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Fahrenheit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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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은 Sci-Fi 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2012년 6월 6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제목이기도 한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크레딧은 여느 작품처럼 관객이 읽을 수 있도록 자막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화씨 451>은 사람들이 비판정신을 갖지 못하도록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태그(오스카 워너)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fireman)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세상에 대한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웃 여인 클라리세(줄리 크리스티)를 만나면서부터 꼭두각시 같은 삶에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삶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 그때부터 몬태그의 생각과 행동은 극적인 변화를 맞지만 동료 방화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트뤼포는 <화씨451>을 유니버설 제작으로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만들었지만 스튜디오 시스템 전통 바깥에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1961)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1965) 로제 바딤의 <바바렐라>(1967),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1968)와 같은 Sci-Fi처럼 미래사회에 대한 현란한 볼거리의 설정은 최소화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다 부각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때문에 원작자 브래드버리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작품이었어요. 응당 따라야 할 원작의 줄거리도 지키지 않았죠. 몇몇 중요한 캐릭터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하지만 엔딩은 정말 멋있었어요.”라며 동명영화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전반적으로 <화씨 451>에 대해서 트뤼포의 걸작은 아닐지언정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 후세에 전달하는 일명 ‘북 피블’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비추는 영화의 결말은 원작이 품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화씨 451>은 비록 책이 금지된 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는 획일화된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가깝다. (동성애의 억압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전까지 흑백 필름으로만 작업했던 트뤼포가 첫 번째 컬러영화로 <화씨 451>을 선택한 건 획일화를 반대하고 다양성의 가치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촬영은 <쳐다보지 마라> <지구로 떨어진 사나이>를 연출한 니콜라스 뢰그가 맡았다.) 하여 미장센은 물질과 자연의 철저한 대비 속에서 이뤄진다. 방화수의 유니폼, 비슷한 모양의 집 등과 같은 물질문명의 반대편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으로 대표되는 정신문명의 회복을 역설하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현실은 <화씨 451>이 묘사하는 사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 때문일까, 브래드버리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화씨 451>은 프랭크 다라본트(<쇼생크 탈출><미스트>)에 의해 리메이크가 추진 중에 있다. (몬태그 역에는 톰 행크스가 물망에 올랐다.) 그에 비해 트뤼포의 <화씨 451>은 오래된 과거의 작품이지만 다소 촌스럽게 보이는 화면과 달리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 메시지 덕분에 지금에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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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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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가 화제입니다.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을 수상했기 때문인데요. 우리에게는 낯선 영국 왕실의 이야기입니다. 3년 전이었죠,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 <퀸>(2006)이 개봉한 적이 있었는데요. <킹스 스피치>는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그러니까 조지 6세의 일화를 다룹니다. (그러고 보니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들이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네요.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헬렌 미렌이, 조지 6세를 연기한 콜린 퍼스가 말이죠.)

영화는 심각한 언어장애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꺼려했던 조지 6세(콜린 퍼스)가 괴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를 만나 대중 공포증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지 6세의 아버지인 조지 5세가 처음으로 국민을 상대로 한 라디오 연설을 했다고 하죠. 왕이 국민의 편에 서있다는 걸 보여준 상징적인 행위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국민을 상대로 왕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건 치명적인 결격사유에 해당됩니다. 더군다나 적국 독일의 히틀러가 엄청난 선동 능력으로 자국민을 휘어잡으며 세를 넓혀가던 때이니까요. 그래서 조지 6세에 앞서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조지 5세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데요. 국가 대신 사랑을 택한 형이 물러나자 조지 6세는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로그의 치료를 받으면서 히틀러의 야욕에 맞서 국민을 단합시킬 감동의 연설을 준비하게 됩니다.

