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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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리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몽>(2008) 이후 3년, 그동안 김기덕 감독은 그와 관련한 갖가지 소문(후배 감독과 프로듀서와의 불화, 폐인설 등)으로부터 벗어나 강원도 산속에 칩거하며 와신상담 속에 <아리랑>을 만들었다. 처절한 자기고백과 자기쇄신이 난무하는 이 영화 속에서 김기덕 감독은 데뷔 이래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그간의 힘겨웠던 과정을 셀프카메라 형식을 빌려 과감하게 드러낸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고, 힘겨워하고 냉소하고, 꾸짖고 울부짖고,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등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영역의 창작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아닌 게 아니라,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아 한 달 남짓 유럽에 머무는 동안 <아멘>을 완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김기덕 감독이라면 가능하다. 직접 개조하 DSLR 카메라 1대를 가지고 유일하게 캐스팅한 여배우와 함께 어떤 스태프도 없이 프랑스 파리와 아비뇽, 이탈리아 베니스를 돌며 영화를 만들었다. 김기덕 감독은 제작부터 각본과 연출, 촬영과 편집과 사운드, 그리고 극 중 연기까지, 무려 1인 7역을 담당한 것이다. <실제상황>(2000) 당시 영화의 러닝 타임과 동일하게 실시간 촬영했던 실험적인 연출을 감안해도 이번 경우는 꽤나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미니멀한 제작 환경답게 <아멘>의 이야기 역시 단출하다. 남자친구 이명수를 찾기 위해 무작정 유럽으로 쫓아온 한 여자(김예나)가 방독면을 쓴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 기이한 여행을 하는 것이다.

굴곡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극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설정은 여자의 임신이다. 관계를 맺는 장면을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차 안에서 잠을 깬 여자의 팬티는 무릎까지 내려가 있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방독면 남자는 “아이를 낳아달라”는 메시지를 수시로 남긴다. (이후 그는 여자에게 “경찰에 자수해 벌을 받을게요”라는 메모를 남긴다.) 제목이 ‘아멘’인 점을 감안하면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연상케 하는 극 중 여자의 임신은 김기덕 감독이 그만의 방식으로 ‘어떤’ 구원을 의도하려는 바가 짙다. 실제로 방독면 남자는 드러난 눈 부분을 어둡게 처리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김기덕 감독이 연기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멘>을 <아리랑>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아멘>은 <아리랑>을 가지고 칸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다작의 감독으로 통했던 그를 기억한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만 3년의 공백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아우라(aura)가 감지된다. 오두막 ‘안’에 스스로 갇혀 고통스럽게 만든 <아리랑>으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발동시킨 창작욕은 일련의 행보 탓에 깊은 의미를 생성한다. 확실히 <아리랑>과 <아멘>은 짝패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결되는 지점이 다양하다. 그 중 <아리랑>의 내부 깊숙이에서 회오리치던 이야기 구조가 <아멘>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된다는 점은 주목해 볼 만하다. <아멘>은 유럽을 돌아다니는 여주인공의 특성상 로드무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장르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그 행위로써 장르적 의미를 갖는다.  

나는 글 중간에서 김기덕 감독이 <아멘>을 통해 찾는 것이 구원일 거라고 두루뭉술하게 진술했다. 어떤 구원일까. 김기덕 감독은 <아멘>의 작품의도에 대해 “연인은, 사랑은, 범죄란, 불행은, 행복은, 생명은, 죽음은, 믿음은, 영화는 무엇인가? (중략) 나만 알고 있는 내 생각이 가능하길 기도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아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김기덕 감독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아멘>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던 <아리랑>과 떨어뜨려 설명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리랑>의 내부에서 <아멘>의 외부를 지향하는 구조는 여자 주인공의 임신과 연결되면서 ‘낳는다’는 의미, 즉 창작의 고통으로 치환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발언이 극 중 강간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은 <아리랑>에서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영화계에 대한 한()을 고해성사하듯 쏟아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의지인 듯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총구를 겨눈 후 자신을 향해서도 총을 발사, 자살이라는 상징적인 죽음으로 묵은 한을 씻어낸다. 그리고 <아멘>을 통해 새로운 출발의 다짐처럼 영화적 구원(Amen)의 길에 다다른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가시면류관처럼 옥죄던 방독면을 벗는 장면은 정확히 이에 조응한다. 아기를 낳아달라고 줄곧 여자를 괴롭히다 끝내 약속을 받아낸 후 파리의 첫 번째 감옥이었던 콩시에르주르(La Conciergerie)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이 영화에 테마에 걸맞은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 본인의 영화적 구원에 대한 욕망이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그가 원하는 평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멘>과 <아리랑>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김기덕 신작열전’이라는 제하로 함께 묶여 상영이 되지만 정식 개봉 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2주간의 상영 기간을 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한국의 어느 극장에서도 상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김기덕 감독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두 영화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동반 시산부 개봉은 어떤 면에서 적절한 형태로 보인다.) 이는 여전히 한국 영화계와 불화한 김기덕 감독의 불편한 심정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길에 이르렀으되 완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구원.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더욱 개인적인 행태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김기덕 감독은 국외자처럼 힘겹게 영화를 찍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은 열릴 것이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힘겨워하는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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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아리랑>(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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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2008) 개봉 2년쯤 지났을까. 김기덕 감독이 외진 산골에 처박혀 직접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영화기자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그 즈음, 그가 키운 장훈 감독(과 송명철 프로듀서)의 배신으로 폐인처럼 살고 있다는 기사가 각종 포털 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기덕의 열여섯 번째 영화 <아리랑>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칸 현지에서 전해지는 국내 언론의 <아리랑> 관련 기사는 영화와는 별 상관없는 속보성 가십 기사라는 인상이 짙었다. ‘”장훈은 기회주의자” 폭로 파문’, ‘”개xx” 원색적 韓 영화계 비판 파문’, ‘영화 <비몽> 촬영 중 이나영 죽을 뻔 고백’, 모 신문의 논설위원이라는 사람은 <아리랑>을 두고 ‘위험한 복수’라며 문화․예술로 복수를 감행하는 김기덕의 행보가 섬뜩하게 다가온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 헛소리다.

