀 주변에서 감지되는 이상한 행동을 단서삼아 크리스티앙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추적해 들어간다.

크리스티앙은 롤랑과의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한다. “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야.” 다시 말해, ‘본능적’으로 행동한다는 크리스티앙의 대사는 뒤를 캐는 롤랑을 향한 선전포고이자 은연중에 속마음을 내비친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노인들을 상대로 한 TV쇼에서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로 비칠지언정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는 것에 <마스크>의 진면목이 담겨 있다.

사실 샤브롤의 모든 영화는 이성이라는 ‘마스크’에 가려진 본능의 실체에 대한 폭로다. 그의 작품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이란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본능을 가리기 위할 때 필요한 긴급 처방에 불과하다. 특히 가족이란 울타리는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지라 폐쇄성을 띠는 까닭에 허울뿐인 인간의 이성을 드러내기에 좋은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가 연출 후반기로 갈수록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집중하며 추악한 본능을 폭로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마스크>는 그런 샤브롤 후기 연출작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경우라 할 만한데 무엇보다 크리스티앙이 가족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허위의식이 텔레비전의 속성과 닮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은 클로드 샤브롤의 현실의식이 얼마나 첨예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다. 극중 크리스티앙처럼 미디어를 적극 끌어들여 자신을 유리하게 이미지화한 뒤 이면에서 나쁜 욕망을 드러내는 경우는 현대영화의 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하지만 <마스크>가 발표된 당시를 상기해본다면, 이 같은 설정이 얼마나 획기적이었는지는 이 작품이 최근 영화들에 미친 영향으로 증명된다. 예컨대,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2010)에서 <마스크>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고립된 장소에서 전기를 쓰는 작가가 해당 인물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더군다나 <유령작가>가 원작소설을 취하고 있지만) 작가를 실체 없는 존재로 그리기 위해 미로 같은 집안의 구조와 사소한 행위를 미스터리 삼는다는 점에서 두 영화가 닮아있는 것이다.

다만 <유령작가>가 검은 세계의 풍경에 대한 영화라면 <마스크>는 일그러진 가족의 초상에 대한 영화다. 크리스티앙 역의 필립 느와레 얼굴이 이를 대표하는 오브제라 할 만한데 후에 <시네마천국>(1988)을 통해 인심 넉넉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을 생각하면 <마스크>는 시대를 더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영화라 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

<사촌들>(Les Cousin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샤브롤의 미스터리는 당시로써 생소한 것이었다. 대개 상황의 급전환을 통한 심리 변화로 눈에 띄는 미스터리를 형성한 것에 반해 데뷔작 <미남 세르쥬>(1958)는 의식의 서서한 흐름에 이야기를 맡겨 미묘한 분위기로 미스터리를 구축한 까닭이다. 그래서 <미남 세르쥬>는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 흥행에 큰 재미를 못 보았지만 두 번째 작품 <사촌들>(1959)에 이르러서야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샤를르(제라드 블라인)는 법률 시험을 치르기 위해 파리로 상경, 사촌 폴(장 클로드 브리알리)의 집에 머물며 시험에 대비한다. 모범적인 샤를르와 달리 폴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까닭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대신 자유분방한 파리의 환경과 적극적인 폴의 성격에 매료되지만 여인 플로랑스(줄리엣 마뉴엘)를 두고 둘의 사이가 어그러지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사촌들>은 피를 나누었지만 서로 다른 행동 양식과 심리를 보여주는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 대비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 모든 시작은 샤를르의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된다. 지방 출신인 그가 파리를 느끼며 즐기는 감정은 모두 파리지엔인 폴에게로 감정 이입이 된다. 그로인해 법학도로 대표되는 샤를르의 이성은 점차 플로랑스를 향한 애정의 본능에게로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후에 시험에 실패한 그의 모습은 비극의 전초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관계도 이성이 버팀목이 되어줄 때 유지되는 법이지만 정신이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앞서게 되면 그 상황은 결국 러시안 룰렛 게임이나 진배없다는 것이 샤브롤의 입장이다.

<사촌들>이 인물의 설정에서부터 상황 묘사까지 대비를 주요한 표현 양식으로 삼는 것은 이와 같은 감독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사실 <사촌들>이 개봉한 당시의 프랑스, 특히나 파리 는 전통에서 혁신으로, 구세대에서 신세대로의 도도한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 무수한 문화 충돌로 들끓는 시기였다. 극중 샤를리와 폴이 처한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흑과 백이 서로 공존하기보다는 그 성격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튀어나오다보니 서로 충돌하고 부딪혀 회색빛 풍경이 된다는 것을 <사촌들>은 보여준다. 

