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가까이> 김종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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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은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을 비롯하여 20여 편이 넘는 단편을 만든 독립영화의 스타감독으로 통한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첫 번째 장편영화로,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사랑의 감정 교류라는 일관된 주제 속에 하나의 궤를 만든다. 김종관 감독의 새로운 면모보다는 여전한 그의 감수성과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로테르담의 폴란드 남자와 서울의 한국 여자 간의 이야기다. 다섯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지만 감정적인 거리감을 주제로 삼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 같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라는 건 개인적으로 겪은 것도 있지만 수많은 거짓말을 덧칠해서 섞어버리는 거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조그만 화면으로 나오는 이미지들은 4년 전 로테르담 영화제 여행 가서 찍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구성해놓은 거짓말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처음에 배치했다.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을 폴란드인으로 설정한 건 왜인가?
로테르담 영화제 당시 단편 섹션에 함께 초청받은 감독이었다. 그때 얘를 데리고 핸디캡으로 뭔가를 찍어볼까 했는데 벌써 떠난 뒤였다. 실제로 폴란드 친구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로테르담처럼 먼 도시로 다닌다고 한다. 로테르담은 2차 대전 때 도시 전체가 폐허가 돼서 다시 재건축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분당 신도시 같은 곳이다. 옛날 것들이 남아 있지 않아 휑하고 외부인들이 많이 머무는 공간이다. 여자 친구를 찾으러 왔다가 직업을 구하는 쓸쓸한 폴란드 남자라는 설정이 로테르담과 잘 어울렸다.   

두 번째 에피소드와 네 번째 에피소드는 주인공이 같다. 그런데 굳이 떨어뜨린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연애는 다면적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다섯 개 에피소드로 쪼갰다고 할까. 정서적인 궤를 차고 있는 다섯 개가 모두 연결이 돼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두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를 붙이지 않았다. 내가 처음에 레퍼런스로 생각했던 영화는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이었다. 연결고리가 없으면서 각 에피소드끼리 소통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주제인 영화다. 하지만 현재형이라기보다 기억을 다룬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것이 영화가 주는 매력인 것 같다. 독립영화 쪽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니 (인터뷰가 진행되던 삼청동 카페의 창밖을 가리키며) 이런 길이나 공간이 변하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1960~70년대 작품을 봐도 극중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속성 때문에 재미가 있다. 그런 공간감들이 잘 살아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를 즐기게 된다.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주변 소품이나 음악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왔다. 우리가 과거의 사랑을 기억할 때 주로 떠오르는 것들이 그런 요소 아닌가.
영화라는 게 전체를 완전한 걸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 한 장면이라도 관객의 마음을 건드려주어야 한다. 윤계상과 정유미 주연의 에피소드에는 카페에서 징글징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믹싱 작업할 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하나 얹어놓으니 옛 기억으로 확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연애하면서 다투고 그럴 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나 음악 소리 같은 게 있지 않나. 믹싱 하면서 느낀 건데 사람의 기억을 환기해주는 공간음들이 있더라.

가을을 배경으로 삼은 점도 눈에 띈다. 가을 풍경을 필름으로 담고 싶었나? 
내 영화중에 가을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담아보고 싶었다. 사실 다른 상업영화를 준비하다가 <조금만 더 가까이>를 만들었다. 큰 규모의 영화들은 기다리는 작업인데 개인적으로 그런 것들을 못 견뎌한다. 환경이 주어지면 당장에 그 안에서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이 영화는 총 16회차로 찍었다. 작은 회차에 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찾는 중에 가을을 배경으로 내게 익숙한 공간들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솔직하게 고백하는 느낌이 든다.
내 작품 중에 대사 많은 게 없다. 단편 <모놀로그 #1>(2006) 이후 대화가 많은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다양한 패턴으로 대사가 주가 되는 형식의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요조와 윤희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섯 번째 에피소드가 그렇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을 연상시킨다.
좋아하는 취향이 그런 영화들이다. 특히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 <파리의 랑데부>(1995)는 단락 지어진 구성인데 파리의 공간과 계절의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 종류의 영화를 보면 마음에 젖는 게 있다. 평소에 해보고 싶었고 여유로운 느낌도 주고 싶었다.  
 
