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의 용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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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火車)는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를 뜻한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왕창! 주의!! 책임 못짐!!!) 실제로 영화 <화차>에는 두 명의 망자가 등장한다. 한 명의 망자는 정선영(차수연). 자신을 꾸미기 위해 불법으로 대출금을 끌어 쓰다 서울에서 도피 중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부모가 남긴 대출 빚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던 차경선(김민희). 새 인생을 살고 싶어 선영을 살해 후 그녀의 신분으로 살다 정체가 들통 나 기차역에서 투신자살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화차>는 선영 행세를 하는 경선의 악행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 이 두 명의 망자(더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의 망자와 곧 망자가 될 이)가 한 공간에서 조우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용산역에서다. 선영 살해 후 또 다른 신분 세탁을 위해 범행을 계획하다 용산역에서 약혼자 문호(이선균)와 그의 삼촌 종근(조성하)에게 덜미가 잡힌 경선은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용산역에서 들어서 쇼핑몰을 경유해 철로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되는 것. 그런데 경선은 도망 중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 선영의 유령을 보며 경악한다.

두 망자의 원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태어났다는 것에 있다. 지금 이 사회에서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욕망을 부추기는 무수한 상품과 광고들의 전시 속에 경선과 선영 같은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이것들을 손에 넣을 수가 없다. 그러니 살아생전 이들에게 마음 편할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도망치는 경선의 눈 속에 비친 선영의 유령은 죽어서야 마음 편히 쇼핑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마치 경선의 미래를 암시하려고 그 위치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변영주 감독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하면서 경선의 악행에 대해 관객들이 동정심을 갖지 않도록 흐름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없는 이들에게 가혹하다고 해도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어야지 범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화차>에서 그녀가 단죄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왜 굳이 용산역이어야 했고 그녀는 철로 위로 떨어져야 했을까.

경선(과 선영)이 품은 소비(그리고 대출)에의 욕망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요컨대 대다수의 우리는 사회적 죽음을 담보로 대출을 감행하는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마치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쩌지 못하는 이들이 대기하는 공간, 즉 림보를 연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이들이 일주일간 머무는 림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화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용산역은 림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지상으로는 쇼핑몰, 극장, 레스토랑과 같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첨병들이 집결해있고 지하로는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이 오간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던 경선은 결국 지하로 몸을 던져 선영의 뒤를 따르게 되는데 철로 위에서 숨은 거둔 모양새가 마치 ‘화차’에 실려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엉클 분미> 새로운 영화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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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시즌은 가히 흥행 기대작들의 격전지라 할만하다. 올해 역시도 <시라노; 연애조작단> <무적자> <퀴즈왕> <레지던트 이블: 끝나지 않은 전쟁 3D> 등 관객의 구미를 끄는 소재, 대중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스타(배우와 감독), 할리우드의 최첨단 3D 영화처럼 흥행 코드로 범벅된 작품들이 추석 시즌의 흥행을 주도했다. 이 와중에 끼어든(?) 두 편의 영화,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 서술, 흥행 코드와 접목한 전통적인 영화 만들기와는 안녕을 고한 작품 구성으로 눈길을 끌었다.