<킹스 스피치>는 한마디로 장애를 가진 인간의 극복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말을 더듬는 조지 6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언어장애를 치료하는 로그 역시도 일종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대에 서고 싶은 배우 지망생이지만 재능 부족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대신 언어치료사로 나서 조지 6세와 같은 말더듬 증세를 교정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죠.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 왕실이 무대로 등장하지만 <킹스 스피치>의 스케일은 굉장히 소박합니다. 영국왕실과 로그의 언어치료실 외에 카메라가 외부로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죠. 조지 6세의 연설도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 때문에 엄청난 군중씬도 영화 시작 부분을 제외하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감독 톰 후퍼는 <킹스 스피치>를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지 6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로그와의 우정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킹스 스피치>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데이비드 핀쳐의 <소셜 네트워크>나 코언 형제의 <더 브레이브>를 응원하는 쪽이었지만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킹스 스피치>는 보수적인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영화입니다. 장애를 가진 인물이 이를 극복하고 대중의 박수를 받는다, 거기다 우아하고 지적인 영국 왕실의 이야기이니만큼 표가 몰릴 수밖에 없었겠죠. 거기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드라마틱합니다. <킹스 스피치>의 각본을 쓴 이는 데이비드 세이들러로,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자 중 역대 최고령 작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어쩌면 훨씬 일찍 받을 상이었는데요.

원래 데이비드 세이들러도 미세한 말더듬 증상이 있었답니다. 그가 10대인 시절, 말더듬이 조지 6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조지 6세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근데 왕비로부터 답변이 왔더랍니다. 자신이 살아있을 때는 결코 만들지 말라는 비보(?)였죠. 데이비드 세이들러는 그 약속을 지켜 70세가 넘어서야 <킹스 스피치>의 각본을 쓰게 되었고 73세가 되던 해에 각본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도 감동적이죠. 그러니 어찌 우리의 아카데미 심사위원님들께서 <킹스 스피치>를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연출을 맡은 톰 후퍼의 감독상 수상은 동의하지 못하시겠다고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같은 거장도 7전 8기 끝에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어디 애송이가 처음 노미네이트된 그해에 감독상을 수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만 그게 아카데미의 정치성이니 어쩌겠어요. 그래도 톰 후퍼가 <킹스 스피치>의 가장 어울리는 연출자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역사극에서, 더 정확히는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는데 능통한 감독입니다.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1세>(2005)와 미국 1대 부통령을 조명한 <존 아담스>(2008)처럼 실존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 TV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지 6세의 일화는 톰 후퍼 감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이었던 셈이죠.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콜린 퍼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그는 정말 <킹스 스피치>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뒤엎는 파격 연기를 선보입니다. 콜린 퍼스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맘마미아!>(2008) 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 대체로 수다쟁이 영국 신사 같은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된 배우가 아닙니까. 그런 그가 <킹스 스피치>에서 말을 잘 못하는 배역을 맡았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죠. 원래 조지 6세 배역에 거론된 배우는 폴 베타니였다고 합니다. <다빈치 코드>(2006)에서의 사악함과 <윔블던>(2004)에서의 친근함이 조지 6세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는데 가장 잘 맞는 조건이었다고 하는데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콜린 퍼스가 조지 6세를 연기하게 됐고 나중에야 폴 베타니는 <킹스 스피치>에 출연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고 하죠.

왕의 운명을 타고 나기란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배우가 자신의 연기 옷에 딱 들어맞는 배역을 만나는 것도 힘든 일이죠.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입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거죠. 조지 6세의 일화도 그렇고 콜린 퍼스의 연기 또한 그렇습니다. 조지 6세야 앞서 설명한 그대로고, 콜린 퍼스는 지난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싱글맨>(2009)으로 노미네이트됐지만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킹스 스피치>는 여러 모에서 콤플렉스를 극복한 감동적인 도전기라고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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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entertainment report
EBS Radio

