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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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황소개구리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 극장가의 절반을 넘어서는 스크린을 먹어치운 지도 어언 한 달 여. 새로운 패자의 출현에 목마른 관객 제위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극장가 여기저기를 찌르고 있는 바, 8월 극장가의 맹주를 자처하며 여기 <퍼블릭 에너미>와 함께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가 왔다.


공공의 적? 아니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한국말로 번역하면 ‘공공의 적(들)’ 근데 왜 <퍼블릭 에너미>(8/13 개봉)냐고? 아메리카무비니까. 당 영화는 아메리칸갱스터히스토리계의 파이오니아로 통하는 은행 강도 존 딜린저의 초특급버라이어티선혈낭자범죄로드쇼를 다뤘다.

1930년대 당시 아메리카 동부 폴리스들이 존 딜린저를 대하는 마음가짐 속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더랬다.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범죄는 없다! 그러나 존 딜린저는 더 큰 범죄의 세상을 발견할 것이라고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총으로 ’No‘의 무장을 해제하며 이렇게 답했더랬다. ’More Ahead’ 나에게 범죄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리하여 해군에 입대하자마자 탈영해 슈퍼마켓을 털고, 젊은 나이에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손이 근질근질한 나머지 박차고 나와 은행 수십 군데를 또 털고, 쫓아오는 폴리스에게 냅다 총알을 갈기다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존 딜린저는 일개 나쁜 놈들이 꿈꿔보지 못한 범죄의 미답의 경지를 밟으며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됐다.

그래서 당 영화의 마이클 만 감독은 존 딜린저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딴 무비를 만든 것이냐? 당근 아니고. 존 딜린저라는 퍼블릭 에너미를 통해 시대상을 탐구하고 어제의 히스토리를 거울삼아 오늘의 교훈으로도 만들자, 모 이런 의도 아니겠나. 세상이 좀 하수상해야 말이지.

물론 이런 종류의 심오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당 영화는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의 쭉하고 딴한 보디는 물론이요, 이들의 꽃스런 세숫대야를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마디로 <퍼블릭 에너미>는 예술성과 오락성을 일타에 이피함으로써 임도 보고 뽕도 딴 작품이란 얘기다.        


이제는 할리우드 배우 이병헌

물 건너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 간 ‘병헌Lee’ 또한 <지.아이.조>(8/6) <나는 비와 함께 간다>(8/20)로 두 마리 토끼몰이에 나선다. <지.아이.조>에서는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군단의 넘버3 스톰 쉐도우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는 홍콩 뒷골목의 큰 형님 수동포 역을 맡아 나쁜 놈 2인2색을 펼친다. 우리의 병헌Lee가 할리우드의 그렇고 그런 동양 캐릭터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산화할 것인지, 신천지를 개척하고 금의환향할 것인지 귀두가 주목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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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8월호

5월은 <마더>의 달 봉준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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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계절의 여왕, 또 누군가는 가정의 달, 또또 누군가는 징검다리 연휴의 달이라고 얘기하지만 5월은 대박영화의 달이라고 이 필자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왜냐고? <스타트렉: 더 비기닝>부터 <천사와 악마> <박물관이 살아있다2>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이하 <터미네이터4>), 그리고 <마더>까지, 블록버스터 영화가 떼거지로 개봉하니까.


<마더> 아빠 없는 하늘 아래

허나 ‘5월은 <마더>의 달 봉준호 세상’이라고 마더송을 제창해도 될 만큼 <마더>(5/28 개봉)를 향한 국민적 기대치는 김연아, 박태환에 모아지는 그것을 1.73배가량 능가하는 형국이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등 영화 제목 국산화를 선도해온 봉 감독이 <마더>에서 영문 제목으로 유턴하며 변신을 예고하는 통에 당 영화는 일찌감치 2009년 한국영화의 지존으로 자리 잡은 터.

‘국민엄마’로 추앙받는 김혜자가 마더로, ‘국민꽃돌이’ 원빈이 아들로 출연, <전원일기>의 금동엄마와 금동의 관계에 오마주 바치는 것 아니냐며 갖은 추측이 난무했더랬는데 <마더>는 전혀 사맛디 아니한 이야기다. 집나간 아들을 향해 빤쓰끈 줄여 놨다, 컴백 홈 해다오 눈물로 호소하던 엄마가 아들의 살인 소식을 접하곤 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특유의 마더파워를 과시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파더는 뭐하고? 당 영화는 철저히 아빠 없는 하늘 아래에서 진행된다. 전작 <괴물>에서 아빠를 전면에 내세워 부성애를 보여준 까닭에 <마더>에서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모성애의 결정체를 탐구생활해보겠다는 것이 봉 감독의 자세다. 그래서 ‘봉 감독의 변신은 무죄!’야 말로 <마더>의 밑줄쫙 관람 키워드다.


