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년 기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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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은 사람들이 전혀 관심 갖지 않았던 <불신지옥>(2009)이라는 공포영화로 기대주에 등극했다. 3년만의 신작 <건축학개론>은 <불신지옥>에 앞서 데뷔작으로 먼저 준비했던 영화로 알려진다. 건축가로 근무 중인 승민(엄태웅)에게 낯익은 손님이 찾아온다. 대학시절 첫사랑이었던 서연(한가인)이다. 그녀가 옛집을 새로 지어달라는 의뢰를 하면서 이를 계기로 승민은 과거의 사랑을 추억한다. (과거의 승민과 서연은 각각 차세대 연기파 배우 이제훈과 걸그룹 미쓰에이의 수지가 연기한다.) 특출한 내용의 멜로는 아니지만 건축공학과 출신의 이용주 감독은 전공을 살려 건축 설계하듯 주인공의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건축가가 건축주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야 좋을 집을 만들 수 있듯 상대방의 심리를 잘 파악해야 사랑 또한 잘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승민과 서연의 사연은 극 중 집을 완성해가는 단계와 합을 맞춰 진행된다. 그래서 <건축학개론>은 인물의 사연만큼이나 공간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다.




korean cinema today
(2012년 베를린영화제 특별판)

<불신지옥>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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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물처럼 풍선 터지듯 관객석 여기저기서 와 하는 함성소리가 쏟아졌다.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예정되어있던 전주시네마타운 1관에 남상미, 심은경, 김보연, 류승룡 등 주연배우까지 모두 참가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집 나간 동생을 찾는 언니의 고군분투 속에 한국 사회에 독버섯처럼 침투해있는 빗나간 믿음에 대한 정체를 일상에서 건져내는 작품이다. 비록 개봉 당시에는 <해운대>와 <국가대표>에 밀려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작품성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는 영화였던 까닭에 이용주 감독은 물론 출연한 배우들 역시 애정이 대단했다. 감독과 배우, 그리고 관객까지 <불신지옥>에 대한 애정을 무한대로 확인했던 시간,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의 진행으로 시네토크에서 오간 대화의 일부를 공개한다.

어떻게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됐나?
(이용주 감독) 이야기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는 영매와 믿음에 관심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고민하다보니까 무속신앙과 기독교라는 얼개가 나오게 됐고 자연스럽게 공포영화와 연결됐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전에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고 나서 어떻게 하면 입봉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공포와 저예산으로 돌파구 삼으려했고, 세트비중이 높은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불신지옥>이 나오게 됐다.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처음 본 후 어떤 인상을 받았나?
(남상미) 희진이라는 역할로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감독님과 처음 미팅할 때 소진이를 하면 안 되겠느냐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근데 아시겠지만 내가 나이가 많아서 포기했다. (웃음) 내가 맡은 희진은 매력적인 인물인데다가 관객에게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내레이터의 역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연기를 했고 처음 시나리오 상에 나왔던 이야기보다 영화에서 더 좋게 나와 기쁘다.

(심은경) 시나리오를 보고 굉장히 욕심이 많이 났다. 지금도 애착이 많은 작품이다. 평소에도 강한 역할에 관심이 많은데 <불신지옥>의 소진은 첫 느낌이 굉장히 신비스럽고 묘한 느낌을 주는 소녀 같았다. 오디션을 보면서도 감독님에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비쳤다.

(김보연) 이용주 감독님께서 내가 연기할 수 있게끔 좋은 역할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끝으로 앞으로는 공포영화를 안 할 생각이다. <불신지옥>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보다 더 좋은 역할을 다른 공포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류승룡)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이렇게 오게 됐다. 그만큼 영화를 만들 때도 패밀리쉽이 있었던 현장이었다. <불신지옥>은 불운의 작품 중 하나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십만 명의 관객이 보았다. (웃음)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굉장히 퀼리티 있고 색다른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읽고는 구원이라든지, 잘못된 믿음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하고 싶어 이 영화를 선택했다. 

<불신지옥>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영화제, 뉴욕의 트라이베카 영화제 등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직접 경험한 해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이용주 감독) 국내에서라면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관객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영어가 짧아서 (웃음) 해외에서는 상영관의 반응만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 개봉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적인 공포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점집이나 아파트와 같은 한국적인 분위기에 대해 외국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관객들은 공포영화를 즐기는 습관이 돼있다고 할까, 의외로 재미있게 보시더라. 

배우 입장에서 가장 찍기 어려웠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남상미) 가위 눌리는 장면. 가위를 경험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나는 한 번도 없다. 그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감독님과 상의를 많이 했다. 콘티가 워낙 좋아 고민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장면이다.