<레드 화이트 블루>(Red White &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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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화이트 블루>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을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오히려 피로 난도질한 버전에 가깝다. 영화는 레드로 대변되는 에리카와 블루의 네이트, 그리고 화이트의 프랭키 간의 얽히고설킨 복수극을 다룬다. 옛 남자의 배신의 충격에 못 이겨 모든 사람을 다 같이 평등하게 사랑하겠다며 방탕한 시간을 보내는 에리카,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겠다며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후 에이즈 감염자가 되고 마는 프랭키, 대부분의 남자가 노리갯감으로 생각하는 여자와 교감을 나누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프랭키까지, 영화는 이들의 사연을 병렬식으로 전개한 후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하나로 묶으며 관객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마지막 ‘한방’을 선사한다. 기본적으로 <레드 화이트 블루>는 공포물에 속하지만 시각적인 공포를 앞세운 영화와는 궤를 달리한다. 이 영화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행동이 타인에게는 위협으로 가해져 복수의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 사실 <레드 화이트 블루>의 제목은 각각 박애, 평등, 자유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받들어야 할 가치가 무참하게 짓밟히는 과정을 은유하고 있는 거다. 과연! 프랭키의 손에 들린 행복한 한때의 사진이 불속에서 타들어가는 에필로그는 이 영화가 노리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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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카탈로그

<네이키드>(Na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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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리는 영국사회의 보수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밑바닥 삶의 불안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들과 협업하는 즉흥 연출과 더불어 영국민의 변두리 삶과 생활 태도에 근거한 자기반영적 유머에서 나오는 풍자적 연출은 그만의 장기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네이키드>는 전작까지 이어지던 블랙 유머가 완전히 휘발됐다는 점에서 마이크 리의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 할만하다.

그런 조짐은 이미 오프닝에서 선언적으로 제시된다. 주인공 조니(데이비드 두윌스)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간에 가까운 섹스를 마친 후 도망치듯 고향 맨체스터를 떠나는 것. 곧이어 카메라는 런던으로 향하는 운전석의 조니에게로 옮겨가지만 그의 시선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도로 풍경은 목적지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을 강하게 은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묘사하는 조니의 이틀간의 행적에는 목적의식이 철저히 결여돼있다. 마침 런던에 헤어진 여자 친구 루이스(레슬리 샤프)의 거처가 있어 찾아갈 뿐이고 우연히 그곳에 그녀의 룸메이트가 있어 감정 없는 섹스를 나눌 뿐이며 결국 거리로 나와 정처 없이 방황, 또 방황할 뿐이다.

그것은 배회하는 길에서 조니가 만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진창 같은 현실에서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서로 동정심을 베풀지도 않으며 인생을 개선하고픈 의지도 없는 이들에게서 인생의 의미 따위 거론할 게재가 아니다. 마이크 리는 극중 인물들의 머무를 곳 없는 처지를 곧 희망 없음으로 동일시한다. 예컨대, 루이스 또한 주인집에 얹혀사는 형편이고 주인조차 부재중인 상태이며 결국 집에 모였던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른다. 표피적인 관계의 지형도, 즉 농담 일색의 대화와 메마른 웃음소리, 그 속에서 언뜻 비치는 분노조차 곧 증발하고 마는 현실은 <네이키드>가 거처 없는 이들, 즉 ‘벌거벗은’ 이들의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조니와 주변 인물들이 처한 현실보다 더욱 인상적으로 <네이키드>의 공기를 지배하는 것은 부유(浮游)와 고립의 이미지다. 극중 인물들이 어둠에 쌓인 도시의 빈민가를 홀로 먼지처럼 부유하는 구도와 좁은 골목길에 포박 당한 듯한 고립의 장면화는 마이크 리의 이전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감각적인 장면으로 기능한다. 섬뜩하도록 텅 빈 빌딩에서 조니가 (마이크 리 작품의 단골 배우인 피터 와이트가 연기한) 경비원과 미래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창문 밖 풍경과 대조를 이뤄 실루엣처럼 제시되는 이들의 모습에는 비관적인 패배주의가 여실히 묻어나는 것이다.

마이크 리는 그런 조니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는다. 방황을 거듭하던 조니가 끝내 루이스와 관계 개선을 이루는가 싶더니만 다시 거리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1993년에 발표된 <네이키드>는 포스트 대처(a post-Thatcher) 보수주의 정부 하에서 하층민과 노동 계급이 겪는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세기말적 풍경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2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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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카탈로그

(Lesbian Vampire Kil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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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트와일라잇> <박쥐> 등 뱀파이어물은 세계적인 유행이다. 공포물에 일가견 있는 영국이 이를 가만둘 리 없다. 뱀파이어가 영국으로 넘어가니 코믹하게 바뀌었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는 흡사 뱀파이어 버전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라 할만하다.

