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킹 우드스탁>(Taking Wood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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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이하 ‘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은 어떤 영화를 소개해주실 건가요?
허남웅(이하 ‘허’) 오늘은 <와호장룡> <색,계>의 연출자로 유명한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7월 29일 개봉)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어떤 작품이죠?
1969년이었죠, 미국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려 큰 반향을 일으켰잖아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가자 인기 있고, 가장 중요한 록 뮤지션들이 모여 3박 4일 동안 5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펼쳐졌던 페스티벌인데요. <테이킹 우드스탁>은 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어떻게 열리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나보죠?
실제로 <테이킹 우드스탁>은 국내에도 지난 4월에 출간이 된 동명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책의 저자 엘리엇 타이버는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이 열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우드스탁 관계자들이 페스티벌을 열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장소를 제공한 사람인데요. 리안 감독이 <색,계> 홍보 차 TV토크쇼에 출연했다가 책의 저자 엘리엇 타이버를 만나 책을 전해 받게 됐고, 따듯하고 코믹한 감성에 매료가 돼서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하네요.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있어 우리가 잘 모르는 흥미진진한 배경이 있었군요?
정말로 극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전설적인 페스티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뭐랄까, 잡스러운 배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데 최현정 아나운서는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이 어디에서 열렸다고 알고 계신가요?

우드스탁 페스티벌이니까, 우드스탁에서 열린 거 아닌가요?
최현정 아나운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드스탁이라고 하면 우드스탁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실은 우드스탁이 아닌 뉴욕주의 ‘베델’이라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원래 열리기로 했던 장소의 사람들이 히피들은 방종하고 성에 너무 개방적이고 동성애자들이 말썽을 부릴 거라며 장소 제공을 꺼려했거든요. 근데 베델 지역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엘리엇 타이버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장소를 제공하게 됩니다. 하도 파리만 날리는 모텔을 운영하느라 등골이 휘어가던 우리의 주인공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데 그렇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탄생했다고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죠.

책의 저자인 엘리엇 타이버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군요?
엘리엇 타이버 본인이 직접 출연을 하는 건 아니고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건데요. 디미트리 마틴이라고 국내에서는 생소한 배우고요, 미국에서도 배우보다는 코미디언과 TV쇼 작가로 유명합니다. 영화 출연도 실질적으로는 <테이킹 우드스탁>이 처음이라고 하는데요. 근데 재미있는 건 실제 엘리엇 타이버는 동명의 책에서는 뚱뚱한 체형에다가 평범에서 약간 모자라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묘사가 되는데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호리호리한데다가 꽃미남과의 배우가 출연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실제 타이버보다 영화 속 타이버가 더 호감 가는 인물인 건데, 이렇게 말하면 실제 엘리엇 타이버가 기분 나쁘려나요? 일종의 영화적 조크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록페스티벌이니만큼 영화에서 많은 록뮤지션들의 공연을 볼 수 있겠네요?
<테이킹 우드스탁>의 특징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다루지만 뮤지션들의 공연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사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다룬 작품들은 꽤 있었거든요. 사실 <테이킹 우드스탁> 책이 관심을 끈 건 공연 자체가 아니라 이 페스티벌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예컨대, 엘리엇 타이버의 어머니는 돈에 환장한 여자로 나오거든요. 남편과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재능을 보이는 자식을 볼모로 잡아(?) 모텔을 운영하는 여자인데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랄 수 있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함께 하면서 엘리엇 타이버는 물론 그의 아버지까지도 어머니의 협박 아닌 협박에서 벗어나 진짜 그들 각자의 인생을 찾아 나서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뒷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답게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다루는군요?
이 영화는 우드스탁이 뭔가를 변화시켰다고 신화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성의 순간은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영화는 우리의 주인공이 우드스탁이 벌어지는 동안 약에 취해있는 것처럼 묘사해요. 그것처럼 누군가는 우드스탁을 통해 자유와 평화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느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우드스탁의 공연 자체를 즐겼을 것이며, 또또 누군가는 엘리엇 타이버처럼 삶의 변화를 꾀했을 거라는 거죠. 우드스탁은 이미 끝난 지 오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형태로 남아있다는 거죠.

