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존> 내부 고발자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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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존’(Green Zone). 2003년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함락한 후, 바그다드 궁전을 주이라크 미군 사령부와 이라크 임시정부청사로 개조한 안전지대를 뜻한다. 미국 침략 전 이곳은 사담 후세인의 고급 청사였던 만큼 전장의 한 가운데서도 그린존의 미국인들은 한가롭게 수영장에서의 일광욕과 칵테일파티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워싱턴 포스트의 현(現) 국내뉴스부 편집장이자 바그다드의 지국장이기도 했던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이 저술한 <Imperial Life in the Emerald City>(국내에는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출간 예정)를 통해 알려졌다. 이 책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미국의 대(對)이라크 정치학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순수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폴 그린그래스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국가 권력의 횡포와 음모를 현장에 직접 입회한 것 같은 눈으로 주요하게 다뤄왔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찬드라세카린의 책에서 설정만을 가져와 주요 인물을 새롭게 배치해 영화를 완성했다. 흔히 ‘본 시리즈’의 콤비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이 다시 한 번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린존>을 일러 ‘제이슨 본의 바그다드 외전’이라고 얘기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린존>을 온전히 소개하기에 이 비유에는 뭔가 결여된 측면이 존재한다. <그린존> 공개 후 예상 밖으로 극명히 갈리는 찬반 논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폴 그린그래스의 필모그래프는 두 가지 형태로 뚜렷이 구분된다. <블러디 선데이>(2002) <플라이트93>(2006) 같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정치영화와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과 같은 액션히어로물의 새 지평을 연 오락영화가 그것인데 <그린존>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이유로 이라크 침략을 정당화하는 미국이 실상은 현실을 조작하기 위해 제도화된 폭력을 저지르는 한편에서 WMD의 존재를 의심하는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는 내부의 시스템을 향해 교란과 전복을 꾀하려 한다.

<그린존>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듯 폴 그린그래스가 다루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진실은 이제 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부시만 여전히 아니라고 ‘땡깡’ 부리려나) <블러디 선데이> <플라이트93>처럼 짐작만 했지 사실에 근거한 실체를 접했을 때 가해지는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린존>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만을 고발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다면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로이 밀러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린존>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라기 보다 ‘로이 밀러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을 두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방점은 스릴러다. 무엇에 대한 스릴러인가. 이라크 내 WMD가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제 메커니즘에 대한 스릴러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내부 고발자다. 냉전 시대가 막을 고한 뒤 할리우드가 적을 찾지 못해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혼란에 휩싸인 슈퍼히어로물을 양산하고 있을 때 폴 그린그래스는 ‘제이슨 본’을 등장시켜 테러리즘 시대의 히어로(영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였더랬다. (그러고 보면 덕 리먼의 <본 아이덴티티>(2002)는 냉전시대와 테러리즘 사이에서 과도기적 증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슈퍼히어로물이었던 셈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감시와 조작 등으로 전 세계에 군림하려는 미국의 ‘통치’ 목적의 메커니즘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려 할리우드에 내부 고발과 내부 전복의 이야기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거대한 감시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일개 개인을 넘어 국가 하나 정도 무력화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을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제이슨 본을 통해 알려줬다. 다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본은 내부 고발자라는 자각이 없었다. (수전증에 걸린 듯 과도하게 흔들어대던 카메라는 본의 정체성 혼란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미학적 성취에 다름 아니다.) <본 얼티메이텀>의 마지막 장면, 물속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는 장면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바그다드로 간 제이슨 본’ <그린존>의 로이 밀러는 군인정신이 뚜렷한 인물로 묘사된다. 상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연달은 WMD 수색 실패에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상부의 지시와 상관없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WMD 수색 지시가 왜 이뤄졌는지 역으로 추적에 나선다. 이는 기본적으로 WMD가 애초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극중 밀러의 행동 진행 방향은, 그러니까 전복적이다. 그가 찾아나서는 건 진실이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했는가’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뻔한 진실일지 모르지만 은폐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작동 원리에 대해 정확한 바를 모른다.

