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The Bird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새>(1963)는 그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도전이었다. 몇 번의 TV 출연을 제외하면 연기 경험이 아주 없었던 무명 여배우와의 작업, 살아있는 새와 애니메이션 새를 혼합해 실제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특수효과, 식별 가능한 음악 없이 오로지 새의 음산한 울음소리로만 구성한 사운드 트랙, 그리고 그의 연출작 중에서 최고의 제작비에 해당하는 330만 달러까지, 줄곧 작업해 오던 파라마운트를 떠나 유니버설로 회사를 옮겨 처음 작업하는 <새>는 여러 모에서 히치콕에게는 도전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등으로 경력의 정점을 찍은 그에게 <새>의 여러 불리한 조건들은 완성도를 방해할만한 위험 요소가 전혀 아니었다. “처음부터 특수효과의 난제들을 맞닥뜨리는 것에 절대로 겁을 집어먹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심지어 <자마이카 인>(1939) <레베카>(1940)에 이어 <새>까지, 세 번째로 작업하게 되는 다프네 뒤 모리에의 원작소설이었지만 그 사실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나는 그 소설을 딱 한 번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히치콕이 뒤 모리에의 소설 <새>를 떠올린 것은 수천 마리의 바닷새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난 뒤였다. 당시 그레이스 켈리의 <마니>(1964)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던 (모나코의 왕세자비였던 켈리는 국민들의 저항에 끝내 출연을 거절하고 말았다.) 히치콕은 주저하지 않고 <새>의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새들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원작 소설의 설정과 새들에게 눈동자를 쪼여 죽은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 새들의 최후의 공격에 대비해 집안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의 특정 장면을 그대로 취하는 한편 히치콕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보데가 만을 직접 찾아 원형의 호수와 초등학교 건물을 목격하고는 이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했다.  

멜라니 다니엘스(티피 헤드런, 히치콕은 헤드런의 딸 멜라니 그리피스의 이름을 따와 캐릭터 이름을 지었다.)는 신문 사주의 딸이지만 제 멋대로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의 새 가게에서 젊은 변호사 미치 브레너(로드 테일러)를 만나 매력을 느낀다. 미치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멜라니는 잉꼬 한 쌍을 선물로 준비해 그가 사는 보데가 만으로 향한다. 미치가 없는 동안 그의 집에 잠입해 잉꼬를 두고 오는데 성공하지만 돌아가는 모터보트 안에서 멜라니는 갈매기의 공격을 받고 이마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다.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치는 멜라니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다음날 미치의 어린 여동생의 생일을 기념하는 야외 파티장에서 새들이 아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히치콕의 영화를 일러 ‘스크루볼 코미디’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확실히 히치콕의 영화는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적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남녀의 결합을 이어주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까닭에 이야기의 측면에서는 스크루볼 코미디인 경우가 대다수다. 하여 히치콕의 라이벌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 영화와 비교해도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거실의 벽난로처럼 온기 있는 영화로 인식된다. 다만 <새>의 경우는 멜라니와 미치 간의 스크루볼 코미디로 시작해 새가 사람을 공격하는 공포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컨대, 새의 소리를 제외하고 음악이 부재되어 있는 연출은 (크레딧에 올라 있는 버나드 허먼의 역할은 ‘music by’가 아닌 ‘sound consult’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체험토록 한다.

평화로운 일상에 새의 소리로 급작스럽게 균열을 가하는 음악적 모티브는 극중 새들의 공격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히치콕이 <새>의 시나리오 작업에서 끝까지 신경을 썼던 부분이 바로 새의 공격 이유에 대한 확실한 설명보다는 불친절한 모호함이었다. 대신 히치콕은 새와 사람의 관계를 역전시킨 설정을 통해 마음의 철창(새장)에 갇힌 인간관계의 묘사를 강화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특히 미치를 가운데 두고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강하게 보여주는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제시카 탠디)와 애니 헤이워스(수잔 플레셔트), 멜라니의 신경전은 극 중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미치는 사람을 철창으로 보내는 변호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극 중 인물들의 감정 상태는 다름 아닌 ‘결핍’이다. 리디아는 남편을 잃고 아들에게 의지하는 과부 신세이고, 멜라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그녀를 떠난 지 오래다. 애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치와는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리디아의 질투로 지금은 멀찍이서 미치를 바라보는 상태다. 다시 말해, 그런 결핍이 더욱 소유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을 영화는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히치콕은 새가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은근히 암시한다. 새장 속에 새를 가두는 행위로 상징되는 인간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소유욕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새>는 후에 수많은 영화에서 인용되고 패러디 되었다. 그 중 조지 로메로의 <살아난 시체들의 밤>(1968)이나 나이트 M.샤말란의 <싸인>(2002)은 <새>의 설정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면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로 평가 받는다. 집안에 갇힌 주인공들이 각각 좀비와 외계인의 공격을 받는다는 설정 외에도 ‘결핍’의 테마, 흑인을 좀비 취급하는 백인의 우월주의(<살아난 시체들의 밤>), 부인의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은 신부 캐릭터 (<싸인>) 등 창조적으로 <새>를 계승한 것이다. 그렇게 히치콕의 모험적인 프로젝트였던 <새>는 개봉 당시 흥행 성공은 물론 후대 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   

