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미술감독 삼국지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황후花>의 후오 팅샤오, <꿈의 미로>의 이소미 도시히로, <타짜>의 양홍삼 등 세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초빙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스터클래스’는 아시아 삼국의 영화미술을 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마스터클래스에서 확인된 아시아영화의 미술을 조명한다.


영화현장은 바벨탑과 같다. 각 파트별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나리오가, 촬영감독에게는 카메라가 펜이 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에겐 세트와 공간을 디자인하는 또 다른 언어가 있다. 영화에서 미술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1차 정보의 기능을 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조직하고 디자인한 공간에는 그 나라의 시각문화, 이미지에 대한 태도 등 특수한 환경이 묻어난다. 공간을 연출하는 프로덕션 디자인과 미술작업은 각 나라마다 뚜렷한 특징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감독 후오 팅샤오, 이소미 도시히로, 양홍삼의 작업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기와 주제를 실어 나르는 색채


후오 팅샤오는 현실을 재현한 공간에서 추상적이고 과장된 시대극 공간까지 시대와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현존하는 최고의 미술감독 중 한 명이다. 그중 등장인물의 감정을 공간에 구현하는 데 있어 ‘색’을 가장 잘 활용하는 미술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색에 대한 그의 미학은, 베이징 영화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참여한 첸 카이거의 <현 위의 일생>(1990)에서 시작됐다. 첸 카이거의 <황토지>(1984)와 장이모우의 <붉은 수수밭>(1988)은 중국 5세대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색의 활용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형식미까지 고려한 과감한 시도들은 이후 중국영화를 규정하는 하나의 특징이 됐다.

후오 팅샤오는 공간을 꾸미는 데 있어 색채의 조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면 이야기를 규정하는 색조를 가장 먼저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 퍼센트 사실적인 재현이 쉽지 않은 까닭에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시대극은 후오 팅샤오의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장르다. 아닌 게 아니라, 2000년 이후 장이모우 감독의 주요 작품, <영웅>(2001), <연인>(2003), <황후花>(2006)에 참여하면서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가장 극대화된 형식미를 보여줬다. 장이모우의 첫 번째 대작 영화 <영웅>에서 후오 팅샤오는 네 가지 단색을 사용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한편 색채를 통한 드라마를 보여줬다. 통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왜곡된 심리는 강렬한 붉은색을 통해,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의 이뤄지지 못한 애정관계는 차가운 푸른색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회상 신은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녹색이 배경을 이뤘으며 수시로 상황이 변모하는 현실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모든 색을 빨아들일 수 있는 백색으로 처리했다.

강렬한 색이 두드러지다보니 과장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 이 같은 작업물이 규모가 큰 장이모우 영화의 빈약한 서사를 눈가림하는 장치가 아니냐는 식의 의심을 종종 받는다.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음모를 다룬 <황후花>야말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었기에 황금색과 붉은색이 주요한 색조가 됐다. 황금색으로 황궁의 화려함을 강조하는 한편 내부에 붉은색을 점점이 박아 넣어 음모의 기운이 서리도록 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패한 아이러니를 표현한 것. 하지만 황궁 내부의 조형물을 유리로 제작해 발열하는 빛으로 황금색을 극대화한 점이나, 실제 국화 화분 30만 개를 사용해 황궁의 마당을 뒤덮은 공간 연출은 입이 쩍 벌어지는 규모로 인해 ‘뻥 미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그런 비아냥거림이 섞인 평가와는 다르게 후오 팅샤오 본인은 “과장되지 않도록 사실적으로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가령, 진나라가 배경인 <영웅>은 북방민족의 특징이 살아 있는 시대였기에 거칠고 투박한 면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그에 반해 <황후花>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대로 평가받는 당나라가 배경이었던 까닭에 정교하고 섬세한 시각화에 애를 썼다.

시대극에서 사실적인 재현이라 함은 간접적인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뼈대 구축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시대극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재현’보다 ‘표현’에 더 가깝다. 대신 후오 팅샤오는 공간의 구성을 상상력에 의지하기보다 등장인물의 감정과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최대한 ‘재현’한다. 색을 이용한 작업은 공간의 해석을 풍성하게 만드는 그만의 특징이다.