이는 샤브롤이 히치콕의 영화를 추종하지만 히치콕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를 만든다는 결정적 대목이라 할만하다. (극중 서점에 들어간 샤를르가 샤브롤과 로메르가 공저한 연구서 <히치콕>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히치콕의 미스터리는 늘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현실에서 맞보기 힘든 따뜻한 유희를 선보였다. 샤브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샤브롤의 작품에서 관계를 이룬 남녀라도 반드시 깨지기 마련이었다. 또한 <사촌들>에서처럼 (후기 연출작에서 더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가족일지라도 비밀의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어코 풍비박산까지 밀어붙이고야 말았다.

그것이 샤브롤의 비관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에서 목격한 부조리한 상황들을 접목해 미스터리를 삼는 것이 샤브롤의 장기였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이 자신의 예술관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샤브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면 외부 조건 따위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데뷔작 <미남 세르쥬>에서부터 <벨라미>(2009)를 유작으로 남길 때까지 50편, 그러니까 매년 한 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 때문에 샤브롤은 누벨바그 내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작가였다.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

페리 라세즈 무덤은 특별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리의 가볼만한 곳으로 페리 라세즈 무덤(Cimetiere du Pere Lachaise)을 추천해놓은 가이드북을 보면서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며 코웃음 쳤더랬다. 무덤에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추천씩이나, 뇌까리면서 말이다. 근데 웬걸, 파리 도심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소개하기를 파리를 대표하는 무덤이란다. 그렇다면 파리지엔들에게 무덤은 혐오시설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란다. 그들에게 무덤은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란다. 이거 참, 명절 때 산소 아니면 무덤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설명이다. 어쩔 수 있나, 한 번 방문해볼 수밖에.

세상에나! 입구에서부터 사람이 북적인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페리 라세즈 무덤이 파리의 관광 명소인 것인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정말 오기를 잘했어. 음화하하하.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손에 사진 아니면 CD를 가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도어즈’ CD와 ‘짐 모리슨’ 사진이다. 그들에게 듣자하니 1960년대 후반 전 세계 음악 팬들을 매료시켰던 록그룹 도어즈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의 묘지가 이곳에 있단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음악도 추억할 겸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들의 얘기였다.

실제로 페리 라세즈를 찾는 방문객의 대다수는 짐 모리슨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지난 2001년 프랑스 관광청은 여행자를 대상으로 짐 모리슨 묘지를 찾는 방문객의 수를 계산해보았다고 한다. ‘럴수럴수 이럴 수가!’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베르사이유 궁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수치를 기록했단다. 매년 200만 명 이상의 다녀간다고 하니 여느 관광명소가 부럽지 않은 수치다. 페리 라세즈를 설명하면서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언급하지 않는 건 추리소설을 말하면서 셜록 홈즈를 빼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페리 라세즈가 짐 모리슨 때문에 먹고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짐 모리슨의 묘지 앞에만 유독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지고 온 사진과 CD, 팬레터와 꽃 등을 비석 앞에 경건히 놓으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뒤에 도열한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어즈의 히트곡 <Light My Fire> <Riders on the Storm> 등을 속삭이듯 부르기도 한다. 국적과 나이도 다양해서 미국에서 왔다는 후덕한 아줌마, 칠레에서 온 섹시한 소녀, 일본의 인형 같은 여인까지. 아, 참! 한국에서 온 꾀죄죄한 나도 있지. 그나저나 내게는 참 별난 광경이다. 이를 두고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걸까.

페리 라세즈 뿐만이 아니다. 몽마르트 묘지(Cimetiere de Montmartre)에도 그렇게 사람이 몰릴 수가 없다. 프랑스의 지성으로 불리는 대문호 에밀 졸라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와 이야기하기 위해, 세기의 배우 이브 몽탕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몽마르트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관념이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 끊임없이 산 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산 자는 듣지 못하지만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우리는 삶처럼 죽음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무덤을 산책로 삼아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또는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본다는 건 파리에서 만큼은 결코 낯선 광경이 아니다. 파리의 무덤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전혀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나 역시 짐 모리슨 팬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함께 <Light My Fire> <Riders on the Storm>를 맘껏 불러 젖혔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무덤에서는 그렇게 돼지 멱따는 소리로 크게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나. 아무튼 파리의 무덤은, 페리 라세즈는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대자동차 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