* 본문에 언급된 히치콕의 말은 패트릭 맥길리건이 쓰고 윤철희가 옮긴 을유문화사의 <히치콕>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

<사보타주>(Sabotage)


우리가 히치콕의 <사보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얼마나 될까? 사전을 클로즈 업(close up)하여 제목을 소개한 그 유명한 도입부를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영화 <펄프 픽션 Pulp Fiction>에 차용했다는 정도. 아니면 히치콕의 영화치고는 소개가 너무나 덜 되어 있어 평가가 낮은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 그 몇 가지가 아닐까.


실제로 <사보타주>는 히치콕의 명성에 비해 그리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제목이 주는 전복적인 힘만큼 인상적이지 못 하다. 전등 신(scene)과 가로등이 비추는 밤거리를 교차 편집하여 사보타주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한 도입부 장면은 간결하면서도 아주 강렬하게 그 뜻을 전달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혼란을 보여주는 극장에서의 환불소동은 사보타주에 대한 반응치고는 너무나 얌전하여 앞 장면에서 보여준 이미지의 크기만큼 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이 신사의 나라로 통하는 영국의 국민성이든 히치콕의 표현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 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 할 수 없지만 상징과 실제간의 연결이 끊기는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상의 결점도 발견이 된다. 벨록(오스카 호몰카 분)의 정체가 탄로 나고 테드(존 로더 분)가 경찰임이 밝혀진 상태에서 벨록의 심부름이라며 물건(실은 폭발물)을 들고 나가는 스티브(레스몬드 테스터 분)를 그냥 내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벨록과 관계된 일이 사보타주였으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집 주위에 경찰까지 보초로 세워 놓았던 상황이라면. 원작인 조셉 콘라드의 <비밀 정보원 The Secret Agent>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살해장면을 위해 벨록 부인과 벨록만을 남겨놓은 각색과정에서 설득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는 히치콕의 말에 따르면 극중 벨록 부인의 동생 스티브를 죽인 것이었다고 한다. 폭발시간을 극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런던을 배회하는 스티브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부각시키다보니 폭발이 가져다 줄 긴장감보다 오히려 관객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혹시 장면 하나에 어떻게 분노까지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독자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의 60∼70년대 영화관객들을 끌어들이자면, 그들은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당시 활동사진이라고 불리던 영화를 보는 한국사람들에게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속 이야기를 실제인양 착각 슬픈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이 온통 눈물바다를 이룰 정도였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영화가 대중화 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1936년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에 상당히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는 영화에서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글쎄 1930년대의 정서 상 꽤 위험한 표현에 속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보타주>는 몇 가지 점에서 수작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히치콕도 사람인 이상 언제나 좋은 영화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 대신 <사보타주>에는 그런 단점들을 감싸안을 많은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우선 서두부분에서 언급한 사전장면을 들 수 있겠다. 그럼 왜 사전까지 끌어들여 제목을 강조했을까? 말 그대로 사보타주가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 ‘개인이나 단체 혹은 사회불안을 야기 시키려는 파괴행위’를 부각시키려 한 까닭이다. 연출력 자체가 도입부의 의도에는 못 미쳤지만 후대에까지 모방될 정도면 성공적인 셈이다.