일상에 들이 댄 현미경


후오 팅샤오가 공간을 채우는 미술감독이라면 이소미 도시히로는 공간을 비우는 미술감독이다. 후오 팅샤오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해 그는 최대한 의미를 배제한다.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미술 철학이다. 그는 삶의 미세한 부분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기술적이라기보다 일상적이다. 가능하면 세트를 만들지 않고 이야기에 맞는 일상의 공간을 집요하게 찾아나서는 건 이 때문이다. <도돔파아가씨, 강에 가다>(1988)에 미술감독으로 입문한 이래, 아오야마 신지의 <헬프리스>(1996), 구로사와 기요시의 <네 멋대로 해라>(1996), 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1997), 최양일의 <피와 뼈>(2004)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했지만 그의 결과물은 늘 한결같다. 워낙에 일상적인 까닭에 배경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없다.

이소미 도시히로가 돋보이는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다. 소소한 일상에서 깊은 의미를 건져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이소미 도시히로가 추구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철학과 일치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은 데뷔작 <환상의 빛>(1995)에서부터 최근작 <하나>(2006)까지 모든 영화에서 함께했다. 그중에서 고레에다의 이례적인 사극으로 화제를 모았던 <하나>는 이소미 도시히로의 특기가 잘 발휘된 경우다. 아무래도 사극은 일본 건축이 지니고 있는 극도의 형식미로 인해 과장된 느낌이 강한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사무라이의 복수담을 주제로 한 ‘주신구라’를 우회적으로 풍자하며 일상의 자질구레함을 찬미하는 탓에 굉장히 현실적인 세계로 재창조됐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을 오밀조밀하게 밀집시켜 일상의 풍경들을 강조한 것. 사실 당시에는 토지가 넓은 장소에 집을 세우는 경우가 없었다. 다만 <하나>는 현 시대를 풍자하는 우화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무리가 가는 부분이 있어도 현실적인 공간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겐로쿠 시대가 배경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만 통용되던 자재를 이용, 실제 사물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살리는 데 집중한 건 특기할 대목이다. 1930년대가 배경인 이시이 소고의 <꿈의 미로>가 이를 설명할 좋은 예다. 이를 테면, 차장으로 등장하는 소녀(고미네 레나)가 사용할 버스를 수소문하던 이소미 도시히로는 1950년대에 제작된 것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문제의 버스를 사용하는 대신 외관을 다시 칠하고 내부의 의자라든지 손잡이 등 소품을 모두 1930년대 것으로 교체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며 그 시대의 공기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이소미 도시히로는 큰 그림으로써의 배경보다 사물을 활용하는 공간 구성에 특별히 신경 쓴다. 이는 그가 극단의 무대연출로 경력을 시작했기에 보여주는 특징이다. 아무래도 연극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이 제공하는 정보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소품이 갖는 의미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소미 도시히로는 영화에서도 인간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상의 자잘한 부분이랄 수 있는 작은 소품을 적극 끌어들인다. 이를 위해 상상력을 쥐어짜는 대신 등장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며 관찰하는 쪽을 택한다. 극중 인물의 입장에서 생활하며 이들의 감정에 따라 보일 듯 말 듯 반응하는 공간의 미세한 변화를 캐치한다. <아무도 모른다>(2004)는 엄마 없이 생활하는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미술 스탭 중 한 명을 극중 배경인 아파트에 머물게 했다. 공책, 크레파스와 같은 학용품이 아이들이 머무는 아파트를 서서히 어지럽히며 공간을 잠식해가는 것은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소산이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베란다에 정원을 설치한 것도 아파트에서 직접 생활했기에 가능했다.

이소미 도시히로가 연출한 공간은 미세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에게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삶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공간 구성을 보고 있으면, 돋보기를 든 채 삶의 밑바닥에 밀착해 일상을 관찰하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 그의 공간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이소미 도시히로는 공간으로 감정을 자아내는 흔치 않은 미술감독이다.


