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티풀>(Bi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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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2006) 이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세계 각지에서 다수의 언어를 가지고 여러 명의 캐릭터와 영화를 찍는 것에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차기작에 대해 “딱 한 도시에서, 직선적인 이야기 진행으로, 그리고 내 모국어로 찍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바로 <비우티풀>이다. 그의 말처럼 영화 상영 내내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되는 <비우티풀>은 스페인어를 쓰는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남자가 암을 선고받은 후 죽음에 이르는 동안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다.


욱스발은 바르셀로나로 흘러 들어온 불법이민자들을 상대로 가판장사나 ‘짝퉁’ 공장을 연결해주는 인력브로커다.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다보니 경찰관들에게 뒷돈을 주고 보호를 받으려하지만 매번 사고가 터지면서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가족도 그에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아내는 조울증에 걸려 떨어져 산 지 오래고 욱스발 홀로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힘이 딸린다. 그래도 어떻게 힘을 내어 살아가지만 하늘도 무심하여라, 오줌 대신 피가 나와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암에 걸렸다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고한다.

말하자면 <비우티풀>은 이냐리투 감독이 만든 <이키루>(1952)다. (심지어 영화사의 이름도 ‘이키루 영화사 Ikiru Films’다.) 구로자와 아키라가 연출한 <이키루>에서 간암에 걸린 칸지(시무라 다카시)는 시한부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욱스발 또한 자신의 아이를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민자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기울이는 데 집중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피할 수 없는 상실이 발생했을 때의 삶과 삶에 깃든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비우티풀>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냐리투의 의도는 구로자와가 <이키루>에서 보여준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욱스발과 칸지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처한 상황 자체가 다르다. 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했던 칸지와 달리 욱스발은 원체 가진 게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산타 콜로마라는 동네다. 1960년대 프랑코 정부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역의 고유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교외지역인 산타 콜로마에 타 지역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스페인의 경제 회복력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고향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였다. 다만 카스티야 출신의 욱스발은 여전히 산타 콜로마에 남아 하층민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스페인 출신이지만 일종의 이민자 취급을 받는 욱스발이 산타 콜로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민자들에게 불법으로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거기서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며 불쌍한 처지의 이웃들을 돕는 것이다. 이건 생존의 사투지 삶의 가치라 말할 수 없다. 고향을 떠나 생존을 위해 떠도는 이민자들은 현대판 노예에 다름 아니다. ‘뷰티풀'(Beautiful)한 삶을 갈구하지만, 욱스발의 딸이 아빠의 발음만 듣고 잘못 쓰게 된 철자 ‘비우티풀'(Biutiful)처럼 현대 사회에서 이들의 운명은 제도권의 안정된 삶과는 대를 이어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월에 대한 꿈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구로자와 아카리의 말이 맞았을 지도 모른다.”고 피력한 이냐리투의 의견은 <비우티풀>에서 비극의 형태로 결말을 맺는다. 욱스발의 죽음은 결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스페인의, 그리고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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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바르셀로나, 클럽 그 이상의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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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여행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환상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어서? 아니. 바르셀로나 출신의 후안 미로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의 세기의 명작을 감상하고 싶어서? 아니. 그럼 바르셀로나에 뭣 하러 갔냐고? 축구 보러 갔다, 고 하면 코웃음 치시려나. FC바르셀로나는 내가 열렬히 응원하는 두 팀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FC대한민국, 바로 국가대표 팀이다. -_-;)

리오넬 메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티에리 앙리 등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구성된 FC바르셀로나는 기술 축구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하는 팀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얼마 전 타계한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도 FC바르셀로나의 회원이다.) 내가 응원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시절 억압받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유일한 저항의 수단은 FC바르셀로나였다. 프랑코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마드리드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는, 그러니까 목숨 걸고 이겨내야 할 프랑코의 군부 독재와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래시코’(El Clasco) 더비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FC바르셀로나는 그래서 특별하다.

프랑코의 독재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홈구장인 누 캄프(Nou Camp)는 마드리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빨간 줄과 파란 줄 유니폼은 카탈루냐(바르셀로나가 속한 지역의 지명) 깃발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국기였다. 그런 이유로 FC바르셀로나의 모토는 ‘클럽, 그 이상의 클럽’(mas que un Club)이다. 누 캄프 구장은 바르셀로나의 시내 중앙에 성전처럼 모셔져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니폼에 광고를 넣지 않는 전 세계 유일의 클럽이었다. (지금은 유니세프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광고 수익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고 있다.)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탈루냐인은 아니었지만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관람하는 동안만큼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에게 빙의하고픈 심정이었더랬다. 그랬건만, ‘우째’ 이럴 수가! 1월부터 영국의 런던을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을 거쳐 시계 방향으로 진행된 유럽 여행이 약간 지연되면서 6개월 만에 스페인에 도착하니. (유럽의 축구 일정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끝으로 5월 말에 마무리된다.) 아 글쎄, FC바르셀로나의 경기 일정이 이미 끝난 상태였던 것이었다. 축구의 신도 참 무심하시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경기장의 풀이라도 뽑아갈 생각에 미리 준비해온 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누 캄프 투어를 신청했다.