<터미네이터4> 새로운 시작

미제산 대박무비 쪽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라면 단연 <터미네이터4>(5/22)다. 박힌 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뽑힌 자리를 배트맨의 탈을 벗은 크리스천 베일이 굴러와 박혔다. 고로 기존 세 편의 <터미네이터>와 안녕을 고한 <터미네이터4>는 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시리즈의 서막을 열어 제친다는 점에서 기대할 법한 영화인 것이다. 5월은 곧 죽어도 가정의 달이다, 가족영화를 소개해다오 눈물로 호소하는 그대들에겐 <박물관이 살아있다2>(5/22)를 추천하는 바이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웃기고 자빠진 행각을 벌였던 벤 스틸러가 이번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배꼽을 강타할 빅웃음을 선사할 예정이란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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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5월호

<3:10 투 유마>(3:10 to Yuma)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부극은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199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이후 간간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장르였다. 최근 이 전통적인 미국식 장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과 같은 정통 서부극은 물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등 변종 서부극까지 붐을 이루고 있는 것. 1957년 개봉한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동명작을 리메이크한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는 이 서부극 러시의 선두에 선 작품이다.

1953년 ‘다임 웨스턴 매거진 Dime Western Magazine’에 발표된 엘모어 레너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3:10 투 유마>는 정해진 시간 안에 범인을 무사히 호송한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을 연상케 한다(엘모어 레너드는 TV용 영화 <하이 눈 파트 투: 윌 케인의 귀환 High Noon, Part Ⅱ: The Return of Will Kane>(1980)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하이 눈>에서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은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악당을 실은 죄수 호송 열차가 12시 정오에 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시간 게임의 상황을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하이 눈>은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을 통한 극적 재미를 주었다. 반면 <3:10 투 유마>는 제한된 시간이 주는 긴장감은 크지 않은 대신, 선악 구별이 혼재한 요지경 세상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건보다 영화 내내 충돌하는 두 캐릭터 벤 웨이드와 댄 에반스의 묘사에 더욱 신경을 쓴 건 이 때문이다. <3:10 투 유마>는 서부극이면서 동시에 캐릭터영화다.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서부극 속 인물은 섬세한 내면보다 선 굵은 외면 묘사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외양 못지않게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인다. 예컨대, 22건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2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벤은 표면상 악인이지만 일차원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틈만 나면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그 눈을 깊이 바라다보면 세상의 색깔이 바뀔 정도예요” 따위의 시적 대사를 읊조리는 그에게서는 악당에 어울리지 않는 신비로움이 묻어난다. 이는 댄도 마찬가지. 목장주에게 억압당하며 힘들게 가족을 부양하는 한낱 목동에 불과한 그도 알고 보면 남북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으로 의족까지 하게 된 피치 못할 사연을 숨기고 있다. 즉 사건보다 캐릭터가 충돌하며 이야기와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화인 것이다.

<3:10 투 유마>에는 통념적인 선악 구도를 뒤집는 전복의 재미가 있다. 벤 웨이드를 절대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을 넘어 댄의 아들 윌리엄(로건 레먼)의 눈을 빌려 그에게 호감을 보낸다. 오히려 벤이 동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보안관과 목장주가 비열하거나 더한 악한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벤 역시 돈을 노린 보안관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에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으로 등장할 정도.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의 태도에는 전통적인 장르의 가치 기준을 위반하는 재미가 있다.

<3:10 투 유마>는 한 발 나아가 이들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마저 제시한다. 댄이 벤의 호송을 맡은 건 그가 정의에 불타는 도덕군자기 때문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당장에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벤의 호송에 참여하는 것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나라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돈을 위해 정의를 도모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 초기 서부극이었다면 마땅히 정의의 용사로 그려졌어야 하는 캐릭터지만, 세월이 변한 만큼 서부극이 품고 있는 함의 역시 변했음을 벤의 캐릭터는 증명해 보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해답은 대장의 탈출에 목숨을 건 부하들을 바라보며 댄에게 던지는 벤의 대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악당이 아니었다면 부하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부려먹는 약육강식의 세계, 악당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먹힐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가 진정 노리는 지점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구분 없이 자신이 획득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을 보여준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이 다음 세대에도 거듭할 만큼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댄의 14살 아들 윌리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특히 마지막 대결이 그의 시점으로 비춰지는 건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의 신화를 옹호하는 장르였던 서부극은 선악의 경계가 역전된 수정주의 서부극을 거쳐 이제 현재의 비극이 대물림되는 ‘신수정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10 투 유마>는, 그 결정적인 증거다.