시각적인 효과가 빛을 발하는 장면들도 있다. 벨록이 수족관에서 내키지 않은 임무를 받은 후 화면과도 같은 어항을 바라보자 그 어항이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곧 이어 파괴되는 장면, 폭발시간이 다가왔음을 보여주기 위해 태엽이 돌아가는 모습을 겹치게 한 장면은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장면 속의 소리를 지워도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보타주>가 나름대로 의미를 갖게 하는 부분은 벨록부인이 벨록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우선 벨록부인과 벨록의 숏(shot)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팽팽한 대립구조를 완성한다. 그리고 벨록부인의 미디엄 숏(midium shot: 등장인물의 허리나 무릎 위를 비추는 숏)에서 팬(fan: 카메라가 상하 혹은 좌우로 움직이는 것)한 카메라가 칼을 포착하고 이어 벨록의 얼굴을 비추어주면 그 칼은 살인에 대한 기능성을 확보 하게 된다. 이 장면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사가 아닌 보여줌으로서 칼의 기능을 관객에게 전달하여 살인장면을 긴장감 있게 잡아내었다는데 있다. 벨록부인의 살인장면을 통해 몇몇 평론가는 선한 사람도 충분한 동기가 갖추어질 경우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히치콕의 관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살인 시퀀스(sequence)는 전통적인 남녀관계에 대한 일종의 사보타주(?)로 볼 수 있다. 폭발계획을 지원하였던 새장주인이 부인에 의해 협박당하는 장면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는 남성(테러집단)을 그린 결말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문제는 히치콕의 영화치고는 상당히 밋밋하며 벨록부인과 경찰인 테드가 사랑을 이루는 설정이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히치콕의 <사보타주>를 통해 우리는 거장이라고 해서 항상 걸출한 작품만을 발표하지는 않으며 또한 거장이 만든 평범한 작품일지라도 그 안에는 거장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적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P.S. 영화의 크레딧을 유심히 살펴보면 cartoon sequence by arrangement with and thank to Walt Disney 라고 쓰여진 문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스티브가 죽은 사실을 알고 벨록부인이 영화를 보며 슬퍼하던 장면에서 상영되던 디즈니의 <Who Killed Cock Robin?(1935)>의 장면제공에 대한 언급이다. 그럼 스티브는 누가 죽였을까?


(2001. 8. 25. <무비클래식>)

<로프>(Rope)


선과 악은 평범한 사람에게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초인정신을 끌어들여 살인은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두 남자 브랜든(존 달 분)과 필립(팔리 그렌저 분)이 있다. 그들은 그 이론에 따라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지만 손님으로 초대된 은사 루퍼트(제임스 스튜어트 분)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다.


패트릭 해밀튼의 연극대본을 각색한 <로프>는 흥미를 끄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사건의 해결과정은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묘기(stunt)’라고 표현한 히치콕의 자평처럼 <로프>는 극중에서 진행되는 시간과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실제시간이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어 이야기보다 카메라의 기술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로프>는 이른바 TMT(Ten Minutes Technique)라 하여 한 숏(shot)의 길이가 무려 10분에 이른다. 참고로 카메라에 장전되는 필름 한 릴은 시간으로 10분의 길이에 해당한다. 즉, <로프>의 배우들은 필름 한 릴이 완전히 소모되는 10분 간 어떠한 동작의 멈춤 없이 미리 약속된 대본에 따라 고도로 계산된 연기를 펼친다. 이를 숏 하나라고 보았을 때 <로프>는 10분으로 이루어 진 숏 8개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10분 짜리 연극이 8편 상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장면 전환 없이 연속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히치콕이 의도적으로 시도한 기술적인 편집 때문이다. <로프>를 관람하다 보면 카메라가 가끔 등장인물의 등을 극단적으로 클로즈 업(close up)하여 화면을 어둡게(black out) 한 후, 다시 뒤로 빼는(track out)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어두워졌던 찰나의 시간동안 화면이 바뀌는 편집이 이루어 진 것이다. 히치콕은 카메라에 장전된 10분간의 필름을 모두 소모하였을 때 즉시 다른 카메라로 교체하여 화면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교체되는 순간을 위해 이 방법이 사용된 것이다. 결국 <로프>는 단 하나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수잔 헤이워드의 영화사전 <이론과 비평>을 보면 시퀀스는 ‘보통 논리적으로 같은 의미 단위를 형성하는 신(scene)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한 시퀀스의 길이는 한 에피소드의 시각적이고 내러티브적인 연속성과 일치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쉽게 말해 시퀀스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에피소드를 뜻한다. 영화 한 편이 보통 25개 정도의 시퀀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시퀀스 하나가 영화 전체인 <로프>는 얼마나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작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대사로 전달되는 상황의 설명보다 카메라를 통한 장면의 묘사가 더욱 효과적이다. <로프>는 연극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므로 대사가 상당량을 차지한다. 이를 영화로 옮기기 위해 히치콕에게는 몇 가지 고민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위에 언급한 영화를 하나의 시퀀스로 구성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항상 주장해 왔던 이미지 표현법, 즉 몽타주였다.


