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깨면 집에 가자>(酔いがさめたら、うちに帰ろう。)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모시다 유타카의 자전적 소설 <원더링 홈 Wandering Home>을 영화화한 히가시 요이치 감독의 <술이 깨면 집에 가자>는 제목만큼이나 귀여우면서 묵직한 울림을 주는 영화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흔히 말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는 과정이 소개되지만 처절하기보다는 다소 코믹하게 묘사된다. 그것이 결국 가족의 화합을 위한 것임이 강조되는 후반부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만드는 것이다.

야스유키(아사노 타다노부)는 오늘도 잔뜩 술이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다가 피를 토하고 만다. 알코올 의존’중’증이지만 술을 끊는 게 맘처럼 쉬운 게 아니다. 몸도 몸이지만 술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도 그를 괴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알코올 의존증이 얼마나 심하면, 의사가 죽음에 거의 한 발짝을 걸쳐놓은 것이나 진배없다는 진찰 결과를 내릴 정도다. 이번 기회에 야스유키는 완전히 술을 끊고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입원을 자처한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주변에 끼치는 피해는 끔찍할 정도지만 <술이 깨면 집에 가자>는 야스유키에게 고까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알코올 의존증에 걸린 것이 어디 한 개인만의 잘못일까. 영화는 그 원인을 콕 집어서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가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술만 마시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끔찍한 어린 시절, 카메라 종군기자로 전쟁의 잔인함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던 일화 등을 소개하며 야스유키가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암시를 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니까, 알코올 의존증은 야스유키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다. 주변 환경이 그를 술로 몰아간 것처럼 술독에 빠진 야스유키를 구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만큼이나 주변의 도움 역시도 절실하다. 야스유키의 사연이 중심에 서지만 그의 부인 유키(나가사쿠 히로미)를 비롯해 병원의 동료들 한 명 한 명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 영화가 의도한 바에 부합한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남편의 음주 때문에 이혼한 사이면서 거리를 유지하기는커녕 살갑게 구는 유키의 태도가 이해 가능해진다.

유키는 술 때문에 말썽을 피우는 남편에게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아무리 비참한 인생이라도 살아있는 게 좋아” 야스유키를 연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주로 사회 중심에 편입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상황으로 놓고 보자면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아사노 타다노부는 그의 연기 커리어에서 가장 풍부한 표정을 보여준다. 우리가 언제 아사노 타다노부가 화통하게 웃어 제치는 연기를 본 적이 있던가.

그것이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한 극 중 야스유키의 과장일지 모르지만 긍정의 태도는 보다 생산적인 삶을 이어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단, 그것이 노력에 그쳐서만은 안 될 것임은 이 영화의 제목이 단정적으로 예시한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술이 깬 후 집에 가서 가족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되고, 알코올 의존증을 고쳐야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죽음을 앞둔 야스유키가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좀 더 희망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EXT plus
NO. 65

<슬랩스틱 브라더스>(漫才ギャン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나가와 히로시는 만담 듀오 ‘시나가와 소지’로 유명세를 떨치는 코미디언이다. 또한 자전적 소설 <드롭 Drop>(2009)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으며 이를 영화로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팔방미인 시나가와 히로시가 두 번째로 연출한 <슬랩스틱 브라더스> 또한 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이다.  

토비오(사토 류타)는 만담 파트너와 결별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로 감옥에 갇힌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깡패 류헤이(카미지 유스케)를 만나는데 대화 몇 마디를 나눠보니 만담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토비오의 만담 파트너 결성 제안에 류헤이는 흥미를 보이지만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다. 토비오는 전 파트너가 남긴 거액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고, 류헤이는 사이가 좋지 못한 상대방 깡패와의 대립으로 다시 폭력의 세계에 뛰어들기에 이른다.

만담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작품답게 <슬랩스틱 브라더스>는 매 장면 말이 홍수처럼 끊이지 않는다.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의 본질과는 다소 동 떨어진 모습이지만 만담에서 주가 되는 ‘말’, 즉 소통을 통해 파트너와 호흡하고 더 나아가 주변 인물들과 화합하는 모습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토비오와 류헤이가 서로 만나기 전 영화는 이들 각자가 속한 만담과 폭력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아마도 감독의 목적은 류헤이를 폭력적인 환경에서 끄집어내 만담의 세계로 편입시키는 데 있는 것 같다. 다만 류헤이가 훌륭한 만담가로는 보이지 않지만 주먹이 아닌 말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의 힘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법이다.  


