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vs 박민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과 지역 불문, 운명이 되풀이 된다는 평행이론. 이 미스터리한 이론이 각각 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사이에 존재한다는데. 2000년대 초반 혜성같이 등장, 거북이 등껍질처럼 경직된 기존 한국문학의 리얼리즘에 경종을 울리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박민규와 내놨다하면 베스트셀러요, 발표하기만 하면 전 세계로 번역되는 ‘공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 사이에는 예상외로 닮은 것이 많다?

약속이라도 한 듯, 2010년 11월과 12월을 전후해 신작을 발표한 것. 그것으로 모자라 두 권의 단편집을 하나로 엮은 박민규의 회심의 역작 <더블>에 맞서 스티븐 킹 또한 공포문화 비평서 <죽음의 무도>와 소설 <언더 더 돔>을 거의 동시에 출간, ‘더블’의 위용을 뽐내니. 장모 거세게 반데라스의 헤드락보다 충격적이고 이 겨울에 먹는 죠스바보다 소름끼치는 박민규와 스티븐 킹의 평행이론의 진실이 최초 공개된다.


가설1 생긴 대로 글 쓴다?

박민규와 스티븐 킹의 첫 번째 평행이론 가설은, 둘 다 못 생겼다. 농담이다. 둘 다 생긴 것처럼 글을 쓴다. 부부는 함께 할수록 서로 닮는다는데, 박민규가 <지구영웅전설>(2003)로 등단한 이래 올해로 9년, 스티븐 킹이 첫 장편소설 <캐리>(1974)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지 30년하고도 8년, 작가와 글의 관계를 부부생활에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구력이 오래 붙다보면 작가가 글을 쓰는 건지, 소설이 작가를 만드는 건지 모르는 경지에 이른다… 고 한다. 누가 그런 얘기를?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박민규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정말 생긴 대로 글을 쓰던가, 아니면 소설처럼 생겨먹었던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맞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박민규가 1할 2푼 5리의 인생 타율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워’ 삶을 긍정하는 소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쓰지 않았던들, 하늘을 나는 오리 배로 하나 되는 세계시민연합의 사연(<아, 하세요 펠리컨>)으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았던들 제 정신 박힌 이라면 공식석상에 어디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듯한 물안경을 쓰고 나올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지구영웅‘전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몇 년 전 시상식 자리에서 예의 기름때 낀 물안경을 쓰고 나간 박민규가 수상소감 대신 그 자신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노래 한 곡조를 꽝, 그러니까 즉석에서 축하공연을 시연하여 모인 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도 전해진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화에 비춰, 박민규는 글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스티븐 킹에 대해서는, 두꺼운 안경테 이면으로 암영 진 두 눈매와 입술 가장자리가 쏙 들어간 입매가 마치 살찐 해골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40년 가까이 공포소설 외길 인생을 걸어오며 얻게 된 ‘The King of Horror’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스티븐 킹에 대한 이미지를 학습하도록 만든 결과에 가깝다. 몇 년 전 놀이공원에 놀러간 킹이 회전 관람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던 중 뒤에 있던 아이들의 귓속말을 우연히 듣게 됐단다. “이 아저씨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래”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몰라. 멀찍이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때 킹은 부러 자리를 양보하고 같이 사진도 찍어주며 아이들의 선입견을 풀어줬다고 한다. 이 경우 역시 글이 사람을 만든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만하다. 그런 전차로, 박민규와 스티븐 킹 사이에는 ‘소설처럼 생겨먹었다’는 평행이론이 성립한다. 어떠십니까,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가설2 음악을 좋아하면 소설도 잘 쓴다?

박민규와 스티븐 킹은 모두 소문난 음악애호가로 유명하다. 박민규는 신작 <더블>을 발표하면서 음악에 대한 무한 애정을 자기 식으로 증명해보였다. “두 장의 LP 같은 느낌으로 이 책을 묶고 싶었다.”는 그는 편집자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앨범 재킷에 가까운 형태로 책을 디자인한 것으로 모자라 “그 무수했던 더블 쟈켓의 아트웍 속에는 반드시, 꼭, 한 장의 속지가 들어 있었다.”며 “더블 앨범에 대한 헌정”으로 별도의 ‘속지’까지 끼워 넣는 북 디자인 월권행위를 감행하며 ‘박민규답다’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스티븐 킹 또한 음악사랑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0년대 초반,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망각한 킹은 작가로 구성된 밴드 ‘잉여의 록들’(The Rock Bottom Reminders)을 결성하며 리듬기타로 참여, 화려한 뮤지션 데뷔(?)를 알렸다. 단 한 번의 외도로 끝났을 법한 프로젝트는 “돈을 내고 들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유혹하는 글쓰기>)는 스티븐 킹의 ‘자뻑’, 아니 자평처럼 음악에 대한 팔불출적 열정 하나만으로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 소유의 라디오 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면 소설도 잘 쓴다?’ 실제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문학적인 재능까지 뽐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작곡은 물론 작사까지 ‘투잡’을 병행하는 싱어송 라이터에게서 주로 목격되는 현상인데 가까운 사례로, 산울림의 김창완과 이적, 타블로 등이 단편소설집을 발표하며 기염을 토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까지 잘 쓴다는 얘기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뮤지션들의 소설이 그래서 문학성까지 뛰어나던가? 물론 소설이 업인 작가와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박민규와 스티븐 킹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음악적 지식을 극중 이야기와 접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다. 