표현되는 것이 아닌 디자인된 공간


양홍삼 미술감독은 공간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표현한다.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시쳇말로, 후오 팅샤오와 이소미 도시히로 작업의 절충에 가깝다. 인위적이지만 사실적이고, 꾸밈이 없지만 계산적이다. 이는 조소과 출신의 양홍삼이, 민병천 감독의 <유령>(1997)에서 미니어처 세트 디자이너를 맡으며 영화미술 세계에 발을 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니어처 제작은 참고할 바탕이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고, 인위적인 손길을 가한 모형이라는 점에서 계산적이다. 현실을 가장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장르의 이율배반적인 속성과 닮았다. 박찬욱의 스릴러 <올드보이>(2003), 김태경의 공포영화 <령>(2004), 김지운의 누아르 <달콤한 인생>(2005), 김대승의 사극 <혈의 누>(2005), 봉준호의 괴수물 <괴물>(2006)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 유독 장르 영화가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2000년 이후, 국내에서 제작된 중요한 장르 영화의 대부분을 양홍삼이 맡았다는 사실에 비춰 그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살펴보는 건 한국 장르 영화의 경향들을 일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장르를 횡단하며 작업한 양홍삼의 공간 구성은 일관된 스타일이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장르의 수많은 규칙과 속성에 맞춰 공간을 구성하다보니 개인만의 색깔이 묻어나지 않은 것. 그는 공간을 재현하거나 표현한다고 말하지 않고 ‘디자인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일상적인 공간에 대한 리얼리티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극중 배우의 동선에 따라 구성되는 영화적 공간의 리얼리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작업하기 때문이다. 양홍삼은 시나리오를 확인하는 즉시 일차적으로 실제 공간에 대한 조사를 거친 후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큰 그림을 그린다. 그 후 디테일한 부분은 극중 인물이 살아온 과정을 상상해 영화적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디자인한다. 풀숏으로 봤을 때 리얼리즘이 드러나고, 미디엄숏이나 클로즈업이 들어갈 때 표현주의적인 면모가 살아나는 건, 그런 독특한 작업방식의 결과다.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 그중에서 고니(조승우)의 군산 집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트로 지어진 고니의 집을 구성하기 위해 양홍삼 미술감독은 가장 먼저, 시나리오상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니의 가족이 어떨 것인지를 상상했다. 고니는 학교 성적도 바닥을 기고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사고도 많이 치지만 누나가 오는 것을 반긴다는 설정에 착안, 가족 간의 화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구는 약간 오래된 듯하지만 손때가 묻은 것들을 선택했고 방안을 포근하게 둘러싸는 형태로 배치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방안 풍경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소품 하나하나에 클로즈업이 들어가면 리얼리즘적인 면모는 금세 사라진다. 가령, 장롱 표면에는 화투 패를 연상케 하는 자개장이 붙어 있다. 또한 창에 걸어둔 커튼이나 마룻바닥에 깔린 카펫에는 카드에서나 볼 법한 다이아몬드 문양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돼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모를 무늬 하나에 도박을 소재로 한 영화의 컨셉을 새겨 넣은 것. 도시 외곽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곽철용(김응수)의 비닐하우스 도박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됐다. 실제 존재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양홍삼 미술감독은 최동훈 감독과의 협의하에 그저 재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집단으로 충돌하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잭슨 폴락의 작업처럼 노란색과 갈색의 래커를 이용, 비닐하우스 벽면에 어지럽게 흩뿌렸다.

이처럼 일상의 공간을 변주하는 양홍삼의 작업은 철저히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그의 공간은 늘 일상과 욕망의 이중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2006)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개의 정치체제가 충돌했으며 <괴물>에서는 일상적인 공간인 한강이 살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했고 <달콤한 인생>에서는 조폭의 이상과 현실이 어지럽게 겹쳤다. 이런 이중성은 장르 영화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런 점에서 양홍삼의 작업은 모든 장르에서 공간 창조가 용이하다. 한국의 장르 영화는 그의 무개성한 구성이 빚어낸 개성적인 공간의 도움을 받아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했다








FILM2.0 335호
(2007. 5. 8)