‘뻔하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밀러가 감수해야할 위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WMD가 이라크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밀러의 일거수일투족은 미국 감시 체계의 손바닥 안이다. 이런 감시와 조작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 이는 굉장한 용기를, 무엇보다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제이슨 본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이를 밝혀내지만 로이 밀러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으로 나라 잃을 위기에 처한 이라크 국민을 위해 내부 고발을 단행한다는 점에서 미묘한 태도의 차이를 보인다. 갈수록 미국의 감시 체계가 미국을 괴물로 만들고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 진정 미국을,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하는 것은 무얼까. 로이 밀러처럼 미국의 치부를 드러낼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야말로 국가 권력의 횡포가 횡행하는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 <그린존>의 진정한 주제다. 

밀러는 끝내 부시 정부가 원하던 시나리오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영화는 미국 정부가 꼭두각시 인사를 이라크의 새 정부 지도자로 임명하고 자치정부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그 시간, 이라크 내 WMD에 대한 위험 여론 자체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주요 언론에 고발하는 밀러의 행동을 교차한다. 그리고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그의 결연한 얼굴을 카메라는 수 초간 응시한다. 존재하지 않는 WMD를 찾기 위해 동원된 이가 오히려 미국의 조작을 발견하자 허둥대는 부시 정부의 모습이 전달하는 바는 극명하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의 ‘포화 속의 향락’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빗대 더욱 더 많은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린존>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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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3.24)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근육질 NO! 첨단장비 NO! 게다가 응징해야 할 적은 다름 아닌 우리편! 이를 오로지 짱구 굴리기와 후다닥 원 샷 원 킬 특공무술로 무찌르며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스파이 영화계의 뉴 세숫대야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

당 영화 <본 슈프리머시>는 바로 새로운 액숑 영웅 제이슨 본의 탄생을 알렸던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이다. 전편처럼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우리의 쥔공 본이 애인과 함께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살고 있던 중 美정부의 비밀조직 트래드스톤의 계략에 빠졌다가 누명을 벗고 야금야금 기억을 되찾아간다는 스또리. 아시다시피 당 영화는 블록버스터다. 근데 전혀 다른 스타일의 블록버스터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대개의 속편들이 1탄의 이야기 골격을 유지하면서 별 고민 없이 잔머리 굴리기에 바빴던 것과 달리 당 영화는 본인의 정체를 모르는 쥔공이라는 설정만 남겨놓고, 영문도 모른 채 쫓기기만 하던 본이 2탄에 이르러 자신을 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적진(?)에 뛰어든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 영화가 중점을 두고 있는 건 비싼 돈 처발라가면서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비주얼이 아니라 본의 심리 상태를 어떤 식으로 연출하느냐 하는 것. 이를 위해 당 영화는, 1972년의 아일랜드 사태를 존나게 사실적으로 재현한 <블러디 선데이>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꿀꺽한 폴 그린그래스를 감독으로 모시고 있다.

왜와이뭐땀시롱. <블러디 선데이>에서의 현장감을 극대화한 촬영이 본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나달라 다큐필 물씬 풍기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답게 당 영화에서도 지진 현장에 떨궈놓은 거 마냥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들고찍기 촬영술을 그대로 구사하고 있다.

그로 인해 킬러와 본, 본과 트레드스톤간의 물고 물리는 상황의 긴박감이 충실하게 묘사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는 본의 정신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쾌거를 올리고 있음이다.

그러다보니 시종일관 궁디 들썩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치며 더군다나 시간을 개무시하는 편집이 들고찍기 효과와 맞물려 굉장한 속도감을 자랑 떠는데 개중 백미는 단연코 당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모스크바 자동차 추격씬!

