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의 최민식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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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은 비리 세관원에서 거물 로비스트로 전향하는 최익현(최민식)을 통해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버지 세대의 욕망을 풍자한다.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이 돼야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욕망 과잉의 시대. 최민식의 과잉 연기는 <쉬리>(1999)의 박무영, <파이란>(2001)의 이강재,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 <악마를 보았다>(2010)의 연쇄살인마 등으로 정평이 나있다. 보스가 종친임을 앞세워 궤변과 허세로 조직의 대부 행세를 하며 가문의 재산을 불리는 최익현의 욕망은 발산으로 연기의 끓는점을 보여주는 배우 최민식의 특징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다. 다만 이전의 대표작 캐릭터들이 다소 인공적이면서 워낙 강렬했던 까닭에 연기를 위한 연기라는 인상이 강했다면 욕망 과잉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체현한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배우가 아닌 인물 자체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모로 욕망의 강약조절을 구사하는 연기는 좀 더 현실의 지면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한동안 침체를 면하지 못했던 최민식의 재기작으로 손색이 없는 연기에 대해 극 중 대사를 빌려 평가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최민식 연기, 살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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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악마를 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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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만한 결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하기로 한국영화에서 제일간다며 연일 시끄럽다. 다루는 수위가 신체를 절단하고 훼손하는 것으로 모자라 인육을 씹어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 논란을 겪기도 했다. 약혼녀를 잔인하게 살해당한 남자의 복수극이니만큼 섬쩍지근한 장면 연출은 필수불가결 했을 터. 다만 김지운 감독은 이를 부수적으로 삼는 것이 아닌, 상영시간 내내 전면에 드러내놓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진가가 드러난다.


복수, 무의미의 의미

그 남자는 다름 아닌 국정원 경호원 출신의 김수현(이병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범을 쫓은 결과, 놈은 밥 먹듯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장경철(최민식)로 밝혀진다. 수현은 인간병기의 재능(?)을 살려 경철을 사지로 모는데 웬걸 팔목 하나 부러뜨리는 정도로 끝을 본다. 대신 추적 장치를 몸에 심고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마다 나타나 다시 손을 본 후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약혼녀가 겪은 고통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되갚아주기 위한 수현의 벼린 복수극. 하지만 경철도 만만치 않은 놈인지라 마냥 않아서 당하지만은 않는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를 출발 신호 삼아 직선주로를 달려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마는 영화다. 일찌감치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고 시작하는 영화는 이후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수현의 경철에 대한 치밀한 복수, 경철의 수현에 대한 무차별적 반격을 집요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얼음장 같은 수현과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경철의 대결로 압축되는 영화는 광기라는 목적지를 향해 한 눈팔지 않고 돌진한다. 그 과정에서 김지운 감독은 관객의 입장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잔혹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금기가 없다. 둔기로 머리통을 바수어 짓이긴 자두처럼 만드는 건 예사다. 수술용 메스를 발목에 찔러 넣어 아킬레스건을 그어버리고 두 손으로 입을 사정없이 찢어버리는가 하면 드라이버로 뺨을 뚫은 채 그대로 둘 정도다.

이런 장면들이 과도하게 등장하게 된 영화적 배경의 맥락에 상관없이 잔혹함의 정도가 관객을 정신적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것임은 자명하다. 헌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악마를 보았다>의 악명 높은 폭력의 스펙터클은 장르 연출에 출중한 감독의 자기만족을 위한 악취미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특정한’ 나쁜 공기를 예민한 예술적 촉수로 포착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 ‘악마를 보았다’에는 주어인 ‘누가’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상태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남자와 서서히 악마가 되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임을 고려할 때 수현의 입장에서는 경철이, 경철의 입장에서는 수현이 악마가 되는 셈이다. ‘수현은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경철은 (수현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극중 인물보다 관객을 소환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마성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화한 장면들은 명백히 관객을 겨냥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입할만한 대상은 누가 보더라도 수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수현이 경철에게 가하는 앙갚음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아마도) 첫 번째 복수까지다. 이후 경철을 풀어주고 다시 붙잡아 죽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입히기를 반복하는 수현의 행동에 관객은 더 이상의 대리만족 대신 당혹감과 불쾌감에 진저리친다. 복수란 게 그렇다. 분노를 잠시간 억제할 수 있는 진통제는 될지언정 궁극의 치료책은 아니다. 더군다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저울질에는 평형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누가 더 악마인지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경철도 그렇지만 복수의 끝에서 수현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파멸에 가깝다.