이안 감독의 최근 작품인 <색,계>와는 굉장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져요.
<색,계><와호장룡> 같은 영화와는 많이 다르죠. 하지만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이지만 미국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족과 동성애는 즐겨 사용하는 소재였죠. <아이스 스톰>처럼 1970년대의 미국 가족의 붕괴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고, <브로큰백 마운틴>처럼 가슴 저린 동성애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요. <테이킹 우드스탁>은 이 두 가지 소재를 모두 다룹니다. 엘리엇 타이버는 동성애자였고 결국 그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니까요. 다만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다소 가볍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테이킹 우드스탁> 역시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FM4U(6:00~7:00)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1.
 
애니 프루(Annie Proulx)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상자 속에 몰래 숨겨둔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남몰래 마음속에 꿍쳐두고 있는 비밀에 대한 영화다. 어떤 비밀? 동성친구를 사랑한 슬픈 비밀. 근데 왜 동성친구를 사랑한 것이 슬픈 일이 되어야하며 비밀이 돼야하는 걸까? 일단 스토리부터 살짜쿵 살펴보기로 하자.

에니스(히스 레저 분)와 잭(제이크 질렌할 분)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하루살이 카우보이 인생들. 거미줄 친 입에 풀칠 좀 해보려고 인간 하나 없는 브로크백 산에서 양치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어느 날 새벽 버럭! 눈이 맞아 러브에 빠지고 마는데…


당 영화의 무대는 마초냄새가 코를 찌르는 카우보이 세계. 그 바닥에서 동성애는 놀림감이자 종국엔 사형감. 게다가 때는 1963년. 지금도 동성애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니 주변 편견의 눈길 피하랴, 맘 놓고 러브 할 수도 없어 당시 잭과 에니스 커플의 사랑은 지금보다 몇 곱의 몇 갑절은 더 힘들었을 게다. 이들의 사랑이 슬프고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


특기할 만한 건, 영화가 이들 서서쏴 커플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주로 에니스의 시점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사실 에니스는 잭을 알기 얼마 전 알마(미셸 윌리엄스 분)와 약혼한 이성애자다. 더군다나 존나게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탓에 아버지로부터 게이는 불알이 찢겨져 죽어도 싸다는 교육(?)까지 받고 자란 몸. 그런 그가 잭과 충동적으로 한 빠굴 뛰고 난 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러니 에니스에게 잭을 사랑한다는 건 처음부터 고난이 따르는 일.


물론 힘들기는 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부터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잭은 이런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가 또는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을 해나가니 에니스처럼 정체성 혼란을 극심히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고로 감독은 에니스의 시점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진행함으로써 관객에게 그런 슬픈 사랑이 더 잘 전달되게끔 설정을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카메라와 장면의 설정도 이들의 감정 특히 에니스의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가령 영화 초반, 잭과 에니스가 처음 만나 첫 번째 빠굴을 하는 장면까지 카메라는 브로크백 산의 풍광 속에서 초원의 말처럼 자유롭게 러브를 나누는 모습을 입이 쩍 벌어지는 스케일에 담아 속 시원하게 보여준다. 반면 산을 내려와 후일을 기약한 뒤 홀로 남은 에니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브로크백 산에서와는 다르다. 그가 좁아터진 골목으로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주변의 건물을 이용 앞뒤로 에워싸은 뒤 속 좁은 소심처럼 답답하고,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게끔 촬영한다.

이처럼 당 영화는 잭과 에니스가 사회의 편견 속에서 맘 졸이며 닫혀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들이 편견의 눈길을 피해 브로크백 산에서 마음 놓고 러브를 나누는 장면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두 상황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우리 주인공들이 겪는 슬픔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다시 말해 <브로크백 마운틴>은 힘든 사랑에 대한 영화다.



2.

