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김태용 감독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감옥에서 하루 휴가를 받은 여자가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하루 동안 마음을 연다는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김태용의 <만추>는 미국의 시애틀로 배경을 옮겨 중국여자 애나(탕웨이)와 한국남자 훈(현빈)의 사랑으로 개비했다. 한국영화사의 계보에 위치하지만 한편으로 중국영화라고 해도 될 만한 <만추>에 대해 김태용 감독은 ‘아시아영화’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약속>(1972),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에 이어 이번에 네 번째로 리메이크가 됐다.
원작의 훌륭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감옥에서 나왔다,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라는 구조 자체가 영감을 많이 줬다. 그 때문에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이후 계속해서 리메이크 됐던 것 같다. 

이전의 ‘<만추>들’은 로드무비였다. ‘길의 영화’였는데 이번 <만추>는 ‘도시의 영화’다. 미국 시애틀에서 극중 인물들이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밝힌 세 줄의 구조를 벽에 붙여놓고 계속 영감을 얻었다. 여자의 고향에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원작은 어디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감옥과 감옥이 아닌 곳으로만 되어 있다. 원작을 충실히 지키려면 감옥 아닌 곳이 선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애나가 다시 돌아온 고향,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별로 없고 고향마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 감옥만 나오면 내가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감옥을 나와도 사실은 갈 데가 없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길에서 만난다는 건 일종의 자기 고향이라는 의미인데 자기 고향 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는 쪽으로 가다보니 한 공간이 좋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시애틀을 염두에 뒀나?
미국에서 한국남자와 중국여자가 만난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미국 동부의 낙엽 떨어지는 곳, 가령 뉴욕을 생각하다가 미국이라는 곳에서 아시아인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센 설정인데 낙엽보다 더 스산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마침 겨울의 시애틀은 만날 비가 온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시애틀에서 비오고 안개 끼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로 가자. 결국 날씨 때문에 시애틀을 선택했다. 

비보다는 안개가 더욱 중요하게 등장한다.
CG로 안개도 많이 만들었다. 계절감과 공간감을 안개 하나에 집중하려고 했다.

시애틀이라는 도시의 속성 자체가 그렇기도 한데 흥미로운 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던 김수용 감독이 <안개>(1967)라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만추>는 한국영화의 과거를 환기시키는 지점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야기 자체가 주는 향수 같은 게 존재한다고 할까. 어떤 이야기는 백 년 전에 만들어도 굉장히 현대적인 것에 반해 미래에 만들어도 고전적인 이야기가 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누군가와 정을 나누지만 비극적으로 헤어져야 한다는 플롯은 시대와 상관없이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1960년대에도 고전적인 이야기였을 것 같다. 그 고전성이 좋았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 시대가 남겼던 것은 뭘까, 라기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고전적인 원형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럼 <만추>의 이야기 구조를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봐도 괜찮을까?
그럴 것 같다. 이번에 <만추>를 리메이크하다보니까 한국영화에만 존재하는 원형적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극중 현빈이 연기한 훈이라는 인물의 이름도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그건 지키고 싶었다. 그에 반해 애나는 미국으로 이민 온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어이름이다. 미국에 온 중국인 이름 중에 가장 평범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남자와 중국여자가 미국에서 만나는 로맨스는 흔하지 않은 설정이다.
회사에서 처음 얘기를 꺼냈다. 난 다른 걸 준비 중이었는데 회사 대표님이 <만추>를 미국에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얘기를 하셨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에요, 라고 답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웃음) 근데 그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를 안 떠났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쓸 때만 해도 너무 느닷없는 일이었고 미국도 잘 모르는데다가 영어, 중국어, 한국어까지 3개 국어가 난무하는 거라서 실제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쓴 건 무슨 이유에서였나?
<만추>의 아이디어를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게, 낯선 길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는 정서가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2010년 지금과 사실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거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탕웨이를 캐스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아마도 <색,계>(2007)의 그녀를 기대했을 거다. 하지만 <만추>는 성격이 전혀 다른 작품인 까닭에 노골적인 베드신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좀 더 격렬한 감정을 다루고, 감정 자체를 격렬하게 베드신으로 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으면 탕웨이가 아닌 배우로 했을 거다. 탕웨이에게 그런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만추>는 마음에 있는 걸 몸으로 잘 표현 못하는 사람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 번 표현해본 사람의 이미지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후사까지는 아니지만 <색,계> 그 이후에 나이가 좀 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것도 있었다. 배우만 놓고 본다면, 몸으로 격렬하게 표현하는 감정이면 탕웨이가 아닌 게 낫고 그 반대라면 탕웨이가 낫다고 판단했다. 

탕웨이가 가장 중요한 캐릭터이지만 애나의 감정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훈이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그전까지는 현빈을 잘 몰랐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추천을 받았다. 현빈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작품을 본 적은 없었다. 추천을 받고 그가 출연한 TV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봤다. 잘 하더라. 느낌이 좋았다. 만나보고 싶었다. 질문처럼 <만추>가 구조적으로 애나의 하루 여행 이야기이지만 이 여자가 도대체 어떤 남자를 만났기에 마음을 열었을까가 핵심이다. 훈이의 캐릭터를 짜는 게 그래서 굉장히 어려웠다. 훈의 캐릭터를 현빈이 맡으면서 개인적으로 애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애나가 만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 집중했다.

다행히 최근에 현빈이 출연했던 드라마가 크게 성공을 했다. 한국 관객들이 보기에는 저 정도면 어떤 여자라도 안 넘어오고는 못 베기겠다는 설정이 설득력을 갖는다. (웃음)
영화를 만들 때만 해도 미국에 온 지 2년 밖에 안 된 껄렁대는 남자가 지금은 사회지도층이 배경인 남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웃음) 흥행에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존재감이 더 커진 거는 긍정적이다.

