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죄 논란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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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아저씨>, <악마를 보았다>를 필두로 갈수록 잔인해지는 한국영화가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자 파블로프의 개가 반응하듯이 여기저기서 모방범죄의 위험성 얘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가 개봉 전 신체 훼손과 인명 경시로 두 차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면서 모방범죄의 주장은 힘을 얻고 있는 듯 한 모양새다. 과연 잔인한 영화는 스크린 속 살인마를 현실로 불러낼 것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절대, 네버, 결단코, 노’ 그렇지 않다.
 
현실의 살인 사건이 영화에게 원인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는 결코 낯설지 않다. 예컨대, 버지니아 총기 사건이 벌어졌던 3년 전, 조승희가 언론사에 보낸 사진이 <올드보이>(2003)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특정장면과 유사하다고 해 영화의 폭력성에 관한 논쟁으로 뜨거웠다. ‘폭력영화가 범행의 단서 vs 영화가 현실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어’, ‘폭력영화 규제해야 vs 폭력을 조장하는 미디어가 문제’ 등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개인의 총기 소유를 허용하는 미국의 법제도와 아메리칸 드림에 목맨 이민자 부모 세대의 비뚤어진 자녀 교육의 폐해가 빚은 참극이라는 쪽이 더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다루는 폭력이 현실의 폭력 조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는 1999년의 콜럼바인 총기 사건을 다각도로 접근해 들어간다. 소통이 단절된 가정환경, 학교 내 왕따, 컴퓨터 게임 중독,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바로 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승희를 둘러싼 수많은 환경의 총합이 그와 32명의 희생자를 사지로 몰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의 원인을 하나로 몰아가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혹은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이 대목에서 질문을 달리 던져야 한다. 모방범죄의 원인을 들어 영화에게 잘못을 몰아가는 환경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혹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부정적인 면이 너무 노출돼서 그렇지 폭력을 다루는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또한 만만치 않다. <즐거운 살인>의 저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폭력에 관하여 읽는(본)다는 것은 아무런 해가 없는 형식으로 폭력을 목격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폭력을 대리 경험함으로써 실제로 행하는 폭력을 포기하게 됐다.”고 기술하면서 영화가 폭력을 조장한다는 사실에 대항한 보기 좋은 반론을 내어놓는다. <악마를 보았다>의 김지운 감독도 어느 인터뷰(‘익스트림 무비’)에서 “영화는 사람들의 어두운 내면의 욕망을 해소시키는 문화적으로 가장 안전한 해소법이다. 금기시된 것을 공개된 사회적 장치로 보게 해주니까.”라며 모방범죄에 대한 위험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들의 말은 한편으로 폭력에 대한 대리 만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아닌 게 아니라, 대중문화에 모방범죄의 재갈을 물리는 행위는 보수적인 사회일수록, 더 정확히는 공익을 우선해 개인의 취향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부시 정권 하에서의 버지니아 사건,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보수적인 등급 판정으로 위기를 맞은 영화들이 좋은 예다.) 이와 관련, 에르네스트 만델은 부르주아 중심의 건강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이 폭력을 조장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가 범죄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한국의 잔혹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공권력 부재다. <아저씨>의 원빈은 경찰에 한발 앞서 아동 대상의 범죄 집단을 일망타진하고, <악마를 보았다>의 이병헌은 형사들이 잡지 못한 연쇄 살인마를 처단하며,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서영희는 자신을 멸시한 남편과 이를 묵인한 이웃과 경관에게 복수를 가한다. 이 영화들 속 공권력 부재가 모두 사회적 약자인 아동과 여자를 희생자 삼는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공권력, 그럼으로써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겹친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을 ‘모방’하며 관객을 불러 모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그래서 모방 위험을 들어 영화를 코너로 몰고 극중 현실을 부정하는 건 비겁하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민낯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사실 사회의 악을 처단하겠다며 필요 이상으로 개인의 폭력을 이상화하는 영화의 등장은 불길한 징조다. 현실에 대한 경고다. 그런데 모방범죄 논란이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그것이 재생산되는 동안 폭력을 방치한 사회 환경이나 이를 제 때 제지하지 못한 공권력에 대한 책임 문제는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버린다. 도리어 영화에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문화가 가지는 순기능, 즉 부정적 사회 현상에 대한 벼린 문제 제기를 차단하기에 이른다. 현실을 모방하는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라 할만하다. 거울이 제 기능을 다할수록 그 사회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기득권의 신념이나 가치, 기준을 강요하는 ‘부르주아’의 선전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영화는 모방범죄 위험 논란 앞에서 검열을 강요당하고 현실 은폐의 위협을 받고 있다. 원칙은 필요보다 우선하는 가치다. 한국영화의 시간이 거꾸로 갈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일러스트 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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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0년 10월호

<즐거운 살인>(Delightful murder)


