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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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만한 결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하기로 한국영화에서 제일간다며 연일 시끄럽다. 다루는 수위가 신체를 절단하고 훼손하는 것으로 모자라 인육을 씹어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 논란을 겪기도 했다. 약혼녀를 잔인하게 살해당한 남자의 복수극이니만큼 섬쩍지근한 장면 연출은 필수불가결 했을 터. 다만 김지운 감독은 이를 부수적으로 삼는 것이 아닌, 상영시간 내내 전면에 드러내놓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진가가 드러난다.


복수, 무의미의 의미

그 남자는 다름 아닌 국정원 경호원 출신의 김수현(이병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범을 쫓은 결과, 놈은 밥 먹듯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장경철(최민식)로 밝혀진다. 수현은 인간병기의 재능(?)을 살려 경철을 사지로 모는데 웬걸 팔목 하나 부러뜨리는 정도로 끝을 본다. 대신 추적 장치를 몸에 심고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마다 나타나 다시 손을 본 후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약혼녀가 겪은 고통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되갚아주기 위한 수현의 벼린 복수극. 하지만 경철도 만만치 않은 놈인지라 마냥 않아서 당하지만은 않는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를 출발 신호 삼아 직선주로를 달려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마는 영화다. 일찌감치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고 시작하는 영화는 이후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수현의 경철에 대한 치밀한 복수, 경철의 수현에 대한 무차별적 반격을 집요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얼음장 같은 수현과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경철의 대결로 압축되는 영화는 광기라는 목적지를 향해 한 눈팔지 않고 돌진한다. 그 과정에서 김지운 감독은 관객의 입장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잔혹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금기가 없다. 둔기로 머리통을 바수어 짓이긴 자두처럼 만드는 건 예사다. 수술용 메스를 발목에 찔러 넣어 아킬레스건을 그어버리고 두 손으로 입을 사정없이 찢어버리는가 하면 드라이버로 뺨을 뚫은 채 그대로 둘 정도다.

이런 장면들이 과도하게 등장하게 된 영화적 배경의 맥락에 상관없이 잔혹함의 정도가 관객을 정신적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것임은 자명하다. 헌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목적이라면? <악마를 보았다>의 악명 높은 폭력의 스펙터클은 장르 연출에 출중한 감독의 자기만족을 위한 악취미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특정한’ 나쁜 공기를 예민한 예술적 촉수로 포착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 ‘악마를 보았다’에는 주어인 ‘누가’가 의도적으로 생략된 상태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남자와 서서히 악마가 되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임을 고려할 때 수현의 입장에서는 경철이, 경철의 입장에서는 수현이 악마가 되는 셈이다. ‘수현은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경철은 (수현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극중 인물보다 관객을 소환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악마성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화한 장면들은 명백히 관객을 겨냥한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입할만한 대상은 누가 보더라도 수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수현이 경철에게 가하는 앙갚음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아마도) 첫 번째 복수까지다. 이후 경철을 풀어주고 다시 붙잡아 죽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입히기를 반복하는 수현의 행동에 관객은 더 이상의 대리만족 대신 당혹감과 불쾌감에 진저리친다. 복수란 게 그렇다. 분노를 잠시간 억제할 수 있는 진통제는 될지언정 궁극의 치료책은 아니다. 더군다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저울질에는 평형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누가 더 악마인지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경철도 그렇지만 복수의 끝에서 수현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파멸에 가깝다.

복수가 의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의미’다. 그게 복수의 진실이다. 김지운 감독은 복수의 무의미함을 생성하기 위해 잔혹한 장면을 반복에 가까울 만치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스펙터클화한(化)다.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과녁을 잘못 겨냥한 셈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살인을 즐기는 경철이나, 그런 ‘개사이코’에게 자체 징벌을 가하겠다며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수현이나 정신 나간 것은 매한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악마라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악마라는 것을 ‘누가’ 지켜보고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어의 자리를 생략해가면서 <악마를 보았다>라고 제목을 지은 그 배경에는 관객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읽힌다. ‘관객은 (수현과 경철이란 이름의) 악마를 보았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 복수의 폐해에 대해 반응토록, 더 나아가 사유토록 이끄는 것이 이 영화의 노림수다.


