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데이즈>(The Next Thre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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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의 <쓰리 데이즈>(2010)는 대학교수 존(러셀 크로우)이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린 아내 라라(엘리자베스 뱅크스)를 교도소에서 구출해 미국을 탈출하는 영화다. 일종의 탈옥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쓰리 데이즈>는 교도소 탈옥 이상의 의미를 숨겨놓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폴 해기스는 전작을 통해 지옥과도 같은 미국의 현실을 폭로하기를 즐겼다. <크래쉬>(2004)에서는 해결 방안이 전무한 LA의 인종간의 충돌을 다뤘고 <엘라의 계곡>(2007)에서는 이라크전을 끌어와 미국적 선(善)의 가치에 붕괴에 따른 절망을 묘사했다. 그리고 <쓰리 데이즈>에 이르러 더 이상 미국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선고한다. 진범이 아닌 라라를 살인범으로 구속해 복역시킨 것만 봐도 미국 경찰력의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시민들은 조국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폴 해기스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국 탈출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속국처럼 거느리는 베네수엘라 같은 곳이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는 폴 해기스에게 이제 더 이상 미국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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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1월호

<엘라의 계곡>(In the Valley of 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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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 감독의 <엘라의 계곡>은 2~3년 전부터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이라크전(戰) 관련 영화들 가운데 완성도 면에서나 메시지 면에서 가장 독보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다만 2007년 미국 개봉 당시 관객의 철저한 외면 속에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국내 개봉 또한 2년 뒤인 올해 십여 개 정도의 상영관에서 단출하게 이뤄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엘라의 계곡>이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퇴역군인 행크(토미 리 존스)는 이라크에서 막 돌아온 둘째 아들의 탈영 소식을 듣는다. 그 길로 아들의 부대를 찾는 행크는 곧이어 아들의 죽음 소식까지 접하게 된다.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된 것. 사건 당일 아들이 마약을 찾아다녔다는 주변의 증언이 잇따르자 행크는 그럴 리 없다며 스스로 사건을 수사하기에 이른다. 우연히 아들의 휴대폰을 손에 넣은 행크는 누군가에게 동영상 복원을 부탁한다. 거기에는 아들을 포함해 미군이 이라크에서 행했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엘라의 계곡>은 반전(反戰)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더 정확히는 미국적 선(善)의 가치의 붕괴에 따른 망연자실함과 절망을 다룬다. 미국이 자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이라크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겠다고, 종국엔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며 벌인 전쟁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는가. 이 영화는 행크가 아들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로 진행되지만 한편으론 미군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를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과 맞붙은 다윗의 처지에 비유한다. 성서에는 작은 체구로 거한을 이겨낸 영웅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했을 때 느낀 공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의문을 갖고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이라크에 파병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맞닥뜨린 공포로 인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괴물이다. 적의 심장에 총구를 겨눠야 그 순간만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 제 정신을 견지할 사람은 없다. 이 같은 이야기는 마이클 치미노가 <디어 헌터>(1978)에서 일찍이 다룬 적이 있다. 베트남에 참전한 젊은이들이 고문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은 주제 면에서 <엘라의 계곡>과 정확히 조응한다. 대신 <디어 헌터>가 전쟁의 참혹함을 사슴 사냥과 러시안 룰렛이라는 상징적인 게임으로 은유했다면 <엘라의 계곡>은 UCC와 유튜브 시대에 걸맞게 핸드폰 동영상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으로 제시한다.

<엘라의 계곡>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이 괴물이 되게끔 만든 것이 누구인지, 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것이 누구인지 영화는 이를 더욱 중요시 다룬다.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까지 담당한 폴 해기스(<아버지의 깃발> <007 카지노 로얄> 등에서 각본을 쓰기도 했다.)가 <엘라의 계곡>의 주인공으로 ‘아버지’ 행크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행크는 첫째 아들이 걸프전에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부인의 반대를 뿌리치면서까지 둘째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인물로 소개된다. 행크 자신이 베트남에 참전했던 군인출신인데 그는 여전히 ‘미국은 선’이라는 가치를 믿는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죽음에도 신념에 변함이 없던 그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전쟁의 진실을 깨닫는다. 전쟁은 선을 수호하기 위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냥 ‘악’일뿐이라는 것을

행크의 마음 속 변화는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엘라의 계곡>의 답변은 단호하다. 아버지 세대는 모두 죽었다(dead)고 말한다. (둘째 아들이 죽기 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디(daddy)가 아니라 대드(dad)라고 적혀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참혹한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크는 마을의 성조기를 거꾸로 건다. 위기 상황에 빠진 미국이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행동이다. (거꾸로 매달린 국기는 ‘긴급구조’를 의미한다.)