영화중반 살인에 대해 낌새를 알아차린 루퍼트가 데이비드의 행적을 브랜든과 필립에게 캐묻는 장면이 있다. 그 때 카메라의 앵글은 그들의 대화를 중심에 부각시키기보다 오히려 옆에 있는 윌슨 부인(에디스 에반슨)의 행동에 주목한다. 시신이 숨겨져 있는 식탁(장롱)위의 집기들을 하나 하나씩 치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에게 대사보다 이미지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영화적 기능을 살릴 뿐 아니라 ‘저런! 장롱문이 열리면 안 될 텐데’하는 긴장감을 선사한다(관객은 졸지에 그들의 살인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파티가 끝난 후 의심에 쌓인 루퍼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데이비드의 살해순간을 추궁한다. 그러면 비록 데이비드는 숨지고 없지만 카메라는 루퍼트의 예상에 따라 몇 시간전의 살해상황을 시간 순서에 따라 이미지로 재구성한다(방안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면 입구를 비추어 주고 술을 마셨다고 하면 술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보여주는 식). 이와 같은 이미지 연상 기능을 통해 히치콕은 연극만이 갖는 대사의 묘미를 살리면서 영화의 본질적인 기능까지 확보하는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를 모두 히치콕의 업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계산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한 몫 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영화의 밑바탕을 이루는 원작의 우수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히치콕은 이를 영화에 맞게 적절히 각색하였고 언제나 시도해왔던 카메라의 실험적인 기능을 다각적으로 발휘하였다. 히치콕은 역시나 관객을 골탕먹였으며 우리는 히치콕의 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래도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p.s. <로프>는 히치콕이 처음으로 제작에 참여한 영화였으며, 히치콕의 첫 컬러 영화입니다.


(2001. 7. 28. <무비클래식>)

<이창>(Rear Window)>


심리 스릴러 장르가 성공하기 위한 성패는 정교한 이야기 구조(plot)을 가지고 얼마만큼 관객을 긴장감 있게 몰고 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를 위해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성에 대한 억압된 환상(오이디푸스), 맥거핀, 관음증을 영화 속 이야기에 주요한 소재로 적절히 풀어 넣어 ‘스릴러를 만든다는 자체가 히치콕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일종의 헌사가 될 만큼 그 장르에서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였습니다.