악마, 우리 욕망의 발로

물론 제목과 잔혹한 장면의 연관성만을 가지고 복수에 대한 사유를 들먹이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악마를 보았다>를 비판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장르성이다. 현실의 가장 첨예한 비극을 끌어와 게임 다루듯 가볍게 전락시키는 게 아니냐는 거다. 더 나아가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장르가 리얼리즘과 충돌할 때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장르영화는 현실의 특정한 공기를 허구화하여 오락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일종의 형식의 스타일이고, 이야기의 규격화다. 그런 점 때문에 장르영화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노골적으로 불러일으키면 관객은 불경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대중의 욕망이고, 한편으로는 자각되지 않는 내적 죄의식의 발로다. 장르영화는 적극적인 시대 반영과 관객의 내밀한 욕망과 욕구의 구체화를 통해 자체 진화를 꾀하여왔다. 특히 복수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감독들이 즐겨 연출하는 장르인데 최근 충무로에서 복수 소재의 영화는 하나의 트렌드다. 트렌드는 그 사회의 특정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연쇄살인마가 활개 치는 사회,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공권력 부재의 사회, 그럼으로써 사적 복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결국 잔인함에 둔감해진 사회를 <악마를 보았다>는 거울처럼 반영한다. 거울(스크린) 앞에선 관객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우리의 모습 앞에서 힘들게 버티거나 결국 도망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상업영화로는 드물게 평균율의 대중의 취향과 타협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독하게 밀어붙인다는 점도 관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의 잔인함을 들어내면 <악마를 보았다>는 주인공들을 통한 꽤 굵직한 사고(思考)를 숨긴다. 앞서 밝힌 바, 복수의 유해함이 수현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라면 경철의 책임에 대한 창작자의 입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또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는 김지운 감독 작품 중 가장 치밀하게 구성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느 블로거는 경철의 반격을 접한 수현이 왜 처제에게는 전화 한 통화 걸지 않았는지, 형사 경력 30년의 장인어른은 경철의 방문에 한 점 의심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는지 등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보를 보았다’고 비꼰다.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영화의 작품성을 뒤엎을만한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그 의도를 간파하기 쉽지 않았던 전작들의 결말과 달리 <악마를 보았다>의 결말은 이야기 구조에 비추어 보건데 가장 합리적일뿐더러 감독의 ‘어떤‘ 견해를 농축하고 있기에 좀 더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악마를 보았다>에는 잘린 머리통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장면이 총 두 번 등장한다. 실종된 수현 약혼녀의 머리통을 회수한 경찰이 인파를 밀치고 이동 중 발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한 번, 수현이 설치한 단두대에 의해 잘려나간 경철의 머리통이 그의 부모와 아들 앞으로 굴러가는 것이 또 한 번이다. 두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 수미상응의 형식을 이루면서 그 속에 특정한 의미를 내포한다. 수현의 극중 행동처럼 경철에게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되갚는다는 의미(그래서 경철의 부모 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처형식에 참관시킨다.)도 있고, 무엇보다 김지운 감독은 경철과 같은 악인의 존재는 본인 뿐 아니라 그의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보험업자로 위장한 수현이 경철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방문한 집에서 경철 모(母)는 그의 악행을 감싸기 급급하고 경철 부(父)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보험금에만 관심 있는 눈치다. 아들에 대한 빚나간 모정과 자식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책임 의식의 부재.

이 부분에서만큼 <악마를 보았다>는 이창동 감독이 <시>에서 보여줬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론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창동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청소년 범죄는 부모, 정확히 말하면 학부모의 책임이다. 학부모에게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있고 보상해야 한다면 그 책임까지 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철의 연쇄 살인 행각을 청소년 범죄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점에서 <시>와 <악마를 보았다>가 동일한 맥락을 공유한다고 보는 것은 경철의 악마성이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무관심 하에 더욱 몸집을 불렸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다면, <시>는 피해자의 윤리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가해자 손자를 둔 할머니를 내세워 시를 통한 속죄로 세상의 희망을 긍정한다. 반면 <악마를 보았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마구잡이로 죽음을 일삼는, 그리고 묵인하고 외면하는 부모 세대를 보여주면서 지옥과 같은 세상을 절망한다.