베드신 장면 연출도 이번이 처음이다. (웃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데스크신이라고 하더라. 책상에서 한다고. (웃음) 나는 이걸 섹스신이 아니라 설렘이 있는 신이라고 한다. 첫 관계 시 갖게 되는 설렘 같은 감정을 준 것 같다. 거기서 배우들이 존재감 있게 해줬다. 둘 다 영화를 처음 한 배우들이었다. 특히 세연을 연기한 염보라가 날 것 같은 연기를 했다. 그런데 4일 동안 촬영을 하면서 뭔가 조율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가령, 배우 옆에서 촬영했는데 카메라가 자기 시선 바깥에 있으니까 여배우가 굉장히 잘 해줬다. 마지막 날 촬영은 야한 장면이 아니었다. 얼굴만 클로즈업으로 가는 장면이었다. 그때 힘들어했다. 옆에 있던 촬영진들이 정면으로 몰려와 시선 근처에서 얼굴을 찍으니 수치심을 느낀 것 같더라. 감독의 입장에서 배우가 힘들어 하는 게 마음이 아팠다.

베드신이라고 하지만 육체의 전시가 아니라 역시나 특기인 감정 포착에 집중했다. 그래서 시나리오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클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는 시나리오보다 잘 나오는 것이다. 독립영화 작업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구체적인 상(像)에 대해 정확하게 쓴 시나리오를 그대로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다. 현장에서는 너무 많은 변형의 순간들이 있잖나. 그렇기 때문에 시나리오에서는 감정적인 것만 잡아놓고 현장에서 적응해 가며 긴장감 있게 찍으려고 한다. 배우들도 신인일 때 그런 방식을 잘 따라온다.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배우 정유미를 발굴했다. 그때의 정유미는 굉장히 수줍은 소녀로 등장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는 ‘진상’으로 나온다. (웃음)
성격적으로 극중 캐릭터 은희와 닮아있는 건 아니다. 다만 오래 보아오면서 내가 유미에 대해 느끼는 게 있지 않나.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수줍은 소녀가 보였다면 이후 오래 관계를 하다 보니 유미가 은희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고 서로 같이 시작을 한 거니까 소중한데 그래서 같이 작업을 하는 게 조심스럽기도 했다. 유미를 과거의 이미지 그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성격의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띠는 캐스팅이라면 인디뮤지션 요조다.
이 영화에 음악적 구성이 있기 때문에 노래를 할 줄 알고 뮤지션인 배우로 알아봤다. 처음 만났을 때 요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연기적인 부분이 걱정돼서 만났다. 의외로 요조가 극중 캐릭터와 잘 맞으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쳐줬다. 더군다나 내 영화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를 해줬다. 그래서 가장 먼저 캐스팅된 경우이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대해서 잘 이해해준 덕분에 이번 작업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많이 생겼다. 

결국 이 영화가 추구하는 사랑의 감정적 거리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감독이 배우에 대한, 배우가 감독에 대한 감정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은유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연애를 하면서 호기심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가 변화를 겪기도 하고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것들을 버리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나도 옛날부터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다. 그것 때문에 자책도 생기고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솔직하게 영화 속에 담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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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2010.10.18)

<조금만 더 가까이>(Come, Clo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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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으로 유명한 김종관 감독은 주로 사랑을 다루면서 행위 대신 섬세한 감정을 포착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지금껏 20여 편의 단편을 연출한 그의 첫 번째 장편으로 다섯 커플의 연애담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진다.

첫 번째 커플은 사실 남남에 가깝다. 로테르담에서 헤어진 연인을 찾던 폴란드 남자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무작정 전화를 거는데 서울의 한 카페다. 전화를 받은 한국 여자는 갑작스러운 전화가 당혹스럽지만 폴란드 남자의 사연을 들으면서 호기심이 생긴다. 이후 영화는 막 사랑에 눈뜬 커플, 헤어진 후 남은 감정의 앙금으로 갈등을 겪는 커플, 새로 나타난 사랑으로 이별을 겪는 게이 커플, 그리고 우정과 사랑 그 어딘가에 위치한 커플의 사연을 횡단하며 사랑의 ‘어떤’ 순간을 잡아낸다.