Wonderful Spectacle – <타짜>의 위험한 열차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단순히 현란한 도박의 기술을 나열해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그런 종류의 도박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 욕망의 허망함을 폭로하는 영화 쪽에 더 가깝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돈을 손에 넣기 위해 기차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던 고니(조승우)의 눈앞에서 돈 가방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영화의 주제가 집약된 장면인 만큼 촬영이 쉽지는 않았다. 기차를 빌려야했고, 기차에 고니가 매달려있어야 하는 까닭에 블루 스크린 촬영이 필요했으며, 이 모든 것이 움직이는 기차에서 벌어진다는 설정 탓에 CG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자칫 촬영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최동훈 감독이하 촬영팀은 서울의 모처에서 먼저 테스트 촬영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촬영 중 발생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장면의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촬영은 광양의 태금역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철도에 기차를 세워두고 고니 역의 조승우를 와이어에 묶어 기차에 매달아 바탕장면을 촬영했다. 두 번째로, 조승우가 그랬던 것처럼 와이어를 이용해 기차에 매달린 돈 가방을 촬영한 후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찍어 앞의 두 장면과 CG로 합성, <타짜>의 명장면은 탄생할 수 있었다.


(2006. 11. 10. <스크린>)

영화는 어떻게 만화를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옮길 수 있었을까?




충무로의 새로운 광맥, 만화


최근 한국영화계는 만화의 영화화가 붐이다. 올해를 기점으로 벌써 강풀의 인기만화 <아파트>(06), B급달궁의 <다세포 소녀>(06), 허영만의 <타짜>(06)가 안병기, 이재용, 최동훈 감독에 의해 영화화화 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전윤수 감독의 <식객>,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 김정권 감독의 <바보>, 최양일 감독의 <수> 등 현재 충무로를 돌고 있는 수백 개의 프로젝트 중 무작위로 몇 개만 쥐어들면 만화원작의 영화가 손에 잡힐 정도다. 소재의 고갈을 겪고 있는 한국영화계에서 만화는 새로운 광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인기도와 검증된 이야기 등 우수성을 인정받은 만화를 영화화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고, 흥행이 보장되는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만화의 영화화가 있어 왔어도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김성수 감독의 <비트>(97), 최동훈 감독의 <타짜>를 제외하면 손에 꼽을 정도다. 왜일까. <올드보이>로 성공적인 만화의 영화화를 이룬 박찬욱 감독의 다음 사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하다.


박찬욱 감독은 지인의 소개로 접하게 된 일본 만화 <멋지다 마사루>를 재미있게 보았다. 주변에서 이 얘기를 듣고 영화화하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영화로 만들고 싶긴 한데 원작이 준 재미의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조잡한 그림체를 스크린에 살려낼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와 만화, 두 매체 간에는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공통분모를 제외하고는 이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 연출시 원작의 설정은 살리되 디테일한 면에 있어서는 영화적 재미를 살리고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선에서 많은 각색과 변화를 줬다.


이처럼 만화를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맞는 화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김성수 감독과 최동훈 감독 역시 원작만화의 장점을 살리면서 영화 고유의 힘도 잃지 않았던 까닭에 <비트>와 <타짜>라는 훌륭한 만화원작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대체 이들은 어떻게 만화 원작을 영화로 ‘잘’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김성수와 최동훈에게 듣는 만화의 영화화에 관한 두세 가지 것들


