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브르의 부두>(Quai des Orphev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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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반(反)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논쟁에 휩싸여 상영금지 당했던 <까마귀>(1943) 이후 영화를 찍지 못하다가 4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조르주 심농과 함께 벨기에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 S.A.스티만(Stanislas-André Steeman)의 <정당방위 Légitime défense>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각색의 과정이 독특하다.

클루조는 활동을 중단했던 4년 동안 새로운 스타일로 무장한 스티만의 소설을 각색하기를 즐겼는데 (이미 그 전에도 <21번가의 살인자 L’assassin habite… au 21>(1942)와 같은 스티만 원작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정당방위>를 영화를 만들어 싶어 시나리오 작업을 하려다가 절판된 사실을 알고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장 페리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소설책을 어렵게 구해 읽어본 뒤 시나리오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원작과 비교해 살인범의 정체가 달라졌고 레즈비언 사진가 도라 모니어의 캐릭터 또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니(수지 들레어)는 스타가 되고 싶어 안달 난 뮤직홀 소속의 가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외모도 뛰어난 탓에 접근하는 남자가 많지만 피아노 연주자 모리스(버나드 브리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유부녀다. 그녀에게 호색한이지만 돈 많은 노인이 접근해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하고 제니는 이에 응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남편 모리스의 질투심은 극에 달하고 욱하는 심정에 노인의 저택을 급습하게 된다. 하지만 노인이 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모리스는 놀란 가슴을 쥐어 잡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 후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만 한다. 형사 안토니(루이스 주베)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모든 정황이 모리스의 범죄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영화잡지 <포지티브>는 1995년 영화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프랑스 영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가장 뛰어난 스릴러 영화 2위에 올려놓았다. <공포의 보수>(1953) <디아볼리끄>(1955) 위주로 클루조의 작품을 생각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다소 의외의 결과처럼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촘촘한 미스터리 그물망을 만들어내는 연출력은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발군이다. 클루조 영화의 모든 사건이 항상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오르페브르의 부두>도 남녀 관계의 의심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파멸 직전까지 내몰리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관객에게 사건 추리의 핵심이 되는 모든 패들을 공개하지만 극 중 인물들은 상대방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오르페브르의 부두>는 제니와 모리스, 모리스와 형사 안토니의 사이를 비롯해 극 중 인물 서로가 의심을 공(ball) 삼은 핑퐁게임을 벌이는 데 여기서 중요한 건 피의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숨기고, 형사의 입장에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승부의 면모가 아니라 의심의 관계 속에 오고가는 진짜 감정의 정체에 있다.

이 부분이 <오르페브르의 부두>의 핵심이랄 수 있을 텐데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은 놀랍게도 비극의 형태로 영화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니와 모리스가 피의자의 혐의를 벗고, 또한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면서 사랑을 재확인하는, 클루조의 영화치고는 드물게 해피엔딩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스릴러물로 분류되지만 이를 감싸고 있는 더 큰 구조는 멜로에 가깝다. 뮤직홀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 역시도 어두움 일색이라기보다는 극 중간중간 노래와 춤이 삽입되면서 스릴러를 완충하는 무대극 위주의 아기자기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포지티브>는 <오르페브르의 부두>를 2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평했다. ‘감정의 극단을 오가면서도 은근하게 드러내는 솜씨가 극작가처럼 발군이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가장 뛰어난 연출력이 발휘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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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영화의 황금기 1930-1960
(2011.10.12~11.13)

<디아볼리끄>(Les Diaboli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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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볼리끄>의 영화화 판권을 두고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피에르 부왈로와 토마스 나르세작의 <악마 같은 여자 Celle qui n’était plus>판권 확보를 위해 두 감독이 모두 달라붙었다가 히치콕에 몇 시간 앞서 클루조 감독이 극적으로 구입한 것. 이를 놓친 히치콕의 격노는 대단했는데, (이 때문에 부왈로와 나르세작은 히치콕을 위해 특별히 <죽음의 입구 D’Entre les Morts>를 집필했고 후에 <현기증>(1958)으로 영화화됐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로 생각한 감독이 앙리 조르주 클루조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심정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후에 제레미아 체칙 감독이 샤론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를 기용해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디아볼리끄>는 1명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여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빗나간 사랑의 정략에 대한 영화다. 기숙사 학교 교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셸 들라살은 인정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인물이다. 학생들에게는 싸구려 음식을 먹여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무엇보다 부인 크리스티나와 정부 니콜에게 서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기도 하다. 이에 격분한 크리스티나와 니콜은 공모 하에 미셸을 살해하려 한다. 니콜은 위스키에 독약을 타고 크리스티나는 남편을 외딴 방에 불려들어 일을 꾸미는 것. 하지만 그 후로 미셸의 양복이 배달되고 그를 봤다는 목격담이 전달되면서 크리스티나와 니콜은 공포에 휩싸인다.  