죽음을 굳이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역으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와 달리 <악마를 보았다>는 과잉의 죽음 묘사로 오히려 고통에 둔감해지도록 (유도)한다. 고통에 무감각한, 더 정확히는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죽은 사회다. 갈수록 잔인해지는 한국영화가 많아지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용서는 없다> <무법자> <파괴된 사나이>와 지금 개봉중인 <아저씨>와 곧 개봉할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까지. 왜 이들 영화는 잔혹해진 것일까? 잔혹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의 정점에 놓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악마를 보았다>는 타인의 고통을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이토록 참혹한 무간지옥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영화에서 두려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실제로 우리가 외면하려는 것(들)의 표상이다. 당신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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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8.20)

공공의 적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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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황소개구리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 극장가의 절반을 넘어서는 스크린을 먹어치운 지도 어언 한 달 여. 새로운 패자의 출현에 목마른 관객 제위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극장가 여기저기를 찌르고 있는 바, 8월 극장가의 맹주를 자처하며 여기 <퍼블릭 에너미>와 함께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가 왔다.


공공의 적? 아니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한국말로 번역하면 ‘공공의 적(들)’ 근데 왜 <퍼블릭 에너미>(8/13 개봉)냐고? 아메리카무비니까. 당 영화는 아메리칸갱스터히스토리계의 파이오니아로 통하는 은행 강도 존 딜린저의 초특급버라이어티선혈낭자범죄로드쇼를 다뤘다.

1930년대 당시 아메리카 동부 폴리스들이 존 딜린저를 대하는 마음가짐 속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더랬다.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범죄는 없다! 그러나 존 딜린저는 더 큰 범죄의 세상을 발견할 것이라고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총으로 ’No‘의 무장을 해제하며 이렇게 답했더랬다. ’More Ahead’ 나에게 범죄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리하여 해군에 입대하자마자 탈영해 슈퍼마켓을 털고, 젊은 나이에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손이 근질근질한 나머지 박차고 나와 은행 수십 군데를 또 털고, 쫓아오는 폴리스에게 냅다 총알을 갈기다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존 딜린저는 일개 나쁜 놈들이 꿈꿔보지 못한 범죄의 미답의 경지를 밟으며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됐다.

그래서 당 영화의 마이클 만 감독은 존 딜린저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딴 무비를 만든 것이냐? 당근 아니고. 존 딜린저라는 퍼블릭 에너미를 통해 시대상을 탐구하고 어제의 히스토리를 거울삼아 오늘의 교훈으로도 만들자, 모 이런 의도 아니겠나. 세상이 좀 하수상해야 말이지.

물론 이런 종류의 심오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당 영화는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의 쭉하고 딴한 보디는 물론이요, 이들의 꽃스런 세숫대야를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마디로 <퍼블릭 에너미>는 예술성과 오락성을 일타에 이피함으로써 임도 보고 뽕도 딴 작품이란 얘기다.        


이제는 할리우드 배우 이병헌

물 건너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 간 ‘병헌Lee’ 또한 <지.아이.조>(8/6) <나는 비와 함께 간다>(8/20)로 두 마리 토끼몰이에 나선다. <지.아이.조>에서는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군단의 넘버3 스톰 쉐도우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는 홍콩 뒷골목의 큰 형님 수동포 역을 맡아 나쁜 놈 2인2색을 펼친다. 우리의 병헌Lee가 할리우드의 그렇고 그런 동양 캐릭터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산화할 것인지, 신천지를 개척하고 금의환향할 것인지 귀두가 주목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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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8월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The Weird)


사용자 삽입 이미지<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5월 24일(현지 시간) 칸영화제에서 세계 월드 프리미어를 갖고 공개됐다. 이번에 공개된 판본은 영화제 상영에 맞춰 손을 본 버전으로 최종 완성본은 아니다. 영화는 시작 전 자막을 통해서도 편집 중이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밝힌다(결말부는 편집의 리듬이 고르지 않은 확연한 미완성 상태였다).