복수가 의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의미’다. 그게 복수의 진실이다. 김지운 감독은 복수의 무의미함을 생성하기 위해 잔혹한 장면을 반복에 가까울 만치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스펙터클화한(化)다.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과녁을 잘못 겨냥한 셈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살인을 즐기는 경철이나, 그런 ‘개사이코’에게 자체 징벌을 가하겠다며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수현이나 정신 나간 것은 매한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악마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악마라는 것을 ‘누가’ 지켜보고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어의 자리를 생략해가면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제목을 지은 그 배경에는 관객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읽힌다. ‘관객은 (수현과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 복수의 폐해에 대해 반응토록, 더 나아가 사유토록 이끄는 것이 이 영화의 노림수다.


악마, 우리 욕망의 발로

물론 제목과 잔혹한 장면의 연관성만을 가지고 복수에 대한 사유를 들먹이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장르성이다. 현실의 가장 첨예한 비극을 끌어와 게임 다루듯 가볍게 전락시키는 게 아니냐는 거다. 더 나아가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장르가 리얼리즘과 충돌할 때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장르영화는 현실의 특정한 공기를 허구화하여 오락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일종의 형식의 스타일이고, 이야기의 규격화다. 그런 점 때문에 장르영화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노골적으로 불러일으키면 관객은 불경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대중의 욕망이고, 한편으로는 자각되지 않는 내적 죄의식의 발로다. 장르영화는 적극적인 시대 반영과 관객의 내밀한 욕망과 욕구의 구체화를 통해 자체 진화를 꾀하여왔다. 특히 복수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감독들이 즐겨 연출하는 장르인데 최근 충무로에서 복수 소재의 영화는 하나의 트렌드다. 트렌드는 그 사회의 특정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연쇄살인마가 활개 치는 사회,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공권력 부재의 사회, 그럼으로써 사적 복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결국 잔인함에 둔감해진 사회를 <악마를 보았다>는 거울처럼 반영한다. 거울(스크린) 앞에선 관객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우리의 모습 앞에서 힘들게 버티거나 결국 도망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상업영화로는 드물게 평균율의 대중의 취향과 타협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독하게 밀어붙인다는 점도 관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의 잔인함을 들어내면 <악마를 보았다>는 주인공들을 통한 꽤 굵직한 사고(思考)를 숨긴다. 앞서 밝힌 바, 복수의 유해함이 수현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라면 경철의 책임에 대한 창작자의 입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또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는 김지운 감독 작품 중 가장 치밀하게 구성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느 블로거는 경철의 반격을 접한 수현이 왜 처제에게는 전화 한 통화 걸지 않았는지, 형사 경력 30년의 장인어른은 경철의 방문에 한 점 의심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는지 등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보를 보았다’고 비꼰다.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영화의 작품성을 뒤엎을만한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그 의도를 간파하기 쉽지 않았던 전작들의 결말과 달리 <악마를 보았다>의 결말은 이야기 구조에 비추어 보건데 가장 합리적일뿐더러 감독의 ‘어떤‘ 견해를 농축하고 있기에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악마를 보았다>에는 잘린 머리통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이 총 두 번 등장한다. 실종된 수현 약혼녀의 머리통을 회수한 경찰이 인파를 밀치고 이동 중 발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한 번, 수현이 설치한 단두대에 의해 잘려나간 경철의 머리통이 그의 부모와 아들 앞으로 굴러가는 것이 또 한 번이다. 두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 수미상응의 형식을 이루면서 그 속에 특정한 의미를 내포한다. 수현의 극중 행동처럼 경철에게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되갚는다는 의미(그래서 경철의 부모 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처형식에 참관시킨다.)도 있고, 무엇보다 김지운 감독은 경철과 같은 악인의 존재는 본인 뿐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보험업자로 위장한 수현이 경철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경철 모(母)는 그의 악행을 감싸기 급급하고 경철 부(父)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보험금에만 관심 있는 눈치다. 아들에 대한 빚나간 모정과 자식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책임 의식의 부재.