이처럼 독립성을 갖는 에피소드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조금만 더 가까이>는 단편 활동에 전념했던 김종관 감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일관된 주제 하에 다섯 개의 사연이 연결되기 때문에 나름 장편의 흐름이 느껴진다. 로테르담의 폴란드 남자와 서울의 한국 여자 사이의 사연을 가장 처음 배치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만 더 가까이>가 ‘감정의 거리’에 대한 영화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모두 관계의 교류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감정 변화들의 줄 잇기이었다. 관계의 거리를 좁히거나 벌리기 위한 무수한 감정의 점찍기가 만들어내는 생명력 넘치는 사랑의 풍경은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좀 더 과감해진 설정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차별이 감지된다.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성 관계를 묘사하는가 하면 게이 커플이 등장해 오래된 사랑에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연출 노선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성 묘사에 있어서 육체의 전시가 아닌 첫 관계 시 발생할법한 호기심, 두려움, 미숙함 등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표정의 변화를 잡아내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다.

게이 커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역할이 남남으로 바뀌었을 뿐 이들의 사랑은 이성 관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이란 게 그렇다. 성별, 나이, 국적을 불문하고 극중 요조가 연기한 뮤지션 혜영의 가사를 빌리자면, ‘모두 다 지나가면 똑같은 이야기일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이 각자에게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갖는 이유는 금세 잊어버린다든지 또는 상처로 남아 마음속을 유영하다가 불현 듯 기억을 통해 주관적인 방식으로 소환되는 까닭이다.

김종관 감독이 감정을 묘사하는데 있어 시간과 공간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주변 소품이나 음악 등을 빌어 설명하길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은 나누는 순간엔 눈이 멀지만 그 이후 기억이라는 우회를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거리에 낙엽이 아름답게 흩뿌려진 가을이었어.’ ‘그때 우린 조용한 음악을 들었지.’, ‘가회동의 한적한 카페에서 사랑을 나누었어.’ 그래서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늘 사랑에 대한 솔직한 고백으로 보인다.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이 사랑의 비밀에 다가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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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2010.10.18)

<엉클 분미> 새로운 영화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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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시즌은 가히 흥행 기대작들의 격전지라 할만하다. 올해 역시도 <시라노; 연애조작단> <무적자> <퀴즈왕> <레지던트 이블: 끝나지 않은 전쟁 3D> 등 관객의 구미를 끄는 소재, 대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스타(배우와 감독), 할리우드의 최첨단 3D 영화처럼 흥행 코드로 범벅된 작품들이 추석 시즌의 흥행을 주도했다. 이 와중에 끼어든(?) 두 편의 영화,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 서술, 흥행 코드와 접목한 전통적인 영화 만들기와는 안녕을 고한 작품 구성으로 눈길을 끌었다.


<옥희의 영화> 생물 같은 영화의 경지

홍상수 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극장전>(2005)을 전후해 그의 영화는 남녀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스크린 속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가 현실을,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도록 연결, 뫼비우스의 띠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이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살아있는 영화’의 경지에 다다랐다.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옥희의 영화>는 눈이 아닌 두뇌로 볼 것을 요구하는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4개의 단편이 각자 자체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서로에게 느슨한 형태로 개입하며 장편으로 확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의 진구는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다. 낮에는 지도편달중인 여학생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그 뒤엔 술자리에서 송 선생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저녁엔 자신이 만든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받곤 곤혹스러워한다. 두 번째 ‘키스왕’의 진구는 학생이다. 송 선생으로 불리는 지도교수에게 단편영화 연출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같은 과 친구 옥희다. 옥희가 송 선생과 깊은 관계인 것으로 보이자 진구는 그녀에게 더욱 집착을 보인다. 그렇다면 송 선생에게는?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세 번째 ‘폭설 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폭설로 수업이 지연되고 참석한 학생도 진구와 옥희 뿐이다 보니 질의응답 시간이 돼버린다. 우문에 현답으로 응하는 송 선생을 진구는 거부감 없이 대하지만 송 선생은 교수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다. 그리고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진구와 송 교수와 각각 아차산에 올랐던 경험을 영화로 찍어 교차해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처럼 스크린 속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앞서 요약한 줄거리에서 보듯 <옥희의 영화>의 이야기 서술과 캐릭터 설정에는 일관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진구, 옥희, 송 선생으로 지칭되는 인물의 등장은 일정할지언정 이들의 역할과 성격, 관계 등은 뒤죽박죽이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진구가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영화과 학생으로 등장하질 않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진구의 집이었던 곳이 ‘키스왕’에서는 옥희의 집인 것으로 보이고 돈을 받고 후배 강사에게 교수 자리를 주었다며 비난받던 송 선생이 ‘폭설 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쪽팔려서 이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며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인양 군다. 또한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내레이션을 통해 송 선생은 ‘나이든 분’으로, 진구는 ‘젊은 남자’로 호칭하기도 한다.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교란하고 인물을 중첩시킨 뒤 결국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마저 어지럽힌다. 그러니까 <옥희의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늘 보던 대로 교란된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재구획한 뒤 인물의 역할과 이야기의 합을 맞추려다가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옥희의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제품인 기존의 영화의 달리 주어진 4개의 단편을 보는 이의 기호와 취향, 생각 등에 맞춰 재구성하는,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제품이 되는 일종의 ‘상호작용’(Interactive) 영화라 할만하다. 그래서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순으로 구성된 순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아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현실의 비(非)확실성에서 유발되는 우연의 미학을 긍정하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잘 알겠지만 홍상수는 정해진 각본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그날그날의 조건에 따라 즉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폭설 후’의 경우, 눈이 가득 쌓인 날씨에 아이디어를 얻어 그날 이야기를 짜고 배우를 불러 무려! 촬영까지 마친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어쩔 때는 영화 속 영화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1997) 또는 <생활의 발견>(2002)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진화형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2009)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疊疊山中)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엉클 분미> 경계를 집어 삼킨 정글의 영화