1956년 9월 24일 개장한 누 캄프는 최대 12만 명까지 입장 가능한 대규모 구장으로, FIFA가 선정한 세계 10대 축구장으로 꼽힌단다. (호텔로 치자면 별 다섯!) 그럼 뭐해,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의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나간 옛 애인의 사진만 바라보며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는 기분이랄까. FC바르셀로나 박물관을 관람하지 않았더라면 ‘나 마드리드로 돌아갈래~’ 레알 마드리드로 응원 팀을 갈아탔을지 모를 일이다.

첫 전시물부터 마드리드를 향한 바르셀로나 시민의 분개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1974년 2월 17일자 흑백 사진 속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엘 클래시코 더비의 전광판에 ‘REAL MADRID 0:5 BARCELONA’ 스코어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던 것. 바르셀로나에 방문하기 전 들렸던 마드리드의 레알 마드리드 박물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각종 우승컵을 전면에 배치하고 데이비드 베컴, 지네딘 지단, 라울 곤잘레스 등 스타 선수들의 사진과 유니폼으로 도배한 레알 마드리드 박물관과 달리 FC바르셀로나 박물관에서는 말 그대로의 ’역사‘가 느껴졌다.

여기에 FC바르셀로나 창단 75주년을 기념해 제작했다는 후안 미로의 그림과 유니폼을 걸치고 공차는 자세를 취한 살바도르 달리의 사진까지 더해지면, 과연 ‘클럽, 그 이상의 클럽’이라는 모토가 산 넘고 물 건너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상한 동양인의 가슴팍에도 팍팍! 하고 와서 박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선수들의 땀과 열정을 지근거리에서 관람하는 것에 비하리. 누가 나 좀 바르셀로나에 다시 보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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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10.5.3)

<산타렐라 패밀리>(Fuer a de Ca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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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종종 음식과 비유된다. 이안의 <음식남녀>(1994), 가브리엘 악셀의 <바베트의 만찬>(1987) 등은 음식 만들기를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함으로써 좋은 점수를 받았다. 2008년 스페인 영화계를 강타했던 나초 G. 베일라 감독의 <산타렐라 패밀리> 또한 주방을 무대로 인생의 한 단면을 표현함으로써 자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영화다.

막시(하비에르 카마라)는 레스토랑 ‘산타렐라’의 주인이자 주방장. 10년 넘게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막시에게 동료들은 가족 같은 존재다. 다만 너무 가족 같아 소동이 끊이지 않는데 미쉐린 음식 평가원의 방문도 그 중 하나다. 막시는 이번 기회에 좋은 점수를 얻어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리려하지만 이게 웬걸, 게이인 탓에 결혼과 동시에 헤어졌던 아내가 숨을 거두면서 두 아이가 막시 곁으로 온다. 10년 동안 멀어진 관계가 쉽게 회복될 리 만무한 터. 설상가상으로 동료 알렉스(롤라 두에냐스)가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그에게 마음을 품으면서 막시는 자식에게 인정 잃어, 친구에게 절교당해 사면초가에 빠진다.

<산타렐라 패밀리>는 철없는 막시의 아버지 되기를 그린다. 아이들이 찾아오기까지 막시의 삶은 몇 개의 불안정한 정체성이 파편처럼 흩어진 인생에 다름 아니었다. 레스토랑 주인으로써 인정받기에 안달 났고 게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알렉스와 갈등을 빚었으며 부모님과의 왕래도 오래 전에 끊어진 터다. 영화는 그런 막시의 삶을 재료삼아 소동극의 과정을 거쳐 아버지라는 요리를 완성해낸다.

혹자는 게이가 주인공인데다가 스크루볼 코미디에 버금가는 대사가 압도적이고 소동극의 형태를 띤 까닭에 페드로 알모도바르(<나쁜 교육><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영향력을 언급하지만 이는 <산타렐라 패밀리>를 설명하는 적합한 방법은 아니다. 언급된 요소들이 공통된 건 사실이지만 알모도바르 작품의 경우,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과 결합하면서 도발적으로 기능한다면 <산타렐라 패밀리>는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기운을 풍기며 마음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것은 아버지 되기라는 이 영화의 주제가 결국 해체된 가족의 결합이라는 고전적 이야기의 틀을 빌려온 것에서 기인한다. 신기하게도 극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간관계에 있어 절름발이에 다름 아니다. 10년 넘게 가족을 등진 막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알렉스는 너무 쉽게 정을 줘서인지 남자들은 그녀의 육체만 맛(?)보곤 돌아서기 일쑤다. 막시와 알렉스가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 호라시오(벤자민 비쿠나)는 어떤가. 전직 축구선수 출신인 까닭에 성정체성을 숨겨온 지 오래다.