최동훈 감독은 <타짜>를 영화화하겠다는 결정은 내린 후 가장 먼저 원작자 허영만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원작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는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고 허영만 화백에게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아냈다. 허 화백이 흔쾌히 OK사인을 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자신의 작품이 다수 영화화되는 것을 보며 원작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긴 작품은 매력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수 감독의 <비트>는 그런 허영만의 생각이 잘 드러난 거의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 초반부 30분을 제외하면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만화를 읽은 독자들의 기대는 배반하되 이야기의 본질은 놓치지 말자 그런 거였죠. 만화의 그림이 갖는 추상성이 이미 독자의 머릿속에 현실적인 화면으로 재현되었을 텐데 거기에 정면으로 견주면 어떤 영화라도 초라해질 것 같았죠” 김성수 감독의 얘기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담당한 심산 작가는 당시까지 출간된 만화 <비트> 5권까지 대충 읽어본 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워낙에 방대한 양이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영화로 보여주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성수 감독은, 방황하는 10대 후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비슷한 내용의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었다. 원작에서 그리 큰 비중이 아니었던 태수(유오성)가 영화에서는 핵심인물이 되었고 환규(임창정)의 여자 친구 선아(사현진)라는 인물이 새롭게 탄생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구조와 시간을 점프하며 진행되는 서술방식은 고민 끝에 더욱 강조하기로 하였다. 성장 드라마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신에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뮤직비디오들처럼 강렬한 음악을 배경에 깔고 이질적인 화면들을 억지로 붙이면서 전개했습니다. 주인공들이 갈팡질팡하는 젊은이들이었기에 그런 서술이 오히려 적절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 결과, 허영만 원작의 만화 <비트>와는 다른 김성수 감독의 영화 <비트>가 탄생했다. 평단의 반응도 좋았을 뿐 아니라 1997년 당시 서울 관객 34만 명이라는 높은 흥행성적까지 기록했다. 그런 김성수 감독의 성공적인 만화의 영화화 탓이었을까. 이후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많은 작품이 전반부는 원작을 살리면서 후반부는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흐름에 변화를 가져온 건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다.


“캐릭터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의 기질 같은 게 있다. 기질이란 건 선악의 전형성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 <타짜>는 결국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중단되더라도 도박판의 이런 캐릭터들에 대한 매혹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시다시피 <타짜>는 9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서술형태가 사건이 발생하는 순서가 아닌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최동훈 감독의 얘기처럼 <타짜>는 캐릭터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허영만의 원작은 이와는 다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대별 에피소드에 따라 막도 나뉘고 등장하는 캐릭터도 변화한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이와 같은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채택했다. 원작의 묘미를 살리면서 원작과는 또 다른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최동훈 감독은 “원작만화는 신문연재 형식이었기 때문에 영화화하기에 스케일이 방대했고 많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틀로 엮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일 먼저 한 작업이 바로, 길고 많은 에피소드로 구성 되어 있는 원작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영화 <타짜>는, ‘고니(조승우)가 타짜가 돼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만나는 인간 군상들’이라는 한 편의 운명론적 이야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니가 겪게 되는 심리적인 변화나 내적 성장은 대부분 정마담(김혜수)의 개입으로 비롯된다. 때문에 감독은 정마담의 역할을 원작에 비해 더욱 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마담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영화는 캐릭터 드라마로 재탄생하였고 그런 최동훈 감독의 전략은 멋지게 적중, 올 추석시즌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로 등극하였다.


만화는 만화, 영화는 영화


흔히 사람들은 영화를 도둑질의 예술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TV, 소설, 미술, 음악, 게임 등 가리지 않는 습성을 과시하며 훔쳐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스크린에 가져왔다. 물론 무작정 훔치고 베낀 것은 아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법을 통해 TV를, 소설을, 미술을, 음악을, 게임을 재구성하였다.


게임과 함께 가장 촉망받는 21세기의 대중예술인 만화도 영화의 레이더망을 피해갈 수는 없다. 단, 만화의 영화화 역시 영화만의 특징을 가지고 스크린에 옮길 필요가 있다. 이는 앞에서 보여준 김성수 감독과 최동훈 감독의 <비트><타짜> 사례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허영만 선생과 박하 선생(스토리 작가)의 만화가 너무 유명하다는 게 마음에 짐이 됐습니다. 그걸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왜냐하면, 너무 재밌거든요. 허영만 만화가! 하지만 만화의 영화화가 오히려 자극이 되기도 했습니다. (중략) 만화의 상상력보다 영화적 상상력이 뒤처질 거라고 겁먹지 말아야겠죠” (김성수 감독)


“영화가 완성된 후 원작만화와의 비교는 피해갈 수 없는 수순이라 생각한다. 원작만화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라면 그 기대감에 대한 부담감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연출자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한 후에는 원작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해나갈 것인가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동훈 감독)


만화는 만화, 영화는 영화. 만화의 영화화를 이미 경험한 선배 감독들의 조언(?)이자, 이들만의 특급 노하우다.


(2006. 10. 8.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