<엉클 분미>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แนะนำให้ดู: ลุงบ,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다.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생의 정체는 구체적이지가 않다. 당연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평면적인 형태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볼거리가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입체화(化)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오히려 설명적인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엉클 분미>는 아핏차퐁의 전작들과 비교해 친절한 편이다. 어느 정도 줄거리 요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야기가 잡힌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쉽게 이해 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엉클 분미>의 분미(타나팟 사이세이마)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다. 시골 농장에 머무는 동안 그의 곁에 처제와 젊은 청년 통이 남아 분미를 돌본다. 분미 곁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도 등장한다. 저녁식사를 하던 중 오래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고 실종됐던 아들이 원숭이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오랜 만에 아들, 아내와 함께 회포를 푼 분미는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분미는 주위의 가족을 대동하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미지의 동굴을 발견한 분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화면은 곧 어느 호텔방으로 옮겨간다. 침대 위에서 분미의 처제와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성이 부조금을 정리 중이고 스님 한 분이 이들과 합류한다.

이해가 쉽도록 요약은 했지만 <엉클 분미>는 일관된 이야기의 맥락을 붙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 혹은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앞의 문장 중에서 빌리자면, ‘~같지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사실 <엉클 분미>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비하다. 분미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중 뜬금없이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점핑해 못생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가 끼어들기도 한다. 분미와 못생긴 공주, 메기 사이에 구체적인 연관성을 잡아내는 것도 애매하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 묘사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더 방점을 맞춘 까닭이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보다는 동일한 공간(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숲 (혹은 정글)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다. 그의 영화에서 숲은 현실과 비현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마술적인 공간’, 즉 영화적 환상이 기능하는 장소다. 아마도 <열대병>(2004)이 대표적일 텐데 문명과 야만, 로맨스와 민담 등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확연히 가르며 우리가 경계 지었던 대비되는 개념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소우주로 구현해 보였다. 하여 아핏차퐁은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이미지를, 아니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엉클 분미>에서도 숲은 그냥 숲과는 거리가 멀다. 현세와 내세가 공존하는 공간이면서 원시적 생(生)과 관념적 사(死)가 근접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럼으로써 전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전생을 둘러싼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인 정성일은 <엉클 분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실제로 <엉클 분미>의 분미는 실존하는 인물이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에 착수하게 됐다. 하지만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감독은 다분히 개인적인 영화로 개비했다. 예컨대, 분미처럼 아핏차퐁의 아버지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고 극중 투석기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라오스 접경지역은 과거 타이와 라오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고 원숭이 인간의 붉은 눈 역시 감독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태국 TV 시리즈물의 특정 장르 요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영화란 ‘기억’이다, 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기억은 사실(Reality)의 소환이면서 한편으론 재현이라는 점에서 환상(Illusion)이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사실을 재현한다. 엄밀히 말해 모든 영화가 사실을 재현하지만 아핏차퐁은 사실과 재현 사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가령, 분미의 아내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는 별도의 영화적 장치를 이용해 관객의 눈길을 끄는 대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 넘긴다. (오히려 아내 귀신 대신 분미와 처제의 얼굴을 비추는 식이다.) 이런 작품을 일러 ‘무경계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Media City Seoul 2010’가 한창인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다큐멘터리 영상 ’프리미티브‘ 중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Letter to Uncle Boonmee) 전시가 한창이다. 그는 이참에 영화와 전시를 한 묶음하며 스크린의 경계마저도 넘어선 것이다.