하지만 에니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만으로, 카메라가 그런 혼란을 황량하게 수놓는다고 그 사랑이 저절로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닐 터. 에니스는 혼란을 겪는 것만으로 모자라 결국엔 어렵게 이룬 가정이 풍비박산 되는 꼬라지에 처하고 만다. 그놈의 동성애 때문. 어디 감히 아내가 있는 남자가, 그것도 카우보이 모자를 꾹 눌러쓴 그가 어떻게 같은 성인 서서쏴와 러브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당 영화가 카우보이 세계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우보이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신화의 무대. 미국인들이 그런 자신들의 신화를 가슴에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근데 대만인인 이안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나보다. 이미 <아이스 스톰>에서 콩가루 된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사회의 허약함을 들춰냈듯 당 영화에서도 이안이 보는 미국 신화의 세계는 허약하고 부실하기만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이 바로 잭이 결혼 이후 텍사스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텍사스는 카우보이의 중심지. 잭의 부인 로린(앤 헤서웨이 분)은 텍사스 출신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로린은 먼저 잭에게 적극적으로 껄떡대고, 잭과의 빠굴을 리드하며,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과시한다. 여자이면서 도리어 더 사내대장부 같은 모습. 남자의 가치가 우선하는 그곳에서는 그렇게 키우는 것이 당연했나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계집애처럼 구는 잭이 맘에 들지 않아 사사껀껀 그를 무시한다. 보건데 남자의 가치와 동떨어진 동성애자 잭의 최후 역시 에니스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안 봐도 비디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듯 미국의 신화는 자신과 다른 이들은 무시하고 배제하는 식으로 자신들만의 에덴동산을 완성했다고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잭과 에니스의 러브질로 인해 이들 가정이 붕괴되는 모습을 비추며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미국 신화의 허약한 고리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감독 이안이 이를 통해 대놓고 미국사회에 똥침을 놓는다든가 하는 뭔가 거한 주제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관객이 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끔 간간히 사회의 편견을 드러낼 뿐 영화는 잭과 에니스의 비밀스런 러브를 중심에 두고 이들의 감정과 은밀한 감정교류를 담담히 영화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들이대는 공간은 카우보이의 전체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잭과 에니스가 러브를 나누는 브로크백 산의 한정된 공간과 이들의 사적인 공간만이 전부다. 그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니 철저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법.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것이 또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가해자는 대개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범 또는 제약, 편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은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가지각색일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은 2차 대전 직후 일본의 절망적인 시대상 속에서 비극적으로 끝맺음될 수밖에 없는 유키코·도미오카 커플의 러브를 보여줬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에서 메말라 버린 한국 현대사회에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 찍혀 처절하게 하지만 마술적으로 러브를 나누는 홍종두와 한공주 커플의 사연을 보여줬다.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1960년대 미국 그것도 미국 신화의 상징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를 통한 에니스와 잭의 슬픈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이 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슬픔을 마음에 담아둔 채 이를 살아가는 힘 삼아 삶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영화의 마지막, 에니스는 자신을 찾아온 딸의 결혼식 초대에 승낙하고 곧바로 잭과의 사연이 담긴 삐리리와 브로크백 산의 풍광이 담긴 그림엽서를 고이 간직한다) 때문일 테다. 본 우원 이런 표현하기 참으로 쑥스럽다만 우리는 이런 러브를 흔한 말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사랑이라 불러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두고 이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쯤에서 본 우원, 실로 간만에 검열보고 하는 당 영화에 베스트를 수여하며 짧은 소견을 마친다. 끝!


(2006. 3. 7. <딴지일보>)

<헐크>(Hulk)


무협이면 무협(<와호장룡>), 서부극이면 서부극(<라이드 위드 데블>), 사회비판드라마면 사회비판드라마(<아이스 스톰>), 에. 또.. 음… 모냐…. 긍까….. 그거, 잔잔한 유머가 돋보이는 인간극장 삘 다분한 <쿵후선생>과 <결혼피로연>까지.

어떤 소재든 맨졌다하면 쫙! 빠진 모냥새를 만들어내어 세간의 찬사를 받았던 아시아의 작은 꼬추 이안이 이번에는 글씨 미국 만화 캐릭터 <헐크>를, 그것도 블록버스터로 만든다 하여 기염을 토했더랬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삼팔선 넘나들 듯 특정장르에 집착하지 아니한 창작욕을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동양의 감독이 양키 감수성 물씬 묻어나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 마블코믹스를 영화로 맹글었다고 하니 참 말들이 많았드랬다.