(심은경) 의자 위에 올라가 돼지고기를 씹으면서 신들린 장면을 연기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앞 상황을 먼저 찍었다면 감정이 연결돼서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의자 연기를 먼저 찍고 이전 상황을 연기했다. 이 때문에 감독님과 의견 차이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세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했는데 영화로 나온 걸 보니 감독님 말이 맞았다. (웃음)

(김보연) 영화 결말부, 옥상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그랬다. 진짜 떨어졌다. (웃음) 당시에 사실 내가 왼쪽 장을 수술했다. 그 때문에 이용주 감독님한테 굉장히 미안했다. 실제로 매달려서 연기를 해줬으면 요구했는데 수술을 한 부위가 너무 많이 당겨서 와이어를 못하겠더라. 그래도 감독님이 잘 찍어주셨다. 다만 감독님 요구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게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류승룡) 진지하게 연기했는데 웃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끝에 가면 희진에게 극중 나의 딸이 빙의가 되는 장면이 있다. 항상 귀신같은 것은 없다고 관객과 비슷한 감정으로 연기를 하다가 일순간 아버지로써 무너진다. 그런 연약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을 정도다. 원래는 원 컷 원신으로 한 번에 이어서 찍는 거였는데 투자사와 제작사의 압박 때문에 중간 중간 자르게 됐다. 감독님이 내게 굉장히 미안해하는 부분 중 하나인데 시사회 때였나, 거기서 무릎을 꿇으니까 모두 웃었다. 그 때문에 힘들었다.  

영화 초반, 희진은 꿈속에서 놀이터에 앉아있다. 그때 새가 와서 희진의 손바닥에 놓인 이빨을 쪼는데 무슨 의미인가?
(이용주 감독)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게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공포를 조장할 수 있을까?’이었다. 기존의 공포와 달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일상적이되 어느 한 구석이 낯선 느낌이었다. 딱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가 유발되는 느낌이 하나의 룰이었다. 새만 보면 이상하지 않지만 아파트 놀이터에 새가 있으면 이상하다. 그 새가 뭔가를 쪼아 먹으면 좋겠는데 무엇이 좋을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 꿈이니까 몽환적이었으면 하고 생각했고 그것이 공포로 둔갑하기를 바랐다. 꿈에서 이빨이 빠지면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대표적인 흉몽이다. 가족의 불상사, 그리고 난데없는 공포를 주는 소재를 생각하다가 이빨이 떠올랐다.

지금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영화는 무엇인가?
(이용주 감독) <해운대>나 <국가대표> 같은 영화? (웃음) 그런 작품처럼 흥행이 되는 영화를 찍지 않으면 앞으로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다. 얼마 전에 시나리오를 끝냈다. 물론 영화로 제작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깨끗해서 더러움 같은 것은 범접할 수 없는 밝고 경쾌한 첫 사랑의 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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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th JIFF daily
(2010.5.6)

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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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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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불신지옥>(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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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십년 가까이 여름시즌을 장식했던 국산 ‘피(血)무비’는 매년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배출하며 극장가의 대표적인 지뢰밭으로 악명을 드높였더랬다. 올해 기세 역시 만만찮아서 여름 피무비 시장의 서막을 열어젖힌 <여고괴담5:동반자살>의 경우, ‘여고괴담’ 시리즈가 쌓아왔던 명성을 한 큐에 말아먹으며 혹시나 하던 기대를 역시나로 마무리하는 놀라운 살상능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올해 역시도 ‘볼짱 다 봤다’는 불신감이 영화판에 팽배할 때쯤 홀연히 등장한, 관객을 피 보게 만든다 하여 피무비가 아닌 말 그대로의 공포영화가 한편 있으니, 바로 바로바로 이용주 감독의 데뷔작 <불신지옥>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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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찮다. <불신지옥>이란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가져왔나보다. 그럼 일부 빗나간 종교인을 향해 똥침 놓는 영화? 아니다. <불신지옥>은 단순히 특정종교인을 겨냥한 작품이 아니다.