김지운 감독은 한국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버전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2시간 15분의 칸 버전을 2시간으로 줄이고 결말을 대폭 수정할 것이며, 유머와 액션이 가미된 훨씬 오락적인 영화가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 공개 버전만으로도 <놈놈놈>은 충분히 통쾌하고 활기 넘치는 오락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주에서 말 타고 보물 찾던 시절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놈놈놈>은 청나라 때 사라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물고 물리는 추격전을 벌이는 ‘세 놈’ 박도원(정우성), 박창이(이병헌), 윤태구(송강호)의 이야기다. 목적은 같지만 보물을 찾기 위한 수법도 가지가지. ‘좋은 놈’ 박도원은 현상금 사냥꾼. 돈 되는 일이면 포기하는 법이 없는 놈은 보물에까지 눈독을 들인다. ‘나쁜 놈’ 박창이는 악명 높은 마적단 두목. 자신을 최고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죽음으로 응징할 만큼 명예에 집착한다. 하지만 놈의 관심사도 역시 보물. ‘이상한 놈’ 윤태구는 열차털이범이자 전설의 고수. 그러나 어떤 전설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가장 먼저 보물의 위치를 발견할 만큼 수완이 탁월하다. 문제는 보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된 게 이들 세 놈만이 아니라는 것.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러시아군까지 합세하면서 이들의 욕망은 혼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알려졌다시피 <놈놈놈>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1966)에서 제목, 인물 설정을 가져왔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은 동일하지만 못난 놈이 이상한 놈(The Weird)으로 달라진 게 차이랄까. 눈에 띄는 건 좋은 놈 블론디(클린트 이스트우드) 위주로 진행되는 <석양의 무법자>와 달리 <놈놈놈>은 이상한 놈 태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송강호가 벌판에서 쌍권총을 들고 달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의 무법자>를 떠올렸고, 못난 놈 투코(엘리 왈락)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김지운 감독은 설정의 변경만으로 흥행 코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태구를 앞에 두고 창이와 도원이 쫓는 구조를 설정함으로써 액션 활극의 요소를 얻었고, 송강호 특유의 코믹 연기를 한껏 살려 유머러스한 오락물을 만들 수 있었던 것. 아닌 게 아니라 <놈놈놈>은 ‘세 놈이 대치한다’는 기본 설정을 제외하면 <석양의 무법자>와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3인 대치 설정은 오마주라고 하기엔 너무 유명하다”는 김지운의 표현처럼 직접적으로 <석양의 무법자>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별로 없다.

다만 만주를 배경 삼은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부극을 만들고 싶었지만 한국적인 요소와의 접목에 고민하고 있던 차 김지운 감독에게 실마리를 준 것은 고(故)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였다. “한국에서 서부극을 어떻게 토착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쇠사슬을 끊어라>를 보았다. 아주 오래 전 만주 웨스턴이라는 장르로 당시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던 영화다. 그걸 새롭게 재현해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캐릭터를 가져왔지만 시대적 배경을 통해 이를 묘사하는 방식은 <쇠사슬을 끊어라>에 가까운 것이다. 독립군 명단이 감춰져 있는 티베트 금불상을 원하는 이에게 넘기면 큰돈을 벌 수 있기에 독립군 철수(남궁원)와 도적 태호(장동휘), 일본군 첩자 달건(허장강) 세 인물이 연루된다는 <쇠사슬을 끊어라>의 스토리 라인은 여러모로 <놈놈놈>과 닮았다. 특히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의리’나 ‘역사’ ‘민족감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캐릭터는 가장 중요하게 가져온 부분이다. “과거 만주 웨스턴을 현대적으로 되살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이 향하고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만주 웨스턴으로서 <놈놈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만주는 어떤 공간인가? 만주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고 인물의 성격과 조응하며 영향을 미친다.


무국적 이종 공간의 판타지

다소간의 변형을 가했다 하지만, <놈놈놈>엔 우리가 서부극에 기대하는 요소가 대부분 담겨 있다. 기적을 울리며 벌판을 가로지르는 열차, 검은 옷의 무법자가 말을 몰며 총을 쏘아대는 장쾌한 스펙터클, 드넓은 대지를 배경으로 인물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마지막 결투 등. 허나 이런 요소들의 바탕이 되는 황야에 대한 묘사는 독특하다. 예컨대, 미국 서부극의 황야는 이제 막 발굴되고 개발되는 공간이라 빈 곳이 많고 가옥들도 점점이 박혀 있어 빈약해 보인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서부가 영토 확장을 위한 폭력의 세계였음을 폭로하기 위해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곳으로 황야를 묘사했다. 이와 반대로 <놈놈놈>은 서부극치곤 세트 촬영이 많으며 기차 내부 묘사도 꽉 찬 느낌을 줄 정도로 밀도가 높다.

