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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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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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차우>(Ch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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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란 영화가 참으로 별나다. 블록버스터인줄 알았더니 B급영화이고, 공포물인줄 알았더니 코미디였던 것이다. 영화의 감독이 바로 <시실리2km>를 연출했던 신정원임을 상기할 때 이와 같은 결과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다만 줄거리만 보면 <차우>는 괴수물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모범적인 장르영화다.  

식인 멧돼지 ‘차우’가 출몰하는 지역은 작은 농촌마을 삼매리. 사람들이 하나둘 잡혀 먹이면서 마을엔 공포의 기운이 감돌지만 도시민을 상대로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지역유지들은 돈을 벌기위해 이를 모른 체한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결국 서울에서 좌천된 김순경(엄태웅)과 사건 해결을 위해 급파된 신형사(박혁권), 현역 최고의 포수 만배(윤제문)와 전설적인 포수 일만(장항선), 그리고 동물학자 수련(정유미)은 우여곡절 끝에 팀을 구성해 차우 사냥에 나선다.

<차우>는 표면상 차우와 인간의 사투로 보이지만 신정원 감독은 그와 같은 관객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 안에는 <죠스> <레이더스> <쥬라기 공원> 등 주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에서 가져온 패러디가 있고, 기존의 이미지를 비튼 배우의 우스꽝스러운 변신이 있으며, 일반적인 틀과 리듬을 벗어난 기괴한 웃음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식인 멧돼지를 두고 설왕설래를 거듭하는 인간들의 웃지 못 할 소동에서 빚어진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차우>의 소동을 야기하는 것은 삼매리 구성원들 간의 갖가지 충돌이다. 지역유지들은 오로지 돈만 생각하며 경찰의 안전경고 따위 강 건너 불구경 보듯 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외지인 김순경은 삼매리 내지인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며, 마을잔치 무대에 선 록그룹 공연에 삼매리 어른들은 전혀 호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한국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갖가지 병폐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개발논리 앞에 자연은 무방비상태고 지역갈등은 여전하며 세대 간의 벽은 높기만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신정원 감독은 전작 <시실리2km>에서 그런 한국사회를 풍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식인 멧돼지 차우는 한국사회의 충돌이 빚은 피조물이다. 극중 인물들에게 차우는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뒤죽박죽(?)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그래서 <차우>는 괴수물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소동극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이야말로 <차우>의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라고 생각한다. 신정원 감독은 여러 인터뷰 자리에서 CG부분에 대해 예산과 기간 부족을 감안한 최선의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씨네21 713호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애초 내가 생각한 것만큼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약 차우가 사람을 물고하는 장면까지 다 만들려 했다면 아마 지금까지 찍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정원 감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원 하에서 가장 합당한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고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다름 아닌 블록버스터 급의 B급괴수물이라는 점이 내겐 흥미로운 것이다. 

<차우>의 홍보는 오로지 블록버스터 괴수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B급의 이미지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아마도 <괴물>이 밟았던 1300만 관객동원의 후광을 얻으려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60억의 소동극과 120억의 괴수물 간의 간격만큼이나 <차우>는 <괴물>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여기에는 한국영화계의 대박에 대한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영화계의 대박에 대한 욕구가 <차우>와 같은 형태로 구현될 때 나타나는 당황스러운 반응들은 정확히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QOOK블로그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