미래의 영화 혹은 21세기 영화?

살펴본 바, 우연처럼 같은 날 개봉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새로운 영화 보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전통적인(?) 영화가 난립하는 추석 극장가에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확연히 다른 영화 문법으로 관객을 (긍정적, 부정적 의미로든) 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의 제공과 주입식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전혀 다른 영화의 차원을 선사했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영화. 영화가 문제를 제시하고 관객이 이에 답하는, 혹은 감독이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해석하는 영화. 영화가 스크린에 머물지 않고 스크린 밖으로 넘어오는 시대. <옥희의 영화> <엉클 분미>와 같은 영화가 이번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개봉영화 시장에서 대중성과는 동 떨어진 두 편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영화의 세기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린 과거와 현재의 영화 보기에 익숙한 나머지 이미 도달한 미래의 작품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외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우리 곁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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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년 9월 28일

<옥희의 영화>(Oki’s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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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는 하나의 소우주다. 큰 변화는 없지만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종종 동어반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읽어낼 수 있는 거리들은 많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며 하나의 원을 구성토록 하는 홍상수 특유의 연출법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런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옥희의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4개의 단편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또한 이것이 영화 속 영화로 다시 한 번 재구성되는 것.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 또는 <생활의 발견>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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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2010년 10월호

<차우>(Ch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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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란 영화가 참으로 별나다. 블록버스터인줄 알았더니 B급영화이고, 공포물인줄 알았더니 코미디였던 것이다. 영화의 감독이 바로 <시실리2km>를 연출했던 신정원임을 상기할 때 이와 같은 결과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다만 줄거리만 보면 <차우>는 괴수물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모범적인 장르영화다.  

식인 멧돼지 ‘차우’가 출몰하는 지역은 작은 농촌마을 삼매리. 사람들이 하나둘 잡혀 먹이면서 마을엔 공포의 기운이 감돌지만 도시민을 상대로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지역유지들은 돈을 벌기위해 이를 모른 체한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결국 서울에서 좌천된 김순경(엄태웅)과 사건 해결을 위해 급파된 신형사(박혁권), 현역 최고의 포수 만배(윤제문)와 전설적인 포수 일만(장항선), 그리고 동물학자 수련(정유미)은 우여곡절 끝에 팀을 구성해 차우 사냥에 나선다.

<차우>는 표면상 차우와 인간의 사투로 보이지만 신정원 감독은 그와 같은 관객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 안에는 <죠스> <레이더스> <쥬라기 공원> 등 주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에서 가져온 패러디가 있고, 기존의 이미지를 비튼 배우의 우스꽝스러운 변신이 있으며, 일반적인 틀과 리듬을 벗어난 기괴한 웃음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식인 멧돼지를 두고 설왕설래를 거듭하는 인간들의 웃지 못 할 소동에서 빚어진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차우>의 소동을 야기하는 것은 삼매리 구성원들 간의 갖가지 충돌이다. 지역유지들은 오로지 돈만 생각하며 경찰의 안전경고 따위 강 건너 불구경 보듯 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외지인 김순경은 삼매리 내지인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며, 마을잔치 무대에 선 록그룹 공연에 삼매리 어른들은 전혀 호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한국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갖가지 병폐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개발논리 앞에 자연은 무방비상태고 지역갈등은 여전하며 세대 간의 벽은 높기만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신정원 감독은 전작 <시실리2km>에서 그런 한국사회를 풍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식인 멧돼지 차우는 한국사회의 충돌이 빚은 피조물이다. 극중 인물들에게 차우는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뒤죽박죽(?)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그래서 <차우>는 괴수물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소동극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이야말로 <차우>의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라고 생각한다. 신정원 감독은 여러 인터뷰 자리에서 CG부분에 대해 예산과 기간 부족을 감안한 최선의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씨네21 713호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애초 내가 생각한 것만큼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약 차우가 사람을 물고하는 장면까지 다 만들려 했다면 아마 지금까지 찍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정원 감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원 하에서 가장 합당한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고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다름 아닌 블록버스터 급의 B급괴수물이라는 점이 내겐 흥미로운 것이다. 