Tip!  디트로이트의 디킨스, 엘모어 레너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1925년 10월 11일 뉴올리언스 출신인 엘모어 레너드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이자 할리우드 작가다. 1953년 소설가로 데뷔, 총 44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중 21편의 작품이 영화화됐으며(TV 포함), <The Big Bounce>(1969) ‘Three-Ten to Yuma'(1953)는 두 차례씩 영화화되기도 했다.

<Rum Punch>(1992)를 원작으로 한 <재키 브라운>의 쿠엔틴 타란티노, <Out of Sight>(1996)를 원작으로 한 <조지 클루니의 표적>의 스티븐 소더버그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엘모어 레너드는 현재 82세에도 불구, 지난해 <Up in Honey’s Room>(2007)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 신문 헤드라인을 연일 장식했던 ‘보니 앤 클라이드’ 사건과 당시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야구단의 경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독할 정도의 현실성과 생생한 대화로 할리우드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찰스 디킨스’라는 별명을 가진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도시에 사는 인물들을 주로 다루는 까닭에 하드보일드 혹은 누아르 이미지로 전환하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종종 ‘뻣뻣한 레이몬드 챈들러 소설’이라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Freaky Deaky>(1988)가 배우이자 감독인 찰스 매튜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에 있는 등 그의 명성은 여전히 확고하다. 국내 출간된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모험> <악어의 심판> <보안관과 도박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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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75호
(2008.2.19)

<프레스티지>(The Prestige)


영화와 마술의 공통점은 트릭, 즉 속임수를 기본으로 하는 장르라는 점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마술은 무대장치를 통해 관객을 황홀경에 빠뜨린다. <메멘토><배트맨 비긴즈>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프레스티지>는 영화이면서 한 편의 마술이자 거대한 속임수다.

앤지어(휴 잭맨)와 보든(크리스천 베일)은 런던의 잘 나가는 마술사. 그런데 둘 사이에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마술쇼를 벌이던 중 보든의 속임수로 앤지어의 아내 줄리아(파이퍼 페라보)가 목숨을 잃은 것. 이후 앤지어와 보든은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던 중 목숨을 건 마지막 마술 승부를 펼치기에 이른다.

<프레스티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술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힌다. 평범한 것을 보여주는 1단계, 이를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2단계, 그리고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마술 ‘프레스티지’는 3단계라는 것. 그래서 영화는 이를 형식으로 구조화한다.  앤지어가 보든의 마술 책을 보는 시점, 보든이 앤지어의 일기장을 보는 시점, 그리고 두 주인공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시점으로 나누어 3개의 상황대별로 교차해 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속임수의 최고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감독은 마지막 순간 영화의 ‘프레스티지’랄 수 있는 반전을 심어놓는다. 

하지만 <프레스티지>의 그것은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오로지 반전을 향해서만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반전이 생겨난다. 그 내용과 상관없이 반전이 형식상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반전이 허무한 건 사실이다. 그 트릭이 관객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만큼 싱겁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레스티지>를 실패한 영화로 본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될 듯하다.  이미 언급했듯 이 영화에서의 반전은 그 내용보다 ‘왜’ 등장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프레스티지>는 극 사이사이마다 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을 강조한다. 마술은 그 황홀함의 결과와 달리 속임수의 방법이 의외로 간단할 뿐더러 그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신비감이 깨져 매력이 사라진다는 것. 이를 인지한다면, 이 영화에서의 반전의 쓰임새가 훌륭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술에서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허무해지는 속성을 <프레스티지>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건, 이 영화의 홍보다. ‘침묵서약’ ‘경악할만한 반전’ 등의 문구를 앞세워 <프레스티지>가 오로지 반전으로만 존재 의미를 갖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프레스티지>는 마술이라는 장르를 영화 속에 구조로, 또 형식으로 체화해 보여주는 데 더욱 공을 들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2006. 11. 11.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