일각에선 ‘교장선생님 훈화시간만큼이나 존나게 졸린 영화’ 라고 학을 띄었다. 딴 일각에선 ‘블록버스터의 일반상식을 히떡 바꿔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과연 당 영화의 진실은 무얼까… 를 디벼보는 것이 이 개봉영화검열평의 의무 아니겠냐. 해서 디볐다. 어서 따라들 온나.


1.

잘 아시겠지만 당해 영화 <헐크>는 <엑스맨>,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등 온갖 맨들의 종갓집인 스탠 리 옹의 마블 코믹스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대표 캐릭이다. 국내에서는 80년대 초반 <두 얼굴의 싸나이>란 제목으로 케베쑤에서 방영되어 역시나 선풍기적인 인기를 모은 적이 있었드랬다.

평상시엔 샌님처럼 얌전떨다가 빡 돌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화를 주체하지 몬하고 바야바처럼 변신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적인 모티브가 백미인 <헐크>. 이 작품에 우리가 품고 있는 아련한 추억이란 아마 미테와 같을 테다.

투악투악 찢겨져 나간 옷 조각을 뒤로한 채 아담과 이브의 낙엽처럼 국부만을 살짝 가린 청바지의 위용, 그 무지막지한 인상과 보디빌더스런 팔뚝 그리고 王자가 아로새겨진 갑빠를 앞세워 적들을 응징하는 선 굵은 몸부림.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헐크>다.  

하지만 이안이 만든 <헐크>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헐크>가 아니다. 미량의 천 조각으로 자신의 좌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모습은 여전하나 CG로 새롭게 태어난 헐크의 우량한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이야기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슈퍼 영웅적 활약담을 다룬 것도 아니다.  

대신 아버지의 무모한 과학적 욕망 탓에 본의 아니게 튀나오는 자신의 악마성으로 고뇌하는 쥔공 브루스 배너(에릭 바나 분)와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 배너(닉 놀테 분) 사이의 갈등을 중점적으로 디비고 있음이다.

전작을 통해 주로 인간을 탐구하고 개인간의 운명적인 관계에 관심을 두었던 경력답게 이안은 <헐크>에게서 초록빛 살덩이가 내뿜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본 것이 아니라 약하디 약한 인간의 가녀린 심성을 목격하였고, <프랑켄슈타인>의 주제처럼 과학의 맹신이 인간에게 보답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캐치해 낸 것이다.

그래서 당 영화의 초반부는 아버지한테서 변형된 유전인자를 물려받게 된 배너 家의 기막힌 사연을 소개하고, 브루스 배너가 <헐크>가 되기 전까정 겪는 갈등 그리고 베티(제니퍼 코넬리 분)와의 사랑동안 보여지는 소심한 성격과 같은 카인드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분의 관객덜이 학수로 고대하는 <헐크>의 모습은 영화가 시작되고 무려 1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얘기. <두 얼굴의 싸나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액숑보다 드라마적인 요소에 더욱 힘을 쏟은 당 영화는 매우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이다.  

게다가 당 영화는 중반부 이후부터 <헐크>의 괴력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긴 하는데 전체적인 구도가 선과 악의 맞짱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으로 설정되어 있고 풍기는 분위기가 비극적인 가족사에 더 기울어져 있기 땜시롱 오락적인 요소보다는 억쎄게 재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때문에 당 영화는 느와르처럼 매우 어둡게 처리가 되는데 맨시리즈를 영화화한 다른 작품과 구지 비교하자면 팀 버튼의 <배트맨> 쪽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2.

하지만 팀 버튼이 <배트맨>을 영화화하는데 있어 이야기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의 장기를 살려 미술적인 면에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안은 그 반대로 접근하고 있음이다.

위에서 보셨겠지만 이안은 기존의 <헐크> 이야기를 자신의 세계관에 맞추어 재구성하였다. 그렇지만 영화의 형식은 만화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에 충실하도록 하였음이다.

이런 의도는 슈퍼면역 시스템을 실험하는 장면을 만화스럽게 표현한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편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단 장면을 전환하는데 있어서 당 영화는 기존의 편집처럼 장면들을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브루스 배너가 아버지에게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데서 착안, 마치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로 전이되듯 다음 컷이 앞의 컷을 서서히 잡아먹는 것처럼 장면을 연결하고 있음이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꾀한 거다.  

