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물원을 샀다>(We Bought a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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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예전 같지 않다. <엘리자베스 타운>(2005)에 이어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가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의 동명 에세이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아내를 잃은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다. 얼떨결에 동물원을 매입하면서 그곳의 직원과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지만 상처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극복의 과정이 너무 일사천리로만 진행된다. <제리 맥과이어>(1996) <올모스트 페이모스>(2000)에서 극 중 인물의 구멍 난 가슴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메우는 데 특기를 보인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더욱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록이나 메이저리그 야구와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에 익숙한 그의 취향 탓일까. (그는 ‘롤링스톤’의 음악평론가 출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에서는 다양한 동물의 면모만 겉핥기 할 뿐, 동물원의 문화라 할 만한 요소를 벤자민 가족의 사연에 제대로 접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가족영화라지만 천하의 맷 데이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데려다 놓고 키스 한 번으로 마무리하는 러브스토리라니. (그래서 오히려 엘르 패닝이 등장하는 아이들의 러브스토리가 더 돋보이기는 한다.) 이래저래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영화가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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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 우디 앨런이 깨달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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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이 한동안 영국 런던(<매치 포인트><스쿠프><카산드라 드림>)에서 영화를 찍다가 이번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갔다. 한국에서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막장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개봉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가 그것이다. ‘뼛속까지 뉴요커’로 잘 알려진 우디 알렌의 필모그래피에서 고향을 떠나 타지를 전전하고(?) 있는 영화가 특정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디 앨런의 심적인 변화가 느껴지는 것이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우디 앨런 특유의 코믹한 연애극이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단짝 친구지만 애정관만큼은 물과 기름이다. 약혼자 있는 비키가 욕망을 자제하는 편이라면 크리스티나는 솟구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타입이다. 비키는 논문준비 차, 크리스티나는 휴가 차 바르셀로나를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멋진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을 만나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비키는 후안과의 불장난같은 사랑이 죄스러울 지경이고 반면 크리스티나는 아예 그의 집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후안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등장하면서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로를 견제하던 크리스티나와 마리아가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후안까지, 이들 셋의 기묘한 동거가 펼쳐지는 것이다.

내용은 얼핏 복잡한 것같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는 꽤 단순명료하다. 애정관이 서로 다른 비키와 크리스티나를 앞세워 좌충우돌하는 연애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칠순 넘은 노예술가의 삶의 통찰력이 깊게 배어 있다. 누구의 애정관이 옮고 그르냐는 대결구도를 넘어 삶은 완벽할 수 없기에,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진행될 것같았던 이들 주인공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완벽한 사랑의 형태를 지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착했기 때문이다. 집착은 결국 또 다른 집착을 낳기 마련인데 고로 완벽은 허상일 뿐이라고 우디 앨런은 말하는 것같다. 한때 주변의 부러움을 살 만큼 완벽한 커플로 군림하던 후안과 마리아가 서로 죽이지 못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건 완벽한 사랑을 꿈꾸다 이루어지지 않자 틀어진 경우일 터다. 크리스티나도 다르지 않다. 셋의 동거생활에 만족하던 중 갑자기 도진 공허감으로 후안과 마리아에게 결별을 고하니, 완벽이란 것도 실은 완벽한 상태가 아닌가 보다. 즉,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완벽하지 않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끌고 가는 동력일 뿐 아니라 우디 알렌이 내세우는 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극이지만 달콤한 사랑의 순간보다 싸우고 집착하고 고민하는 장면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극중 마리아의 대사를 빌자면, “충족되지 못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로맨틱하다.” 우디 앨런이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비단 그것이 이 영화 속 사랑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 이 험한 세상에 대처하는 우디 앨런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살펴보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멜린다와 멜린다>(2004) 이후 꽤 오랜만에 맛보는 우디 앨런표 특유의 ‘생활밀착형’ 코믹 연애극이다. 하지만 <매치 포인트>로 시작된 런던 삼부작에는 생활보다는 사건이, 희극보다는 비극적인 요소가 극을 지배했다. <매치 포인트>가 웃음기 빠진 치정극이었다면 <스쿠프>는 후반부 갑자기 심각해지는 연쇄살인범 얘기였고 국내 (수입됐지만) 미개봉인 <카산드라 드림 Cassandra’s Dream>은 부와 출세를 쫓다 패가망신하는 두 형제의 비극이었다. 뉴욕 시절의 생기발랄했던 영화와 비교하자면 이는 우디 앨런에게 큰 변화였다.