폭력은 섹스와 더불어 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말초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소재다. 동시에 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표현의 벽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사회가 이들 소재에 필요이상의 금기를 가해온 만큼의 강제성에 비례하여 흥미는 배가되었기 때문이고, 반발심에서 우러나온 도전정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폭력 중에서도 살인은 여러 장르에서 애용되며 다수 대중의 감성에 어필하는 인기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 표현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훨씬 잔인하게 진화해왔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그럴수록 살인의 표현이 현실세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를 들어 검열의 칼날을 들이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을 규제해 온 사회가 대규모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살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자! 여기 살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반영론적 관점에서 다루어준 책 한 권이 있다. 「즐거운 살인」. 즐거운 살인이라, 아무리 요즘의 인식체계를 뒤바꾸고 있는 제1 화두가 ‘재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살인을 장려해도 되는 것일까. 오해는 마시라! 추리소설을 몹시 즐겨 읽었다는 저자는 범죄소설이 불러 온 대중적 인기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역설적인 두 단어를 결합하는 재치를 보임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즐거운 살인」은 범죄소설의 변천사를 기술한 책이다. 하지만 저자인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범죄소설의 사회사’라는 부제가 말하듯, 범죄소설의 역사를 문학사보다는 사회사로 간주하고 책을 구성한다. 그는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인 경제학자로서의 지위를 십분 활용, 범죄소설의 성공 이유에 대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이런 상품이 충족시켜주는 욕구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 지난 수세기에 걸쳐 범죄소설에 열광하는 욕구들은 어떻게 변해왔고,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구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들어간다.


저자는 우선 범죄소설의 기원을 찾는 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16세기, 봉건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등장하던 시기의 ‘선한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바로 현대추리소설의 유래다. 하지만 덧붙이길 이 시기의 ‘선한 악당’, 즉 과거의 영웅이 오늘날에는 악한이 되는가 하면 과거의 악한이 오늘날에는 영웅으로 변하였다고 진술한다. 이는 곧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범죄소설도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후 범죄소설은, 대규모의 조직화된 범죄에 따라 조직 수사가 이루어진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대와 국가와 범죄, 대기업 이 삼자간의 공모로 범죄와 정치와의 관계가 불분명해지는 세계 2차 대전 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진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의 등장에 따른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고 범죄소설의 역사는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다고 단언한다.


「즐거운 살인」은 다루고 있는 내용과 저자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사회학자들과 문학 관련자들의 필독서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갱스터, 느와르, 첩보영화 등 범죄영화와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점이 바로 「즐거운 살인」을 독자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필자의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영화 속의 범죄는 소설처럼 사회의 범죄양상을 시의 적절하게 반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자가 ‘선한 악당’이라고 지적한 16세기 범죄의 특징은 영화 <레미제라블>(52)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조직범죄를 그린 영화로는 <대부>(72), <스팅>(7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84), <언터처블>(86) 등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처럼 영화는 범죄소설의 배경과 역사적인 궤를 함께 나누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게다가 저자의 범죄를 향한 문어발식(?) 지식의 범위와 옮긴이의 정보수집 능력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67)의 원형이 된 ‘딜린저 사건’에서부터 알프레드 히치콕의 마지막 수작 <프렌지>(72)의 소재가 된 넥타이 사건의 실제 모델인 ‘보스턴 스크랭글러 사건’, 그리고 최근작 <비독>(01)의 탐정으로 등장하는 비독의 개인적 이력에 이르기까지 영화 팬들에게 좀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발견의 재미까지 느끼게 해 준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범죄소설의 대중적 성공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폭력에 관하여 읽는다는 것은 아무런 해가 없는 형식으로 폭력을 목격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폭력을 대리 경험함으로써 실제로 행하는 폭력을 포기하게 됐다”와 같은 문장을 통해 지금 한창 영화가 폭력을 조장한다는 사실에 대항한 보기 좋은 반론을 내어놓는다. 그 뿐이 아니다. 범죄소설이 사회의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남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끄는 현상에 대해서는 “범죄자에 대한 개인적인 폭력을 이상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극도로 불길한 징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상력의 산물들은 자경단이나 ‘자기 방어적’ 폭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확산되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다. 이 부분은 현 국내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인 조폭 영화들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으로 활용될 만한 가치가 있다.


결국 「즐거운 살인」을 읽으면서 크게 느끼게 되는 사실은 책이나 영화 등 문화매체가 살인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중심의 건강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이 살인을 저지르게끔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가 범죄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독자의 동의를 구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한가지 아쉬운 사실은 「즐거운 살인」이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84년에 저술된 작품인 관계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문명의 충돌’과 같은 폭력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의 풍부한 텍스트적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력이 9.11 뉴욕 테러로 수면 위에 오른 문명간의 갈등에 대해 어떤 견해를 도출해 냈을지 사뭇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02. 2. 17. <무비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