물론 광적인 기독교인이 등장한다. (무속신앙인도 등장하지만 너무 자세하게 밝히면 명랑관람에 지장 있는 바, 이 부분은 생략하기로 한다!) 주인공 희진(남상미)의 마더(김보연)다. 딸 소진(심은경)이 실종됐음에도 찾을 생각 없이 기도에만 올인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찾아준다나 모라나. 희진은 그런 마더의 행각에 복장 터진 나머지 경찰에 신고하지만 형사 태환(류승룡)은 단순 가출을 이유로 수사에 소극적이다. 바로 그때, 윗집에 사는 소진의 친한 언니가 목매 자살을 하면서 상황은 급변, 태환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다. 하지만 소진을 목격했다는 이웃주민들이 하나둘 이유 없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보신 바와 같이 <불신지옥>은 종교적인 이야기와는 코딱지만큼도 연관이 없다. 다만 소진 정도를 제외하면 <불신지옥>의 등장인물들은 종교적이다 싶을 정도로 어딘가에 집착하는 모습이 강하다. 희진과 소진 시스터즈의 마더는 말할 것도 없고 옆집에 사는 시한부인생의 수경(장영남)은 병만 낫는다면 뭔 짓인들 벌일 기세며 5공 독재시절의 향수에 푹 절어 사는 아파트 경비원 귀갑(이창직)은 자기 기준에 벗어나면 누가 죽어도 별 상관없다는 투다. 태환 역시 다르지 않아, 딸이 죽을병에 걸려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이렇듯 <불신지옥> 속 대부분의 인간들은 광신도에 다름 아니다. 감독이 보기에 극중 기독교인이나 무속신앙인은 별 반 다를 것이 없는 인물이다. 오로지 자신의 믿음만을 신봉하며 그 믿음에 반하는 이들은 모두 경계하고 해를 입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의 믿음에서 보는 건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빗나간 믿음이 주는 공포다. 문제는 그것이 그 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내 삶은 물론, 당신 주변의 모습도 다르지 않으며 우리가 처한 상황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는 듯 보인다. 다시 말해,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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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장화, 홍련> 이후 국산 피무비들이 베껴먹고 또 베껴먹길 주저하지 않았던 알록달록 꽃무늬 벽지 풍의 숲속의 대저택스러운 공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불신지옥>의 배경은 지방소도시의 아파트를 웬만해선 떠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아파트는 지극히 한국적인 공간이다. 오로지 ‘잘사니즘‘을 앞세운 개발논리의 첨병이자, 성냥갑을 도미노처럼 배열한 천편일률적인 만듦새에, 별 특징 없는 공간 속에서 목격되는 특유의 잡스러움까지. 예컨대, 극중 아파트는 교인을 드러내는 교회 명패와 함께 동네무당집 간판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한국 외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혹자는 이용주 감독이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란 점을 들어 ’<플란다스의 개>의 오마주‘, ’봉준호에게 받은 영향‘ 등 플란다스의 개 같은 사운드를 내기도 하는데, <불신지옥>은 지금의 한국, 그중에서도 우리네 평균적인 현재 삶이 만드는 무지막지한 풍경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귀신의 존재나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귀신의 공식복장이랄 수 있는 하얀 소복과 긴 머리는 저 멀리 나빌레라 흔적도 찾을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말끔한 복장에 긴 머리까지 모자로 감춘 이가 귀신이라고 등장할 지경이다. (물론 존나게 무섭다!) 더욱이 가위눌림과 신들림, 그리고 지하실의 어둠과 같은 현실적인 소재로 공포를 자아내는 솜씨는 과연 <불신지옥>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현실적인 공포를 목격하는 건 아마도 윤종찬 감독의 <소름>(2001) 이후 실로 오랜만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는 한편으론 그동안의 국산 피무비들이 얼마나 무뇌아적인 방식으로 이 장르를 다뤄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공포영화는 오락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 기반은 현대인의 심연 깊숙한 곳에 짱박힌 불안 심리를 바탕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치로써의 공포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이러한 현실이 뒷받침되어야 하거늘 오로지 놀람과 사지절단으로 오해한 부류들로 인해 국산 공포물이 피무비의 불명예를 뒤집어썼다는 얘기다. <불신지옥>이 그 자체로 좋은 공포영화인 것은 사실이지만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면에는 피무비들의 활약이 한몫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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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불신지옥>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사건은 소진의 실종에서 시작되고 이야기 전개는 대부분 태환의 수사로 이뤄지며 결국 소진을 찾음으로써 끝맺음되기 때문이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소진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앞서 밝힌 바, 이 영화가 다루는 공포의 정체는 맹목적 믿음이 야기한 불신이다. 즉, <불신지옥>은 소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그런 점에서 <불신지옥>은 대만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1986)를 연상시킨다. <공포분자>는 경찰이 소년 갱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이 주변 인물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지를 탐구한 작품이다. 이를 에드워드 양은 굉장히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것에 반해 <불신지옥>은 장르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한다. 좋은 장르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순수하게 오락적인 형태로써 현실과 유리된 듯 보이지만 그 형식을 좇다보면 그 끝은 항상 현실, <불신지옥>과 같은 공포영화의 경우, 현실의 어두운 이면과 맞닿아있다.

그에 비춰, <불신지옥>이 품고 있는 영화적 메시지는 가볍게 넘길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소진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며,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소진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슴 찢어지는 자식의, 동생의, 이웃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불신지옥>은 뜬금없게도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모성의 기적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영화가 내세우고 있는 도발적인 화두에 비해 결말의 야심이 부족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기야 감독에게도 뾰족한 해답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기 위해서 감독이 감당해야 할 모험의 위험성이 너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특정종교를 비판했을 때 닥쳐올 반발은?) 그런 상황에서 모성에 책임을 지운 지금의 결말이야말로 <불신지옥>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신지옥>의 결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가 내세우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정작 <불신지옥>이 처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찾는 관객이, 별로 ‘엄따’ <해운대>는 천만 관객 초읽기요, <국가대표>는 3주 만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한다는데 <불신지옥>은 지난 한 주 동안 1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물론 ‘한국 공포영화가 그 정도면 많이 든 거 아니야’ 이렇게 나오시면 할 말 없지만서도 다만 <불신지옥>은 그간의 국산 피무비가 쌓아온 한국 공포물에 대한 관객의 불신을 한 방에 날려버릴 만한 작품이다. 그러니 <해운대>와 <국가대표>도 좋지만 이 영화에도 관심 좀 가져주면 안되겠니? <불신지옥>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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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