다만 박민규와 킹이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우선 스티븐 킹은 불길한 상황을 암시하거나 극중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음악을 즐겨 차용한다. 투명 돔에 갇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언더 더 돔>의 경우, 돔에 충돌해 비극적 최후를 맞는 등장인물의 극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제임스 블런트가 부르는 ’그대는 아름다워‘(You’re Beautiful)를 듣던 도중에 시속 24킬로미터로 장벽에 부딪쳤다.’고 묘사한다거나 ‘존 멜렌캠프의 옛 음반제목이 떠올랐다. ‘문제없어. 있다고 해도 어쩔 거야?‘(Trouble No More)’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박민규는 직접적으로 음악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대신 음악적이라고 해도 좋을 특유의 문체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랬다, 나는 평생을’(<낮잠>) 문장의 어순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다시 한 번 또각 했지만’(<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글의 크기를 달리하여 상황의 고저를 효과적으로 묘사하며

‘그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다.‘(<루디>) 편집상 금기된 행간 띄움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등 글에 자신만의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문체만으로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렇게 음악과 음악적인 리듬은 좋은 문학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박민규와 스티븐 킹은 이 세상에서 음악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해먹을 줄 아는 작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가설3 둘 모두 공포를 다룬다?

스티븐 킹이야 워낙에 공포 하나로 전 세계를 주름잡는 작가라고 해도 박민규가 공포소설을 쓴다고? 맞다. 그의 소설에 대해 공포물이라고 규정하는 건 무리가 따른다. 다만 박민규의 소설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공포를 기저에 깔고 있다. 하늘에 집채만 한 아스피린이 떠있고(<아스피린>) 세상에 가장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잘 생긴 남자(<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기상천외한 설정이 주로 ‘골 때린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만 그는 언제나 지금 이 땅에 발 디딘 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공포를 애써 부정하는 대신 유희 혹은 판타지로써 인정하는 방식으로 희석시키곤 했다.

<더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누런 강 배 한 척>은 세상에 아군이 하나도 없는 한 남자의 가혹한 현실의 공포가 극의 정서를 지배한다. 아내는 치매에 걸려 앞가림을 못하고 친구는 다단계 물건을 떠넘기기 바쁘며 딸은 뻔뻔하게 아버지의 퇴직금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아내와 함께 삶을 마치는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박민규는 동정의 시선대신 이들 부부를 위한 의미 깊은 선물을 마련한다. 유원지 호텔을 하직 장소로 결정한 남편은 갑작스런 마사지사의 방문을 받고 아내가 마사지를 받게 허락해 부부가 삶의 오르가슴을 마지막으로 느끼고 세상과 안녕을 고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모진 현실을 전제 삼지만 초현실적인 마무리로 불꽃을 터뜨려 강한 인상을 남기곤 한다. 그래서 쓸쓸한 정서가 독자들의 심리를 추동하며 다소 심난하게 극을 끌고 가도 마지막에 이르러 ‘몰라 몰라 이런 멋진 결말이라니,(<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박민규 소설이 우리 삶을 지켜줬어요.(<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위안 받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박민규의 소설에, 그럼으로써 설득당하는 것이다.

박민규가 보편적인 공포를 다룬다면 스티븐 킹은 특정한 상황의 공포를 포착한다. <언더 더 돔>만 하더라도 돔 안에 갇힌 마을이라는 다소 황당한 설정을 밀어붙이지만 그것이 은유하는 것은 9.11 이후 테러에 대한 집단적인 공포로 고립을 자초한 지금의 미국이다. 그렇지만 킹에게도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언더 더 돔>이라는 지옥도를 통해 공포를 극대화하지만 그 끝에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빛이 서려 있다. 스티븐 킹이 30년 넘도록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도 공포를 얘기하되 현실을 환기시키는 이유가 크다. 이에 대해 스티븐 킹은 “현실의 공포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공포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는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킹만의 방식이라고 할만하다.