201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탈로그



<기적>(奇跡)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의 영어 제목은 ‘Miracle’이 아니라 ‘I Wish’다. 이 차이는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기적>이 일본 대지진과는 하등 상관없이 제작된 작품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쿠슈 철도청의 제안을 받은 영화다.) 하지만 1년 내내 화산재가 끊이지 않는 쿠슈의 작은 마을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사는 형제가 화산 폭발로 함께 살기를 희망한다는 내용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일본대지진과 연결 짓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고레에다의 영화는 균열된 가족의 현상을 직시하면서도 작은 틈이지만 미래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기적’에 대해 갈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꼬집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건 말건 그 가능성을 무조건 신뢰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제목처럼 기적은 언젠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일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단 하나의 ‘희망 wish’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Q
2012년 1월호






<오키 부부의 지옥행 신혼여행>(大木家のたのしい旅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부야시와 사키 부부는 갓 결혼한 사이지만 수년의 동거 생활 때문인지 신혼의 깨소금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신혼여행도 떠나지 않은 채 백화점을 들리게 된 사키는 폐점 직전 점쟁이 할머니를 만나 지옥행 특급열차, 아니 지옥행 신혼여행을 추천 받는다. 별 이상한 할머니를 다 보겠네, 흥미가 동하지 않지만 오키 부부의 사정을 용하게 꿰뚫어보자 지옥행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GS 원더랜드>(2008) <내일 모레는 댄스>(2005) 등을 연출한 혼다 류이치 감독은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로 점철된 일본 영화의 전형을 대표한다. 마에다 시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오키 부부의 지옥행 신혼 여행> 또한 그러한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험담을 차용한 설정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하여 영화가 묘사하는 지옥은 뿔 달린 도깨비와 불구덩이가 난무하는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빨간 피부와 파란 피부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비프스튜가 온천을 이루는 환상과 모험의 세계다.

모험은 결국 성장과 맞닿아있기 마련. 그럼으로써 노부야시와 사키는 잊고 지냈던 부부 간의 애정을 발동 시키는 값진 시간을 갖는다. 함께 목욕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속 깊은 대화도 나누며,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은 중요하다. 감독은 오키 부부가 지옥에서 만난 아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장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는 오키 부부가 현실로 귀환하는 장면에서 끝맺음하지만 머지 않아 아이를 갖고 번듯한 가정을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감독이 현실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5회 부천영화제
카탈로그
(2011.7.14~7.22)

<도시의 이방인>(行きずりの街)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타이의 충격적인 아동 인신매매 실태를 고발한 <어둠의 아이들>(2008)을 만든 후 일본 경제의 막후를 드러낸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일본 경제다. 그중에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매매의 흐름을 들춰내고 싶다.”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 작가 시미즈 다츠오의 <스쳐 지나간 거리>를 영화화한 <도시의 이방인>은 준지의 야심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방의 학원 강사로 활동 중인 하타노(나카무라 토호루)는 몇 년 전까지 도쿄에서 교사로 재직했었다. 하지만 제자와의 연애 사건으로 쫓겨났던 것. 불미스러운 기억을 안고 있는 그에게 실종된 학생을 찾아달라는 연락이 온다. 실종 학생의 집에서 발견한 우편물을 단서로 오랜만에 도쿄를 찾게 된 하타노는 이 사건이 과거 근무했던 학교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는 오리무중이고 오랜만에 학교를 방문한 그는 재단 이사장과 비서로부터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한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하타노는 학교를 둘러싼 이권 사업이 실종 사건의 배후임을 직감한다.