<놈놈놈>이 묘사하는 만주는 돈을 좇아 수많은 욕망이 몰려든 곳이자 이상을 찾아 새 출발을 다짐한 사람들이 찾아든 곳이다. 러시아인,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일본인 등 다종다양한 인종들과 각양각색의 문화까지 가세해 난맥상을 이루었던 공간이니만큼 무법천지의 카오스, 무국적의 욕망이 들끓는 거대한 용광로였던 것이다. 그런 만주 벌판이 스파게티 웨스턴의 무대처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땅으로 묘사될 수는 없는 법. 조화성(<짝패> <친절한 금자씨>) 미술감독이 담당한 <놈놈놈>의 국적불명 미술에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형형색색의 타락한 에너지로 넘쳐난다.

세 놈의 추격전이 처음 벌어지는 제국열차 장면에서 이런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등칸에서 삼등칸까지 다양한 계급과 인종이 뒤섞인 이곳에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 이들의 이상과 욕망이 빼곡히 담겨 있는 짐들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금세 폭발할 듯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맥락은 무법자들이 들끓는 귀시장이나 유혹의 기운이 넘쳐나는 아편굴 세트에서도 발견되는데, 타락한 욕망의 기운이 전편에 짙게 서려 있는 것이다.

액션으로 재현되는 폭력 역시 욕망의 한 형태다. 그에 따라 주인공 세 놈이 펼치는 액션에도 성격이 반영돼 있다. 가장 전형적인 서부극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좋은 놈 도원은 말 위에서 시원스레 장총을 휘두르고 귀시장에서는 화려한 밧줄 타기 액션까지 선보인다. 나쁜 놈 창이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 눈 깜짝할 사이 상대를 제압하는 칼 기술은 현란하지만 최소한의 목숨 줄만 남겨놓은 채 고통은 고통대로 가하는 행위는 가히 나쁜 놈답다. 재미있는 건, 이상한 놈 태구. 홀로 오토바이를 몰며 쌍권총을 쏘아대지만 액션이라기보다는 몸 개그에 가까울 정도로 큰 웃음을 준다.

하지만 보물지도와 연관된 모든 인물들이 만주 벌판 한데 모여 대규모의 추격전을 벌이는 결말부에서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모호해진다. 욕망을 발현하는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종착점은 같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은 “만주 벌판을 마음껏 달리는 활극을 찍어보고 싶었던 개인적인 판타지가 분명 존재한다. 서부극에 대한 개인적인 향수와 만주에 대한 민족적 판타지가 동시에 작용했다”고 말한다. 이는 <놈놈놈>이 오락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만 잊힌 장르를 발굴하는 동시에 서부극을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겠다는 저변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만주 웨스턴의 현대적 변용

어떤 장르보다 미국적인 장르로 평가받는 서부극은 21세기 장르영화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아시아만 보더라도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검은 호랑이의 눈물>(2000), 미이케 다카시의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2007) 등이 ‘오리엔탈 웨스턴’의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놈놈놈> 역시 그런 추세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작품으로, 서부극이 변주하기 쉽고 장르 혼합이 용이하며, 특히 현실 반영을 통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한편으로 서부극은 신화적인 세계를 창조해 공동체의 탄생과 유지, 소멸을 장르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한다.

김지운의 <놈놈놈> 역시 이런 신화화된 서부극의 틀을 빌려온다. 만주를 소우주로 상정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군상들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국인의 신화를 다루려 한다. “미국의 서부가 그랬듯, 일제 강점기 만주는 우리 선조들에게 기회의 공간이자 꿈의 공간이고 개척의 공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그리는 것도 <놈놈놈>을 만들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미국의 서부극이 신대륙 발굴을 통해 개척정신을 미화함으로써 미국적인 사고방식과 이데올로기를 대변했다면 칸에서 공개된 만주 웨스턴 <놈놈놈>이 대변하는 것은 보물로 상징되는 황금만능주의다. 세 주인공을 비롯해 다양한 군상이 나오지만 이들의 욕망은 단 하나의 꼭짓점, 보물에 모아진다. 특히 “나라는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박도원) “과거 조선 일은 다 잊고 만주에서 새 출발 하려고 했더니”(윤태구) 등과 같은 대사는 당시 일본 지배하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운명 따윈 초개처럼 집어던진 인물들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가려 했던 인간의 내면이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쇠사슬을 끊어라>가 만들어진 시대였다면, 이런 극단적 개인주의의 욕망은 집단주의로서 국가주의를 부정한 혁신적 묘사로 비춰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과 교묘히 맞물려 진행되는 <쇠사슬을 끊어라>와 달리 <놈놈놈>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물론 극중 등장하는 일본군의 존재나 대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시대를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다. 현실을 반영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장르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이해한다면 <놈놈놈>이 보여주려는 것이 우리 시대 인간의 모습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욕망의 끝은 어떨까? 미국 정통 서부극이라면 이를 신화화했겠지만 도덕적이고 이상화된 가치관을 전복하면서 실제적인 느낌을 강조한 <놈놈놈>은 반대의 길을 택한다. “서부극 특유의 추격전을 통해 인생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을 단서 삼는다면 도원, 창이, 태구 이들의 끝이 해피엔딩보다 비극에 가까운 형태가 될 것임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딱 한 놈만 살아남는 형태인지, 모두 죽는 건지, 모두 사는 것인지는 7월 개봉 즈음이 돼봐야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떠돌이 무법자가 들끓는 타락하고 황량한 스파게티 웨스턴의 결말을 전용한 것인 동시에 <쇠사슬을 끊어라>로 대표되는 만주 웨스턴의 현대적 맥락(국가, 연대보다 개인, 영웅보다 떠돌이) 위에 놓이리라는 건 예측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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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90호
(2008. 6. 10)