이 부분에서만큼 <악마를 보았다>는 이창동 감독이 <시>에서 보여줬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론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창동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청소년 범죄는 부모, 정확히 말하면 학부모의 책임이다. 학부모에게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있고 보상해야 한다면 그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철의 연쇄 살인 행각을 청소년 범죄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점에서 <시>와 <악마를 보았다>가 동일한 맥락을 공유한다고 보는 것은 경철의 악마성이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무관심 하에 더욱 몸집을 불렸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다면, <시>는 피해자의 윤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가해자 손자를 둔 할머니를 내세워 시를 통한 속죄로 세상의 희망을 긍정한다. 반면 <악마를 보았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마구잡이로 죽음을 일삼는, 그리고 묵인하고 외면하는 부모 세대를 보여주면서 지옥과 같은 세상을 절망한다.

죽음을 굳이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역으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와 달리 <악마를 보았다>는 과잉의 죽음 묘사로 오히려 고통에 둔감해지도록 (유도)한다. 고통에 무감각한, 더 정확히는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죽은 사회다. 갈수록 잔인해지는 한국영화가 많아지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용서는 없다> <무법자> <파괴된 사나이>와 지금 개봉중인 <아저씨>와 곧 개봉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까지. 왜 이들 영화는 잔혹해진 것일까? 잔혹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의 정점에 놓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악마를 보았다>는 타인의 고통을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이토록 참혹한 무간지옥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영화에서 두려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실제로 우리가 외면하려는 것(들)의 표상이다. 당신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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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8.20)

거대 로봇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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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트랜스포머’ 인간이 스크린을 주름살 잡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은 갔다. 2년 전 거대 로봇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던 <트랜스포머>가 다시 한 번 스크린을 정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다. 이에 맞서 작은 규모의 영화로 중무장한 인간들의 역습도 만만치 않은 전차로, 6월은 가히 ‘다윗vs골리앗’의 대결이라 할만하다.


절대강자 <트랜스포머2>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6월 25일 나 홀로 개봉할 정도로 일찌감치 2009년 상반기 기대작으로 자리 잡은 터. 전편에서 만화 상에만 존재하던 로봇들이 뿅~ 실사로 구현돼 많은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탕에 빠뜨렸던 만큼 벌써부터 로봇들의 사자후가 전 지구에 울려 퍼지누나. 

<트랜스포머2>는 오토봇과의 로봇전쟁에서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 ‘다구리’ 당한 디셉티콘이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디셉티콘은 나쁜 로봇 놈들을 규합해 좋은 로봇 분들과 전쟁을 펼치니, 1편에서 12놈이었던 트랜스포머가 2편에선 40놈으로 늘어났단다. 싸우는 장소도 미국을 넘어 상하이에, 파리에,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 전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바, <트랜스포머2>는 전편보다 더 많아진 로봇들이 더더 거대한 전쟁을 펼치는 더더더 똥꼬 긴박한 상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렇게 로봇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판을 치는 형국이라 샤이어 라보프와 메간 폭스 등 우리의 비정규 인간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할 일이 많이 줄어들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림이다. 갈수록 설 자리를 잃는 작금의 일자리 위기를 반영하듯 <트랜스포머2>는 1편에 비해 더욱 어두워진 비전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다만 로봇들이 막간을 이용해 연료를 보충하는 동안 마이클 베이 감독께서 쭉하고 빵한 메간 폭스의 몸매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특별히 마련해 인간 배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고. 단, 가족영화라 수위 조절이 이뤄졌다고 하니 서서쏴 관객들이여, 과도한 기대는 금물!