우디 앨런은 왜 갑자기 뉴욕을 떠난 걸까. 알려진 바로는 제작비 유치가 뉴욕보다 수월해 런던과 바르셀로나로 배경을 옮겼다고 하지만(<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바르셀로나 시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이뤄졌다!) 그 외에도 우디 앨런 나름의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서 줄곧 든 생각인데 새로운 예술적 이상향을 찾아 유럽에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디 앨런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페데리코 펠리니, 잉그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유럽 출신 감독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습관처럼 얘기했다. 그는 늘 유럽을 꿈꿨다. 다만 뉴욕도 예술적인 환경에서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곳인 만큼 영화 찍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테다. 문제는 9.11 이후 뉴욕은 과거와 달리 예술 하나만 생각하기에 너무나 정치적인 장소가 됐다는 점이다.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우디 앨런이 <매치 포인트>를 위해 런던행을 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큰 사건이었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법. 그에게 뉴욕은 더 이상 예술적 이상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런던도 예술만 생각하기에는 뉴욕 못지 않게 지정학적으로 심각한 장소였다. 아닌 게 아니라, 런던 삼부작만 떼놓고 보면 과연 우디 앨런의 영화일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고향을 떠난 자가 낯선 땅에서 느끼는 위협과 불안감이 짙게 서려있다. 도무지 뉴욕 시절에 보이던 낙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 우디 앨런이 낭만과 자유로 대변되는 예술적 기운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가 영화 곳곳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포진한 가우디의 건축물을 훑는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음악 사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그가 이번엔 ‘바르셀로나’를 부르짖는 노래를 질리도록 들려준다. 그동안 사라졌던 유머가 되살아난 점만 봐도 우디 앨런이 얼마나 바르셀로나의 예술적 기운에 만족해하는 지가 눈에 선하다. 뉴욕에 버금가는 완벽한 예술의 도시를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우디 앨런은 앞으로 바르셀로나를 제2의 예술적 거점으로 삼을 생각인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이에 대한 답변이 될 만하다.

앞서 이 영화를 살펴본 바,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향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부족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세상사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가 내세우는 바다. 그런데 우디 앨런은 그동안 너무 예술적 이상향에 집착했다. 제2의 뉴욕을 찾기 위해 런던으로, 바르셀로나로 오랜 시간 방황했다. 너무 완벽한 사랑을 꿈꾸다 신경쇠약에 걸린 마리아처럼 비극을 양산했고, 완벽한 사랑의 발견에 들뜬 크리스티나처럼 바르셀로나 찬양에 열을 올리다 갑자기 공허감이 찾아들었다. 고향 뉴욕으로 돌아갈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우디 알렌의 그동안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작품이다. 아무리 찾아봐야 뉴욕만한 이상향은 없다. 비록 뉴욕이 예전처럼 이상적인 예술적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겠지만 우디 앨런 자신이 좀 더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기에 다시 연애하고픈, 다시 사랑하고픈 장소가 됐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바르셀로나가 배경이지만 역설적으로 뉴욕에 대한 노감독의 절절한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우디 앨런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이후 차기작으로, <매치 포인트> 이후 5년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뭐든지 잘될 거야 Whatever Works>를 촬영했다. 기가 막히게도 노신사와 10대 소녀의 러브스토리다! 우디 알렌이 돌아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프레시안
(2009.5.1)


 

<블랙달리아>(The Black Dahlia)


