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사건>(Itaewon Sarinsag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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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MBC <시사매거진 2580>은 1997년 서울 이태원에서 벌어졌던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두 명의 10대 한국계 미국 유학생이 재미 삼아 대학생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12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다름 아닌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50만 명 정도의 관객을 모으며 큰 관심을 모으는데 실패한 이 영화가 오히려 시사 프로그램에서 주목을 끈 대목이 흥미롭다. 영화의 성격을 반영한 결과라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은 잘 알려졌듯 범인을 잡아놓고도 결국 범인을 풀어준 사건으로 유명하다. 두 명의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 살인자임이 확실하지만 서로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까닭에, 이에 더해 미국과의 소파협정이 수사의 발목을 잡는 등 이 사건은 한국 수사체계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에 다름 아니다. 홍기선 감독이 <이태원 살인사건>을 통해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영화는 사건 그 자체보다 이 사건이 어떻게 미제로 남았는지, 각종 진술과 재판 등 수사과정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태원 살인사건>은 <살인의 추억>에서 장르적 재미를 쏙 빼고 끝내 범인색출에 실패한 극중 박대진 검사(정진영)의 허탈한 표정을 앞세워 ‘진실이 감춰지도록 이 사건을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라며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다. 하여 폐쇄된 벽을 뚫고 들어간 카메라가 무참히 살해당한 피해자의 얼굴을 비치며 끝을 맺는 영화의 결말부를 두고 <이태원 살인사건>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처럼 범인 검거에 대한 홍기선 감독의 강한 의지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감독의 자의식이 반영된 박 검사는 틈만 나면 진범 색출을 위해 자문자답을 구한다. 특히 알렉스(신승환)가 범인임을 확신한 그가 환영 속에 살해자를 불러내 “알렉스 맞지?”라고 묻는 장면은 진실 촉구에 대한 감독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맴돈다. 서로 상대방이 진범임을 주장하는 두 명의 용의자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의 진술을 오가며 계속해서 사건 당시를 재현하기를 반복한다. 진실 찾기에 몰두하다보니 이야기가 진행된다 싶으면 살인 장소로 돌아오고, 다시 수사가 활발해진다 싶다가 난관에 부딪치면 카메라는 어느새 또 살인 장소를 비추는 등 실제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 스스로가 제자리걸음을 걷고야 만다.

그것은 한편으론 <이태원 살인사건>이 보여주는 연출의 우직함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은 장르적으로 꽤나 훌륭한 소재다. <살인의 추억> <조디악>처럼 미제 사건을 소재로 한 스릴러의 가능성도 엿보이고 <그놈 목소리> <추격자>처럼 수사의 후진성을 극의 동력으로 삼아도 괜찮았을성싶기도 하며 <어 퓨 굿맨>처럼 흥미로운 법정영화가 될 법도 했다. 하지만 홍기선 감독은 그런 잔가지는 모두 베어버리고 오락적 구성은 완전히 배제한 채 진실을 찾아 우직하게 나아갈 뿐이다.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 사건이 여전히 공소시효가 남아있고 살해당한 이의 가족이 재수사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비추고 있는 상황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이 취할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의 딜레마가 생긴다.

그 어느 누구도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보여준 감독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한다면 여전히 살아있는 두 명의 용의자와 그들의 가족 정도) 다만 선한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만듦새로 보건데 <시사매거진 2580>을 움직인 건 <이태원 살인사건>의 제작의도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함량미달에 가깝다. 영화는 TV고발프로그램이 아니다. 소재의 이슈적인 성격에 기대어 선의만 가지고 밀어붙이기엔 관객의 눈길을 붙잡아둘 영화적 요소가 너무 빈약하다. 피해 당사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장르적 효과를 추구했다면 어땠을까. 이를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객을 모았다면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욱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를 통해 진실 촉구에 대한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의 입장에서 내가 <이태원 살인사건>을 100% 지지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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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9)

<날아라 허동구>(Bunt)


장애를 가진 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장애를 극복할 대상으로 삼고 이를 넘어서는 것?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 채 비관하며 살아가는 것? 박규태 감독의 데뷔작 <날아라 허동구>는 장애를 가지고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물주전자에 집착하는 열한 살 동구(최우혁)는 아이큐가 60이다. 학급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점심시간 친구들의 컵에 물을 따라주는 것밖에는 없다. 하지만 동구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에서 학교가 제일 좋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진규(정진영)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동구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동구를 특수학교로 전학 보내려한다. 선수가 부족한 야구부에 입단하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는 얘기에 동구는 룰도 모르는 야구를 시작한다.