클루조와 히치콕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온도 차에 있다. 히치콕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감성으로 스릴러를 운용함으로써 따뜻한 감성을 발하는 것에 반해 <디아볼리끄>의 클루조는 사랑을 소재 삼아도 남녀 사이에 권력 관계를 형성해놓고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 약자의 위치를 점한 인물을 메몰 차리만치 몰아붙이는 것이다. 안 그래도 클루조의 영화 속에서 불운한 최후를 맞는 인물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고향으로 갈 날을 학수고대하는 트럭 노동자(<공포의 보수>)이거나 남편에게 대접 못 받아, 천성적으로 심장은 약해, 가까운 인물에게 이용당하는 여자(<디아볼리끄>)처럼 약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클루조의 미스터리는 종종 호러의 관점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디아볼리끄>에서 관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네모 상자는 미셸을 물속에 처넣어 익사시키는 욕조로, 시체를 숨기기 위한 옷상자로, 실제 관으로 형태를 달리하며 극중 중요한 도구의 콘셉트를 이루는 것은 물론 극한 상황에 처한 여자, 그중 크리스티나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대리하기도 한다. 그것은 미셸로 상징되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해 살해를 실제로 옮기는 행위의 과감함, 하지만 그 자신의 행위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더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크리스티나의 처지, 즉 남성에 의해 삶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여성의 공포가 담겨 있는 것이다.

클루조의 메마르고 음산하며 한기가 서려 있는 <디아볼리끄>를 감상한 히치콕은 이를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사이코>(1960) 완성 후에는 그의 영화가 훨씬 뛰어나다며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원작소설 <사이코>의 저자 로버트 블록은 어느 인터뷰에서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호러영화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끄>를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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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아마 자칭 타칭 졸라 대단한 영화광이 아니라면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Henri-Georges Clouzot) 감독에 대해 아는 국내 독자제위는 별로 없을 것이라 본 우원 생각한다. 혹시 축구 선수 이름쯤으로 알아먹을 독자도 여럿 있을 거라고도 보고…

그도 그럴 것이 1940~5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대한 국내 팬들의 인식이라면 뭐였나? 하품을 과도 유발하며 결국엔 보던 자리에서 널부러져 자연스럽게 수면을 유도한 우아고상한 영화만의 본산이 아니었나.

결국 영화팬의 이 같은 편견과 국내 영화계의 소극적인 발굴자세가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여 취침성 기능 영화 양성소 프랑스에서 여집합의 위치를 점하고 있던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존재를 국내에 소개하는데 있어 상당한 빗장으로 작용했을 것은 눈감아도 비디오다. 세계적인 감독임에도 불구, 고작 두 편의 영화만이 떨렁 비디오 가게 귀탱이에 짱 박혀 있는 절라 무사안일한 상황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잖어…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잠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 대한 브리핑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클루조는 한마디로 세상에서 가슴벌렁 온몸꽁꽁 스릴러를 가장 잘 만든 감독이었다…

어허, 역성들 내지 마시라. 안다 알어. 이 방면에서 히치콕 대인 따라올 감독이 어디 있겠냐는 거. 히치콕 역시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스릴러 대인이셨다.

그래서 역시 당대 최고의 스릴러 감독이었던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과의 관계를 통해 비교 썰하는 것이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니덜의 흥미를 쪼금이나마 유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본지의 서비스 정신 항시 니덜을 우선하고 있다는 거 알아주시라.

우짰든 이 클루조 감독, 가슴벌렁 온몸꽁꽁 긴장감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는 스릴러 영화를 만드는데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던지, 히치콕이 평생의 거머리로 생각한 감독이 또한 클루조였다.