<차우>의 홍보는 오로지 블록버스터 괴수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B급의 이미지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아마도 <괴물>이 밟았던 1300만 관객동원의 후광을 얻으려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60억의 소동극과 120억의 괴수물 간의 간격만큼이나 <차우>는 <괴물>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여기에는 한국영화계의 대박에 대한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영화계의 대박에 대한 욕구가 <차우>와 같은 형태로 구현될 때 나타나는 당황스러운 반응들은 정확히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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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21)

<리턴>(Return)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국의 장르영화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신세다. 매년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공포영화는 몇 년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스릴러영화는 제작되는 편수가 많지 않아 성과를 언급하기에는 민망할 지경이다. 다행히 올해 초 개봉한 <극락도 살인사건>이 괜찮은 흥행을 기록했지만 그 역시 정통 스릴러라고 하기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규만 감독의 <리턴>은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 스릴러영화다. 소재 자체도 구미를 당긴다. ‘수술 중 각성’, 즉 ‘전신마취를 한 환자가 수술 도중 의식이 깨어나 모든 통증을 느끼지만 정작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다룬다.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니(?) 독특한 소재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스릴러의 소재로도 꽤 그럴듯해 보인다.

당연히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곳은 병원이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으로 열연을 펼쳤던 김명민이 유능한 외과 전문의 류재우로 등장하는 까닭에 <리턴>은 자칫 <하얀거탑>의 영화 버전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같은 배우의 동일한 배역, 그리고 극중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두 작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얀거탑>이 장준혁 개인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리턴>은 류재우는 물론 그의 동료 장석호, 오치훈, 강욱환 네 명의 균형을 극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또한 캐릭터적인 측면에서 류재우는 장준혁과 달리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차이라면 차이. 이야기 구성 측면에서도 <리턴>은 복수를 위해 저지른 연쇄살인사건이 플롯을 이끌어가는 핵심요소로 작용한다. 방영은 <하얀거탑>이 빨랐지만 촬영은 <리턴>이 먼저 이뤄졌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리턴>은 미국 드라마 <하우스>와 닮았다. 미스터리한 의학사건을 전문적인 분석을 통해 풀어가는 것처럼 <리턴> 역시 의학적 현상을 가지고 두뇌싸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소재를 취하는 데 있어 1982년에 벌어졌던 사건을 2007년에 끌어들여 마치 거대한 운명론적 관점을 펼쳐보이듯 이야기를 풀어간다. 수술 중 각성을 겪은 한 소년이 이상증세를 보이다 사라진 뒤 25년 만에 나타나 그의 수술과 관련 있는 의사와 주변 인물에게 복수극을 펼치는 것. 그래서 <리턴>은 과거에 벌어졌던 수술 중 각성과 관련한 사연의 묘사와 살인범이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춰 극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비교적 탄탄한 드라마와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리기법을 도입해 한국 스릴러영화로는 근래 보기 드문 만듦새를 갖춘다. 소재주의에 머물고 마는 과거 스릴러영화와 병원을 무대로 사랑이야기를 펼쳐 보이기 일쑤였던 그간의 메디컬영화들과 비교해 보건데 소재 발굴 측면에서나 깔끔한 연출력 면에서는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리턴>은 소재 자체가 품고 있는 특수성을 깊이 파고들지는 못한다. 많은 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탓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단순한 구성을 통해 친절하리만치 자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주요 등장인물 역시 최소화해 관객이 범인을 추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진행, 가장 안전한 방식의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스릴러영화는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백미인데, <리턴>의 경우 그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수술 중 각성과 같은 특별한 소재를 현상으로 다루지 못하고 사연으로 소개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는 건 이 영화가 가진 한계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객이 고통을 간접 체험해 극에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드는 연출이 필요했지만 <리턴>은 이해를 돕는 데 치중한 나머지 소재가 가진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이는 수술 중 각성을 너무 거대한 이야기 속에,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풀어가는 효과적이지 못한 연출에서 기인한다. 가령,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혐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심한 디테일이 필요한 주요 인물들의 혐의는 간단한 트릭으로 마무리 짓는 것에 반해 주변 인물들의 계략은 복잡하게 구성하는 등 이를 풀어가는 추리 효과는 인물간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 묘사는 풍부하되 그 속의 디테일은 한쪽으로 치우쳐 고르지 못하고 장면에 대한 설명은 친절하되 차고 넘쳐 예상 가능한 내용 전개가 펼쳐진다. 구조상의 불균형이 눈에 띄는 것이다.

<리턴>은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스릴러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일정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게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을 확인한 정도에서 머문 수준이라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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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7호
(2007.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