<아리랑>은 한국영화계를 표적삼은 비판의 영화가 아니다. 김기덕의 처절한 자기고백이자 <비몽> 이후 3년 동안 영화를 만들고 있지 못한 자신을 향해 자기쇄신을 강력히 요구하는 영화, 혹은 셀프카메라다. 김기덕은 디지털 카메라를 세워두고 그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연출과 촬영과 배우와 편집을 모두 김기덕이 담당한, 말하자면 원맨 시스템 영화다.) 그 모양새는 흡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뭔가를 숨기거나 꾸미고 싶은 마음이 한 톨도 없어 보인다. 그런 의도는 <아리랑>을 만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패(?)를 영화 시작과 함께 벌거벗듯 공개하는 태도에서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인가가 드문 산 어귀에 직접 집을 짓고, 땔감이 없으면 난방이 힘든 집 안에 텐트를 쳐놓은 후, 물이 나오지 않아 쌓인 눈으로 물을 대신해 밥을 해먹는 야인의 생활이 전시되듯 펼쳐지는 것이다.

세계적 명성의 감독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오랫동안 김기덕의 신작을 기다리던 팬들의 의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독 본인이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은 그를 괴롭히는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탓이었다. <비몽> 촬영현장에서의 여배우의 사고, 제자와의 갈등, 메이저 배급사의 횡포, 기타 등등.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 김기덕은 영화판과 연을 끊고 강원도 산골에서 칩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속되는 무기력과 침체의 꼬인 끈을 풀기 위해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영화의 상상 선을 이용해)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자아 분열한다. 질문하는 김기덕과 답변하는 김기덕, 냉소하는 김기덕과 고통에 찬 김기덕, 꾸짖는 김기덕과 울부짖는 김기덕, 화면 속의 이들을 지켜보는 제3의 김기덕까지.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의 이전 열다섯 편의 영화와 이를 둘러싼 평가와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이 말은 필모그래프에서 전작과 관련한 모든 것을 지우겠다는 김기덕의 비극적 결단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해해야 타당하다. 실제로 김기덕은 극 중에서 <비몽> 당시의 사고를 두고, 죽음이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신비의 문인 줄 알았지만 흰색이 검은색이 되는 무(無)의 세계였다며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한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 그 지점에서 김기덕에게는 무로 화한 뒤 새롭게 출발할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리랑>에서 보듯 솔직하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한 내려놓기에 있다.

이때 김기덕의 심정이란 일종의 한(恨)에 가깝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리랑>인 이유 중 하나!) 영화감독이 되기 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받았던 인간적인 수모,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 등 이를 떨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김기덕에게는 그래서 극 중 상징적인 죽음, 즉 자살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조하지만 한국영화계가 아닌 김기덕 그 자신에게로 향하는 총구인 것이다. 그 자살은 유용했던 것일까. 그 다음 순간 김기덕이 <아리랑>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상을 수상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수상 소감 대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미소를 짓는다. 이는 마치 성공적인 새 출발을 자평하는 제스처로 해석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김기덕은 <아리랑> 말고도 벌써 열 일곱 번째 영화 <아멘>을 완성했다. <아멘>은 김기덕이 칸에 초청된 이후 유럽 각지를 돌며 촬영한 작품으로 남자친구를 찾으려는 한국 소녀의 미스터리한 여행기로 알려진다. 짧은 줄거리를 제외하면 알려진 정보는 없지만 이전과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아리랑> 이후 김기덕은 새로운 출발점에서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KBS저널
2011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