그중 코넬 울리치(Cornell Woolrich)의 단편을 각색한 <이창>은 이웃의 사생활을 엿보는 관음증을 통해 인간의 속물근성을 잘 읽어낸 히치콕의 통산 40번째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창>은 영화 자체를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힘보다는 한정된 공간 속에 상황을 시각화하는 이미지 전달력이 더욱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1943년 히치콕은 이미 구명선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라이프보트>를 통해 제한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서술의 한계를 이미지로 극복한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여주인공의 심리를 소품을 이용하여 표현한 연출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10년 후, 연극을 원작으로 삼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는 살인사건의 발생과 해결을 단지 거실에서만 촬영하여 연극의 공간(무대)을 영화 속에 재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창> 역시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 분)의 방이 만들어내는 폐쇄성으로 인해 위에서 소개한 두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히치콕이 ‘왜’ 제한된 공간에서의 연출을 지속적으로 실험하였는지 의문에 쌓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영화란, 영상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무성영화시절부터 영화를 익혔던 히치콕에게 있어 계산된 설정공간이 주는 상징적 표현의 가능성과 세트 내의 소품을 이용한 이미지 서술은 기술적으로 영화에 가장 적합한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창>을 통해 ‘방’이라는 최소의 공간이 주는 제한된 카메라의 행동반경을 어떻게 넓혀 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배우와 스텝의 소개에 이어 카메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풍경을 원형으로 훑은 후 제프리의 방으로 들어와 ① 기온이 높이 올라가 있는 온도계 ② 땀을 흘리며 잠들어있는 제프리의 모습 ③ 창문 ④ 면도를 하고 있는 이웃집 작곡가 ⑤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깨는 나이든 부부를 차례로 비추어 줍니다. 관객은 카메라가 투시하는 장면들을 엿봄으로 해서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아침, 주인공 제프리가 엿보는 이웃 간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에 놓이게 될 것이란 사실을 짐작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글을 통해 배경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전형적인 소설의 그것처럼 시각화된 이미지를 통해 공간적,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스트뤽(Alexandre Astrue)은 이를 두고 “작가가 펜으로 작품을 쓰듯 영화감독은 카메라로 작품을 쓴다”라고 했습니다. 기본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감독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영화적 진술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창>의 서두 부분은 배경설명 외에 합법적인 관음증의 설명까지 포함한 이중 효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더운 여름이기에 창을 열어놓을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이웃 간의 사생활은 ‘무장해제’ 되므로 제프리의 엿보기는 우발이었다는 주인공의 특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시공간의 분위기를 설득해놓았으니 카메라는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될 인물의 자세한 설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인공 제프리를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는 다시 유려한 날개 짓으로 ①제프리의 얼굴 ② 그의 깁스한 왼쪽 다리 ③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산산조각 난 카메라 ④ 부서진 경주용 자동차 사진을 비롯한 벽에 걸린 여러 장의 액자 ⑤ 잡지 표지임을 강조하는 팜플렛을 보여줍니다.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잡지사에 사진을 기고하는 제프리(실은 프리랜서 사진기자이다)는 자동차경주를 위한 사진을 찍는 도중 사고를 당해 카메라를 잃고 왼쪽다리를 깁스한 상태이다’. 이로서 현재 그가 처한 상황설명이 대사 없이 깔끔이 처리됩니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제프리는 방안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이웃을 엿볼 수밖에 없었다는 또 하나의 합리적이며(?) 직접적인 관음증의 이유가 이미지만으로 도출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창>의 카메라 시선은 대부분 제프리의 방안에서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리니치 빌리지 밖의 공간은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니치 빌리지를 넘어선 공간의 설명은 제프리의 방안에 있는 소품을 이용한 묘사이거나 또는 대사를 통해 설명하는 2가지 방법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화가 카메라를 이용한 영상예술이란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몇 마디의 대사가 전달하는 상황의 설명보다, 너무도 당연하게, 이미지가 보여주는 장면의 묘사가 더욱 효과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장면을 지적한 트뤼포의 물음에 히치콕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진술하는 영화적 수단을 쓴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누군가 스튜어트에게 “어떻게 다리를 다쳤습니까?”라고 묻고, 스튜어트는 “자동차 경주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달리는 차의 바퀴 하나가 튀어 나와 부딪쳤습니다”라고 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장면일 겁니다. 내가 보기에 대본작가의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는 그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대사 한 줄로 커버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사는 다른 여러 소리 중의 하나로 단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어야 합니다. 영상 측면에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눈(eye)입니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눈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본질에 가장 충실한 재현이 아니겠습니까.


(2001. 6. 22. <무비클래식>)

<이창>(Rear Window)


8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결혼을 앞둔 한 후배녀석이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며 다소 생뚱맞은 고민을 상담해 온 적이 있다. 그러면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린 영화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서슴치 않고 사랑을 불안해하는 녀석에게 <이창>을 추천해 주었다.

알다시피 <이창>은 엿보기에 대한 인간의 속물적인 근성을 스릴러의 공식에 담아 만든 히치콕의 영화 중에서도 굉장히 잘 만든 오락영화다. 합당한 표 값을 지불하고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엿보기를 영화 속에 구현했다는 뜻에서 <이창>을 두고 ‘영화를 위한 영화’라고도 한다.

속옷만을 걸치고 춤을 추는 앞집 처녀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며 전화를 하는 제프리(제임스 스튜어트 분)와 도일(웬델 코리 분)의 통화내용을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대화를 듣기보다는(자막을 읽기보다는) 제프리처럼 처녀의 몸매를 훔쳐보는데 열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운운하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냐고 반문할 독자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테다. 하지만 다시 한번 주장하건데 <이창>은 확실히 ‘사랑’에 관한 영화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진기자 제프리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이웃집 훔쳐보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속살을 드러내놓고 춤을 추고있는 젊은 여자를 지켜보며 음흉한 미소도 짓고, 갓 이사온 신혼부부의 깨가 쏟아지는 광경도 목격한다. 매일매일 싸움을 하는 중년부부도 있고 외로움에 고통 받는 피아니스트와 노처녀의 모습도 있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결혼에 회의적인 제프리에게 한결같게도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창>이 개봉 된 1954년의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사상 유례 없는 물질주의에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은 시기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자동차가 필수품이 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물질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다보니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정신적인 측면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배우자를 지정 받았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사랑에 ‘조건’이 전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 리사(그레이스 켈리 분)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제프리에게 보험사 스텔라(델마 리터 분)가 요즘 젊은 것들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사랑에 되도 않는 조건을 따진다고 불평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조건을 다는 제프리보다 리사가 어느 면에서 순진해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감성이 부모세대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창을 통해 바라보는 어긋난 사랑의 광경(부부싸움도 사랑의 한 형태이니 말이다)을 목격함으로 해서 제임스가 결국에 리사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설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살인자 라스 쏜월드(레이몬드 버 분)의 집에까지 들어가 반지를 찾아낸 리사가 제프리에게 반지 낀 손가락을 보여주는 장면은 증거를 찾은 동시에 그녀의 사랑을 제프리가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적이다. 또한 ‘조건’을 들어 평행선을 달리던 서로의 이몽(異夢)이 관음증이라는 모순된 사건으로 인해 일견(一見)의 꼭지점을 이룬다는 점에서 ‘사랑’의 변증법적 해석이라고 본다면 무리일까?