주인공 역시 두 명의 남자로 사회부적응자다. 비카(폴 맥건)는 여자 친구에게 차여, 플레처(제임스 코든)는 직장을 잃어 울적한 마음에 시골로 주말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곳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저주에 휩싸인 곳. 비카와 플레처는 아리따운 여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지만 이네 레즈비언 뱀파이어들의 공격을 받는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에겐 정치적, 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다. 오로지 이들의 ‘쭉쭉 빵빵’한 육체를 볼거리로 전시하며 오락적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필 클레이든 감독은 작가적 자의식 따위 저 멀리 날려버리고 <이블 데드> <데드 얼라이브>처럼 조악하지만 통쾌한 고어와 썰렁하지만 유쾌한 코미디를 뒤범벅 하여 악취미적 스타일을 뽐내는데 집중한다. B급영화의 즐거움이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스>에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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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카탈로그

<라이언의 딸>(Ryan’s Daughter)


사용자 삽입 이미지<닥터 지바고> 이후 데이비드 린은 영화 만들기에 강한 회의심이 들었다. 흥행에 성공한 <닥터 지바고>를 두고 유수의 평론가들이 서슬 퍼런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다. <라이언의 딸>은 그런 린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작품이었다. ‘예술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통속물’이라는 비평가 폴린 카엘의 신랄한 평가에 충격을 받아 이후 영화 연출을 중단하고 장기간 칩거에 들어갔던 것이다.

<라이언의 딸>은 <마담 보바리>의 무대를 프랑스에서 세계1차 대전 당시 아일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로 옮긴 작품이다. 선술집을 운영하는 라이언의 딸 로즈는 나이차 많은 교사 찰스와 결혼한다. 하지만 사랑에 적극적이지 않은 그에게 실망하던 차, 젊은 영국군 장교 랜돌프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린은 <라이언의 딸>이 단순히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하거나 여성의 욕망에 관대하지 않은 시대의 폭력성을 고발하는데 그치길 원치 않았다. 더 나아가 이 작품에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인공들의 상처받은 감정이 자아내는 마음의 풍경, 이를 깊이 연구하고픈 인문학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다. 린이 보기에 그것은 강박과 죄책감인데 극중에서 전자가 집단의 신념을 고취하며 광기로 변모하는 사회적 윤리라면 후자는 윤리에 상관없이 개인적인 선택에 따른 결과랄 수 있다. 이에 따라 <라이언의 딸>은 적군의 남자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로즈의 사연과 세 주인공이 삼각관계로 엮이면서 드러나는 그들 각자의 내면 갈등이 순환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무기를 운반하는 차, 시체를 실어 나르는 마차 등 유독 <라이언의 딸>에는 바퀴 이미지가 부각되는데 이는 그대로 강박과 죄책감으로 굴러가는 마을의 폭력 구조를 드러낸 것이었다.

결국 영화는 로즈와 찰스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흥미롭게도 이는 린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차기작 <인도로 가는 길>로 스크린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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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회고전
카탈로그
(2009.4.28~5.17)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사용자 삽입 이미지흔히 영화의 스펙터클을 논할 때 70mm 스크린의 정수로 언급되는 작품이 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70mm로 촬영된 영화역사상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작품은 사막 지평선 위의 점이 서서히 인간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구체화하고 싶었던 데이비드 린의 바람이 발단이었다. 세계1차 대전 중 영국군으로 활약했던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 Seven Pillars of Wisdom>을 접하자 든 생각이었던 것.

