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소식부터 전하고 시작해야겠다. 나는 지난 번 ‘<판타스틱>이여, 영원하라!’ 기사를 통해 장르문학 월간지 <판타스틱>의 복간을 기뻐하며 척박한 국내 장르문학 시장에서 되도록 오래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에 쓴 글이었는데 내용이 무색하게 <판타스틱>의 재휴간 소식이 들려왔다. <판타스틱> 편집부가 블로그(http://blog.fantastique.co.kr/)를 통해 휴간 공지를 띄운 것. ‘보다 근본적인 검토와 장기적인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월간 <판타스틱>을 휴간하게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문구를 보면서 국내 장르문화의 빈곤함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살아야 <판타스틱>이 살고 <판타스틱>이 살아야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판타스틱>에 거는 기대가 컸지만 예상치 못했던 휴간이 장르문학 시장의 절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싶다.) ‘장기적인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해’ 이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작은 규모나마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살 길 찾기에 대한 방안 마련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이는 중견 규모의 장르문학 출판사들이라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일 텐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때론 어떤 트렌드를, 혹은 어떤 징후를 나타내기도 한다.
현재 장르문학 시장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화두는 ‘중편’이다. 이미 블로그나 트위터가 일상화된 지 오래인데 출판계 역시 짧은 글에 익숙한 독자들의 성향에 맞추기 위해 단편에 많은 공을 들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단편선 출간이 유행을 넘어 대세로 굳어진 이때 중편의 출현은 현재 장르문학 출판사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대개의 장르출판사들이 중편에 대해 보이는 관심은 말 그대로 ‘관심’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지만 중편 시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만큼은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야베 (미유키) 월드’ 시리즈로 유명한 출판사 ‘북스피어’가 로저 젤라즈니의 중편 <집행인의 귀향>을 선보이면서부터 하나둘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북스피어는 지난 1월 말 중편을 모은 문고 형식의 총서 ‘에스프레소 노벨라’(Espresso Novella)의 준비호에 해당하는 첫 번째 책(출판사에 따르면 0호)으로 <집행인의 귀향>을 출간했다. 이는 장편과 단편선 위주로 출간이 이뤄지고 독자의 관심이 모아지는 국내 장르문학 시장에서 획기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순문학에 비해 여전히 자리 잡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르문학 시장에서, 더군다나 중편의 가치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북스피어의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출간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목표지향점이 보인다. 장르문학의 출간은 대개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발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에스프레소 노벨라는 장르문학에 입문하고픈 예비 독자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북스피어의 발행편집인 김홍민은 ‘Espresso Novella 출간에 부쳐’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렇게 얘기했다. “왜 장르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인가. 이 세계는 단순하게 말하면, 기존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해서 구획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너무 커서 잘 모르겠을 뿐인 그런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계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예상외로 많다. … (중략) 중편 분량의 소설 전집은 어떨까. 입이 딱 벌어질 대작들과 도통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는 값비싼 장정의 도서들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오늘, 일단 분량 면에서 만만해 보인다. 가령 젤라즈니의 중편을 내면서 뒤쪽에는 젤라즈니에 관한 다양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덧붙인다면. … (중략) 독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말하자면 이런 ‘콘셉트’의 전집인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중편에 관심을 쏟는 장르문학 출판사의 동향에 영화계는 겉으론 무심한 척 실제론 예의주시하고 있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뒤따라야 할 듯하다. ‘충무로의 장르탐험가’ 연재를 통해 영화계가 국내 장르문학에 보이는 관심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한국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이상한 일이다. 한두 편도 아니고 열편이 넘는 장르소설이 영화판권 계약을 맺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제작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는 건 단순히 시장의 문제로만 넘기기엔 영화계 내부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시나리오 작가의 부재와 능력 부족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장르소설 팬의 입장에서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단편의 경우, 장편 영화 분량으로 늘이는 역량이 부족해서, 장편의 경우, 방대한 양을 2시간의 상영시간으로 압축하는데 애를 먹어서, 라는 게 영화계와 장르문학 출판사 관계자들이 전하는 장르소설 영화화의 지지부진한 이유다. 영화계가 중편 소설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그래서다. 중편은 시나리오로 옮기는데 무엇보다 가장 적합한 분량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단편과 장편에 비해 각색 과정에서 생기는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에 따른 위험요소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생각이다.
이는 한국의 장르소설에 해당하는 경우일 텐데 안 그래도 이종호(<귀신전><분신사바>), 김종일(<손톱><몸>), 강지영(<심여사는 킬러><굿바이 파라다이스>) 등이 소속된 공포문학 창작 집단 매드클럽(http://themadclub.net)은 올 여름 ‘공포 문학 중편 컬렉션’(이하 ‘공포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중편소설 단행본 열권을 출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공포물을 대중영화의 주력 장르로 인식하고 있는 영화계가 눈독을 들일만한 콘텐츠임이 자명하다. 다만 사소한 오해라도 줄이기 위해 전제하자면, 공포 컬렉션은 영화화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프로젝트가 아니다. 공포 컬렉션은 오히려 국내 장르문학이 한 번에 열권 나오는 게 한국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공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라 할만하다.
이종호 작가는 지난여름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공포 컬렉션을 언급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단편을 쓰던 작가들에게 중편은 장편으로 넘어가기 위한 안정적인 징검다리 역할로 기능하게 된다. 워낙 큰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주목을 바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공포와 스릴러를 비롯하여 국내 장르소설의 형태가 단편선을 통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획된 공포 컬렉션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단편에서 중편으로 공포문학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는 과정에 있음을 증거한다. 여기에 중편을 선호하는 영화계가 그들의 바람처럼 성공적인 영화화를 이룰 경우 이에 맞춰 한국의 공포문학이 갖게 될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요는, 우울한 소식으로 기사의 포문을 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문학 시장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장르 출판사의 새로운 시도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는 중이다. 물론 워낙 척박한 시장이다 보니 <판타스틱>의 재휴간처럼 안타까운 결과가 초래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의 지점을 교훈삼아 리부팅은 여지없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번에는 ‘중편‘이란 형태로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국내 장르문학 시장에는 여전히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비스트
(20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