“공포에 관한 꿈은 본질적으로 배출이고 상처의 절개인 것이다. 그리고 대중매체가 만들어 내는 공포에 관한 꿈은 이따금씩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과 진료 소파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하리라.” 스티븐 킹이 <죽음의 무도>에서 한 말이다. 박민규가 <죽음의 무도>를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에 대해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도 마찬가지로 공포로써 공포를 극복하는 글쓰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국적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며 다루는 소재도 판이하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엔 한 지점을 향한다. 박민규와 스티븐 킹 사이의 평행이론, 이 정도면 정말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ARENA
2011년 2월호

<스탠드>(The St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삼스레 스티븐 킹의 <스탠드>가 각광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 <스탠드>가 소개됐고 그로 인해 서점가에서는 이 책의 판매량이 늘어났으며 실제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경우, 판매순위가 무려 10,000등 이상이나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게 다 그 놈의 ‘신종플루’ 때문이다. 

미국에서 1978년 처음 발표되고 1989년 완전판이 발매된 이후 2007년에야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스탠드>는 (<미래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1996년 축약판이 소개된 적이 있다.)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간다는 설정이 최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와 맞물리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무려 원고지 9,000매에 달한다는 (국내에는 총 6권으로 출간된) <스탠드>는 실은 꽤 간단한(?) 이야기다.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실험하던 독성 강한 감기 바이러스가 유출돼 삽시간에 시민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천만다행으로 면역력을 품고 있던 소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아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것. 굳이 <스탠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은 <미스트> <셀> 등 적지 않은 수의 지구 종말 소설을 발표했다. 개중 <스탠드>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현실성’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스탠드>의 구상에 대해, “친분 있는 의사로부터 일정한 주기로 변이를 일으키는 독감의 특성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킹의 말마따나, 요 몇 년 사이 조류독감에서 돼지독감으로 변이를 일으킨 사례만 보더라도 <스탠드>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법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 벌써 유행으로 번져 하루가 멀다 하고 감염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사망자도 속출한다는 점에서 <미스트> <셀> 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실제로 두 작품은 <스탠드>와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건 발생의 계기에는 다소 황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미스트>가 차원의 문을 뚫고 나온 안개 속의 괴생물체를 앞세워, <셀>이 ‘폰 사이코’로 지칭되는 일군의 좀비를 앞세워 종말론적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스탠드>에 대항(?)하기에는 현실과 괴리된 약점이 너무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스탠드>는 독감으로 몰락하는 세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것은 곧 변종독감의 맹위에 따른 과학의 종말이 마법의 부활을 부르고 각각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른 이들 진영이 극단적인 전쟁을 통해 대립하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스티븐 킹은 과학과 마법이라는 상징적인 키워드를 통해 잿더미로 화한 문명 속 이성이 눈을 감고 두려움이 눈을 뜨는 지점에서 사람들의 혼란을 극대화한다. 가족, 친구, 친지 할 것 없이 독감으로 모두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기에 측정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며, 그래서 보이지 않는 마법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스티븐 킹의 특기다. 킹의 진가는 상황의 묘사보다 오히려 심리묘사에 있다. <스탠드>는 사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기보다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인물들의 극한 심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겉보기엔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스탠드>는 결국 사람들 마음속의 심리적 종말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이 사라진, 마법과 본능만이 살아남은 시대에서 과학과 마법은 대립하고 이성과 본능은 서로를 파괴하려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인다. <스탠드>가 제시하는 종말의 풍경은 과학과 이성으로 제어되던 인간의 벌거벗은 본성을 드러내는 시험대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시험대를 통과하고 다시 과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를 읽을수록 자꾸 궁금해지는 이유는 현재 신종플루와 직면한 우리의 일련의 혼란스런 행동들과 극중 묘사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탠드>는 종말의 풍경을 묘사한 이야기라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 혹은 일말의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스티븐 킹은 이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저 아이한테 이제껏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준다면, 저 아이는 자기 자식들한테도 이야기해 주겠지. 자손들한테 경고하는 것이지. (중략) 제발 과거의 교훈을 배우렴. 이 텅 비어 버린 세상을 너희 교본으로 삼도록 하려무나.’
“프래니”
스튜가 몸을 돌려 프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스튜어트?”
“너는…… 너는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에서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프랜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더니 침묵에 빠졌다. 등유 램프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프랜의 눈빛이 매우 우울해 보였다.
“나는 모르겠어.”
프랜이 마침내 말했다. 자신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듯싶었다. 뭔가 더 말하려고 기를 썼다. 첫 번째 답변을 해명하려고. 그러나 그저 되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르겠어.”

신종플루가 창궐하고 있는 작금에 <스탠드>를 생각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작품이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킹은 이미 30여 년 전에 독감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세상에 퍼져 혼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좋은 소설은 독자를 즐겁게도 하지만 미래를 예측해 간담을 서늘케도 만든다. 그래서 <스탠드>는 내게 가장 무서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겠지만 소설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스탠드>는 바로 그런 걸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