각본을 쓴 로버트 볼트는 로렌스의 자서전을 기본으로 삼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각색했다. 로렌스의 자서전은 영웅적인 면이 과장됐다 하여 진정성이 의심되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다만 린은 그런 뒷이야기보다 자연 앞에 무력한, 즉 인간이 가진 능력의 유한성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컸다. 직접적인 대사보다 시각의 황홀경으로 이야기 전달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도 광활한 사막 위에서 심리적 혼란을 겪는 인간의 모습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얼핏 플롯 자체도 단순해 보인다. 터키와 맞선 영국군이 아랍부족을 끌어들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로렌스를 이용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라면 전부다. 여기에 복합적인 층위를 선사하는 건 피터 오툴이 연기한 로렌스다. 극중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로렌스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치가 곳곳에서 발견되니,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영웅답지 않은 왜소한 체구와 유난히 돋보이는 하얀 피부, 그리고 로렌스를 고문하여 동성애를 자극하는 터키 경찰서장과의 에피소드 등등. 그 자신이 소수자였던 만큼 영국군과 거리를 유지하며 아랍인과 아랍문화에 동화되어 그들의 권익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모습은 편견에 맞선 삶의 개척자로 로렌스를 위치시킨다. 그래서 로렌스는 버릇처럼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다. 결국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운명을 개척하려했던 한 인간의 대서사시를 그린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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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회고전
카탈로그
(2009.4.28~5.17)

(5) 밀레니엄 브리지, 테이트 모던을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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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학도였던 지인이 런던 행을 택한 이유는 그림 공부 때문이었다, 고 한다. 내가 아는 그는 공부와는 담 쌓고 지내는 인간인데 아무래도 영국의 미술관 입장이 공짜인 까닭에 런던에 온 것이 확실하다. (영국의 주요 미술관은 2001년 12월부터 무료입장을 실시하고 있다!) 안 그래도, 내가 멋진 공연을 소개해달라고 하니 공연은 무슨 공연이냐며 돈 들일 필요 없이 미술관에나 가자던 그다. 내가 언제 제 돈 드려서 공연 보여 달라고 했나, 그냥 추천해 달라고 했지. 추측대로 런던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암.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바로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역시나 이동하는 동안 말이 많다. 많이 가봤다는 거지 모. 하도 재잘대는 통에 바늘로 입을 봉하려 했는데 웬일인지 지인이 들려주는 생생한 미술관 얘기가 자못 흥미롭다. 그의 말에 따르면, 테이트 모던은 철저히 프랑스를 의식한 영국 특유의 자존심 발로에 따른 문화적 결과물이란다. 날로 명성을 얻어가는 파리의 퐁피두센터(Pompidou centre)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인 미술관이라는 얘기. 영국이 프랑스와 라이벌 관계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흥미가 동했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그가 St Paul’s 역에 이르러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난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내렸다. 테이트 모던에 가기 위해서는 Blackfriars 역에 하차해야 한다고 가이드북에 쓰여 있던데 이런 멍청한 녀석이 한 정거장 미리 하차한 거다. 내가 런던에 처음 온 여행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나도 웬만한 건 다 안다고. 나 다시 지하철로 돌아갈래. 지인은 그런 나를 향해 ‘닥쳐!’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한 번 쏘아붙인다. 그러더니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가로질러 약 5분여를 걷다가 유서 깊은 이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래형 컨셉의 어느 다리에 이르러 다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게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라고.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에 세워졌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어.” 국가정보원이 거대한 비밀을 털어놓듯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속삭이는 지인의 목소리가 맘에 안 들었지만 여기까지 참고 따라온 게 아까워 계속 들어주기로 했다. 

퐁피두센터가 들어서면서 파리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던 마레지구가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처럼 테이트 모던 역시 런던의 공장지구로 악명이 높았던 Bankside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문화단지로의 이미지 쇄신을 꾀하려 했다. 문제는 공장지구였던 까닭에 고립돼 있던 데다가 정면으로 템스 강이 흐르고 있어 사람들이 쉽게 통행하기 불편했다는 것. 테이트 모던이 처음 문을 열 당시만 하더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로 밀레니엄 브리지란다.

미술관에 관객이 없다고 다리를 세운다? 미술관 알기를 돌처럼 여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그래서 더욱 지인의 얘기에 집중했다. 테이트 모던은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세인트폴 대성당과 마주보고 있는데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밀레니엄 브리지다. 세인트폴 대성당은 런던의 주요 관광지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1년에 수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근데 밀레니엄 브리지가 생기면서 강북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강남의 테이트 모던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수백만으로 증가했다고 하니. 그 결과, 지금은 퐁피두센터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현대미술에 있어서만큼 작품의 질은 테이트 모던이 압도하는 수준이란다.