사용자 삽입 이미지살인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히 사람의 숨이 멎었다는 사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生)의 유통기한을 다한 결과는 싸늘한 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블랙달리아>에서 입술이 양쪽으로 찢어지고 몸뚱이가 두 동강 난 채 내장이 깨끗하게 적출된 시체는 이 세상을 규정할 열쇠로써 또 다른 삶을 연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있는 것들을 증거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섬뜩하게 전시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를 밝혀내는 건 열쇠를 손에 쥔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1987년에 발표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블랙달리아>는 미국의 가장 충격적인 살인으로 기록된 ‘블랙달리아’ 사건을 소재로 당대의 사회를 치밀하게 읽어낸 하드보일드 소설의 걸작이다. 1947년 1월 15일 아침 LA 근교에서 발견된 젊은 여자, 검은 옷을 입고 포르노 필름에 등장했다 하여 일명 ‘블랙달리아’로 불리게 된 그녀 엘리자베스 쇼트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수사관을 통해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LA, 이 도시로 대표되는 전후 미국의 혼란을 치밀하게 읽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카페이스>(1983), <언터처블>(1987), <칼리토>(1993) 등의 범죄영화를 통해 타락한 시대적 징후를 탐구하는 데 일가견을 보여 온 브라이언 드 팔마가 <팜므 파탈>(2002) 이후 차기작으로 이를 영화화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특히 극중 ‘불과 얼음’으로 불리는 LA의 유능한 수사관 버키와 리가 ‘블랙달리아’ 사건에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천착해온 드 팔마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어릴 적 납치돼 마약에 중독된 채 시체로 발견된 여동생의 모습과 블랙달리아를 동일시하는 리의 모습, 블랙달리아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매들린에게 마음이 쏠려 있는 버키의 모습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1958)에서 매들린(킴 노박)에 집착하는 형사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의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 증세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버키와 리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주변인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무려 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가 된 소설의 구조와 달리, 영화는 드 팔마의 장기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버키와 리, 케이와 매들린 네 명에게 집중해 2시간의 이야기로 축소됐다.

그중 버키와 리, 케이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블랙달리아>의 주제에 접근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들 셋의 관계, 즉 두 남자 모두 케이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버키와 리의 사랑을 포용하는 관계 설정은 ‘파멸’이 아닌 ‘공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장르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블랙달리아 사건’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가해지자 각자가 숨기고 있는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서서히 붕괴시키고, 결국 그 빈틈을 파고드는 건 LA의 추악한 이면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 해결방식은 증거를 통한 ‘추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쇼트와 관계된 사람은 물론 이를 수사하는 형사까지, 영화는 모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파고든다. 결국 블랙달리아 사건의 전모는 우연으로 점철돼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우연의 끝이 할리우드의 거물급 인사와 LA 형사에게 이어져 있다면, 이는 사실상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그만큼 LA의 부패는 도시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LA의 혼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략적으로 꿈을 파는 이미지를 선전해온 미국의 타락한 이면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드 팔마는 인물간의 관계를 통해 도시의 이면을 읽어내는 한편, 도시에 대한 묘사를 전면에 드러내 당대의 비릿한 공기를 포착한다. 그런데 여기엔 원칙이 있다.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먼트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앞에 두고도 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갖는 태도로 일관한다. 가령,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이를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축이 되는 건물을 가운데 두고 마약범을 체포하는 버키와 리를 보여준 뒤 그 건물을 넘어 블랙달리아 사건의 시작을 포착한다. 시체 주변으로 펼쳐진 배경에서부터 이야기가 번져오고, 카메라는 도시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부터 살인사건의 이미지를 찾아나간다. 영화 <블랙달리아>의 이런 태도는 원작에 의지한 바가 크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사회의 이면을 읽어내는 소설의 화법 자체는 그대로 보존한다.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대폭 축소했을지언정 화법과 주제에 있어서는 큰 변화를 기하지 않으면서 연출의 안정화를 꾀하려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블랙달리아>는 그의 신작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좀 심심한 면이 없지 않다. 드 팔마 감독 특유의 복잡한 미스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듯 유영하는 이미지는 원작의 방대함과 누아르라는 장르가 지닌 이미지의 클리셰에 갇혀 힘을 잃고 만다. 브라이언 드 팔마 이전 <블랙달리아>의 영화화에 뛰어들었던 데이비드 핀처는 3시간 버전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을 매달린 끝에 포기를 선언했고 미국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살인 이야기 <조디악>(2007)을 내놓기도 했다. 그만큼 <블랙달리아>가 품고 있는 충격파는 단 몇 시간에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여전히 할리우드에는 엘리자베스 쇼트처럼 배우의 꿈을 안고 영혼을 팔며 살아가는 ‘블랙달리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미국은 이들의 타락을 자본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블랙달리아>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그 무엇도 명쾌히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무력감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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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59호
(2007. 10. 30)