대신 영화는 자식 세대에게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의 유산을 남겨주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영화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자막이 뜬다!) <엘라의 계곡>은 직접적으로 이라크전을 겨냥하지만 죽은 아들의 짧은 동영상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이야기는 대부분 미국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엘라의 계곡>은 미국 그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고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폴 해기스의 바람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을 옹호하고 전쟁의 참혹함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엘라의 계곡> 같은 영화가 극장가에서 된서리를 맞은 건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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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12.21)

<크래쉬>(Crash)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뒤집기 한판 쎄려불고 작품상을 꿀꺽한 <크래쉬>. 더군다나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각본을 쓴 폴 해기스. 게다가 스타가 한두 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너 명도 아닌 무려 한 세트로 출연하고 있어 더욱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여기서 본 우원의 급질문 하나.


당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으니까 당연히 훌륭한 영화일까?


이에 대해 본 우원은 이렇게 답하고 싶다. 아카데미 기준으로는 훌륭할지 모르나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도 유효한 건 아니라고.



1.

<크래쉬>는 제목처럼 ‘충돌’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는 자동차 충돌로 문을 연다. 그렇다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처럼 자동차 충돌에 오르가자미를 느끼는 변태 성욕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대가 되는 곳은 인종의 도떼기시장으로 불리는 LA. 당 영화는 이곳에서 발생한 자동차 충돌을 계기로 바나나 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드러나는 인종 간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많은 인종들이 콩나물 시루마냥 얼키설키 엮어있는 관계로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돈 치들 분)’과 히스패닉 ‘리아(제니퍼 에스포시토 분)’가 맡은 사건이 백인 경관 ‘라이언(맷 딜런 분)’과 ‘핸슨(라이언 필립 분)’에게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흑인 PD ‘카메론(테렌스 하워드 분)’과 그의 부인 ‘크리스틴(탠디 뉴튼 분)’에게로 바통 터치되며 이를 불량 흑인 ‘앤소니(루다크리스 분)’와 ‘피터(라렌즈 테이트 분)’가 받아 백인 지방 검사 ‘리차드(브렌단 프레이저 분)’와 부인 ‘진(산드라 블록 분)’에게 넘긴 후 멕시칸 열쇠 수리공 ‘다니엘(마이클 페니 분)’과 이란인 잡화상 ‘파라드(샤운 토웁 분)’를 거쳐 다시금 그레이엄에게로 마무리되는 구조로 스토리를 꾸며간다. 헥헥.


이처럼 당 영화는 동글뱅이처럼 그레이엄으로 시작해 그레이엄으로 끝나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에는 필시 중요한 이유가 있을 터. LA에 헤쳐모여한 인종들이 자의든 타의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좋든 싫든 개나 소나 모두 연결이 되어 하나의 원, 즉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겠고,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존재하겠냐. 줄거리 썰하기 죠낸 숨 찰 정도로 각 파트별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렇게 많은 인간들의 많은 사연이 서로 부대끼고 충돌하니 인종 갈등과 같은 사회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지사. 그런 인종 충돌이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닌 한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엉킨 실타래마냥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런 구조와 형식은 반드시 필요했을 테다.  


그럼 이들은 왜 서로를 못 잡아서 먹어서 안달일까. 감독은 LA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충돌의 원인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적극적으로 짝짜꿍하지 아니하고 닭장에 닭 보듯 안방의 아버지 보듯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소극적 태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나게 한빠굴하던 중 리아가 자신을 시종일관 멕시칸이라 부르는 남친 그레이엄의 호칭에 짜증 이빠이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아빠는 푸에르토리코인이고 엄마는 베네주엘라인이라고 민감하게 되받아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뿐인가, 시종일관 이름대신 중국인으로 불리던 한 아시아인은 영화 말미에 이르면 ‘조진구’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으로 밝혀진다.


이렇게 아시아인은 몽창 중국인, 히스패닉 계는 몽조리 멕시칸으로 지칭되는 것처럼 하나의 정체성이 하나의 인종으로 도매급되는 에피소드를 제시하며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 나빌레라 빠빠이 시켜버린 LA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다.    




2.

그렇다고 감독은 그런 무관심이 우리는 좋은 편, 니네는 씨바 나쁜 편 이러코롬 편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깜둥이가 웃고 사는 꼬라지를 보기 싫어 크리스틴에게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수색을 한 라이언이 그 담날은 웬일인지 자기 목숨까지 걸고 차전복사고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는 것처럼 LA의 인종문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단! 이를 위해 감독이 내건 조건이 있다. 상대방의 위치에, 상대방의 상황에, 상대방의 조건에 적극적으로 빙의하라는 것. 그리고 이해하라는 것.