물론 원작이 만화이다 보니 만화적 특징의 도입 역시 필요했다. 그래서 이안은 화면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만화의 컷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바로 분할화면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분할화면처럼 상하 혹은 좌우 두 개로 단순히 화면을 나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분할된 장면을 만화의 컷처럼 불안정하게 배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만화책을 보는듯한 인상을 받도록 하였다.  

이렇듯 물줄기 흘러내리는 듯한 편집과 만화의 컷 개념을 도입한 화면분할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점에서나 아이디어적인 면에선 꽤 훌륭했다. 게다가 이안의 스타일리스트 적인 면모를 보여준 대목이기도 하고. 근데 분할화면 같은 경우 영화를 전개해 가는데 있어서 이야기를 늘어지게 만드는 최악의 효과를 내고 말았으니 이를 우째 쓸까나…

몇 개의 화면으로 분할된 장면은 그 수만큼의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당 영화에서의 분할화면은 하나의 컷만으로도 충분히 정보제공이 되는 것을 쓸따리없이 나눈 것에 불과하다. 형식에 너무 집착한 거다.  

그러다보니 불필요한 정보만 많아지게 된 꼴이 되었다. 안 그래도 초반부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끄는 바람에 늘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분할화면까정 말썽을 부리니 당 영화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이게 모하자는 플레인가’ 하는 의문 뿌라스 불안감이 엄습해옴이다.  

그리고 아니나 달라 당 영화의 쥔공 <헐크>가 관객의 기대감을 온 덩어리에 받으며 그 광포한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웅성웅성대는 소음이 들려왔다. 환호의 웅성웅성이 아니라 어이없음을 호소하는 웅성임말이다.  

나오라는 <헐크>는 안 나오고 어디서 <슈렉> 한 마리가 예의 그 초록빛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낸 거다. 그러타. 당 영화는 알고 보니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성된 영화였던 거시다.

이런 닝기리…


3.

눈치들 까셨겠지만 당 영화의 결정적인 패착은 CG로 구현된 <헐크>다. 앞 대갈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안은 당 영화를 최대한 만화책처럼 하기 위해 헐크의 모습마저도 실사보다는 애니메이션에 더 가깝도록 만들고 말았음이다.

슈렉의 얼굴을 상하로 4~5미터, 좌우로 2~30센치 꼬집어 늘려 놓은듯한 고무인형스런 모습에서는 과거 실제 보디빌더인 루 페리뇨가 연기했던 <헐크>에서 보여지는 아날로그적인 인상 구겨짐이라든지 실제로 살아있는 근육의 움직임 덕에 받았던 공포시러움을 전혀 느낄 수가 없음이다.

요로코롬 이안의 <헐크>는 현실성이 결여되다보니 무려 5미터에 달하는 거대 괴수가 화면을 수놓으며 별의 별 지랄을 떨어대도 무섭기는커녕 어설픈 실사와 CG의 부조화스런 결합으로 존나게 우습게만 보일 뿐이다.  

광활한 대지 위를 발판 삼아 하늘로 피융피융 날아오르는 꼬라지를 대하면 <와호장룡>의 외전을 보는 것 같고, 어찌저찌해서 샌프란시스코에 입성한 후 난리법석을 피는 안하무인격 행동은 <쥬라기공원 2>의 헐크版을 보는 기분이다.

그뿐이냐, 얘가 제트기 꽁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안간힘 쓰는 모습이라든지 날아오는 미사일을 입으로 확 물고 퉤 뱉는 장면을 보면 씨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음이다.

안다. 이안이 자신의 작가적 역량도 살리고 블록버스터적인 재미도 살릴라고 한거. 근데 아니신걸 우쩌란 말인가.  

전반부의 드라마는 늘어지는 경향을 보여 지루하기만 하고 후반부는 씨쥐와 실사가 따로 놀아 스펙터클한 맛도 못 줄뿐더러 초반의 진지함과 막판의 황당함은 서로 충돌만 할 뿐 결합하지 못 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데… 게다가 재미없는 게 길긴 또 존나게 길다.