<매치 포인트>(Match Point)


슬랩스틱 코미디(<돈을 갖고 튀어라>), 로맨틱 코미디(<애니홀>), SF 코미디(<슬리퍼>), 스릴러 코미디(<맨하탄 미스테리>), 뮤지컬 코미디(<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 어떤 꺼리든 쪼물딱거렸다하면 뉴욕을 배경으로 한 특유의 코미디로 완성시켰던 우끼고 자빠라짐의 대가 우디 알렌.

이번엔 쫌 다르다. 지금 소개하는 <매치 포인트>는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모냥새를 지니고 있다. 일단 우디 알렌이 출연하지 않는다. 게다가 배경은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더군다나 땅콩영감 특유의 자폐적 개그도 사라졌다. 당 영화에서 선보이는 이야기는 웃음기가 쫄아든 순도 98% 정통 치정극이다.

테니스 강사로 하루살이 하는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 분). 부잣집 되련님 톰(매튜 굿 분)을 지도하던 중 그의 동생 클로이(에밀리 모티머 분)와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던 중 톰의 애인이자 가난뱅이 배우 지망생 노라(스칼렛 요한슨 분)를 만나 첫눈에 뿅~ 사랑에 빠지게 되니 크리스는 쩐과 사랑 두 갈래 인생극장에서 운을 시험하게 된다.

당 영화에서 재미있는 설정은 주인공 크리스의 처지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일정부분 겹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감독은 크리스가 <죄와 벌>을 읽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은 물론이요, 가난에 비관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소설속 살해 장면을 크리스에 빙의해 비스 무리한 형태로 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몰까. 매치 포인트. 즉, 감독은 <죄와 벌>의 설정에 더해 테니스에서 공이 네트를 넘어가느냐 넘어가지 않느냐에 따라 마지막 1점이 승패를 가르는 순간을 대입하여, 삶은 의지나 노력보다는 운에 의해 좌지보지된다고 얘기한다. <죄와 벌>에서는 의지와 노력이 더 큰 가치를 갖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다르다는 의미.

이처럼 인생의 대가가 보기에 삶은 교과서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끌고가지 않고 보다 현실적으로 크리스의 인생이 운에 따라 결정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은 원래 로또라고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거다. 확실히 요리법은 바뀌었을지언정 그 요리의 맛이 보여주는 인생의 깊이라든지 이야기의 전개는 여전한 것이 어느 모로 보나 메이드 인 우디 알렌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런 대가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삶은 로또!’라는 성찰을 보기 위해서는 영화 중반부 동안의 지루한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기존의 치정극에서 볼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있지만서도 이를 끌어내는 과정의 크리스와 노라의 치정관계는 배우자의 눈을 피해 나누는 아슬아슬한 사랑, 배우자의 의심, 예상치 못한 임신, 이에 따른 협박과 살인 등등 기존의 치정극에서 보여주는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치정극을 비틀기 위한 의도로 이런 전개가 필요했다는 거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물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영화는 두 쥔공 쭉빵남녀가 엉키는 바디액숑을 보여주긴하지만서리 우디 알렌이 어디 그걸 야리야리얄라리스럽게 묘사할 사람인가. 그나마 스칼렛 요한슨의 살짜쿵 비치는 속살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 헝 그래도 너무 조아~

하여 당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와 달리 그 재미가 뽕나게 뛰어난 편은 아니다. 우디 알렌 영화 애호가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베스트하게 볼 수 있겠지만 우디 알렌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로 없는 이들은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뮝기적에 봉한다.


(2006. 4. 10.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