지인은 이를 두고 발전적인 라이벌 관계란 바로 이런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덧붙여, 자신 또한 같은 과에 다니는 일본인을 가상의 라이벌 삼아 발전적인 작품 활동을 모색 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_-;) 유머라고 하기엔 그는 너무 진지했고 진심이라고 하기엔 내가 본 그의 작품은… (지인이 충격 받을 것 같아 차마 이 지면에 밝히진 못하겠다. ㅜㅜ) 역시 모든 현상에는 양지와 음지가 있는 법. 영국과 프랑스의 라이벌 관계로 생겨난 발전적인 사례가 테이트 모던이라면 폐해는 고스란히 지인의 몫인 것 같았다. 나는 지인에게 언젠가 꼭 그의 작품을 테이트 모던에서 봤으면 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물론 입에 침을 바르지는 않았다.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지음 | 21세기북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을 밝히면, 지인이 그림도 못 그리고 썰렁한 농담이나 나누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테이트 모던 얘기를 하면서 지인의 얘기를 빙자해 뻥을 보탠 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에 워낙 감명을 받은 탓이다. 이 책, 읽다보면 포복절도한다. 여행수필 중 가장 재밌다. 뭔 놈의 성격이 그리 고약한지 가는 곳마다 불평이요, 묵는 곳마다 불만이다. 물론 코믹한 문체 덕에 전혀 고약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요, 백미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의 문체를 따라해봤다. (만약 제가 쓴 글이 재미없다면 그건 순전히 제 탓이지 이 책이 재미 없어서가 아닙니다. 강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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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2010.7.6)

<해피 고 럭키>(Happy-Go-Lucky)


사용자 삽입 이미지<해피 고 럭키>를 개봉한지 세 달이나 지나서야 우연한 기회로 보게됐다. 개봉하자마자 봐야지 한 게 회사 일에 치여 해를 넘기게 됐다. 마이크 리 감독님 영화라면 의무감을 갖고 봐주는 게 예의지 암. 아무튼 의무감을 가지고 보게 된 <해피 고 럭키>는 <베스트셀러극장>에나 등장할법한  스케일의 이야기였지만 놓쳤으면 후회할 뻔했다.

<해피 고 럭키>의 주인공 포피(샐리 호킨스)는 제목처럼 매사가 즐거운 서른 즈음의 여자다. 낯선 사람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무안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방금 타고 온 자전거를 잃어버려도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자기 것에 대한 미련도 없다. 행복전도사 포피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코믹하던지 보는 나까지도 기분이 마구 좋아지더라. (그런 포피 당신은 ‘내추럴 본 낙천주의자’ 우후훗!)

근데 모두 포피의 전도에 넘어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극중 운전강사는 운전 연수생인 주제에 교통안전엔 아랑곳없이 농담 따먹기나 하려는 포피가 한심해 보이고, 그녀의 동생은 서른이 되도록 집 장만도 못하고 결혼에도 관심이 없는 포피가 철없어 보인다. 그래도 포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말고 이 빡빡한 일상 나랑 함께 작은 것에 의미 두고 웃으면서 살아봐요. 제가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드릴께요. 함께 해Boa요. ^^ 이것이 바로 포피의 삶인 것이다.

영화는 포피의 삶을 중심에 놓고 진행이 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인 포피가 옳고 그녀의 삶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긴 나조차도 스크린으로 보는 것과 달리 현실에서 그런 여자를 만난다면 좀 히껍할 것 같더라. ^^;) 대신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즉 우리네 삶이고 삶의 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포피의 낙천주의가 대단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대책 없어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하여 마이크 리 감독은 소통의 방식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인 만큼 서로를 평가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의문형으로 영화를 마친다.

좋은 영화는 모름지기 결말을 단정 짓지 않고 생각하게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감님도 그렇지만 마이크 리 영감님도 존재 자체가 거대한 가르침처럼 느껴지는 감독이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Crossing the Line)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1년 6월, 중국에 머물고 있던 대니얼 고든은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천리마 축구단>(2002) 촬영을 위해 북한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고려여행사 대표이자 공동 프로듀서인 니콜라스 보너였다. 메일을 통해 그는 미국인 네 명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미국과 철천지원수 지간인 북한에 미국 사람이 살고 있다고, 정말?