<날아라 허동구>는 대만의 베스트셀러 소설 <나는 백치다>를 원작으로 삼았다. <나는 백치다>는 발달장애 소년과 억척스러운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아버지가 전면에 나서고 있는 요사이 한국영화의 경향을 반영하듯 부자간 이야기를 담은 가족영화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자식의 장애를 치유하기 위해 눈물겨운 희생을 감수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로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동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로 인해 주위와 조화를 이루는 삶이 얼마나 감동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영화는 동구가 가진 장애를 전혀 극복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삶을 약간 불편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동구 삶의 전환점이 되는 야구에 대입하자면, 호쾌한 홈런을 날릴 수는 없지만 누상의 주자를 한 베이스씩 진루시킬 수 있는 번트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닌 게 아니라 <날아라 허동구>의 처음 제목은 <번트>였다. 야구에서 ‘번트’의 가치가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이런 생각이라면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될 건 없다. 동구나 그의 아버지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체념 대신 희망, 푸념 대신 익살로 풍파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규 부자가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사회의 역할이 전무하다 싶을 만큼 누락된 것은 의도가 어떻든 간에 여운을 남긴다. 마치 동구의 장애도, 진규의 가난도 이 사회에서는 원죄처럼 보일 뿐. 진규 부자처럼 삶을 살아갈 용기가 없거나 주변의 도움이 요원하다면 구원은 힘들다는 식이다. 인간승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흐뭇하게 지켜보면서도 씁쓸한 생각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FILM2.0 332호
(2007. 4. 24)

<황산벌>(Hwang San Bul)


당해 영화 <황산벌>은 신라, 고구려, 백제 핏줄만 같았지 사이라고는 개뿔도 안 좋은 이 삼국이 한 곳에 모여 지네 사투리로 마구 썰을 풀어대면 과연 어떤 커뮤니케이숑이 이루어질지 그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중국의 당을 등에 업고 한반도를 꿀꺽하려는 신라와 이들 나당연합의 보급로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 뻐팅기는 백제, 요 두 나라간의 황산벌 싸움을 배경으로 전라도 사투리와 갱상도 사투리를 충돌시키면서 발생하는 개그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아따 씨벌 와이리 듭노?”이러면 “겁나게 덥구마잉~” 이런 거.

그 중에서도 스피킹의 백미는 재래식 특수용어, 즉 욕설이라고 신라 정예 욕부대의 “조까조까”를 행위예술로 형상화한 절도 있는 동작에 맞춰 백제의 벌교 출신 욕쟁이 3인방이 “니 똥구멍에서 내장을 히껍 뽑아 선지국에 푹 담궈 우짜고저짜고 씨벌씨벌”거리는 대목은 근래 나온 코미디 영화를 통해 가장 우끼고 자빠라진 개그가 아니었다 싶다.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가 우직한 돌쇠마냥 사툴 스피킹 하나만을 내세운 개그로 뽕을 뽑을 때까정 일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당 영화는 강대국의 입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지보지되는 현재의 국제 정세와 완전 흡사한 660년 당시의 전황에 착안하여 극중 김유신(정진영 분)의 대사를 빌자면 “전쟁은 미친넘들 짓인기야!”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첨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계백(박중훈 분)이가 지 마눌과 자식내미덜 죽이고 전쟁터로 나가는 장면이 낭중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불재!’라는 계백의 말에 그 부인이 “호랭이는 그 꺼죽땜시롱 죽고 사람은 이름 땜에 죽는거시여라~”라고 자식새끼를 부여 앉고 목놓아 부르짖는 장면에 이르면 당 영화가 <황산벌>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자명해진다.

이처럼 당 영화는 엄밀히 말해서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우끼리라고만 생각했던 당 영화가 예상과 달리 묵직한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초반엔 우낌, 중반엔 감동 전략을 구사하는 당 영화가 중반까정 줄기차게 구사하는 사투리 개그, 이거 별루 안 우낀다.

그럼 왜 안 우끼느냐, 개그의 호흡을 전혀 못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 영화가 주로 구사하는 개그는 편지를 국어책처럼 또박또박 읽는다든지,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신~라 만세 짝짝짝 짝짝”으로 바꾸어 외치는 등 1회용 단순개그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요런 개그가 나올 때마다 한번에 딱 끊어주는 게 아니라 매번 길게 끌구 간다고 생각을 해바라… 흐미~

특히 이와 같은 안쓰런 경향은 당 영화의 중요한 뼈다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거시기’를 신라군이 해독하는 장면에서 뚜렷이 드러나는데 이미 관객이 그 의미를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지네들끼리 이게 몬 말입네 줄창 머리 쥐뜯고 있음 보는 관객 지루해서 워쩌라고…

그래서 본 특위는 이런 안 우낀 개그덜은 과감하게 싹둥 잘라 버리고 차라리 전쟁의 무해함 이 쪽으로 더 전념했으면 후반부 감동의 약빨도 더 살고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의 어색한 이음새도 깔끔하게 연결되지 않았을까 아쉬워 해보지만 이미 엎어진 거 우짜겠는가.

그런 전차로 초반엔 상당히 거시기하게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중반이후 상당히 선전하여 머시기한 결말을 보여줬지만서리 결국 전체적으로 상당히 거시기한 영화가 돼 버린 까닭에 당 영화 <황산벌>을 뮝기적에 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