그 뿐이 아니다. 혼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여인이 외로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삶에 대한 열의를 되찾아 그와 사랑을 이루는 장면에서는 눈물이라도 흘려줘야 정상일 테다. 그런 위대한 사랑을 무시하고 부인을 살해한 남편이 제프리와 리사 그리고 스텔라의 집요한 추적에 덜미를 잡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사랑’의 힘이란 관음증의 부도덕을 용서받을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이 얼마나 히치콕적인 발상이자 해결책인가!).

당시 내게 ‘사랑’의 해답을 요구한 후배는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직까지 그 후배가 결혼생활을 비교적 순탄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의 충고가 어지간히 효력을 발휘하긴 한 모양이다(?). 이만큼 ‘사랑’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린 영화가 또 있을까?


(2001. 6. 22. <무비클래식>)

<프렌지>(Frenzy)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날은 그냥 일년 365일 중 하루일 테지만 영화계로 그 범위를 한정시킬 때 8월 13일은 우리의 세종대왕 님께서 태어난 날의 가치만큼이나 매우 임포턴트하며 히스토릭한 날이라 아니 할 수 엄따.

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참고서로 머릿속에 귀히 모시고 계신 ‘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탄생일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103년 전인 1899년 8월 13일, 히치콕은 이 세상에 자신의 첫 경적을 울렸더랬다. 응애~

근데 왜 100주년 땐 가마니 입 딱 씻고 있다가 이제서야 호들갑이냐고 의아해 할 독자덜도 있을 거라 본다. 잘 알잖어. 우리 이러는 거. 뭐 굳이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그닥 대단치 않다. 왜냐면 그 때는 본 우원회가 별로 안 꼴렸는데 이번에는 꼴림의 에네르기가 세차게 발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치콕의 영화를 한 편 소개하긴 해야겠는데 <사이코>라든지 <이창>,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경우는 다 알고 있는 영화일테니 제껴두도록 하고, 본 우원은 이들 영화를 제외한 그의 50여 편에 달하는 영화의 제목이 담긴 구슬을 항아리에 넣고 하나를 초이스한 결과, 두두두두둥~ 그의 마지막 수작 <프렌지>가 선택되었다.

그런 전차로 본 우원회에서는 히치콕의 103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걸작 <프렌지>를 이번 달의 추억영화로 선정하는 바이다.


1.

그의 필모그라피 마지막 작품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토파즈 Topaz>의 흥행실패는 히치콕에게 생전 느껴보지 몬했던 존나게 커다란 절망감을 선사하였더랬다. 물론 그의 영화가 발표할 적마다 베리 굿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가 뭐 신도 아닌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아무리 뭣같은 영화를 만들더라도(정말로 뭣같은 영화는 만들지 않았지만서도) 그를 추종하는 열광적인 팬과 비평가들은 히치콕 영화의 진가를 진정으로 이해해주었으며 화려한 빨아줌과 핥아줌을 비롯 온갖 체위의 애무로 최상의 평가를 내려주지 않았덩가.

게다가 비록 흥행실패라는 수치상의 꼬리표를 남기었을지언정 작품자체에 뻘건 신호등이 켜진 적은 엄었더랬따.

하지만 <토파즈>는 네버절대결코 그렇지 않았다. 히치콕의 지지자들마저 <토파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흥행의 결과를 떠나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던 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차원의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무디어진 칼날을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고 곧게 세우는 것.