<옥희의 영화> 생물 같은 영화의 경지

홍상수 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극장전>(2005)을 전후해 그의 영화는 남녀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스크린 속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가 현실을,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도록 연결, 뫼비우스의 띠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이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살아있는 영화’의 경지에 다다랐다.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옥희의 영화>는 눈이 아닌 두뇌로 볼 것을 요구하는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4개의 단편이 각자 자체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서로에게 느슨한 형태로 개입하며 장편으로 확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의 진구는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다. 낮에는 지도편달중인 여학생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그 뒤엔 술자리에서 송 선생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저녁엔 자신이 만든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받곤 곤혹스러워한다. 두 번째 ‘키스왕’의 진구는 학생이다. 송 선생으로 불리는 지도교수에게 단편영화 연출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같은 과 친구 옥희다. 옥희가 송 선생과 깊은 관계인 것으로 보이자 진구는 그녀에게 더욱 집착을 보인다. 그렇다면 송 선생에게는?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세 번째 ‘폭설 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폭설로 수업이 지연되고 참석한 학생도 진구와 옥희 뿐이다 보니 질의응답 시간이 돼버린다. 우문에 현답으로 응하는 송 선생을 진구는 거부감 없이 대하지만 송 선생은 교수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다. 그리고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진구와 송 교수와 각각 아차산에 올랐던 경험을 영화로 찍어 교차해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처럼 스크린 속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앞서 요약한 줄거리에서 보듯 <옥희의 영화>의 이야기 서술과 캐릭터 설정에는 일관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진구, 옥희, 송 선생으로 지칭되는 인물의 등장은 일정할지언정 이들의 역할과 성격, 관계 등은 뒤죽박죽이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진구가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영화과 학생으로 등장하질 않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진구의 집이었던 곳이 ‘키스왕’에서는 옥희의 집인 것으로 보이고 돈을 받고 후배 강사에게 교수 자리를 주었다며 비난받던 송 선생이 ‘폭설 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쪽팔려서 이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며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인양 군다. 또한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내레이션을 통해 송 선생은 ‘나이든 분’으로, 진구는 ‘젊은 남자’로 호칭하기도 한다.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교란하고 인물을 중첩시킨 뒤 결국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마저 어지럽힌다. 그러니까 <옥희의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늘 보던 대로 교란된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재구획한 뒤 인물의 역할과 이야기의 합을 맞추려다가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옥희의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제품인 기존의 영화의 달리 주어진 4개의 단편을 보는 이의 기호와 취향, 생각 등에 맞춰 재구성하는,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제품이 되는 일종의 ‘상호작용’(Interactive) 영화라 할만하다. 그래서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순으로 구성된 순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아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현실의 비(非)확실성에서 유발되는 우연의 미학을 긍정하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잘 알겠지만 홍상수는 정해진 각본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그날그날의 조건에 따라 즉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폭설 후’의 경우, 눈이 가득 쌓인 날씨에 아이디어를 얻어 그날 이야기를 짜고 배우를 불러 무려! 촬영까지 마친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어쩔 때는 영화 속 영화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1997) 또는 <생활의 발견>(2002)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진화형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2009)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疊疊山中)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엉클 분미> 경계를 집어 삼킨 정글의 영화

<엉클 분미>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แนะนำให้ดู: ลุงบ,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다.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생의 정체는 구체적이지가 않다. 당연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평면적인 형태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볼거리가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입체화(化)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오히려 설명적인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엉클 분미>는 아핏차퐁의 전작들과 비교해 친절한 편이다. 어느 정도 줄거리 요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야기가 잡힌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쉽게 이해 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엉클 분미>의 분미(타나팟 사이세이마)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다. 시골 농장에 머무는 동안 그의 곁에 처제와 젊은 청년 통이 남아 분미를 돌본다. 분미 곁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도 등장한다. 저녁식사를 하던 중 오래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고 실종됐던 아들이 원숭이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오랜 만에 아들, 아내와 함께 회포를 푼 분미는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분미는 주위의 가족을 대동하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미지의 동굴을 발견한 분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화면은 곧 어느 호텔방으로 옮겨간다. 침대 위에서 분미의 처제와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성이 부조금을 정리 중이고 스님 한 분이 이들과 합류한다.