역시나 추격씬도 철저히 본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측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해서 시점을 조수석으로 잡아 잉간 두어 명 지나가기도 힘든 좁아터진 모스크바 시가지의 건물과 자동차를 이리 ‘쿵’, 저리 ‘쿵’ 아낌없이 헤딩해가며 근래 보기 드문 엑스타시 만땅의 추격씬을 제공하는데 단순히 확 트인 고속도로를 무대 삼아 장애물을 피하는 등의 스케일 늘리기와 서커스 연출에만 급급했던 기존 자동차 추격씬과는 사뭇 차별화 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음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추격씬을 비롯,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정 흔들리는 화면을 고수하고 있는 까닭에 혹 비위가 약한 관객은 어지럼증을 동반한 토사물 분사의 위험성이 있으니 키미테를 필히 부착하시어 관람에 임하는 것도 한 방법.

물론 이 때문에 당 영화의 재미에 흠집이 생기는 건 아니다. 개봉하는 영화만 존나 많았지 가뜩이나 볼 것없는 최근 극장가에서 당 영화는 군계일학의 재미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문이 불여일견. 베스트다!  

덧붙여,
비공식라인을 통해, <본 아이덴티티>를 안 보고 당 영화 <본 슈프리머시>를 감상할 시 뭔 이야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있는데 본 특위가 확인해 본 결과, 절대 그렇지 않다. <본 아이덴티티>를 안 본 관객이라도 <본 슈프리머시>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소지 없음을 밝힌다.


<딴지일보>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제목이 뭘 지칭하는지 알아보자.  

때는 바야흐로 1972년 1월 31일 일요일, 장소는 북아일랜드 데리시. 이곳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시민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다. 왜? 영국정부가 이들의 주권을 마구 침해하니까. 근데 영국진압부대는 씨바스럽게도 비폭력 평화 시위를 벌이던 데리시 주민에게 총을 난사한다. 아작난 평화, 그리고 피로 물든 북아일랜드. 이것이 소위 피의 일요일, 즉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라 불리는 사건이다.

당 영화는 바로 이 문제적 실화를 거머리처럼 밀착 들러붙은 카메라 출동 필로 딱 하루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카메라가 수전증 걸린 것 마냥 쉴새없이 지랄발광을 떠는데 그러다보니 연출되었음에도 불구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왜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을까. 왜 그러긴, 사실감있게 보이려고 그런거지. 감독이 이를 통해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그럼 또 왜 30년이나 지난 사건의 진실을 이제서야 말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이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썰했듯 북아일랜드의 비폭력시위를 악랄한 폭력으로 제압한 영국, 진실이 알려지는 날엔 전지구적 개망신은 물론이요 그 후한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가라로 왜곡하거나 은폐, 축소하는 것.

이제 눈치들 좀 채셨는가. 그렇다, <블러디 선데이>는 탈골한 진실을 제 자리 찾아주는 영화인 것이다. 게다가 감독인 폴 그린그래스는 사건의 가해자측인 영국 출신. 진실을 숨기는 자신들의 역사가 부끄러웠나보다. 하지만 감독은 북아일랜드, 영국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양측의 상황을 교차로 편집해 보여주면서 사건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졸라게 땀 흘린다.    

허나 이처럼 중립을 지킨다고 해서 이 사건이 주는 충격이 쪼그라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시선이 어디에도 고정돼있지 않고 보여주는 화면이 느무느무 사실적이다보니 관객은 마치 사건의 목격자가 된 듯하고 그 앞에서 무고한 잉간덜이 군바리덜의 총탄에 하나둘 죽어 나가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음이다. 게다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보게되니 어디메선가 이글이글 분노가 뚜껑을 열고 치솟아 오를 지경이다, 씨바!

무엇보다 당 영화가 우리 관객에게 남의 일 같지 않은 건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18 광주 학살. <블러디 선데이> 속 북아일랜드 주민과 영국군을 광주 시민과 전두통 살인마로 치환해도 무방한고로 우리에게도 당 영화처럼 진실을 과감하게 폭로할 수 있는 작품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단순히 ‘재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당 영화인 것이다.

따라서 당 영화를 통해 재미, 스펙타클, 볼거리 등 블록버스터 영화가 제공하는 오르가자미를 기대하는 건 우물가서 숭늉 찾는 격. 다른 영화를 찾아보심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 사료된다. <블러디 선데이>는 그런 영화가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에 올림이다. 이상!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