그래서 감독은 영화 속 가해자의 위치에 있던 이를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하기도 하고, 피해자의 위치에 있던 넘을 가해자의 위치에 세워놓기도 하는 등 등장인물 모두를 상반되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다.  


출세를 위해 흰둥이에게 동료 흑인을 팔아 좋은 자리를 얻으나 흰둥이의 총에 주검으로 변한 동생을 보게 되는 그레이엄, 인종차별주의자인 상관을 혐오하나 그 자신 또한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 흑인에게 총을 겨누는 핸슨, 단지 인종이 비스무리하다는 이유로 이라크인으로 오해받는 것이 죽어도 싫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가 도둑질 당하자 가게의 문을 수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열쇠공을 도둑으로 오해하는 이란인 파라드 등등.


그러니까 양자의 상황을 모두 겪게 되면 상대방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기 땜시롱 LA의 인종 충돌은 화해를 모색할 수 있다고 감독은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영화는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화해필로 이단 변신, 예정된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건 흰소리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감독 폴 해기스는 화해로 나아가는 장면을 감동 없이 볼 수 없는 한편의 시처럼, 재래식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마법과 같은 순간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다니엘 모녀의 에피소드가 압권. 홀로 집안에서 불안에 떠는 딸을 위해 다니엘은 투명 망토(?)를 입혀주는데 이 망토를 입고 뛰어든 딸 덕분에 다니엘은 파라드의 총사위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본 파라드는 다니엘의 딸을 천사로 알고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로써 자동차 충돌이라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시작된 LA의 일상은 쥔공들의 화해와 깨달음을 통해 아름다운 동화처럼 끝맺음된다.


그 결과, 당 영화 <크래쉬>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잡수시게 되었다.



3.


아닌 게 아니라 당 영화는 정말이지 고매하신 아카데미 심사우원님들께서 좋아할만한 요소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 갈등을 다룸으로써 보이는 나름의 문제의식, 이에 걸맞은 형식과 구조에서 보이는 영화적 완성도, 그리고 이를 적당한 선에서 동화적으로 보기 좋게 마무리함으로써 풍기는 낙관주의 내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미국적 이상주의의 힘.

물론 감독 폴 해기스가 이를 노리고서 정밀 눈금자마냥 그 기준에 맞춰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당 영화가 다루고 있는 현실은 판타지에 기댄 현실 즉, 딱 절반만 보여주는 LA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미국적 이상주의가 보여줬던 결과물은 얼마나 허무한가. 폴 해기스가 LA의 인종 문제를 던져놓고 화해를 취하는 방식이 순진해 보이는 건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나 정교한 구조와 형식을 통해 쥔공을 상반된 두 가지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충돌이 갈등을 부르는 한편 동시에 화해와 용서라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 속 감독의 해석.


“LA에선 그 누구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사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충돌하는 거야”


일견 그럴싸해보이지만서두 그것이 정말 LA의 현실에 비추어 가능한 일인지는 의심스럽다. 지금 미국에서는 이민족을 쫒아내기 위한 새롭고도 강력한 이민법을 두고 미국내 타인종들의 반발이 여간 커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법안이 통과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곳은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다인종 사회인 LA가 될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LA폭동 이후 15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LA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이해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적의와 무관심으로 위태롭게 사회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LA는 그렇게 쉽게 동화로, 판타지로 현실을 마무리하고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폴 해기스는 이야기에 구조와 형식을 맞추기보다는 거꾸로 구조와 형식에 이야기를 우겨넣음으로써 현실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셈이 되었다.


그 때문에 당 영화에서 볼 수 있는 LA의 현실에 대한 감독의 생각은 순진한 발상에 따른 문제제기이자 우연과 우발로 점철된 작위적 해석이고 현실을 가리는 또 하나의 이상현실로 비춰질 뿐이다. 오히려 동화적인 장면을 통해야지만 화해를 말할 수 있고 한줄기 희망을 볼 수 있을 만큼 LA가 처한 지금의 현실이 구제불능이라는 걸 당 영화는 역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그러니 얼마나 허무한가.


하지만 올 아카데미는 미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는 <시리아나>, <굿나잇 앤 굿럭>, <브로크백 마운틴>을 외면하고 당 영화 <크래쉬>에 손을 들어줬다. 자신들의 치부가 노골적으로 벗겨지는 것이 싫었나부다.


그렇게 아카데미 심사우원들은 당 영화를 통해 LA의 본모습을 보았다기보다는 지들이 보고 싶어 하고 알리고 싶어 하는 동화로써의 LA를, 판타지로써의 LA를 <크래쉬>를 통해 본 것일 뿐이다.


본 우원이 올 아카데미 작품상에 동의할 수 없고, 당 영화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2006. 4. 10.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