클루조 감독이 1955년에 만들고, 이를 1996년 샤롱 스톤과 이자벨 아자니를 캐스팅해 제레미아 체칙이 리메이크한 <디아볼릭 Les Diabolique>의 원작소설 <악마같은 뇬 Celle qui n’ etait plus>의 판권을 따내기 위해 클루조와 히치콕 두 감독이 모두 달라붙어, 히치콕에 몇 시간 앞서 클루조가 구입했다는 일화는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설명하는데 아주 좋은 잣대이다.

특히 히치콕은 <사이코 Psycho>를 만들고 극찬을 받은 후, 그의 영화가 <디아볼릭>보다 훨 뛰어나다고 호들갑스럽게 주디 나불거리고 다닐 정도로 클루조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는 건 그 바닥에서 하나의 전설로 통하고 있는 썰이다.

재밌는 건 주 활동바닥이었던 미국에서 그저 오락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폄하받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에 의해 작가의 반열에 오른 히치콕처럼 클루조도 그와 비스무리한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자국의 오락영화가 폄하받던 프랑스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미국에서 더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지금 본 우원이 소개할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는 바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를 알리게 한 영화이다.

2.

사실 클루조의 영화하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디아볼릭>이다. 허나 본 우원이 <디아볼릭>을 제껴두고 <공포의 보수>를 소개하는 건, 당 영화가 이미 비디오로 국내에 소개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웬만해선 본 우원 이야기 까발리는 짓 따우는 안 한다만 당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로 한다. Why? 왜? 뭐땀시? 비디오루 출시는 됐지만 당 영화의 비디오 껍디조차 구경 못 한 독자들 지천에 깔려있을 거라 본다. 해서 걍 줄거리를 까 밝힌다.

혹시 만에 하나 당 영화를 울나라에 있는 모든 비디오 가게를 몽조리 뒤져서라도 찾아보겠다 기염을 토하는 사람 있다면 당 보고서의 정독은 뒤로 미루는 편이 낫겠다 싶다.

당 영화의 배경이 되는 라틴 아메리카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는 이국인덜이다. 그래서 이들의 소원은 하루 빨리 메잌 더 빅 머니해설랑 굶부림과 질병에 휩싸인 이 조까튼 곳을 벗어나는 것.

근데 이곳에 지부를 두고 있는 미국 석유회사는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월급에 일만 졸라 부려먹고 직원을 착취하며 그덜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던 원데이, 유전 폭발로 인해 직원이 사망하는 젓같은 일이 발생한다. 회사는 이 사태를 무마하고 폭발의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 운반책을 큰돈을 걸어 모집한다. 그러나 이 화학물질은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폭발력이 엄청나 이것을 운반하는 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

너같으면 하겠냐? 안 하지. 근데 당 영화의 주인공 마리오(이브 몽땅 분)와 죠(샤를로 바넬)는 한다. 왜, 얼마나 돈이 궁했으면 그러겠냐…

3.

Georges Arnaud의 원작을 클루조가 각색한 당 시나리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자칫 뻘짓거리했다간 골로 가 버리는 화학물질을 운반한다는 설정이다.

한 마리의 불나방처럼 돈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불사파 주인공덜의 심정, 삶과 죽음 앞에 존나게 갈등 때리는 인간의 심리, 무엇보다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위기의식.

그래서 이것이 주는 똥꼬 바짝 타 들어갈 듯한 긴장감은 실로 엄청나다 아니 할 수 엄따. 당 영화의 런닝타임이 140분인데, 초반 30분을 제외하곤 윗윗 단락의 설정이 주는 윗 단락 같은 분위기땀시 숨쉬기를 까먹을 지경이라니까.

허나 아무리 이야기가 뛰어나도 연출이 받쳐주지 못하면 관객을 오르락 내리락 쥐락 펼락 할 수 없는 법.

니트로글리세린을 실은 마리오와 죠의 트럭이 산 중턱을 오르던 중 헐거운 나무다리를 버팀목삼아 유턴(U-turn)하는 장면은 당 영화 연출력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조금만 벗어나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이 살벌하게 각잡고 있는 낭떠러지, 적은 무게에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힘아리없어 뵈는 다리. 천하의 마이크 타이순이라도 심장이 죠리뽕되지 않고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당 장면은 당 영화에 수없이 많은 가슴 벌러덩거리며 심장이 꽁꽁어는 장면 중에서도 결정판이다.

