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만 있고 시대는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영화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오랫동안의 침체를 벗고 <그림자 살인> <7급 공무원> <박쥐> 등이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관객의 취향을 잘 간파한 결과다. <그림자 살인>은 최근 불어 닥친 추리소설의 인기를 등에 업고, <7급 공무원>은 우울한 정국을 잊게 해줄 코미디를 통해, <박쥐>는 전 세계적인 뱀파이어 붐을 타고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작품은 모두 시대와 무관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애국심에 호소하든가(<그림자 살인>),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현실을 무력화하고(<7급 공무원>), 심지어 시공간의 정체를 파악하기조차 힘들다(<박쥐>). 안 그래도 최근 발표된 한국영화들은 <똥파리>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 같이 시대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시대를 반영한 영화의 제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광주 민주화 항쟁 피해자들이 전직 대통령 암살 계획을 세운다는 <29년>은 캐스팅을 마친 상태에서 투자가 되지 않아 제작이 중단됐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여당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까닭에 투자자들이 꺼린 탓이다. 현 정부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소재를 다룬 작품은 이미 시나리오 선별 단계에서 걸러지는 것이 작금의 충무로 현실이다. 한국영화는 시대를 비판할 촉수를 잃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전위를 자처하던 한국영화가 노골적으로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유행은 난무하지만 시대를 선도할 외침은 사라졌다. 현실에 치인 관객은 짧은 위안을 가져다주는 즐거운 별세계 영화에만 반응할 뿐이다. 흥행이 들불처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덩그러니 취향만 남았다.  일러스트 허남준



사용자 삽입 이미지


GQ KOREA
2009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