사카모토 준지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도시의 이방인>은 다소 생소하다. 극중 하타노와 여제자를 둘러싼 러브 스토리는 준지의 전작을 감안하면 전혀 의외의 설정으로 다가온다. <멍텅구리-상처입은 천사>(1998) <의리없는 전쟁>(2000) <망국의 이지스>(2005) 등 여성 호르몬이 휘발된 폭력의 세계를 주로 묘사해 왔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방인>은 주변의 편견으로 맺어지지 못했던 교사와 제자의 관계를 복원하는 이야기지만 준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들의 사랑에 방해물로 작용하는 환경이다. 여전히 준지의 하드보일드 세계에서 남자들은 폭력을 창 삼아 순수를 억압하고 탐욕을 방패삼아 정의를 튕겨낸다. 여자들은 철저히 보호의 대상이요, 기껏해야 협상의 수단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결국 하타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거대악과 맞서는 것은 정의감의 발로 따위가 아니다. 과거 추문을 뿌렸던 제자와의 오해를 풀고 무엇보다 실종 학생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많은 남자를 놔두고 더티 해리 같은 폭력경찰도, 필립 말로우 같은 냉소적인 탐정도 아닌 일개 강사가 구원자로 나서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바로 일본 암흑시장의 핏빛 경제 논리를 고발하고 싶다던 사카모토 준지를 <도시의 이방인>으로 이끈 계기(로 보인)다.

도시의 발전에 맞춰 날로 조직화되어가는 지하 세계의 범죄를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도시의 이방인>에서처럼 순수해야 할 학교를 둘러싼 이권 싸움은 이 사회가 얼마만큼 타락했는지 잘 보여준다. 다른 예 필요 없이 학생을 볼모로 이익을 추구하겠다며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다. 더 무서운 건 재단이사장-기업회장-국회의원으로 이어지는 비리의 커넥션이 워낙 견고한 까닭에 누구하나 나서서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힘없는 자들에게 악에 오염된 도시는 방관하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거리’일 뿐이고 지방에서 오랫동안 썩다가 멋모르고 범죄에 대드는 하타노는 제목처럼 ‘도시의 이방인’에 다름 아니다. 하타노가 그렇게 위험한 사랑에 몸을 던진 것도 도시의 썩은 바람이 싣고 온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타노 역을 맡은 나카무라 토호루는 <청연>(2005)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 등 한국영화의 출연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배우다. 일본에서는 연쇄살인범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인을 짝사랑하는 변호사를 연기한 <입맞춤>(2008)이나 이혼 후 젊은 여자에게 대시하는 벤처사업가로 출연한 <언러브드>(2001) 등 미래가 불확실한 사랑에 올인하는 역할을 심심찮게 해왔다. 나카무라 토호루는 그런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 사카모토 준지의 새로운 경지라고 해도 좋을 ‘하드보일드 러브 스토리’ <도시의 이방인>에서 또 한 번의 인상적인 옴므파탈 연기를 펼쳐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ovieweek 448호
부산국제영화제 특별부록

<마루 밑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현정(이하 ‘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은 어떤 영화인가요?
허남웅(이하 ‘허’) 영화사 브랜드만으로 관객에게 신뢰를 주는 영화는 많지 않은데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이죠,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으로 세계를 주름 잡은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로 지브리의 신작 <마루 밑 아리에티>(9월 9일 개봉)를 소개합니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어떤 애니메이션인가요?
한국에도 출간된 영국소설 ‘마루 밑 바로우어즈’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인데요. 건강이 좋지 않은 쇼우라는 소년이 요양 차 시골의 할머니 집을 찾게 되요. 거기서 키가 10cm밖에 안 되는 소녀 아리에티를 만납니다. 마루 밑에서 인간의 물건을 몰래 빌려 사는 소인들인데 각설탕과 휴지를 빌리러 갔다가 만나게 되거든요. 마리에티의 부모는 인간에게 정체를 발각되면 이 집을 떠나야한다고 하지만 마리에티와 쇼우는 서로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나 10cm 소녀 마리에티와 가족들에게 위험이 닥친다는 얘기입니다.

<마루 밑 아리에티>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감독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고 (히로시마가 아닙니다.) 신인이 맡았습니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10년 넘게 애니메이터로 일했던 사람인데요. 사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40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작품이래요. 젊은 시절에 원작소설을 읽고는 소인들이 인간의 물건을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설정에 흥미를 느꼈고 특히 소인들이 인간 세계에 살아가는 모습의 묘사가 상상력을 발동시켰다고 하네요.