<프랜지 Frenzy>는 그러한 히치콕의 말못할 고뇌와 마지막이라는 똥줄 빠지는 긴장감이 만들어낸 영국 노신사의 최후의 만찬… 아니 역작이었고 그 결과 또한 똥줄뺀 만큼 흡족하였다.

뭣보다 <프랜지>는 <자마이카 인 Jamaica Inn> 이 후 그가 33년 만에 영국에서 ‘all’ 로케한 작품이었다(이전에 부분부분 영국에서 찍은 영화들은 많이 있었다). 그래서 히치콕은 고향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감회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만 했더랬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비록 <토파즈>라는 쒯 무비의 실패가 있긴 했지만서도 <레베카 Rebecca>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성공을 고국으로 가지고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카메라가 런던의 상공을 당당당 훑으며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프랜지>의 도입부 장면은 자신의 금의환향에 대한 일종의 아크로바틱 셀프 똥고애무였던 셈이다.


2.

당 영화 <프랜지>의 내용은 간단하다. 넥타이 살인 사건의 혐의를 쓴 한 서서쏴가 간신히 누명을 벗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많이 보아왔던 이야기다.

대신 히치콕은 당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억세게 운이 없는 사나이인 블레이니(존 핀치 분)에게 살인혐의를 씌우는 과정에서 잼난 연출력을 보여준다. 관객이 주인공의 처지에 감정이 이입되도록 장치를 마련한 거다.

일단 두 장면을 바바라.

Notice!!
아랫부분부터 당 영화의 줄거리가 썰 풀어진다. 매우 결정적인 단서가 들가 있으니 당 영화를 아직 안 보았거나, 볼 예정인 잉간덜은 빠꾸 누질르시라! 괜히 후회하지 말고… 본 우원 경고했따!!

장면 1
강물에 뻘개 벗은 앉아쏴의 시체가 둥둥 떠내려온다. 죽은 앉아쏴의 모가지에 뭔가가 둘려져 있다. 목이 졸려 뒈진 것이다. 모가지 부분을 카메라가 다가가 비춰준다(close-up). 그것은 줄무늬 넥타이다.

장면 2
시체에 묶여져 있던 넥타이와 동일한 줄무늬 타이를 감고 있는 남자의 모가지가 거울을 통해 비춰진다. 카메라 뒤로 슬슬 꽁무니 뺀다. 그는 블레이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통해 용의자가 밝혀지는 약 20분 동안 관객은 본연의 임무인 제3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목격(?)하게 된다. 그럼으로 관객 제위덜에게는 눈에 보이는 장면만이 진실이 된다. 히치콕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거다.

스크린에 비추어진 위 두 장면에서 본 바대로 살인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블레이니다. 사건현장의 그것과 동일한 넥타이를 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의 두 장면이후 바로 나오는, 블레이니의 과격한 행동을 담은 에피소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살인자임을 확신케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야(?)가 좁아진 관객 제위의 입장에서라면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실은 속고 있는 거다. 얼마 안 가 블레이니의 친구인 러스크(배리 포스터 분)가 실제 범인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우리는 반전이라 부른다. 그럼으로써 블레이니는 혐의를 벗고 알리바이를 입증 받게 된다. 물론 관객에게 그리고 당 영화를 보는 니덜에게.

그렇다면 왜 히치콕은 그가 범인으로 보이게끔 오인하게 했을까? 간단하다. 누명쓴 서서쏴의 이야기가 당 영화의 주제인 관계로 관객덜도 오해의 과정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관객을 영화 속 또 한 명의 인물로 끌어들인 것이다.

관객에게 실제 살인자가 밝혀짐과 동시에 이와는 반대로 극중에서는 블레이니가 살인자로 지목 받는다. 그가 살인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피해자의 비서가 목격하였고, 살해당한 여자는 블레이니의 전(前) 부인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블레이니에게 보냈던 의심처럼 이제는 런던의 짭새가 블레이니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 즉, 관객이 겪은 편견의 과정을 런던 짭새덜이 고스란히 옮겨 받는 셈이다.