당 장면이 얼마나 살이 떨렸던지 당 영화에 삘 받고 감동 이빠이 먹은 <엑소시스트 The Exorcist>의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dken)은 그 자리에서 당 영화를 리메이크 하기로 마음먹고, 1977년 <Sorcerer>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허나 우리가 언제 리메이크 영화랍시고 제대루 된 작품 본 적이 있었나, 그런적 별루 없었찌. 역시 프리드킨의 영화 망했다. 쫄딱…

4.

하지만 본 우원이 당 영화 <공포의 보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단지 보여주는 시각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도한 분위기와 소리(sound)의 사용이다.

당 영화를 포함해서 클루조 영화덜의 특징은 굉장히 메마르고 음산하며 한기가 서려있다. 흑백필름이란 사실이 이같은 성향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설명이 될 수는 없는게, 흑백으로 만든 필름 중에서 프랭크 카프라(Frank Cafra)의 영화라든가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는 그럼에도 따땃한 감성이 난로의 군불타듯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지 않는가.

클루조의 영화가 마치 한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 신문지 한 장을 깔아놓고 쓸쓸히 변을 보고 있는 것처럼 황량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이유는 최소한의 음악사용과 이를 커버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귀를 자극하는 소음이다.

다시말해 당 영화에서 음악은 시작 씬과 자막이 올라가는 마지막 씬에서만 들을 수 있고, 영화진행 내내 들리는 소리라고는 트럭의 엔진소리, 바쿠 굴러가는 소리, 비행기 소리, 닭이나 염소 등의 동물 울음소리 등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리들이 음악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 소리덜이 한큐에 모두 들리는 것이 아니고 장면마다 하나씩 낑궈져있어 그것이 주는 쓸쓸함과 날카로움은 예사롭지가 않다.

또한 클루조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화면의 구도를 설정하는데 있어 특히 야외촬영 장면의 경우, 하늘과 지상을 거의 50:50으로 분할함으로써 공간의 여백이 주는 공허함을 잘 살리고 있다.

그래서 당 영화는 후덥 지근한 여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같은 소리의 사용과 비어있는 듯한 공간 설정으로 인해 매우 쌀쌀하다는 삘을 준다.

이와 같이 상반된 대비가 주는 예비효과는 존나게 커서 영화초반 사건이 없으면서도 웬지 모를 긴장감이 괄약근을 슬슬 조여오며, 위험스러운 악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보이는 것 이상의 똥꼬 타 들어가는 효과를 발휘한다.

5.

당 영화가 <Wages of Fear>란 명찰로 미국에서 처음 개봉하였을 당시, 필름은 거의 걸레가 된 상태였다. 영화상에 설정된 미국의 유전회사가 도덕성이 결여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라나 모라나… 해서 배급 업자덜이 이를 우려, 스스로 삭제를 해버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넘들 항상 있다. 씹새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덕에 원판을 보고 싶은 관객의 애무성 호소는 사그러들 줄 몰랐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1992년 원판(Original Cut)이 재개봉하였을 때 로저 이버트(Roger Ebert) 할배는 드디어 <공포의 보수>를 두 개의 버전으로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며 그렇게 좋아했을까…

당 영화가 당시 미국의 제국주의에 일갈의 똥침을 찌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클루조가 진짜루정말루리얼리 썰하고 싶은 바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인간의 최후란 건 말 안해도 눈치일발 가능할 거라 본다.

클루조에 따르면 돈만을 좇는 잉간덜의 모습이란 니트로글리세린을 싣고 평양기예단 곡예운전을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인 마리오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운반을 맡은 4명의 운전수 중 홀로 서바이벌해 쩐을 거머쥔 마리오가 결국 그의 동료들에 뒤이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쫌 억지스럽긴하지만서두 의미심장한 당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겠다.

6.

당 영화는 앞의 썰에서 밝혔듯이 그나마 국내에 출시가 되어 있긴 하지만 보유하고 있는 비디오가게도 별루 없을 뿐더러 조악한 필름 상태와 뭉개지는 사운드로 인해 당 영화가 노리는 효과를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저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영화가 출시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에만 만족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졸라 아쉬울 뿐이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