저 역시도 인간의 물건을 빌려 쓴다는 설정이 흥미롭네요.
아무래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마리에티를 비롯한 소인들이 인간의 물건을 활용하는 방식인데요. 10cm 소인들에게 인간의 물건은 각설탕 하나라도 얼마나 크겠어요. 식탁 위에 놓인 각설탕을 짚기 위해 스카치테이프 한 뼘 길이를 발에 붙이면 그 접착력으로 식탁을 오를 수 있고, 또 주인공 마리에티는 빨래집개를 머리 묶는데 활용하기도 하거든요. 아무래도 이런 세심한 묘사가 우선적으로 <마루 밑 아리에티>가 재미있게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그런 소인들과 함께 산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3D로 묘사해도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요즘 3D가 대세이고 웬만한 애니메이션도 모두 3D로 개봉을 하는데 <마루 밑 아리에티>는 2D입니다. 그것도 컴퓨터 작업이 아니라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수작업 방식을 지브리는 유지하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그것이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마루 밑 아리에티>도 그렇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철학으로 삼고 있거든요. 그건 단지 보이는 결과물로써의 작품 뿐 아니라 작업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거든요.

근데 줄거리를 들어보면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인간과 소인이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게 쉬워보이지는 않는데요. 인간과의 조화로운 삶과는 멀어 보여요.
원래 이 원작소설에서 소인들은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안네 프랑크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인간의 공격성이 전제가 되어 있는 건데요. <마루 밑 아리에티> 역시 그래요. 안네 프랑크의 은유 같은 건 배경을 현대의 일본으로 옮겼기 때문에 없지만 인간과 소인이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극중 인간 캐릭터들 중에 악역은 없지만 다만 인간들에게 이런 소인은 일종의 구경거리이잖아요. 소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스트레스겠어요. 그럼에도 <마루 밑 아리에티>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건 주인공 쇼우의 경우, 마리에티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활을 존중하면서 돕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대 사회에서는 조화로운 삶이라는 게 함께 산다는 것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 것이 아닌가, 이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네요.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왜 하야오는 기획과 이야기만 쓰고 감독은 하지 않으셨을까요?
현재 미야자키 하야오 나이가 70살이거든요. 이제 하야오 뒤를 이을 사람도 나와야 되는데 사실 오래 전부터 후계자 인선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모리타 히로유키가 <고양이의 보은>(2002)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가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2006)을 만들었지만 흥행 결과가 좋지 못했어요. 근데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일본에서 8월 19일에 개봉했는데 박스오피스 1위를 연속으로 차지하며 100억 엔이 넘는 수익을 올릴 거라고 예상들을 하거든요. 지브리에서 하야오를 제외하고는 신인감독이 백억 엔을 넘긴 경우가 없다니까,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마루 밑 아리에티>로 최초 기록을 하는 셈이 되겠죠.

그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를 찾은 거네요?
흥행 성적으로는 그렇지만 작품까지 그런 건 아니거든요.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이야기는 사실 하야오의 도움을 받은 거잖아요. 더군다나 하야오 작품은 매번 배경이 주로 일본이지만 캐릭터는 백인인 경우가 많았어요. 그 점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한데 <마루 밑 아리에티> 역시 영국 원작인데다가 캐릭터들 역시도, 특히 아리에티 가족을 보면 서양 쪽이거든요. (유럽이겠죠.) 아마 이런 점을 극복하는 것이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에게 앞으로 주어진 과제이고 이를 넘어서야 하야오와는 다른 느낌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되겠죠.

그럼 어떤 관객들이 <마루 밑 아리에티>를 좋아할까요?
기존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좋아하실 작품이에요. 다만 <마루 밑 아리에티>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대작은 아니고 <이웃집 토토로>와 같은 작은 규모라는 점은 염두에 두시고요.


세상을 여는 아침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FM4U

<골든 슬럼버>(ゴールデンスランバ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현정(이하 ‘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의 영화 소개해주시겠어요.
허남웅(이하 ‘허’)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진행한 이후 처음 소개해드리는 일본영화인데요. 바로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골든 슬럼버>(8월 26일 개봉)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먼저 소개해주시죠.
<골든 슬럼버>는 굉장히 유명한 일본 작가죠, <중력 삐에로> <사신 치바> 등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사카 코타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평범한 남자가 총리 암살범으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도주를 다루고 있는데요. 주인공 아오야기(사카이 마사토)는 2년 전 유명한 걸그룹 아이돌 멤버의 목숨을 구해준 일 때문에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대학교 시절 함께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번화가로 놀러갔다가 총리 암살 사건 현장에서 아무 이유 없이 도주했다는 이유로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아오야기의 과거 행적이 우연히 총리 암살 현장의 증거와 맞아떨어지면서 사살된 위기에 처하게 되고요. 그때 아오야기의 옛 친구들이 등장해 그의 도주를 돕는다는 내용입니다. 