호기심이 발동한 고든은 그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북한에 사는 미국인들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한창이던 시기 남한에 파견된 군인들로, 직접 북한으로 넘어가 40년이 넘도록 그곳에서 살고 있는 미국 망명자였던 것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던 고든은 그들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든은 <천리마 축구단>을 촬영하는 동안 ‘조선영화 수출입 공사’ 관계자를 통해 망명 미국인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다. <천리마 축구단>에 호의를 가지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워 했지만 곧 문제의 미국인들이 누구인지 고든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네 명 중 두 명은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 두 명이 평양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의 이름은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과 ‘찰스 로버트 젠킨스’였다.


기대하지 못했던 이야기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하 <평양 시민>)에는 드레스녹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하지만 고든은 이 영화를 드레스녹 개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연출하지 않았다. 드레스녹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범위를 넓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 사이에 월북한 네 미국인의 정체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미국 정부를 경악케 한 사건은 1962년 8월에 일어났다. 드레스녹이 순찰을 돌던 중 월북을 시도한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유년 시절, 군생활 중 파탄 난 결혼생활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망명을 선택한 것이다. 북한에는 ‘래리 알렌 앱셔’라는 미국인이 드레스녹과 비슷한 사연을 안고 이미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드레스녹과 앱셔는 처벌을 받는 대신 선전용으로 이용됐고 이들의 선전에 혹한 ‘제리 웨인 패리쉬’와 ‘젠킨스’ 두 미국인이 북한으로 넘어왔다. 미국 정부는 당황했지만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하고 사건을 은폐했다. 네 미국인의 존재는 부정됐다. 그러는 동안 푸른 눈의 네 병사는 적국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평양 시민>에는 이런 소재의 영화에 기대할 법한 정치적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을 배제한 채 북한으로 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북한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평양 시민>은 이들이 누구인지, 왜 북한으로 망명을 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밝힐 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비범한 사건을 겪었지만 거기서 역사적인 맥락을 걷어내면 이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고든 감독은 <천리마 축구단>과 <어떤 나라>를 통해 북한, 그것도 평양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했다. <평양 시민>에서는 월북한 미군병사라는 민감한 소재로 범위를 넓혔지만 감독의 목적은 정치적 선전효과가 아닌 평범한 이들의 사연에 있다. 드레스녹이 주인공이지만 네 병사 모두의 이야기로 영화를 구성한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평양 시민>은 우리가 상상하는 혹은 기대하는 북한의 모습을 철저히 배반한다. 어느 체제가 더 우월하다는 이분법에 기초한 정치적인 시선은 배제하고 철저히 다큐멘터리적 중립성을 유지한다.

양쪽의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평양 시민>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반된 의견이 도출될 수 있게 만든다. 즉, “어떤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진실은 판이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감독의 입장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평양 시민>은 부정국가의 이미지로만 덧씌워진 북한에도 인간적인 면모가 존재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카메라 한 대로 증명해 보인다.


자족의 행복을 말하다

대니얼 고든 감독의 중립적인 시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천리마 축구단>으로 시작해 <어떤 나라>를 거쳐 <평양 시민>에 이르기까지 ‘편견 없음’은 ‘북한 삼부작’을 일관되게 관통한 태도였다. ‘천리마 축구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을 때부터 비교적 쉽게 북한의 취재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비방하는 영화가 아닌 중립적인 시각에서 북한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2002년 평양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천리마 축구단>은 매진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국영방송을 통해 열 번 이상 방영되는 등 소위 ‘대박’을 기록했을 정도다.