<누구나 비밀은 있다>(Everybody Has Secrets)


<게임의 법칙>, <본 투 킬>, <라이방> 등 거무튀튀한 싸나이 울리는 莘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던 장현수 감독. 그가 이번엔 변심한 애인마냥 핸들을 백팔십도 꺾어 허걱!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들고 나왔으니, 그 제목하야 <누구나 비밀은 있다>.

영국산 로맨스 영화 <어바웃 아담>을 재활용한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빠굴지상주의자 막내 미영(김효진 분)과 연애 한 번 못 해본 꿔다논 보릿자루 둘째 선영(최지우 분), 그리고 남편과의 빠굴은 근친상간이라며 한동안 폐업상태에 있던 맏이 진영(추상미 분) 세 자매가 희대의 카사노바 수현(이병현 분)을 만나면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빠굴행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니까 당 영화는 여타의 말캉말캉한 러부질 영화처럼 두 남녀가 만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어요, 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원초적 본능인 여성들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인 거다.

게다가 그 욕망은 제도로 인해, 주위의 눈들로 인해 억압 받아온 성적 욕망. 그래서 당 영화는 쥔공 자매의 욕망을 미영, 선영, 진영의 에피소드로 각각각 나누고 세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가는 구성을 취함으로써 굉장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렇게 해서 당 영화가 말하려는 비밀은 몰까. 모긴, 니 욕망 꼴리는 데로 행동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 한마디로 ‘여자도 욕망이 있다’는 그런 카인드의 비밀 아닌 비밀이지. 그래도 맨날 그 부라에 그 빤스만 남발하는 국산 로맨스 영화에 비추어보건데 당 영화가 주장하는 바는 확실히 과감하고 도발적이며 발칙하다 아니 할 수 없음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패착은 캐릭터! 아무리 영화가 환상이라고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하나같이 틀에 박혀 있거나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면 그게 감정이입이 되겠냐. 당 영화가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세 여자의 욕망을 눈뜨게 해주는 수현, 얘가 아주 가관인데 세숫대야 깔끔해, 돈 많아, 작업 잘해 게다가 침실 테크닉까정 좋아,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무적 완벽男이다. 근데 여자의 욕망은 이런 완벽男한테만 필 꽂히는 건 아닐 터. 그러나 당 영화가 하는 꼬라지를 보면 수현과 같은 조건이어야만 여자의 욕망이 부채질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답게 꽤나 우껴주고 있기는 한데 아쉽게도 핀대 안 맞는 캐릭터들의 불협화음이 빚어내는 헛웃음이 심심찮게 목격되며, 결국 이와 같은 비현실적인 등장인물로 인해 도발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마음에 와 닿는 바는 별로 엄따 하겠다.

더군다나 여배우 훌떡씬 보도에 목숨 건 우리의 스포찌라시 덕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당 영화의 빠굴씬, 본 특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세 여자가 스크린에 수놓는 빠굴씬은 이런 젠장, 등짝 보여주기 수준에 안주할 뿐이니 이 아니 안타까울쏘냐…

하여 당 영화의 여러 모를 요목 조목 살펴본 결과, 장현수 감독의 깜짝 변신 그 시도는 좋았으나 그 이상은 보여주지 못하는 실로 안타까운 순간을 연출하는 전차로 해서 본 특위는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뮝기적에 봉한다.


(2004년 7월 29일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