작은 영화의 역습

볼거리 면에선 비할 바 못 돼지만 작품성 면에선 <드래그 미 투 헬> <로나의 침묵>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 <트랜스포머2>를 약 깻잎 1.2장 차이로 능가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메가폰을 잡은 등골 오싹하고 오줌 찔끔하고 모골 송연한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모아진다. 벨기에 영화 <로나의 침묵>은 예술영화계의 지존무상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란 점에서,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은 <친절한 금자씨> 이후 오랜 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홈한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입장료 투자가 아깝지 않은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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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6월호)

<올드보이>(OldBoy)


전작이 쫄딱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강렬한 스타일 덕에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을 배로 더했던 박찬욱 감독, 그가 신작을 내 놓았다. <올드보이>.

거기에 국내 최고 연기파 배우 중 1人인 최민식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 젊은 아덜도 소화하기 힘들다는 마카로니 파마를 멋지게 소화하여 눈길을 끈 점, 또한 그 선하디 선한 눈망울 덕에 악역은 평생 맡지 못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유지태가 악당(으로 보이는) 역에 캐스팅 된 점 등 당 영화가 뿜어대는 화제는 실로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이라 아니 할 수가 엄따.

그리고 개인적으로 <은실이> 시절부터 눈 여겨 보아왔던 ‘영채’ 강혜정이 출연한다는 것까정… 므흣

그러니 이 문제적 영화를 본 우원이 어찌 기냥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으랴, 해서 늦었지만 검열평 올린다.

1.

당 영화 <올드보이>는 츠치야 가롱(Tsuchiya Garon)이 이야기를 쓰고 미네기시 노부야키(Minegishi Nobuaki)가 그림을 그린 일본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이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만화가 국내에 소개된 지 벌써 7~8년이 지났고 또 원작이 있다니까 그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자너, 그래서 원작만화에 대해 잠시간 썰 풀자면..

결혼을 앞둔 며칠 전 원인도 모른 채 실종된 주인공 고토, 깨어나보니 침대와 테레비만 딸랑 있는 어느 방안에 감금되어 있다. 그 방에서 자신이 왜 갇혀있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군만두로만 연명한지 10년, 풀려난 뒤부터 고토는 자신을 이케 만든 장본인을 찾아 나선다.

근데 독자제위덜께서는 본 우원이 원작의 이야기를 얼마간 까발렸다고 해서 지금 혹시 ‘씨바, 당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허, 오해 마시라. 관람에 방해될 정도까지는 밝히지 않을테니. 그랬다 그 후환을 어케 감당하려고…

웬만해선 당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불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완전 백지상태에서 당 영화를 관람하고 싶다면 지금 즉시 빠꾸 버튼 누질러 다른 기사 찾아보시덩가 하시고.

애니웨이, 그래서 군만두 맛을 단서 삼아 자신을 10년 동안 감금한 이를 만난 고토. 결국 고토는 그가 자신의 학창시절과 관계 있는 넘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머리는 좋았으나 하는 꼬라지나 생김새가 형편없어 반에서 왕따를 당했던 그의 뼈저린 고독을 고토가 알아차렸기 때문에 감금당했다는 기상천외한 이유가 밝혀지면서 원작만화는 그렇게 끝맺음된다. 절라 허무하게…

이것이 원작만화 <올드보이>의 대강의 스토리다. 모, 이거 알았다고 크게 걱정은 마시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이유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풀려난 뒤 이를 밝혀낸다는 원작의 설정은 따르고 있되 그 외의 부분들은 상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혀 다르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사실 원작 <올드보이>의 경우, 감금당하는 쥔공의 설정이나 그가 그 이유를 추리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재미는 끝내줬으나 그것에 비해 결말이 허탈할 정도로 시시하고 게다가 인물들의 깊은 묘사 없이 오로지 이유를 밝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까닭에 전체적으로 앙상하고 건조한 느낌이 든다.