잼나는 사실은 블레이니가 누명을 쓴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이제 그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게된다는 점이다. 분명 관객은 그를 살인자로 모는 러스크에게 분개할 것이고, 또한 그를 범인으로 오인하는 짭새들에게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이를 우리는 고상한 용어를 빌려와 주인공에로의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출력의 장점은 관객을 단순히 영화보기라는 수동적인 상태로 패대기 치지 않고 극중으로 적극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로프 Rope>와 <사이코 Psycho>의 도입부를 기억하시능가? 브랜든과 필립이 데이비드를 살해하는 광경을(<로프>), 마리온과 샘의 불륜현장(<사이코>)을 우리는 카메라라는 ‘망원경’을 통해 창 뒤에서 은밀히 엿보기했다. 그 뿐인가, <이창 Rear Window>에서는 우리의 영화관람 행위를 쥔공 제프리의 훔쳐보기에 집약시킴으로써 관객을 졸찌에 관음증 환자로 몰고 가지 않았능가.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은 더 이상 관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처녀의 몸매를 훑어보는 음흉한 중년남성이 되고, 살인을 방조하는 방관자가 되며,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되어 영화에 출연(?)한다.


3.

<프랜지>에서 보여지는 또 한 개의 두드러진 특쥥은 히치콕이 쑤릴러라는 좡르의 개념을 한 번의 놀람이 아닌 긴장감의 연속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현기증 Vertigo>에서 마들레인(킴 노박 분)의 정체를 원작과는 달리 미리 드러냄으로써 반전의 깜딱놀람대신 지속적인 숴스펜수를 선택, 가장 모범적인 쑤릴러 영화의 답안지를 보여준 적이 있었더랬다.

블레이니와 러스크의 정체/관계가 일찍 밝혀지는 <프랜지>의 구성 역시 그런 히치콕의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앞썰했듯, 당 영화는 <39계단 The 39 Steps>, <나는 고백하다 I Confess>,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등처럼 히치콕이 즐겨 사용한 누명 쓴 인물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현기증>에서 보여주었던 숴스펜수 위주의 연출력, 원작소설을 히치콕 스똬일의 쑤릴러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 맥거핀과 같은 영화적 속임수가 극 초반부에 배치된 사실, 주위의 사물을 최대한 활용한 구성은 히치콕의 50여 편이 넘는 작품 활동을 통해서 증명된 전매특허이자 우수성의 단편들이었다.

그렇다면 당 영화는 히치콕의 공식을 잘 소화한 또 한 편의 히치콕 영화이다. 또한 동시에 히치콕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몇몇 두드러진 특징들의 결여는 전형적인 히치콕 영화라는 <프랜지>의 명제에 생소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39계단>의 로버트 도나트, <나는 고백하다>의 몽고메리 클리프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케리 그랜트까정 이들은 마빡 배우로써의 기본적인 흡인력뿐 아니라 누명 쓴 인물로 분했던 히치콕의 영화에서 부당한 처사를 받지만 언제나 관객의 동점심을 유발하는 쪽으로 극적 매력을 뚝뚝 흘리고 다녔더랬다.

<프랜지>의 블래이니, 존 핀치는 어떤가? 애초부터 그의 몽따는 히치콕 영화의 그것과는 잘 섞이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서서쏴 배우덜처럼 먹어주게 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따뜻한 느낌마저 결여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전차로 블레이니는 히치콕 영화의 누명 쓴 인물이 관객으로부터 받아왔던 정당한 대가, 동정심/안타까움과 같은 일련의 감정을 끌어내지 몬 하고 있다.

특히 존나게 재수 없는 자신의 불행을 전 부인에게 싸대기 날려가며 화풀이하는 모습은 부정의 효과가 커서 히치콕 영화에서 종종 목격되는 오인 받은 인물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도덕적인 올바름과도 위배된다.

결국 관객은 감정이입이라는 측면에서 블레이니의 입장에는 동조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게 된다 하겠다.

히치콕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미모의 금발 여배우가 당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히치콕의 영화와 거리가 있어 보이게 하는 큰 요소이다.

당 영화의 두 금발 여배우 바바라 리 헌트와 안나 매세이의 연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히치콕 영화에 나온 금발 여배우에게 연기력의 우수성 여부에 관해서 왈까왈부한 적은 드물었더랬다. 다만 관객은 살인 장면에서 품어져 나오는 숴스펜쑤의 쾌감(?)과 맞먹는 앉아쏴 배우덜의 야리야리얄라리한 매력이 영화 속에서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4.

만약 당 영화가 히치콕 감독 활동의 초창기, 영국 시절에 만들어졌더라면 관객은 처음 접하는 낯선 느낌을 받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 당시는 히치콕의 스똬일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성장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쑤릴러가 확고히 굳어진 시기는 미국에서였다. 그리고 그 시절의 히치콕 영화에 관객은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그래서 <프랜지>는 전형적인 히치콕 스똬일이지만 그러면서 그의 붓칠이 결여 되어 있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영화이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