제목의 ‘골든 슬럼버’는 무슨 뜻인가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황금빛 졸음’ 정도 될까요. 그런데 이렇게 소개하는 것보다는 비틀즈를 좋아하시는 청취자 여러분이라면 아마도 제목을 듣고 바로 떠올리셨을 거예요. 비틀즈의 마지막 리코딩 앨범이자 명반이죠, 1969년에 발매된 <애비 로드>에 수록된 곡이거든요.

비틀즈의 ‘골든 슬럼버’가 이 영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곡인데요. 이 곡은 영화 속에서 총리 암살사건을 통해 아오야기가 재회하게 되는 옛 친구들과의 우정을 상징하는 장치인데요. 아오야기의 도주를 돕는 인물들을 잇는 단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총리암살과 비틀즈의 노래를 연결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게 흥미롭네요?
사실 비틀즈와 암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 비틀즈의 존 레논이 암살당한 역사가 있잖아요. 아마도 작가는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해보는데요. 무엇보다 <골든 슬럼버>는 책이 나왔을 때 ‘올해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는 평을 받았다고 해요. 소재가 총리암살이고, 범인이 도주한다는 이야기면 누구나 어두운 분위기의 스릴러를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골든 슬럼버>는 도주 과정이 스릴 넘치기도 하지만 의외로 코믹하게 묘사되거든요. 게다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과거의 친구들이 등장해 아오야기를 돕는다는 설정은 낭만적이기까지 해요. 아마도 오락물이 줄 수 있는 모든 재미를 집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는 평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럼 영화도 원작 소설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나요?
저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는데요.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면, 역시 심각한 분위기보다는 나른한 가운데 톡톡 쏘는 유머가 있다고 해요. 재미있게 읽었다는 편이 많은데 영화 역시 기본적인 재미는 가지고 있는데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원작소설은 유쾌한 톤에 더 방점이 찍혔다면 영화 <골든 슬럼버>는 일본영화 특유의 나른함이 배어있거든요. 예컨대, 한국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선이 굵고 힘이 넘치잖아요. 일본의 블록버스터인 <골든 슬럼버>는 총리암살을 다루지만 아기자기한 이야기 진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디테일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할까요. 제목인 ‘황금빛 졸음’의 의미가 이 영화를 더욱 나른한 분위기로 몰고 갔다는 생각이에요.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은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어떤 감독인가요?
원작소설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골든 슬럼버>를 완성한 후 만약 영화화가 된다면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데요. 근데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영화화한 건 <골든 슬럼버>가 세 번째입니다. 그 전에도 이사카 코타로가 쓴 소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피쉬 스토리>을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영화화했었거든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사카-나카무라 콤비’라고 불린다고 하네요.

배우들도 소개해주시죠. 한국에도 일본의 배우들은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골든 슬럼버>에는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나요?
주인공 아오야기 역할에는 사카이 마사토라는 남자 배우가, 아오야기를 돕는 옛 여자 친구 하루코는 다케우치 유코가 맡았습니다. 사카이 마사토는 한국 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배우죠. 한국에 개봉했던 영화중에는 <허니와 클로버>에 출연한 적이 있고요, 타케우치 유코는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거예요. <링>과 <환생>에 출연을 했었거든요. 아오야기를 쫓는 경찰 역의 사사키는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의 <도쿄!>에 주인공을 출연했던 카가와 데루유키가 맡았습니다.

<골든 슬럼버>는 어떤 관객들이 좋아하실까요?
원작소설을 읽은 팬들이라면 관심을 가질법하고요. 한국에 소개되는 일본영화들은 대개가 작은 규모의 영화였던 것에 반해서 <골든 슬럼버>는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일본의 작은 영화들에 익숙했던 한국 관객들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12세  관람가이기 때문에 중고생 여러분들도 방학 막바지에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거예요.