<만추>의 한중커플과 <가족의 탄생>(2006)의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가족까지, ‘따로 또 같이’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처럼 보인다. 전혀 타인끼리 마음을 여는 감정을 <만추>에서도 주목한다.
그런 거에 관심이 있나 보다. 완전히 나와 같은 사람이라 통해서 좋은 게 아니라 나랑 완전히 달라서 호기심이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묘하게 연결되는 어떤 지점들이 있을 것 같다. 통할 이유가 없음에도 통해지는 어떤 지점들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만추>는 한국영화라고 하기에는 묘한 정체성이 느껴진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 ‘중국영화를 찍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 탕웨이 때문인 것 같다. 미국에 사는 한 중국여자에 대한 영화잖나. 만들 당시에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찍는 동안 미국에 이민 온 중국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극중 애나 가문은 중국인 커뮤니티 안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정체성이 있다. 훈이처럼 떠돌이로 사는 게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는 존재한다. 미국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정서가 영화에 담기다보니 개인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중국여자를 다루는 거다. 그래서 이상하게 중국영화의 느낌이 들었다. 애나의 정체성이 감옥에서 나왔다는 건데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한국남자와 만난다.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할 수 없고 각자의 문화가 너무 강하고 그런 차이가 들어가면서 정체성이 더 커진 거다. 서로 타인끼리 마음을 열고 뭔가를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진 거다. 

그런 것을 ‘아시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생각의 폭은 물론이고 다음 영화를 만들 때면 소재의 폭을 지금보다 더욱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지난 몇 십 년을 지냈다. 물론 지금도 그런 태도가 많이 남아있다. 확실하게 우리와 다른 문화를 통해서 나를 보려고 하는 느낌이었을 것 같다. 이상하게 아시아영화는 나와 다르지 않은데 오히려 내가 확장되는 느낌이 있었다. <만추> 작업 동안에도 미국에서, 미국 스태프들과 작업을 했다고 해서 미국영화라는 생각은 안했다. 오히려 미국에서 만들었지만 아시아영화 같은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제공 서울아트시네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


NEXT plus
NO.31

<만추>(Late Autumn)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태용 감독의 <만추>(2009)는 이만희 감독의 동명 영화를 세 번째로, 아니 네 번째로 리메이크하는 작품이다. 지금은 필름이 소실되어 그 정체를 파악할 길이 없는 이만희의 <만추>(1966)는 일본에서 사이토 고이치 감독이 <약속>(1972)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리메이크했다. 그 후 김기영 감독이 <육체의 약속>(1975)으로, 김수용 감독이 <만추>(1981)로 다시 만든데 이어 2009년 김태용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리메이크인 만큼 김태용의 <만추> 역시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 휴가를 받은 여죄수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던 중 정체가 묘연한 남자를 만나 서로에게 잠시간의 위안이 된다는 내용을 공유한다. 중국인 애나(탕웨이)가 남편을 살해한 후 자기처럼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한국인 훈(현빈)을 만나 상실감으로 텅 빈 마음속에 뜨거운 점 하나를 찍는다는, 원작의 정서에 가까운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김태용 버전의 <만추>가 이전의 ‘<만추>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미국의 시애틀을 극중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다.

김태용이 <만추>에서 이룬 미학적 성취는 절대적으로 시애틀이 갖는 도시의 속성에 기댄 바 크다. 쓸쓸함을 캐릭터로 내세운 도시는 많지만 그중 시애틀은 비와 안개, 그리고 자살로 유명하다. 인간의 고독을 묘사하기에 이곳만큼 적당한 장소를 찾기 힘들다. 김태용은 흡사 에드워드 호퍼의 황량한 도시 풍경을 연상케 하는 구도 속에 삶의 동력을 잃은 애나의 우울한 소외를 포착하는데 주력한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처지를 ‘길의 영화‘로 구현했던 이전의 <만추>들과 달리 도시 속에 갇혀 헤매는 인간의 절대 고독을 도시의 영혼과 포개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김태용의 <만추>는 ’도시의 영화‘에 가깝다. 

<만추>가 시대를 달리하며 다시 만들어지는 이유는 주인공 남녀의 전사(前史)가 희미하게 다뤄지는 탓에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넓다는 게 주요한 이유다. 남모를 사연 빼면 뭐 하나 제대로 소유한 것 없는 텅 빈 유리 같은 인물들을 감독 각자의 개성에 맞춰 채워가는 구조의 연출은 누구라도 탐낼만한 소재인 것이다. 특별히 김태용이 <만추>를 통해 주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시아성’이다. 미국이라는 이국에서 중국인 애나와 한국인 훈은 어쩔 수 없는 이방인에 다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 사이의 아시아인이라는 공통분모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어떤 기호이고, 무엇보다 감정이다. 그렇게 김태용은 이국에서 하나 되는 아시아의 동일성에 매료된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계에 리메이크 시도가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다. 김태용의 <만추>는 대표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며 리메이크가 시도된 작품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한다. ‘만추(晩秋)’라는 제목처럼 가을에 볼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맹활약한 현빈의 인기에 힘입어 지각 개봉하는 <만추>는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긴밀하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례다. 또한 한국이라는 개별성보다 아시아라는 보편성에 주목하는 보기 드문 경우라 할만하다. 왜 <만추>가 2009년에 리메이크되고, 미국에서 찍어야만 했는지 그 당위성을 김태용 감독은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만추>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NEXT plus
NO.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