박찬욱 감독이 많은 언론에서 당 영화를 ‘과잉’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얘기하는 까닭은 아마 이런 부분들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영화를 ‘과잉’으로 보이게 하였을까?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인물에 대한 묘사다.

당 영화에서 감금당하는 역을 맡은이는 ‘오늘이나 대충 수습하고 살자’는 엄청난 뜻이 담긴 이름의 오대수(최민식 분), 그리고 그를 15년(영화에서 감금기간이 5년 늘었다)이나 갇혀있도록 만든 이는 ‘젠틀맨’ 이우진(유지태 분)이다.

원작에선 이들이 단순히 쫓는 인물과 의도적으로 쫓기는 인물의 구도 속에 인물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박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당 영화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처한 상황이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로 설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도 만화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대수가 굉장히 폭발적이고 즉흥적이며 칙칙한 인상을 준다면 이우진은 그와는 정반대로 무척 차분하며 치밀하고 깔끔하게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살고 있는 장소조차 ‘몇 평 안 되는 감옥 또는 단칸방 vs 100평이 넘는 사치스러운 펜트하우스’로 처리됨으로써 둘이 대립하고 있는 구도를 더욱 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감정이입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인물의 성격이 잘 살아나도록 하였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정반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끝에 가보면 오대수, 이우진 모두 복수가 살아가는 원동력(?), 즉 성격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또한 시간차이는 있지만, 같은 처지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 역시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니까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실은 같은 인물인 셈이다.

사설감옥에서 15년 만에 풀려난 오대수가 옥상에서 자살하려는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고 있는 구도가 나중에 이우진에게 같은 모습으로 적용되는 등 당 영화에서 이야기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반복의 형태가 눈에 띄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 영화는 차고 넘친다는 인상을 준다.  

3.  

그런데 이런 느낌이 드는 건 단지 반복의 구도가 되풀이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 영화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스똬일에 있어서도 역시 차고 넘친다는 과잉의 느낌이 드는데 특히 영화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지는 폭발적인 음악소리를 접하고 있노라면 감독이 ‘나 이 영화 존나게 넘쳐나게 만들 거야, 씨바!’ 라고 작정하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졌던 메마르고 차분한 맛이 돋보였으며 그로 인해 안정감을 주었던 스타일과 비교하면 그 느낌이 더욱 확연해진다.  

일단 사운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 영화에는 정말 음악이 많이 나온다. 영화 시작한 다음 중반정도에 가서야 음악이 흘러나오던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하면 상영 내내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될 정도다.  

게다가 마빡 하나가 스크린을 반이나 차지하는 클로즈업이 사용됨으로써 굉장히 극단적인 기운이 감지되며, 컷 수에 있어서도 당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서 많은 편인데 특히 오대수가 15년 동안이나 갇혀있던 사설감옥에서의 생활을 5분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의 컷 편집은 분할화면까정 끌어들이면서 보다 빠르고 현란하게 구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누아르 화면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촬영기법이라든지 거친 입자가 돋보이는 화면 등 <올드보이>에는 많은 영화적 기교가 사용되고 있고, 세트구성에 있어서도 오대수가 갇히는 방, 미도(강혜정 분)의 방, 대수와 미도가 잠시 묶는 여관의 벽지를 격자무늬의 컬러풀한 것으로 설정하여 색깔 있는 화면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오대수가 자신이 감금되었던 장소에서 17:1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다른 장면들과는 달리 원 컷트 원 씬으로 단순간단명료하게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폭이 여타의 과잉이 느껴지는 장면들에 비해 더 크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 낼 수가 있다. 감독이 생각한 의도가 단순히 돈을 많이 들이고 기교로 무장한다고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하고 그런 기교들이 스토리를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할 때 가장 적합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얘기.