예, 오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식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여는 아침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FM4U(6:00~7:00)

<꿈의 미로>(ユメノ銀河)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아사노 타다노부(淺野忠信) 특별전’이 한창이다. 1990년 마츠오카 조지의 <물장구치는 금붕어>로 데뷔한 이래 5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만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오시마 나기사(<고하토>). 야마다 요지(<엄마>)와 같은 거장에서부터 구로자와 기요시(<밝은 미래>), 고레에다 히로카즈(<하나>), 아오야마 신지(<새드 베케이션>) 같은 중견의 작가들, 그리고 이시이 가츠히토(<녹차의 맛>)와 같은 신진 감독까지, 90년대 이후 현대 일본영화를 아우르는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중 이시이 소고 감독의 <꿈의 미로>(1997)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함을 가장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아사노 타다노부가 맡은 역할은 어딘가 모르게 허무한 기운을 내뿜는 버스운전사 니이타카다. 팀을 이룬 버스 차장 도미코(고미네 레나)로부터 친구 치야코의 살인범으로 의심받는 것. 추리소설가 유메노 규사쿠의 <소녀지옥> 중 ‘살인 릴레이’를 각색한 <꿈의 미로>는 도미코의 눈에 비친 니이타카의 모습을 통해 혼란을 겪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니이타카는 도미코 속에 내재된 이중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환영에 다름 아니다. 영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니이타카는 옴므파탈로써 도미코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니이타카를 살인범으로 확신하는 그녀이지만 가까이 접근할수록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그는 현실을 뛰어넘은 존재다. 머리로는 동료를 살해한 살인범이지만 가슴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버스 차장의 일상을 탈출하게 해줄 남자인 것이다. 니이타카를 인식하는 도미코에게 이성과 감성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즉, 도미코가 겪는 혼란은 어떤 경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파괴는 도미코의 심리적 상황을,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관계를 함축하는 <꿈의 미로>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하여 이시이 소고 감독은 상반되는 존재의 충돌을 영화의 주요 이미지로 활용한다. 컬러화면 대신 흑백화면을 선택한 것도 그렇거니와 니이타카는 선과 악 사이를 넘나들고 그를 대하는 도미코의 심리는 한줄기 빛을 따라 어두운 터널을 헤매는 방황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다시 말해 도미코에게 니이타카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연결하는 터널과 같다. 니이타카를 벗어나야지만 도미코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터널의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 도미코의 주변을 휘감는 허무와 파괴의 공기는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그래서 탐미적이다. 사랑은 찰나적이지만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허무하다.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영화는 꿈과 현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도미코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그리고 니이타카는 바로 바니타스의 캐릭터적 재현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성격이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찰나적 아름다움 뒤에 늘 파국의 그림자가 숨어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훌쩍 자살을 택한 남자였고(<환상의 빛>),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돌발적인 살인을 감행했으며(<헬프리스>), 모성애를 자극하는 창백한 얼굴에서 살인의 그림자가 엿보였다(<포커스>).

이시이 소고는 1980년대 일본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장본인으로써 경제 호황을 누리는 일본의 이면에 숨겨진 광기를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살얼음 같은 아름다움 뒤에 균열을 품은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의 얼굴이면서 곧 감독의 미학을 실현해줄 가장 적합한 그릇이었던 셈이다. <꿈의 미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에 담긴 사연을 가장 명확하게 규정한 작품일 것이다.


QOOK 블로그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11.17)

<로프트>(ロフ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쿄 소나타>(2008) 이전까지 구로사와 기요시가 보여주는 공포에는 대부분 실체가 없었다. <큐어>(1997)의 최면 걸린 이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고, <회로>(2001)에선 실체 없는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타고 퍼졌으며, <절규>(2006)에서 역시 사람들은 이유 없이 유령에 씌어 지구멸망에 이르렀다. 마치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 없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에 반해 (국내에 뒤늦게 개봉한) <로프트>(2005)는 많은 것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들이 겪는 공포에 대해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소설가 레이코(나카타니 미키)는 청탁받은 가벼운 연애소설을 쓰던 중 심한 기침에 시달린다. 급기야 입에서 진흙 같은 것이 흘러나오자 집필 환경을 바꾸기 위해 교외로 이사한다. 바뀐 환경이 맘에 들 때쯤 레이코는 이웃 건물에 거주하는 남자가 시체로 보이는 물건을 운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고고학자인 요시오카(도요카와 에쓰시)가 연구 목적으로 천년된 미라를 들여온 것. 요시오카의 부탁으로 미라를 맡게 된 레이코는 그날 밤부터 이상한 환상에 시달린다.