이해가 쉽도록 요약은 했지만 <엉클 분미>는 일관된 이야기의 맥락을 붙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 혹은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앞의 문장 중에서 빌리자면, ‘~같지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사실 <엉클 분미>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비하다. 분미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중 뜬금없이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점핑해 못생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가 끼어들기도 한다. 분미와 못생긴 공주, 메기 사이에 구체적인 연관성을 잡아내는 것도 애매하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 묘사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더 방점을 맞춘 까닭이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보다는 동일한 공간(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숲 (혹은 정글)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다. 그의 영화에서 숲은 현실과 비현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마술적인 공간’, 즉 영화적 환상이 기능하는 장소다. 아마도 <열대병>(2004)이 대표적일 텐데 문명과 야만, 로맨스와 민담 등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확연히 가르며 우리가 경계 지었던 대비되는 개념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소우주로 구현해 보였다. 하여 아핏차퐁은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이미지를, 아니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엉클 분미>에서도 숲은 그냥 숲과는 거리가 멀다. 현세와 내세가 공존하는 공간이면서 원시적 생(生)과 관념적 사(死)가 근접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럼으로써 전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전생을 둘러싼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인 정성일은 <엉클 분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실제로 <엉클 분미>의 분미는 실존하는 인물이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에 착수하게 됐다. 하지만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감독은 다분히 개인적인 영화로 개비했다. 예컨대, 분미처럼 아핏차퐁의 아버지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고 극중 투석기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라오스 접경지역은 과거 타이와 라오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고 원숭이 인간의 붉은 눈 역시 감독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태국 TV 시리즈물의 특정 장르 요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영화란 ‘기억’이다, 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기억은 사실(Reality)의 소환이면서 한편으론 재현이라는 점에서 환상(Illusion)이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사실을 재현한다. 엄밀히 말해 모든 영화가 사실을 재현하지만 아핏차퐁은 사실과 재현 사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가령, 분미의 아내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는 별도의 영화적 장치를 이용해 관객의 눈길을 끄는 대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 넘긴다. (오히려 아내 귀신 대신 분미와 처제의 얼굴을 비추는 식이다.) 이런 작품을 일러 ‘무경계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Media City Seoul 2010’가 한창인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다큐멘터리 영상 ’프리미티브‘ 중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Letter to Uncle Boonmee) 전시가 한창이다. 그는 이참에 영화와 전시를 한 묶음하며 스크린의 경계마저도 넘어선 것이다.


미래의 영화 혹은 21세기 영화?

살펴본 바, 우연처럼 같은 날 개봉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새로운 영화 보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전통적인(?) 영화가 난립하는 추석 극장가에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확연히 다른 영화 문법으로 관객을 (긍정적, 부정적 의미로든) 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의 제공과 주입식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전혀 다른 영화의 차원을 선사했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영화. 영화가 문제를 제시하고 관객이 이에 답하는, 혹은 감독이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해석하는 영화. 영화가 스크린에 머물지 않고 스크린 밖으로 넘어오는 시대. <옥희의 영화> <엉클 분미>와 같은 영화가 이번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개봉영화 시장에서 대중성과는 동 떨어진 두 편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영화의 세기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린 과거와 현재의 영화 보기에 익숙한 나머지 이미 도달한 미래의 작품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외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우리 곁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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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년 9월 28일

<옥희의 영화>(Oki’s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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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는 하나의 소우주다. 큰 변화는 없지만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종종 동어반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읽어낼 수 있는 거리들은 많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며 하나의 원을 구성토록 하는 홍상수 특유의 연출법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런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옥희의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4개의 단편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또한 이것이 영화 속 영화로 다시 한 번 재구성되는 것.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 또는 <생활의 발견>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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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2010년 10월호

[PIFF 2009] <파주> 부산을 매료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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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를 두고 ‘시네마 천국’이라 일컫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가 많고 스타가 즐비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봉영화에서 보이는 평단과 관객의 괴리 현상이 이곳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다만 영화제에서는 장소를 막론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의견 차이를 좁히려는 토론으로까지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에 대해 존중하는 배려가 목격된다. 결국 영화제의 궁극적인 목적이 ‘소통’이라는 것을 부산영화제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드물다.