아마 유니버셜은 <와호장룡>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액숑씬에 감화되어 이안을 <헐크>의 감독으로 영입한 거 같은데 윗대가리덜 이하 관계자덜이 당 영화의 완성본을 보고 지었을 벙찐 표정을 생각하면 내가 다 웃음이 나온다.

“어, 머여 씨바… 이거 액숑 블록버스터가 아니잖아… 조뙜다!”

결과적으로 당 영화를 보건데 전반부는 무슨 지루한 철학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고 후반부는 아동필 물씬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이 이안은 원작만화 <헐크>의 이야기를 너무 작가적으로 접근하였을 뿐 아니라 만화라는 매체를 너무 과대해석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 두 가지 필이 서로 찰떡같이 붙지 못하고 개떡같이 따로 노는 꼴이 죽도 밥도 안 된 영화를 만들어 내고 말았으니 이안이 <헐크> 프로젝트의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이것이 당 영화가 유일하게 남긴 철학적이자 스펙터클한 교훈이다.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은 이래서 어려운 거다.


4.

재래식 영화 언론의 대표 주자 <쒸네 21>의 이번 주 409호 찌라지를 보면 <헐크>와 관련, ‘누가 리안과 <헐크>를 모함했나’라는 기사가 나온다.

<헐크>의 국내 개봉에 발맞춰 미국에서 떠돌고 있는 이런저런 악소문덜의 실체를 까밝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독자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고스란히 영화관으로 끌어 모으겠다는 의도.  

좋다. 어차피 영화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나 재미라는 것이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매체니까. 근데 개봉 첫 주에 관객덜이 많이 몰렸다고 해서 이걸 기준으로 <헐크>가 괜찮은 영화라는 뉘앙스를 풍기면 이건 존나 곤난하다.

‘그러나 일반관객은 동의하지 않았다. …(중략)… 다수의 저널리즘 평론가들이 욕하기에 바빴던 리안의 신작 <헐크>에 (일반관객들이) 다시 열광적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이다’

니덜도 알다시피 요즘 영화의 홍보 전략은 그 규모와 파장이 매우 커서 화제작의 경우 작품성과 평단의 어떤 평가에도 상관없이 첫 주에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다. 요즘 블록버스터급 영화덜이 개봉하는 주에 극장을 최대한 많이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건 바로 그런데서 기인하는 게 아니냐.

<헐크> 역시 그런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봉한 첫 주(6/20~22) 입장수익 6,212만 달러를 벌어들여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했다. 2위 <니모를 찾아서>의 입장수익을 4,000만 달러나 능가하며 말이다.

근데 <헐크>의 다음주 성적은… 전 주에 비하면 몹시 초라함이다. <미녀삼총사-맥시멈 스피드>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전주 입장수익보다 4,000만 달러나 줄어 고작 1,800만 달러만 벌어들이는 대폭적인 하향세를 보여줬다. 영화가 구리다는 사실이 영화 개봉과 함께 관람객덜의 입소문으로 알려진 거다.

<쒸네 21> 니들도 영화 봐서 알겠지만 이안이 만든 <헐크>, 결코 관객들이 좋아 할만한 영화가 아니다. 만약 니들 표현대로라면 <데어데블>같은 영화도 미국에서 개봉 첫 주에 일반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은 영화니까 볼만한 영화가 됐어야 했는데 우리 관객덜, 이 영화에 열광하기는커녕 돈 아깝다고 욕만 바가지로 하더라.

업계 1위 고수하랴, 영화 관계자들 비위 맞추랴 니네들 고충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하지만 니덜 잡지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독자가 있기 때문인데 왜 <쒸네 21>은 독자들의 입장에 서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업계 사람들의 입장을 이런 식으로 대변하고 자빠졌냐. 제발 언론의 본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응, <쒸네 21>아…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요는 당해 영화 <헐크>가 생각만큼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기사를 보는 독자제위덜께서는 <쒸네 21>과 같은 재래식 언론덜의 <헐크> 똥꼬핥기에 현혹됨 없이 피 같은 입장료 사수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그런 전차로 본 우원은 당 영화를 워스트 주녀에 뽕하며 <헐크>에 대한 개봉영화검열평을 여기서 마친다.


(2003. 7. 7.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