<로프트>는 기존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들에 비해 꽤 명확한 공포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도쿄 소나타>에 비해 추상적인 형태를 띤다. 한마디로 <로프트>는 구체(具體)와 추상 사이에서 알아주는 이 없이 묵묵히 공전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우주의 외로운 소행성 같은 영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천년된 미라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저주를 내린다는 자막으로 꽤 구체적인 설정을 제시한다. 그에 맞춰 이야기 역시 레이코가 겪는 몸의 이상이 미라와 관계돼있음을 암시하고 요시오카 또한 미라로 인해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일련의 사건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어지러운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다. 미라가 완전히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듯이 <로프트>의 촬영이나 극중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공포의 존재, 그리고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까지 대부분 경계에 선 듯한 양상을 보인다. 

단 2대의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는 HD카메라와 DV카메라를 통해 영화적인 화면과 거친 입자의 라이브한 화면으로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한편으론 주인공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기도 한데 미라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갑작스런 유령의 출현에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는 점입가경의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로프트>가 엔딩을 장식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형태로 딱 부러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해피엔딩처럼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사랑에 골인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구로사와 기요시 특유의 절망적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현대 일본사회를 넘어선 좀 더 큰 범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좀 더 장르적인 영화에 충실하려 했다.”는 감독의 연출의 변을 상기한다면 <로프트>가 의도하고 있는 바는 어렵지 않게 이해 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 때문에 <로프트>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박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치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의 저변에는 기존 작품과 달리 꽤 설명적인 영화로 흘러가는 작품이 결국엔 설명을 회피하고 있다는 반응이 상당수다. 미라는 레이코에게 어떤 저주를 내린 것일까? 과연 레이코는 파멸에 이른 것일까? 요시오카는 왜 그렇게 미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극중 레이코와 요시오카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처럼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감독이 관객들에게 의도적인 혼란을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문제는 그런 연출 의도가 형식에 치우친 나머지 이야기에 대한 단서가 너무 부족할 뿐 아니라 불친절한 설명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로프트>는 형식에의 지나친 집착이 이야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만하다.


QOOK블로그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9.8)

<걸어도 걸어도>(步いても 步いても)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환상의 빛>(1995)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자와의 사별, 사후 세계, 버려진 아이 등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왔다. 그것은 결국 현대 사회가 잃은 또는 잊은 가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재라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항상 ‘남겨진 자’에 방점이 찍혀있다. <걸어도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극중 주인공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10년 전 바다에서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장남의 기일 때문이다.

그러나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형만 편애했던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어머니(기키 기린)에게 걱정을 끼쳐드릴까 염려스러울 뿐 아니라 늦은 결혼으로 아내(나츠가와 유이)의 아들까지 얻었는데 가족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료타는 부모님은 물론 누나(유) 내외와 한때를 보내면서 가족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2007) 이후 차기작으로 20대 후반의 여자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를 구상 중에 있었다. (후에 이 작품은 내용이 바뀌어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으로 개봉했다!) 그러나 3대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의 하루를 묘사한 <걸어도 걸어도>로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년 동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가족의 단절, 소통부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출발점삼아 완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는 모습이랄지 그 주변에서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경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족의 일상을 다루는 <걸어도 걸어도>는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계보에 두고 설명이 가능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개인의 경험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 (감독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영화 촬영 중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 영화와 비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 감독은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섣불리 희망을 드러내거나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료타의 가족을 차분히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에는 가족의 의미를 한 발 늦게야 깨닫는 현대 가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어머니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스모 선수의 이름을 헤어진 뒤에야 생각하는 료타의 경우처럼 가족은 함께 할 때나 헤어질 때나 계속해서 평행을 긋기에 애틋한 존재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뒤늦게야 가족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극중 주인공들이 결코 성취를 이루는 법이 없다. 정신적 성장은 이룰지언정 목적을 이루는 성질의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 끝맺음되지 않았기에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안 그래도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 제목은 19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이시다 아유미의 히트곡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의 가사에서 가져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록 흔들릴지언정 계속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한 발 늦게서야 가족의 의미는 찾아오는 법이다.  


QOOK 블로그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