<천리마 축구단> 촬영 중 우연히 접한 매스게임에 매료돼 기획된 <어떤 나라>는, 북한에겐 일종의 도박이었다. 다름 아닌 평양 사람들의 일상이 주요 소재로 차용됐기 때문. <천리마 축구단>의 경우, 1966년 영국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던 까닭에 기록화면이 영화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실생활이 공개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중학생 소녀가 주인공인 <어떤 나라>는 그들의 집과 가족이 영화 내용으로 포함됐기 때문에 북한의 ‘속살’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했다. 발전 시설이 부족해 정전이 잦고 밤이면 어둠에 잠기기 일쑤였던 평양의 일상은 <어떤 나라>를 통해 가감 없이 외부에 공개된 것이었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위험부담을 안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불순한 의도가 없는 이들의 촬영을 거절할 이유가 그들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니얼 고든은 <어떤 나라>에 대해 “북한의 실생활이 공개된 사실보다 주체사상에 대한 본질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산물인 북한의 집단 매스게임을 두고 ‘집단의 필요가 개인의 욕구에 우선한다’는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사례로 언급한 것. 이를 통해 북한의 폐쇄성이 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 박탈이 아닌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부분적’ 자유 박탈에서 기인하는 결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같은 연출의도에 자기의 운명은 자기가 개척한다는 주체사상의 본래적 의미가 담겨 있음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니얼 고든이 북한 삼부작을 통해 보여주는 중립적 시각은 어떤 견해도 삽입하지 않는 기계적인 의미에서의 중립성이 아니다. 그 전에 체제보다 개인을, 복종보다 개척을, 운명보다 삶을 우선하는 전제로 한다. 그래서 1966년 월드컵의 업적을, 매스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두 소녀의 성과를 북한이 아닌 이들 개인의 공으로 돌린다(<어떤 나라>는 현순과 송연의 공연을 보여주며 ‘김정일은 끝내 어떤 공연에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평양 시민>에서 더욱 강조된다. 여기서 감독이 네 병사에게 갖는 가장 흥미로운 의문은, 오늘날도 북한에서의 생활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미국에 대한 적의가 더욱 강력했던 당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네 병사 중 유일하게 현재도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드레스녹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그가 북한의 체제에 대해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은 자신이 꾸려나가야 한다는 주체사상을 마음에 들어 하는 그의 모습을 확실하게 포착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라는 그의 대사는 영화를 통해 고든이 말하고 싶었던 바를 짐작케 한다. <평양 시민>에는 정치적인 견해는 없지만 감독의 견해는 존재한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모두 환경에 맞게 적응해 살아간다는 것. 이는 견해라기보다는 진리에 가깝다.


관객에게 판단을 넘기다


만약 고든 감독이 정치적 견해를 밝힐 요량이었다면 체제나 삶의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는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관계를 더욱 파고들었을 것이다. 촬영 전 <평양 시민>은 두 사람을 중심에 놓고 진행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젠킨스의 부인이 일본에 넘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고(그녀는 납북된 일본 여성이다!) 이 문제가 북한과 일본, 미국의 정치문제로 비화돼 촬영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젠킨스의 이야기 추이를 지켜보며 바로바로 영화에 삽입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다.

감독은 촬영을 진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평양 시민>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었기에 당시 벌어지고 있던 사태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 달 후 이는 감독의 입장에서 올바른 선택임이 밝혀지는데 젠킨스는 부인을 따라 일본의 미군에 투항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상반된 진술로 드레스녹과 진실공방을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양 시민>은 “북한에서 문제없이 살고 있다”는 드레스녹과 “노예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젠킨스 두 사람의 진술을 공정하게 들려줄지언정 그 결과에 대해서만큼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이와 관련해 진실을 캐볼 수 있는 주변인물과 관련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체제의 본질에 깊게 다가서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한 고든의 반응은 단호하다.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 감독으로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이 내용을 보고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다.” 감독은 사실을 밝히는 데 있어 관객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만한 편향된 시각에는 가차 없이 편집을 가하기도 했다. 가령, 고든은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남한 근무 당시의 상관을 만나 이들에 대한 평가를 들었지만 영화에는 삽입하지 않았다. 상관 개인의 견해일 뿐 사실의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양 시민>은 북한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이,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감독의 입장이 북한 삼부작 중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말하려는 바에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걸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없는 일을 꾸미지도, 사실을 왜곡하지도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평양 시민>은 북한도 인간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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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9호
(2007.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