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크라이스트>(Anti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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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는 2009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처음 공개되자마자 (역시나!) 논란에 휩싸였다. 불경한 제목도 물론이거니와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성애장면과 극악한 신체훼손은 기존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도덕과 상식론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헨델의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가 비장하게 흘러 퍼지는 프롤로그부터 그(윌렘 데포)와 그녀(샬롯 갱스부르)의 성기삽입 장면을 초고속 촬영한 느린 화면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섹스의 쾌락에 빠져있는 사이 혼자 놀던 어린 아들이 창문 밖으로 추락사하는 장면에 이르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연출될지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비탄’ ‘고통’ ‘절망’ ‘세 명의 거지’ 4개의 챕터를 통과하며 아들 잃은 슬픔과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부부가 초록빛 자연으로 들어가 겪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한다. 사실 이 같은 설정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일례로,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2008)만 하더라도 아이 잃은 여주인공이 자연이 머금은 생명력의 세례를 받으며 다시 태어나는 기적의 순간을 다뤘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의 치유력에 대한 선입견을 발기발기 찢어놓는다. 오히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며 선언하듯 내뱉는 그녀의 대사를 듣노라면 숲이 갖는 정화의 이미지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의사가 자신의 가족을 진찰하는 것이 금지임에도 (심리치료사로 보이는) 그가 내면의 원초적인 공포와 낯선 두려움에 시달리는 그녀를 치료하겠다며 숲으로 인도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아니나 달라, 그들이 자연에서 목격하는 것들이란 죽음과 추락으로 점철된 이미지뿐이다. 어미 사슴은 사산된 새끼를 자궁에 낀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높은 나뭇가지에서 뚝 떨어진 새끼 새는 까마귀의 먹이가 되며 숙소 지붕 위를 두드리는 도토리 소리에 부부는 밤새 잠을 설친다. 치유 혹은 정화의 자연은 온데간데없다. 그러니 더욱 더 정신상태가 악화되는 그녀는 더 이상 대지를 품은 어미의 모습이 아니다. 남편이 떠나는 것이 두려워 그의 성기에 치명적 위해를 가하고 그 자신의 성기마저 가위로 도려내는 행위(국내 개봉작에는 이 장면이 삭제됐다)는 생명을 제거하는 악마에 가깝다.

‘안티크라이스트’ 제목과 연결하면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신화를 훼손하려는 신성모독의 의도로 읽을 수 있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현재버전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내면을 억누르는 공포와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는 그에게 자연을 뜻하는 ‘에덴’이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감독이 보건데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자연은 여성에게 원초적 공포의 장소다. 그런 곳에 그녀를 데려간다는 건 결국 파멸을 의미한다. 태초의 순수로 남아있던 에덴의 동산은 그렇게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비탄과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죽음의 장소로 변모한다.

에필로그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고 전한다. 타르코프스키는 20년 넘는 연출경력동안 절대적 믿음과 구원을 찾아 고심을 거듭해온 거장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 버전의 답변이라 할 텐데 논란이 자극적인 장면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아 영화는 얄팍한 감이 없지 않다. 다만 끊임없이 논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또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치기어린 성질의 것으로 비판을 받을지언정 라스 폰 트리에는 매 영화마다 기성의 질서를 교란하는 논란으로 전 세계 영화계를 뜨겁게 달궜다.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부터 최근작 <안티크라이스트>까지, 라스 폰 트리에의 고집 하나 만큼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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