소통은 또한 영화가 추구하고 갈구하는 이상(理想)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결과적으로 소통을 주제 삼으며, 또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유통에 대해 고민한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설령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소개하는 세 편의 작품은 영화중에서도 영화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인 동시에 앞으로도 인구에 회자될 ‘진짜’ 영화라는 얘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 인형>은 배두나가 출연한다고 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극중 배두나가 맡은 역할은 공기 인형 노조미다. 섹스 인형이라고 해도 무방한데(이 작품에서 배두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전라의 연기를 펼친다.) 어느 날 생명을 얻으면서 영화는 노조미의 시선을 좇아 이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공기 인형>에는 딱히 극적인 전개랄 것이 없지만 대신 그녀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랑의 소중함이 일상의 나른함을 넘어서면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인간과 인간간의 교류, 즉 소통이다. 공기인형 노조미가 자신의 몸을 산화해 세상에 소통의 바람을 불어넣는 마지막 장면은 동화의 성격이 짙지만 그만큼의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결국 현대사회가 잊은(혹은 잃은)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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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조니 토)의 <복수>는 남자들의 의리에 관한 이야기다. 왜 아니겠는가. 홍콩느와르는 의(義)와 협(俠)에 치중한 남자들의 얘기를 통해 홍콩의 지정학적 상황을 은유했다. 홍콩의 중국반환 이후 이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감독은 두기봉이 유일하다. 두기봉이 9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그의 영화는 결국 남자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매번 대륙(중국)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복수>의 경우, ‘따거’(큰형님)를 배신한 조직원들이 프랑스에서 온 이방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통해 홍콩느와르에서의 전통적인 의리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안 그래도 두기봉은 <복수>를 홍콩느와르의 큰형님 격인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작품을 구성했다. 딸의 복수를 위해 홍콩을 찾은 전직 살인청부업자 코스텔로(조니 할리데이)의 이름을 멜빌의 <사무라이>(1967)에서 알랭 들롱이 연기한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에서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으론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해도 무방하다. <복수>를 비롯해 두기봉 영화의 저변에 흐르는 노스탤지어의 감성은 강호의 도가 급격하게 땅에 떨어진 작금의 상황을 아쉬워하고 개탄하는 감독의 세계관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런 점에서 <복수>는 두기봉 필모그래프의 또 하나의 수작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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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영화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소통의 형상을 구현한다면 박찬옥 감독의 <파주>는 소통의 모호함을 부각하는 작품이다. <파주>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섹슈얼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형부 중식(이선균)과 그에게 끝없이 의심을 품는 처제 은모(서우)의 관계 속에 도사린 모호한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가령, 중식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 언니 잃고 방황하는 처제를 헌신적으로 보살피지만 은모는 그런 형부의 태도가 언니의 살해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의심한다. 그렇게 각자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그럴수록 본심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화해 이들의 방황은 더 길어지고 깊어진다.

박찬옥 감독은 중식과 은모의 마음속에 내재한 감정의 이중성이 서로에게 어떻게 왜곡되고 상처가 되는지를 묵묵히 지켜본다. 이렇게 감정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중식과 은모의 심리적인 상황은 극중 배경으로 등장하는 파주와 정확히 조응한다. 서울의 주변도시이자 재개발이 한창이라 헐벗은 파주의 지역성이 이들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묘하게 공명하는 데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인공의 특정 심리를 특정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발화하는 박찬옥 감독의 능력은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3)에서 이미 증명된 바다. 다만 뛰어난 서사성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망설여졌던 것은 영화적이라 할 만한 그 ‘무엇’이 결여된 탓이었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파주>는 이야기에 걸맞은 영화적 화법에 대한 박찬옥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작의 성과를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안개가 짙게 깔린 파주의 지방 국도를 푸른 빛 감도는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영화가 주요하게 부각하는 모호함이라는 테마를 이와 같은 톤으로 구성한 상당 부분의 공로는 김우형 촬영감독에게서 기인한 것이지만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박찬옥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파주>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불안정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매우 성찰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파주>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에 속하는 동시에 올해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로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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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