이 지점에서 <산타렐라 패밀리>는 전통적인 가족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기존의 가족이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막시와 호라시오가 짝을 이루고 막시의 아이들과 함께 이합집산 하여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것. 이 영화는 막시의 아버지 되기를 통해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 봉합이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가족 재구성을 말하는 셈이다.

극중 막시가 운영하는 산타렐라는 스페인 음식에 프랑스풍을 가미한 일종의 퓨전레스토랑이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전통적인 음식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10년 넘게 산타렐라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테다. 막시가 이룬 가족 또한 산타렐라의 퓨전음식과 다르지 않다. 가족관계도 이제 퓨전음식처럼 변해가고 있다. 극중 막시는 호라시오와의 관계가 잠시 흔들릴 때 이런 얘기를 한다. “이렇게 다르다면 서로 같이 있을 필요 없겠네.” 영화가 보여주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호라시오의 답변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헤어질 필요 없겠네.’

이처럼 해체된 가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를 전통적인 의미의 재결합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타렐라 패밀리>는 스페인 버전의 <가족의 탄생>이라 할만하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 남자 없는, 핏줄 없는 가족의 탄생을 보여줬다면 <산타렐라 패밀리>는 여자가 없어도 가족을 이루는데 하등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고집하지 않으니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안가족들은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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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2)

투우, 스페인이 죽음과 나누는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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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투우장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드리드의 ‘라스 벤타스 투우장’(Plaza de Toros Ventas)으로 향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심성 착한 나는(악! 주변에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투우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동물학대에 가까운 경기를 TV로 접하면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다만 마드리드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투우 포스터를 보면서 약간의 호기심이 인 것도 사실이다.

1929년에 건설된 라스 벤타스 투우장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수준 높은 경기력을 선보이는 까닭에 스페인 투우의 메카로 통한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경기장 규모도 엄청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라는데 관객석이 무려 2만 3천석이다. 한국의 청도 소싸움 대회 정도를 연상했는데 웬걸 축구 경기를 가져도 될 정도의 운동장 크기에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녁 7시에 시작된 경기는 총 여섯 게임, 즉 여섯 마리의 소를 쓰러뜨린 후 9시가 돼서야 막을 내렸다. 열댓 명의 투우사가 소 한 마리를 상대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끝내 목숨 줄까지 끊는 광경은 과연 스펙터클했다. 하지만 두 게임, 세 게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자 관중석을 꽉 매운 2만 3천 명의 관중이 한꺼번에 뱉어내는 하품 소리에 그만 귀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 마침 네 번째로 등장한 투우사가 황소의 뿔에 뺨이 스쳐 피를 흘리는 아찔한 장면을 연출, 경기장은 일순 긴장의 ‘도가니탕’에 푹 빠져버렸다.

나 역시도 순간적으로 핏빛 화하는 광경에 관심이 동했다. 근데 그 뿐이다. 황소 한 마리를 운동장 구석에 몰아넣고 무자비하게 린치를 가하는 모습에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해서 목숨을 잃은 황소가 곧바로 조각조각 해체되어 인근의 스테이크 집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에는 평소 좋아하던 스테이크 생각이 저 멀리 나빌레라 사라질 정도였다.

근데 화가 피카소는 투우를 두고 언어 없이도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했단다. 예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달리 유난히 죽음에 매혹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스페인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은 그렇게 예술로써 죽음과 대화를 나눈다. 투우도 그렇다. 스페인 민족에게 투우는 죽음과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의식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다가서는 대화다. 그들은 검은 황소로 상징되는 죽음에 맞서는 상황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죽음에의 집착을 그들은 ‘두엔데’(Duende)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예술은 모두 이 두엔데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이들은 투우에 관한 소식을 신문의 스포츠면이 아닌 문화면에서 다룬다. ’마타도르(Matador)‘라 명명된 투우사가 사고를 당하거나 황소의 뿔에 받혀 죽기라도 하는 날엔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 것도 다 그런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타도르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운명에 처하는 존재다. 투우장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건 일상이다. 연간 4만 마리에 육박하는 황소가 스테이크 행(?)에 처해질 뿐 아니라 그 숫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투우사 역시도 영웅이 되는 대가로 종종 그에 해당하는 목숨 값을 내어놓기도 한다.

스페인 전역에 산재해 있는 투우장 앞에서 영웅을 기리는 기념비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타도르의 위상을 반영하듯 라스 벤타스 투우장에 도착하자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도 스페인 투우사(史)의 전설로 기록되어 있는 안토니오 비엔베니다와 호세 쿠베로의 철제 동상이었다. 불의의 일격에 뇌사상태에 빠진 후 목숨을 잃고 영웅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런 건가. 그렇다면 3류 글쟁이의 삶을 살고 있는 나도 평생에 남을 역작을 만들다 과로로 쓰러지면 이들과 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 아악!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그 시간에 지구촌 줌인 기사나 재미있게 쓰라는 무명 독자들의 항의 소리가 황소 뿔처럼 날카롭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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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