그니까 종합해 보자면 당 영화에서의 ‘과잉’은 그냥 겉멋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복수’라는 폭발적인 감정을 묘사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표현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당 영화는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보여 만화스럽다는 느낌도 드는데 이처럼 여러 모에서 보았을 때 감독이 당 영화 <올드보이>를 ‘과잉’으로 떡칠(?)한 건 아주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4.

그러나 이 모든 걸 떠나서 관객이 당 영화를 통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는 건 모니모니해도 그 반전의 충격이 얼마나 쎈가하는 그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당 영화가 노리는 반전의 효과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는 그 사실 하나가 <유주얼 서스펙트>의 전부였던 것과는 달리 <올드보이>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의 반전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또 놀랍지도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 영화가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중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반전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당 영화에서의 반전은 <식스센스>처럼 마지막까지 쌓아온 논리를 한 번에 박살내는 그런 이성적인 충격이 아닌 금기를 대할 때의 정서적인 충격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밝혀졌을 때 영화가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닌 이로부터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 역시 <올드보이>가 여타의 반전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최근 반전영화가 많아지면서 안 해도 될 반전을 억지로 낑궈서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건 물론이고 같지 않은 반전을 마케팅 뽀인트 삼아 관객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작금의 反반전적인 영화들이 횡행하는 작태에 비추어 볼 때 당 영화가 반전에 목숨 걸지 아니하고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훌륭한 점이었다.      

하지만비유띄벗뚜…

이 반전의 결과가 ‘모모모’와 같은 현상에 기대고 있는 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특히나 당 영화가 많은 단서와 암시를 영화중반에 흘러 놓으며 꽤 치밀하게 진행되었던 이야기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식의 처리는 쫌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관계가 형성되어 가는 이전의 이야기에 비해 재미를 떨어뜨린 부분이었다. 앞서의 상황들을 꽁으로 먹고 들어간다는 느낌이랄까…

우찌됐던 그리하야 당 영화는 이야기면 이야기, 스똬일이면 스똬일, 이 두 요소가 ‘복수’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통일성을 이루며 독특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만 딱 하나, 반전 부분의 허탈함으로 인해 강한 에너지가 발산되는 그 뒤의 이야기가 크게 어필하지 못한 점, 그래서 재미의 반감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의 짜임새가 다소 헐겁게 된 점은 심히 안타까웠음이다.  

5.

이렇게 해서 당 영화 <올드보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론 가보자.

당 영화, 스타일이 화사해지고 잔혹한 묘사가 줄어들긴 했지만 영화 전편에 흐르는 잔인한 기운이랄지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예기치 몬한 설정은 <올드보이>가 <복수는 나의 것>처럼 매우 논쟁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직도 박찬욱 감독에게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보여준 재미를 기대하고 당 영화를 관람했다간 심히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당 영화의 반전 이후 부분은 알려진 것과 달리 그렇게 뒷골을 땡기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것도 아니었고 뽕나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음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보다 <올드보이>는 상이한 두 캐릭터의 면면이라든지 그 스똬일이 더욱 흥미 있는 영화였다.  

그런 전차로, 한결같은 만쉐이~ 대형을 보이고 있는 재래식 언론에 현혹되어 당 영화를 향한 과도한 기대감을 품거나 또한 반전이라는 부분에만 뽀인트를 맞추어 이것 외에 당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미난 부분을 놓치는 愚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아무튼 여러 의미에서의 문제작, <올드보이>에 대한 검열보고 여기서 마친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